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아가씨.”
푸쉬킨의 시를 암기하고 있던 난 방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세요.”
방문이 열리며 나제즈다가 들어왔다. 그녀는 접시 위에 쿠키 등의 간단한 다과와 따뜻한 차를 가지고 왔다.
그제야 허기를 느끼고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1시가 조금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나제즈다는 쓴웃음을 지으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중간고사 당일이라도 너무 열심히 하시는 것 아니에요?”
“열심히 해야죠.”
“그래도 쉬어 가면서 하세요, 아가씨.”
“방금 쉬었어요.”
“아가씨도 참…….”
나제즈다는 다과를 책상 옆에 내려놓더니 쿠키를 하나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난 작게 감사를 표하곤 그걸 받아먹었다.
저녁 식사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혀가 단맛을 보더니 환희에 차서 열렬히 뇌에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그렇게 식욕을 다 채워 버리고 나면 다음은 수면욕이 날 지배할 것이다.
난 아직 해야 할 시험공부가 남아 있었다.
간신히 식욕의 유혹을 뿌리치고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책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찰나 나제즈다가 날 불렀다.
“아가씨.”
“예. 나제즈다.”
“하나만 더 드세요.”
“……싫어요.”
이렇게 불퉁하게 말할 것까진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말이 그렇게 나왔다. 내뱉어 놓고도 조금 놀랐다.
나제즈다가 일부러 날 배부르게 만들어 재우려고 이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날 곤란하게 만든 적이 없었다.
나 역시 나제즈다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난 다시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미안함을 담아 옅게 웃으며 말했다. 난 그녀가 슬픈 표정을 지으면 참을 수가 없다.
“나제즈다, 전 아직 해야 할 게 남았어요. 가져다주신 과자는 천천히 먹을게요.”
“아가씨…….”
“나제즈다도 이만 쉬세요.”
물끄러미 다과들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날 챙겨 주는 것은 항상 고맙지만…… 벌써 새벽 1시다.
그녀는 그녀 나름의 일과가 있었다. 지금은 잠자리에 들어야 일하는 데에 지장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제즈다는 뭐가 그리 불안하지 한참을 날 바라보고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제발, 나제즈다.
“저도 곧 잘 거예요.”
“정말이죠? 아가씨.”
“예.”
“그럼 전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가씨, 꼭 주무셔야 해요.”
“알겠어요.”
내가 대답하자 나제즈다는 안심했다는 듯 웃으며 물러났다. 그녀가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난 한숨을 쉬었다.
나제즈다는 내가 너무 무리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녀들과 같은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아침 연습을 하는 것도, 저녁 연습 후에 밤늦도록 일반 교과 공부를 하는 것도. 항상 불안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곤 했다.
이 늦은 밤까지 쉬지도 않고 내게 줄 다과를 준비해 오는 것 역시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내가 부탁한 적도 없었고, 혹시 아버지나 예고르가 부탁한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것도 아니라 했다.
나제즈다는 업무 외로도 내게 신경을 많이 써 주고 있었다.
분명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의미가 아니라, 적당히 하라는 걱정의 의미라는 점이었다.
아마 내가 공부에서 아예 손을 놔 버리면 나제즈다는 가장 좋아해 줄 것이다.
“…….”
나제즈다에겐 미안하지만 오늘 안 잘 생각이었다.
벼락치기를 해야 할 분량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난 기본적으로 같은 또래의 일반 학생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을뿐더러 평소에도 꾸준히, 성실하게 공부를 해 왔다. 이쯤에서 잠들어도 고득점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시험 전 마지막까지 한 글자라도 더 머리에 집어넣어야 했다.
책임감, 의무감, 혹은 부채감. 뭐라고 불러도 좋다.
난 타티아나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야 했다.
* * *
밤을 새워 공부하다가 5시가 되자마자 별관의 연습실로 향했다. 중간고사 당일이라도 아침 연습을 빼먹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중간고사가 아니라 국가고시를 앞두고 있어도 밥은 먹고, 숨은 쉬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그대로 달이 이울고, 해가 떠오를 때까지 연습하다가 아침식사를 하고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샤워를 하고, 나제즈다의 도움을 받아 머리를 말리고, 교복을 입고, 넥타이를 메고.
마지막으로 오늘 시험을 쳐야 하는 과목의 책과 노트들을 챙겨 가방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언제나 날 학교에 데려다주는 소로킨과 빅토르, 자하르가 칼 같은 검은 정장 차림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 오늘 학교 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
“어디 아프신 것 아닙니까?”
빅토르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진짜 아파도 나가야 할 판에, 난 어디 아픈 곳도 없었다.
“괜찮아요.”
빅토르는 영 이상하다는 듯 날 보았지만 정말 난 괜찮았다.
차에 타자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이대론 바로 잠들 것 같아서 노트를 꺼내 보기 시작했다.
활자를 눈에 욱여넣고 해석하자 졸음이 조금 가셨다.
빅토르가 흔들리는 차 안에서 글자를 보면 눈이 나빠진다며 말렸지만 난 오늘만 보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빅토르는 한참을 날 설득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나한테 약하기도 했다.
그는 굳이 공부를 해야겠다면 차 안에서 노트를 볼 일이 아니라, 자신이 암기테스트를 봐 주겠다며 노트를 빼앗아 가선 즉석에서 문제를 만들어 나에게 물었다.
그의 문제는 멋대로였고 묻는 포인트도 엉망진창이었지만 난 그 나름의 배려가 느껴져서 뭐라 하지 않고 순순히 답을 해 주었다.
한동안 문답을 주고받았다. 빅토르가 갈수록 어물거리더니 내 필기노트를 좌우로 마구 넘기며 말했다.
“아가씨, 너무 공부 열심히 하신 것 아닙니까? 지금까지 다 맞히신 것 같은데요.”
“너무 열심히 한다는 게 뭐예요, 빅토르.”
“아니 이거…… 솔직히 제가 봐도 뭔지 잘 모르겠는데요……. 여기 이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는 또 누굽니까? 처음 듣는 이름인데…….”
“빅토르…….”
물론 빅토르는 문학적 소양이 깊어서 고용된 것이 아니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푸쉬킨의 시를 강제로 외우게 하는 이 러시아에서 투르게네프를 처음 듣는다는 건 조금 놀랍긴 했다.
빅토르의 학창시절이 조금 궁금해졌다.
내가 약간 실례되는 눈빛을 한 모양이었다. 빅토르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아가씨?”
“빅토르. 지금 아가씨에게 그게 무슨 말이냐!”
“윽, 죄송합니다. 아가씨.”
난 평상시와 같은 빅토르와 소로킨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난 빅토르가 투르게네프를 모르든 말든, 늘 악의 없이 나에게 막말을 하든 상관없이 그를 좋아했다.
학교에 도착해서 반에 들어서니 평소보다 학생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저마다 무언가를 들여다보거나 서로 물어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중간고사 시험일이다 보니 조금 일찍 나와서 공부할 것들을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서로 작게 문답을 하기도 하고, 혼자 머리를 부여잡고 중얼중얼거리며 암기를 하기도 했다.
전형적인 시험 날의 광경에 조금 웃으며 내 자리로 향했다.
“타티아나!”
종이 뭉치를 들고 보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날 불렀다.
처음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오늘 아나스타샤는 눈가에 약간 그늘이 져 있었다. 화장기도 별로 없어서 더욱 두드러졌다.
아나스타샤가 날 보더니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너도 안 잤구나?”
너도라니?
집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나도 저렇게 다크서클이 생겨 있었던가?
“아나스타샤는요?”
“밤새웠지.”
아나스타샤는 종이 뭉치를 팔락팔락 흔들며 말했다. 노트도 아니고 그냥 A4용지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시험범위를 다시 수기로 빼곡하게 정리해 둔 것 같았다. 그녀만의 정리 방법이리라.
난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밤새웠어요.”
“자꾸 이러면 피부 안 좋아지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다니까.”
아나스타샤가 투덜거렸다.
역시 나 혼자 밤을 새운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필사적인 것이다.
“외워야 할 게 너무 많았죠.”
“그렇다니까? 무슨 범위를 이따위로 내 주는 거야?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자신이 가르치는 한 과목만 공부한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해.”
“그러게 말이에요.”
“타티아나, 이따 시험 마치고 같이 스터디나 하자. 내일 하필 수학이라서 자신 없어.”
시험 바로 전날까지 자신이 없는데 스터디 같이 한다고 뭐가 나아질까 싶지만, 아나스타샤는 기본적으로 벼락치기 체질이었다.
시험 개시하기 바로 직전까지 본 것들이 그대로 점수에 직결되는, 그런 체질인 것이다.
난 흔쾌히 아나스타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 *
완성된 답안지를 내려다보며 검토했다.
“…….”
지금도 졸음이 내 뒤통수쯤에서 도사리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밤을 새운 보람이 있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잘못된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한 번 수정도 없이 말 그대로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답안지였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틀린 곳은 없어 보였다.
기억에 애매한 부분도 없었고, 수학 시험처럼 계산을 틀릴 여지도 없었다. 모든 문항이 두말할 것도 없이 확실해서 아예 손댈 곳이 없었다.
이대로 내면 만점일 것이다.
하지만 난 연필을 놓지 못하고 그대로 쥐고 있었다.
차라리 만점인지 아닌지 모르고 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냥 보통 시험을 보듯 별생각 없이, 최선을 다해 푼 만큼 그에 따른 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공부량은 충분했고 아직 제출하지 않은 답안지를 보며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상한 생각이었다.
뚫어져라 답안지를 내려다보았다.
비록 중학생 수준이지만 공부를 안 하고선 도저히 쓸 수 없는 답안지였다.
그저 10여 년 더 살았다고 해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러시아 시인의 시를 암기해서 줄줄 써 내려갈 수는 없는 것이다.
난 정말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노력의 바탕엔 일종의 책임감이 깔려 있었다.
음악 하나만큼은 내 마음대로 하려니, 다른 모든 것은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머리도 좋지 않은 주제에 맞지도 않는 공부를 밤새워 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내 나름대로의 노력이자 희생이었다.
하지만 그다지 뿌듯함도, 만족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
여기는 일반 학교가 아닌, 중앙음악학교였다.
난 시를 잘 외우고 시험을 잘 풀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피아노를 잘 쳐야 했다.
다른 무엇도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 피아노를 잘 쳐야만 했다.
물론 난 피아노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기에 더더욱.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해, 지금처럼 밤을 새워 가며, 피아노로 스스로 만족할만한 연주를 만들어 낼 때까지…….
대체 언제?
“…….”
난 문득 지우개를 들었다. 갈등이 있었다. 하지만 충동이 더 강했다.
지우개로 완성된 답안지 중간의 몇 단어를 지웠다.
그리고 빈 자리에는 어떻게 써야 자연스럽게 틀린 것처럼 보일지 생각해서 철저하게, 오답을 썼다.
타티아나, 나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정말 책임감 있게 살고자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난 이런 것으로 아무것도 만족할 수가 없어.
이제 만점이 아니게 된 답안지를 내려다보며 약간 비웃음을 머금었다.
알 수 없는 희열이 온몸을 감쌌다. 어둡고, 음울한. 저열한 감정이 뇌리를 마비시켰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것은 일종의 쾌감이었다. 비웃음이 나도 모르게 목을 타고 비집고 올라올 것 같아 간신히 억눌렀다.
어두운 감정들은 하나의 문장이 되어 가슴에 울렸다.
내 피아노는 만점이 아닌데 왜 시험지는 만점이어야 해? 안 그래?
그게 지금 내가 가진 한 가지 의문이었다.
난 타티아나의 모든 것을 대신하기로 다짐했지만 거기에 대한 거래로 내 피아노와 내 곡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불공정한 거래를 망가뜨릴 심산도 충분히 있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피아노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남들 눈에 띌 생각이 전혀 없는 내게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며칠 전 리처드도 말했다. 되도록 쉬운 곡으로 하라고. 그것은 비단 위클리 리사이틀에 올릴 곡을 말하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성적, 평가, 학교에서 내게 매길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쉬운 일이던가. 참 쉽다.
“……아.”
연필을 너무 세게 쥐어서 손아귀가 아팠다.
안 돼, 손은 안 돼.
조금 떨리는 손가락을 의식해서 하나씩 폈다. 연필이 책상 위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