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2화 (42/1,277)

##  42화

오늘자 시험은 끝났다. 답안지를 제출하고, 이젠 돌이킬 수 없어졌다.

멍하니 앉아 무슨 짓을 했는지 되새겼다.

좋은 성적과 평판.

난 그런 것들에 전혀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어떻게든 의무감으로 해낼 순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로 내가 원하는 것은 아주 소박하기 짝이 없다.

단 한 곡을 원할 뿐이었다.

남자로 살아남으려 아등바등해 봐야 난 어차피 타티아나가 아닌 누군가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한 곡만 제대로 보일 수 있다면 음악가로서의 나는 존재할 수 있었다.

정신, 영혼, 미련, 뭐라 부른들 좋았다. 난 그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 스스로에게, 혹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모를 타티아나와의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

그렇게 믿고 성실히 임했다.

이제 와서 합의사항에 대한 불만이 생긴 건 아니다.

단지, 만점짜리 답안지를 보니 억울하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을 뿐이다.

난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데, 내 음악은 대체 언제쯤 할 수 있게 되는 거지? 내년? 내후년? 그때까지 내가 피아노를 칠 수 있으리란 보장은 있고? 난 기약도 없이 아무 만족도 느끼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야 해?

갑자기 든 충동적인 심술, 혹은 복수심의 발로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답으로 고쳐 쓸 때 느꼈던, 스멀거리는 검은 감정들을 떠올려 보자면 방금 내가 제출한 답안지는 한 장의 협박장이기도 했다.

나 자신에게 보내는 협박장.

지금은 만점 답안지를 고쳤을 뿐이지만, 앞으로도 내가 이렇게 점잖게 굴 것 같은가?

난 음악가로, 그것도 연주자로 살지 못하는 몸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미 한 번 했었는데, 두 번이라고 못 할 것 같아?

내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내 마음대로 못…….

“타티아나.”

고개를 드니 아나스타샤가 초췌해진 얼굴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험은 잘 봤느냐는 둥 으레 할 법한 소리들을 예상하며 기다리자니, 아나스타샤가 이상한 소릴 했다.

“괜찮니?”

왜 나한테 괜찮냐고 물어? 아나스타샤. 누가 봐도 안 괜찮아 보이는 건 너인걸?

“괜찮아요.”

“응…… 괜찮았으면 좋겠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말을 하며 살며시 웃었다.

우리는 학생답게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나누었다. 물론 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기에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두서없이 이러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오늘 중간고사가 특히 어려웠을 한 사람이 떠올랐다.

뒤편을 돌아보니 한승우가 노트를 다시 파라락 넘기고 있었다. 써 낸 답안이 맞는지 체크해 보는 것 같았다.

잘 봤니?

그때, 갑자기 한승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눈이 마주치자마자 도로 숙여 버렸다. 난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잠깐 동안 스쳐 지나간 표정이 그리 어둡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시험 자체는 생각보다 잘 치른 것 같았다. 그에 비해 나는…….

“……?”

스마트폰으로 문자가 날아왔다. 내 번호로 올 연락은 손에 꼽을 정도라 누군가 싶어 확인했더니 한승우였다.

“고맙습니다……?”

“왜, 타티아나?”

“아무것도 아니에요.”

한승우는 고맙다고 내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앞뒤 다 자르고 이러면 뭐가 고마운지 내가 어떻게 알아?

답장으로 뭐가 고마운데? 라고 물어보는 건 정말 좀 아닌 것 같아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뭐라도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다.

* * *

너무 졸렸다.

평소에 잠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라서 하룻밤 정도는 안 자도 괜찮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오산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긴장이 풀어지자 그대로 잠이 쏟아졌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온몸에서 힘이 빠지면서 팔 부분이 저릿해졌다.

뒷머리에서 서성이던 수마가 이젠 양팔을 드리우고 내 눈가를 가리려 하고 있었다.

여기서 쓰러지면 양호실행이었다. 수면 부족으로 양호실로 실려 갔다간 그만한 창피한 일도 없을 것이다.

식사도 거르고 그대로 5층의 연습실로 올라오기까지, 복도에서 쓰러져 잠들지 않은 것이 용했다.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선 나는 그대로 자리에 드러누울 뻔했다.

하지만 눈앞의 피아노를 보자마자 잠이 조금 달아남을 느꼈다. 정신을 가다듬었다.

잠은 집에 가서 조금 자면 된다. 어제 한 밤샘 공부의 성과는 내 스스로 망쳤으니 피아노라도 잘 쳐야 하지 않겠는가?

습관적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서 건반 덮개를 올리고, 손을 올렸다.

눈앞이 어질어질했지만 그래도 머리 한편에 기억하고 있던 악보는 어디로 가지 않고 그대로였다.

그리고 위클리 리사이틀에 올리기로 했던 슈만 소나타 3번의 마지막 악장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악장지시 프레스티시모 파시빌레prestissimo possibile. 가능한 빠르게. 좌우 번갈아 이어지는 무궁동을 기계적으로 쳐 나갔다.

그냥 연주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소리를 깨끗하고 고르게 내는 것은 꽤 어려웠다.

아직 슈만 소나타를 손쉽게 쳐 내기엔 내 기본기가 부족했다.

정확한 발음이 중요한 곡이다. 속도를 조금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온 신경을 집중해서 음 하나 하나의 아티큘레이션을 살렸다. 그걸 이어 붙여서 프레이징을…….

“…….”

얼마나 쳤을까.

눈꺼풀이 마비라도 된 것인지 도저히 눈을 못 뜨겠어서 눈을 감고 연습을 계속했다.

건반의 위치는 보지 않아도 안다. 연주자가 눈이 필요할 땐 악보를 읽을 때만이지, 머릿속에 그 악보를 집어넣고 나면 눈은 필요 없었다.

눈을 감고 귀와 손, 발에만 집중했다. 혼미한 가운데에 체득된 움직임만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암흑 속에서 내가 만들어 낸 소리만이 귓가에 진동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여기엔 한 연습실, 한 대의 피아노, 한 명의 연주자밖에 없다.

이 소리는 내가 만들어 낸 소리였다. 갑자기 뒷목으로부터 무언가 쏟아지듯, 난 절망했다.

이게 최선이야?

대충 만들어서 무대에 올리기엔 문제없었다, 미하일 선생님도 이 정도면 대단한 완성도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천하의 중앙음악학교의 기악지도 선생님이 괜찮다고 해 주셨으니, 이대로 무대에 올라가서 연주하면 그 누가 이 곡이 엉망이라는 것을 알겠는가?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지.

내가 안다.

“…….”

나는 바보가 아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도 웃기는 짓이었다.

모두가 괜찮다고 하는데 왜 나 혼자 이렇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이게 얼마나 비효율적인 짓이란 말인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 내 소리를 듣고 엉망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그렇게 들렸다. 남들이 어떻게 듣든 난 그렇게 들렸다.

멀쩡한 곡 가지고 왜 그러냐고 물어도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내 마음에 안 들었다.

“…….”

멍하니 생각하다가 순간 웃음이 터졌다.

어차피 오늘만 이런 것도 아니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난 내 수준이 항상 불만족스러웠고 당장 이 슈만 소나타 3번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지도 않았다.

언제나처럼 혼자 만족하지 못하고 짜증스러울 뿐이었다.

문제 해결은 간단했다. 아주 속 편하고 손쉽다.

나 혼자만 잘못되어 있는 일이니 그냥 눈 딱 감고 무대에 올라가서 치고 내려오면 될 일이었다.

마음에 안 든다고 짜증을 내고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그간 얼마나 많은 곡들을 쳐 오고, 남들 앞에 보였는가? 이미 늦었다.

나도 내가 표리부동하다는 것을 안다. 말로는 정말 모조리 다 깨 버릴 것처럼 떠들면서도…… 난 무대가 그립고 청중들 앞의 연주자이고 싶어서, 수없이 거짓말을 해 왔다.

늘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싶었지만, 그렇게 해야만 했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지라 무뎌지고 또 무뎌졌다.

언제나 그랬듯 모두를 속이고, 나 스스로도 속이면 될 일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손아귀에 힘이 빠져나갔다.

눈을 감고 있었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지만, 난 더더욱 깊은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다음은…… 잘 모르겠다.

* * *

팔이 저렸다. 정신이 들고 보니 난 건반 위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이렇게 건반을 누르고 있으면 분명 레버와 댐퍼에 기계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이 갈 것이란 데에 생각이 닿았다.

“!”

튕겨지듯 건반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정신이 없고 졸려도 그렇지 이렇게 자면 안 되는 거였다. 차라리 피아노 밑에 기어 들어가서 잤어야 했는데.

어깨에서 무언가가 스르르 흘러내렸다. 내려다보니 담요였다.

뭐지, 이건.

“잘 주무셨어요?”

옆을 보니 2학년 바이올린과 후배, 아나톨리가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앞에 책을 펴 놓은걸 보니 무언가 공부를 하고 있었던 듯하다.

혹시 침이라도 흘린 게 아닌가 싶어 황급히 입가를 닦았다. 다행히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 흠, 무슨 일인가요? 아나톨리가 왜 여기에 계시죠?”

이미 늦었나 싶지만, 그래도 까마득하게 어린 후배에겐 체통을 지키고 싶었다. 난 짐짓 헛기침을 하며 싸늘한 어투로 물었다.

하지만 아나톨리는 아랑곳 않고 대답했다.

“여쭤볼 게 있어서요.”

“뭔가요?”

“시험공부요. 저번에 아나스타샤 누나가 그러던데 누나가 수학을 잘한다 하시더라고요.”

“…….”

공부 가르쳐 달라고 찾아왔다는 건가?

난 저 어린애가 공부를 가르쳐 달라는데 거절할 정도로 매정하진 않았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조금 냉정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건 가르쳐 드릴게요. 하지만 다음부턴 마음대로 이 연습실에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공부는 도서관에서 해야 하잖아요. 여긴 연습실이에요.”

난 단호하게 말했다.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이 5층 연습실은 내 전용이나 다름없었다.

치사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왜 멋대로 들어와서 사람 자는 걸 구경하고 있단 말인가? 나도 창피하다.

아나톨리는 약간 주저하더니 말했다.

“저도 잠깐 와서 가르쳐 주실 수 있느냐만 묻고, 도서관에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런데요?”

“문도 안 잠그고 주무시는데 혹시 누가 올까 싶어서…….”

“?”

무슨 소리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나톨리가 갑자기 책상을 탕 치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무방비하게 주무시고 계시면 어떻게 해요! 조심하셔야죠.”

“조, 조심요?”

“저였으니까 담요도 덮어 드리고 지켜 드렸지, 아마 다른 애들이었으면 누나 얼굴에 낙서라도 했을걸요?”

“윽?”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내 어깨에도 안 오는 아나톨리에게 혼이 나면서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계속 우울했는데 조금 기분이 풀어졌다.

아나톨리는 상당한 용기를 내어서 내 어깨에 담요를 덮어 줬을 것이다. 난 담요를 대충 개서 의자 옆에 내려놓고 그를 불렀다.

“아나톨리. 이리 와 보세요.”

“예? 왜요?”

“제가 갈까요?”

“아뇨, 아니에요.”

당당하게 날 혼내던 아나톨리는 막상 부르니까 쭈뼛거리다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귀엽기는.

연습실은 좁았고, 아나톨리는 금방 내 앞까지 다다랐다. 그 오밀조밀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의자에 앉은 채 양팔을 뻗어 그를 끌어당겼다.

나보다 작은 아나톨리는 어어 하는 소리를 내더니 내 쪽으로 넘어지듯 안겨 왔다. 난 뒤로 밀리지 않고 그대로 그를 받아 주며 말했다.

“고마워요. 덕분에 잘 잤어요.”

“……!”

아나톨리는 당황한 것처럼 보였지만, 괜찮지 않겠는가?

난 여자로서 남자를 껴안지도 못하고, 양심 때문에 여자를 껴안지도 못하는 몸이었다.

아나톨리는 그 어느 쪽 기준도 적용시키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거부감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아나톨리를 끌어안을 수 있었다.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그저 기특함과, 감사를 담아 내 인성의 밑바닥에 몇 줌 남지 않은 따뜻함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아나톨리를 안고 있는 사이, 난 거꾸로 충족감을 느꼈다. 이성을 떠나 본능적인 영역에서부터 차오르는 충족감이었다.

난 고개를 비틀어 그를 더 가까이 당겼다. 사람의 온기는 따스했고 난 이것을 거부할 수 없…….

그게 벨카에게서 느끼던 것이라는 걸 자각한 순간, 이래선 안 된다는 직감에 팔을 풀고, 아나톨리의 어깨를 확 잡고 떼어 냈다.

실수였다. 잠이 덜 깬 게 분명하다.

난 횡설수설하며 변명했다.

“그, 미안해요 아나톨리…….”

변명을 하니까 모양새가 더 이상했다. 난 벨카와 아나톨리를 동일시하면 안 된다는 것을 떠올렸을 뿐이다.

그저 내가 잠든 사이에 지켜 줘서 고맙다는 의미였다고 다시 설명하려는 찰나였다.

“누나.”

“……예.”

“힘들었던 거죠?”

“…….”

왜 다들 나만 보면 괜찮냐고 묻는 걸까.

항상 반대로인 것 같다. 내가 연주하는 곡을 듣고 모두가 괜찮다는데 나 혼자 안 괜찮다고 하는 것처럼, 지금은 난 괜찮은 것 같은데 모두가 날 보고 괜찮지 않다고 하고 있었다.

“…….”

빨리 괜찮다고 말해.

더 꼴불견인 모습 보일 거야? 저 어린애한테?

“…….”

난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대로 침묵하고 머리를 숙인 내 위로, 이번엔 아나톨리가 다가와서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지금 난 교활하게 이 착한 애를 이용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애가 차마 날 무시할 수 없도록, 교묘하게 유도했을지도 모른다. 마치 벨카에게서 위안을 찾는 것처럼.

이 애가 날 위로해 주기를, 하지만 개인 벨카와 달리 이 애는 사람이었다. 절대 이래선 안 되는 것이었다.

강하게 밀쳐 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들면 울어 버리고 말까 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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