## 40화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일반 교과들은 한국으로 치면 중학생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신경 쓸 부분이 많았다.
날마다 쏟아지는 숙제들을 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대부분이 문제에 따른 답안을 써 내는 것이 아닌, 레포트 형식의 숙제였다.
이전에 아무 생각 없이 레포트를 써서 냈다가 의심받은 적이 있었기에 더더욱 신경 써서 열네 살처럼 고쳐 쓰느라 실제 정신연령이 더욱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매번 소화해야 하는 과제곡들도 많았다.
선생님들은 자비가 없었다. 어지간한 에튀드들은 그 자리에서 던져 주고 곧장 연습에 들어가도록 시켰다.
도대체 학생들의 초견 능력을 어떻게 보는 건지 모르겠다. 죄다 초인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심한 경우엔 하루 만에 한 곡을 인템포로 쳐 내야 했다. 그러면 바로 다음 곡이 기다리고 있다. 끝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면 정말 못하겠다고 드러누웠을 것이다.
진짜배기 천재도 아닌 내가 아득바득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은 어지간한 과정들은 한 번씩 다 거쳐 왔기 때문이다.
특히 화성학이나 수학 등은 아직까진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도 대충 상위권에서 놀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어쨌든, 난 지금까지 성적도 좋고, 선생님들로부터 평가도 괜찮았다.
언제 벗겨질진 모르겠지만, 아직까진 성공적으로 착실한 우등생의 탈을 잘 쓰고 있는 중이었다.
“타티아나. 나 이것 좀 가르쳐 주면 안 돼?”
“어떤 문제인데요?”
“이거.”
쉬는 시간에 아나스타샤가 노트를 가지고 와서 수학 문제를 물어보았다. 아나스타샤는 나에게 무언가 묻는 것에 주저함이 전혀 없었다.
난 최선을 다해 아나스타샤에게 문제 풀이를 설명해 주었고 아나스타샤는 금방 이해했다.
아무리 봐도 아나스타샤는 굉장히 머리가 좋은 편에 속했다.
평소에 공부에 관심이 없다 보니 영 집중을 안 하는 것 같긴 하지만…… 어쨌거나 이렇게 막히는 부분을 내가 가르쳐 주면 금방금방 따라오곤 했다.
아나스타샤는 원래 선생님들로부터 받는 평가는 엉망이었지만 시험 하나는 꽤 잘 치는 학생이었다.
조금 있으면 중간고사인데 얼마나 높은 점수를 받을지 기대된다.
“…….”
문득 창가 쪽을 돌아보았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에르네스트가 보였다.
그는 이번에도 수석은 맡아 놨다는 듯이 그간 모든 시험과 과제, 평가에서 최고로 높은 점수를 받아 내었다.
말 그대로 천재라는 단어를 사람의 형상으로 빚어내면 저런 인간이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난 한 번 배웠던 것들이니까 잘하는 척이라도 한다 치지만…… 쟤는 처음으로 배우는 것들일 텐데도 어떻게 저렇게 해내는지 모르겠다.
“…….”
지금 에르네스트와 나 사이엔 그 어떤 사적인 교류도 없었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작게 알은척을 하긴 했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이상해서, 평소에 그가 날 귀찮게 하기 위해 의욕을 보일 땐 짜증났었는데 지금은 거리가 생기자 조금 섭섭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냥 문득 드는 마음이 그렇단 말이다. 에르네스트가 앞으로도 날 완전 무시해 버려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난 에르네스트를 무자비하게 찍어 눌렀고 스스로 그 높은 자존심을 꺾고 졌다는 말을 하도록 만들었다.
내가 에르네스트 입장이었더라면 눈이 마주치건 말건 나랑 상종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 비해 에르네스트는 얼마나 대인배인가?
그렇게 조금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에르네스트를 보다가, 다시 내 공부에 집중했다. 어차피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었다.
* * *
식사를 하고 나오는데 복도 저편에서 낯익은 남학생 한 명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학교에 단 한 명뿐인 영국인 유학생. 리처드였다.
리처드 피츠앨런 하워드. 듣기론 영국에서 진짜 귀족이라는 것 같았다. 그것도 공작급의.
현대 영국에서 귀족이라 해 봐야 명예직이라곤 하지만, 공작급 귀족 가문이라고 하면 상당히 좋은 위치라 할 수 있었는데도 그 좋은 위치와 대우를 모두 걷어차고 피아노 하나 배우겠다고 러시아까지 날아온 대단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피아노에 대한 열정이 높아 보이는 것과 별개로 그의 학교생활은 평범했다. 피아노 실력도 성적도 중위권.
평상시 모습도 권태에 찌든 눈으로 돌아다니는 모습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지금 역시 그렇고.
오며 가며 인사는 아까 아침에 했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밥은 먹었냐고 물어보려는데, 리처드가 내 쪽을 보더니 마치 찾아다녔다는 듯 내 이름을 불렀다.
“타티아나.”
“……?”
그가 이렇게 날 부르는 건 거의 처음 있는 일인 것 같았다.
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 그에게 다가갔다.
“리처드.”
“그래, 음…… 지금 시간 좀 있어?”
그간 날 거의 무관심하게 대했던 리처드가 갑자기 미치지 않은 이상 이게 데이트 신청일 리는 없었다. 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찮은데요.”
“잠깐 이야기 좀 하자.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요.”
앞장서서 걷는 리처드의 뒤를 따라 얼마간 걸었을까, 리처드는 복도 끝의 아무도 없는 곳으로 날 데리고 갔다.
이 와중에도 연습실같이 폐쇄된 공간으로 데리고 가지 않은 것이 혹여나 내가 겁먹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아서 새삼 그가 신사긴 신사구나 싶었다.
리처드는 벽에 기대어 서더니 내게 물었다.
“내가 정말 □□□□□ 남들이 뭘 하건 신경 안 쓰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어떤 게 알고 싶으신가요?”
“에르네스트한테 뭘 어떻게 한 거야?”
리처드는 난데없이 내 이야기가 아닌 에르네스트의 이야기를 물었다.
내심 그가 뭘 궁금해하고 있을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약간 실망이었다.
“리처드도 그런 소문을 신경 쓰고 있었는 줄은 몰랐네요.”
“소문? 무슨 소문.”
리처드는 거꾸로 되물었다. 이제 와서 시치미야?
“저와 에르네스트 사이에 난 소문들을 듣고선 확인차 물어보고 계신 것 아닌가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니라고요?”
못 믿겠다는 듯 말했더니 리처드가 황당하다는 듯 스스로를 변호했다.
“난 소문이고 뭐고 들은 적 없고, 그런 걸 전해 줄 친구도 없어. 그리고 들었다 하더라도 신경도 안 써.”
“……리처드.”
리처드의 자기변호는 사람의 마음을 미어지게 하는 힘이 있었다.
갑자기 리처드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마구 샘솟았다. 내가 그간 너무 무심했지. 미안해 리처드.
단숨에 결백을 증명한 리처드가 다시 말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에르네스트가 갑자기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자기 공부에 집중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야.”
“…….”
진상을 알고 있긴 하다.
내가 당사자니까. 하지만 에르네스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말하면 안 되지 않을까? 가뜩이나 리처드는 에르네스트와 사이도 안 좋은 것 같은데. 괜한 시빗거리를 제공하긴 싫었다.
난 일단 잡아떼기로 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진짜 사람이 바뀐 것처럼 구니까 이상해서 그래. 너라면 무언가 알고 있을 것 같았거든.”
“본인에게 물어보시는 게 빠르지 않을까요?”
“물어봤어. 아무 말도 안 하더라고.”
아서 코난 도일의 나라에서 온 리처드가 손가락을 들어 날 가리켰다.
“그런데 네 이름이 나오니까 반응을 하더란 말이지.”
“…….”
에르네스트…… 바보 아냐? 대체 얼마나 동요했길래 리처드가 이렇게 확신을 가질 정도야?
그런데 에르네스트를 욕할 것도 없었다. 지금 나야말로 동요해서 뭐라고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진짜 탐정에게 꼼짝없이 덜미를 잡힌 듯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까 고민하는데 리처드가 쐐기를 박았다.
“그뿐만이 아니야. 한승우도 똑같더라고. 에르네스트와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면서도 네 이름만 나오면 놀라는 게.”
“바보들…….”
“두 명이 똑같은 반응을 보이니까 이상하지 않겠어?”
리처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어. 에르네스트가 조용해졌으니 나로선 고맙기도 하고. 그런데 내가 3년을 넘게 못 해낸 일을 넌 몇 주 만에 해낸 것 같아서, 어떻게 한 건지 꼭 물어봐야겠더라고.”
“3년이요?”
“그래.”
리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난 리처드와 에르네스트의 관계를 잘 모른다.
그냥 에르네스트가 너무 건방지게 구는 걸 싫어해서 평소 얼굴만 마주치면 으르렁거리고 싸우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단순한 관계는 아니었던가?
난 리처드를 다시 살폈다. 리처드는 애쉬브라운의 머리와 녹색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었다.
굉장히 샤프하게 잘생겼지만, 늘 약간 무기력해 보이는 태도와 평균치의 학교생활로 그 특징이 희미했다.
그가 무언가 공격적인 의도로 내게서 정보를 캐내려는 것이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리처드는 그렇게 단순한 생각으로 날 붙잡진 않은 듯했다. 그렇다면 이야기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입이 얼마나 무겁냐인데, 아까 스스로 변호했듯 소문을 전해 들을 친구가 없다고 했으니 거꾸로 소문을 퍼뜨릴 친구도 없…….
“제가 에르네스트와 대결을 해서 이겼어요.”
난 사실대로 말했다. 리처드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리처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대결? 무슨 대결을 말하는 것이지. 주먹다짐을 하진 않았을 테고.”
“피아노요.”
“……하.”
리처드는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하긴 못 믿겠지. 이제 막 편입한 내가 학년 수석을 이겼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것도 에르네스트는 보통 학년 수석인 것도 아니었다. 전 세계를 놓고 보아도 아마 손에 꼽을 것이다.
클래식 강국인 러시아에서 주는 공로 예술가 훈장은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닌 것이다.
저 어린 나이에 그런 인정을 받았다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난 기왕에 꺼낸 말을 어떻게 증명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잠시 날 보더니 말했다.
“네가 에르네스트의 콧대를 꺾어 놨었구나. 그런 거였어.”
“……? 리처드. 제 말을 믿어 주시나요?”
“믿어야지.”
리처드는 보기 드물게 피식 웃었다.
“네가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잖아.”
거짓말을 하려 했다면 조금 말이 되는 거짓말을 했겠지. 에르네스트를 피아노로 찍어 눌렀다는 말은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 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순순히 내 말을 믿어 준 리처드가 그제야 이것저것 앞뒤가 맞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랬군……. 왜 모두 입을 다물었는지도 알겠어.”
“…….”
“여전히 조금 이상한 건…… 그 대결에 에르네스트가 연구회의 해체를 걸었다면, 타티아나 넌 뭘 걸었지?”
에르네스트가 저울에 올린 연구회의 반대편에 난 백지수표를 내던졌지만, 그걸 아무에게나 말하고 다니긴 싫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렇게 멍청하고 무분별한 짓도 없었다. 솔직히 발끈해서 한 짓이었으니 부끄럽기도 했고.
“비밀이에요.”
“뭔진 몰라도 대단한 걸 내걸었나 보군. 알았어.”
그렇게 시원스레 넘어간 리처드가 약간 긴장한 날 보더니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타티아나. 걱정하지 마. 나도 입을 다물 테니.”
척하면 척이구나, 리처드?
눈치껏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아준 대신, 리처드는 다른 것을 요구했다.
“대신 다음엔 나한테도 한 수 보여 줄래?”
“저기, 리처드. 미안하지만 제가 에르네스트와 대결했던 것은…….”
“알아. 아는데. 그래도 부탁해.”
리처드는 장난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눈은 어디까지나 진지했다. 난 거부할 수 없었다.
“알았어요. 약속할게요. 당장은 조금 그렇고…… 나중에요.”
“좋아. 그때 뭘 내깃거리로 걸지 준비해 둬야겠네. 돈을 거는 게 가장 편하지만 넌 돈도 많아 보이니…….”
“아뇨, 굳이 그러지 않아도…….”
“내깃거리 없는 게임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안 그래?”
리처드는 게임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생각만 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듯 말했다.
매사 흥미 없어 보이는 그에게 이런 모습이 있는 줄은 또 몰랐다.
에르네스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진실, 그리고 에르네스트를 꺾은 나와의 대결 약속.
원하는 것을 모두 얻어 낸 리처드가 기분이 좋아졌는지 웃음기를 머금고 말했다.
“그리고…… 타티아나. 너 한승우하고도 요즘은 안 붙어 다니는 모양인데.”
“……그렇게 되었네요.”
중간고사도 다가오고 여러모로 걱정이 되긴 했지만 지금 한승우는 아마 날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을 터였다.
아직 어리지만 그 역시 남자였고 그렇다면 스스로 이겨 내야 하는 것이 있었다.
난 적정선에서 그걸 존중해야만 했다.
걱정된다고 너무 다가가다가 폭발하기라도 하면 피차 안 좋은 꼴 보지 않겠는가? 지금은 거리를 두어야 할 때였다.
그런데 리처드가 해결책을 냈다.
“한승우는 나한테 맡겨 놔. 중간고사 때까지 사람 만들어 놓을 테니까.”
“……! 정말요?”
난 만면에 화색을 띠었다. 진짜 가슴 한편이 막막했던 게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정말 고마워요, 리처드.”
“……혹시나 해서 말해 본 건데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그…….”
걱정거리 하나 해결했다고 너무 티를 많이 냈나……?
이상하게 보였으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리처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하나 더.”
“예?”
“다음 주에 위클리지? 무슨 곡 들고 올라갈 거야?”
“그건…….”
준비하고 있는 곡들은 꽤 많았다. 그중에서도 미하일 선생님은 내 실력을 잘 보일 수 있는 고난도의 갤롭이나 소나타 피날레 같은 것을 추천하셨다.
리처드는 다른 의견을 냈다.
“되도록 쉬운 곡으로 해.”
“……?”
“내가 보기에 넌 조용히 지내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까.”
그렇게 조언한 리처드는 다시 매력적으로 웃더니, 나와의 게임을 기대하고 있겠다고 말하곤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난 아직 리처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