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3화 (43/1,277)

##  43화

중간고사 첫날 밤샘은 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컨디션 관리를 해 가면서 성실하게 중간고사를 다 치렀다.

일부러 오답을 쓰는 일은 두 번 다시 하지 않았다. 아무리 불안하고 급했어도 그건 너무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그 이후 시험들은 모두 본 실력대로 답안지를 써 냈다. 아마 좋은 결과를 예상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타티아나, 나도 네 덕분에 시험 잘 본 것 같아.”

“다행이에요. 아나스타샤.”

“우리 그럼 시험도 끝났는데 바람이나 좀 쐬러 갈래?”

잘 노는 남자애처럼 아나스타샤가 쿨하게 제안했다.

실제로도 아나스타샤와 놀면 심심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난 이번엔 정말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중간고사가 끝나도 난 쉴 수 없다. 당장 위클리 리사이틀이 코앞에 다가와 있기 때문이었다.

“미안해요, 아나스타샤. 저 위클리 때문에 상담도 좀 받고, 연습도 해야 해서요.”

“맞다. 너 위클리 있지.”

아나스타샤는 아쉽다는 듯 말하더니, 목소리를 조금 낮춰서 다시 물었다.

“그런데 타티아나, 너 무슨 곡 올릴 거야?”

“…….”

슈만 소나타 3번을 후보에 놓고 있었지만 결정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생각하고 있자니 아나스타샤가 더더욱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너 혹시 라 발스 같은 거 가지고 올라갈 건 아니지? 그러진 마. 엄청 주목받을걸.”

리처드에 이어 아나스타샤도 내게 실력을 숨기길 종용했다.

“그러면 아나스타샤, 일부러 쉬운 곡을 치라는 건가요?”

“그래.”

“……무슨 이유죠?”

아나스타샤는 답잖게 조금 고민하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언젠가 드러나겠지만…… 아직까진 네가 그만큼 친다는 걸 애들한테 알려 주기 싫어.”

“……?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냥 그렇다고.”

“그냥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아무튼! 놀러 가는 건 위클리 이후라는 거지? 그렇게 알고 있는다?”

아나스타샤는 이상한 소리를 하더니 대화를 확 끊고는 갑자기 고개를 휙 돌리곤 도망쳐 버렸다.

그녀의 눈에도 내가 조용히 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잠시 생각해 본 나는, 가능하다면 위클리 곡을 조금 난이도도 낮고 주목을 덜 받을 수 있는 곡으로 고를 수 없겠느냐고 미하일 선생님에게 상담하기로 결정했다.

어쩌면 이게 평생 한 번 있을 기회일지도 몰랐다. 내가 언제 또 중앙음악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실력 과시를 해 보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하기 싫었다.

아직 스스로 듣기에도 자신이 없었고, 그렇게 자신도 없는 곡으로 으스대고 싶지 않았다.

반칙으로 주목받는 것에도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번만큼은 그렇게 마음을 정했다. 슈베르트의 소나타 중 한 곡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14번이나 19번, 20번 정도면 적합하리라.

비록 내가 원하는 방향의 음악이 되진 않았지만 최소한 그 나름대로 구조와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적당한 악장만 하나 고르면 된다.

“들어가겠습니다, 선생님.”

그렇게 미하일 선생님의 레슨실 문을 열자마자, 난 예상치 못한 사람과 마주하고는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뭐냐, 레슨 시간인가.”

미하일 선생님은 자리에 없었다.

그 대신 또 다른 피아노 선생님이자, 에르네스트의 지도 선생인 구세프 바실리예비치 알레니체프 선생님이 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평소 허브차 향밖에 나지 않는 이 레슨실에서 담배라니, 조금 기분 나빴지만 크게 내색하지 않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래.”

곰 같은 덩치의 구세프 선생님은 날 위아래로 훑더니 눈썹을 꿈틀거렸다. 도로 문을 열고 나가고 싶어졌다.

난 구세프 선생님이 심사위원으로 앉아 있는 실기시험장에서 자유곡으로 영화 주제곡을 쳐 버린지라 첫 인상부터 그리 좋지 않았다.

게다가 최근엔 담당 학생인 에르네스트의 연구회를 해체시켜 버린 원인으로 지목되기까지 했다.

구세프 선생님이 날 좋아할 리 없을 것 같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난 황급히 말했다.

“전…… 이따가…….”

“그냥 조금 있어라. 미하일은 곧 올 테니.”

“……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벽에 붙어서 얌전히 기다렸다.

아나스타샤에게 살려 달라고 구조 요청이라도 보낼까 싶었지만 스마트폰을 꺼내 드는 것조차 구세프 선생님을 자극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구세프 선생님은 고개를 돌리고 흥미 없다는 듯 담배를 뻑뻑 피우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타티아나…… 너도 이번 주 위클리 연주자지.”

“그, 그렇네요.”

이상하게 대답하자 구세프 선생님이 끼릭거리며 의자를 돌려 내 쪽을 보았다.

“무슨 곡이냐?”

“예?”

“에르네스트를 찍소리도 못 하게 □□□□□□ 밟아 놨으니…… 아마 이번 위클리가 데뷔 무대가 되겠지?”

“……? 예?”

“나도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라서 말이다.”

빠르게 쏟아지는 밟느니, 데뷔니 이해 못 할 단어들에 당황해하고 있는데, 구세프 선생님이 담배로 내 쪽을 겨누었다.

“네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말이다.”

“…….”

압박감에 눈이 다 따가웠다. 아니, 담배 연기 때문인가?

아무 대답도 못 하고 더 뒷걸음질 쳐서 벽에 달라붙자 구세프 선생님이 날 위협하려는 의도는 없었다는 듯 양팔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디서 나왔든, 인재는 언제나 소중하지……. 게다가 베르체노프……라고 했었고. 왜 겁을 먹고 있나?”

“그…….”

“당당하게 있어라, 당당하게. 편입생인 너도 어쨌거나 이젠 우리 중앙음악학교의 학생이니.”

“…….”

당연한 말이었지만, 어쩐지 그 말은 내게 위안이 되었다.

레슨실 전체를 짓누르던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구세프 선생님은 다시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물었다.

“그래서, 무슨 곡?”

난 기존에 연습하던 것이 아닌, 오늘 바꾸려고 했던 곡의 이름을 댔다.

“슈베르트의 소나타를 하려고 해요…….”

“슈베르트?”

내 말에 구세프 선생님은 한쪽 눈썹만을 들어 날 노려보더니,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옆에 있는 재떨이에 담뱃재를 툭 털었다.

“왜?”

“…….”

왜냐고 물으니 할 말이 없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인상을 쓰며 질문을 바꿨다.

“원래 하려던 곡이 무어냐.”

“…….”

“미하일이 아무리 물러 터졌어도 □□□ □□ □□ 너한테 슈베르트를 시킬 리가 없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원래 곡을 말해.”

“왜죠?”

구세프 선생님은 아예 나에게 슈베르트가 안 맞다는 듯 말했다.

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불쑥 반항심이 들었다.

이전에도 슈베르트는 수없이 연습했었고, 난 꽤 깊이 있는 슈베르트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연구라면 질리도록 했다.

하지만 구세프 선생님은 대답 대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슈베르트가 어떤 작곡가라고 생각하나.”

“……맑은 노래를 쓰는 작곡가죠. 시도 많이 썼고, 표제음악을 제하더라도 모든 곡의 모든 프레이즈가 길고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그따위 것들을 나에게 설명하려 들지 말고.”

난 계속해서 설명할 수 있었지만 구세프 선생님은 단호하게 내 말을 잘랐다.

그리곤 다시 질문을 조금 더 압축했다.

“딱 한 단어로 설명해 봐라.”

“……방랑?”

굳이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을 떠올리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냥 한 단어로 내가 설명할 수 있는 슈베르트는 그랬다.

방랑, 정처 없는 여행자의 삶. 그의 곡은 하나의 길이었다. 그저 길을 따라 걷고 있자면 계속 변화하는 풍경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되는대로 기분 좋게 흘러가고 흘러가다가 멈춰 서면, 곡은 말 그대로 방랑하듯 떠나 버리지만 그 여운은 가슴 어딘가에 남는, 그런 환상적인 곡들을 쓰는 작곡가였다.

이 정도면 그럭저럭 훌륭한 대답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 구세프 선생님을 보았지만 선생님은 인상을 풀지 않았다. 되레 더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아는군. 그런 녀석이 슈베르트를 한다고?”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지금 네게 슈베르트처럼 방랑하는 곡은 맞지 않단 말이다. 차라리 베토벤을 한다면 또 모르겠군.”

“……!”

“미하일이 □□□□□ 아닌 이상에야 귀가 뚫려 있다면, 네게 슈베르트를 권했을 리가 없다.”

담배가 다시 날 겨누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가 마치 내 심장을 쏘고 난 총구처럼 보였다.

상상도 못 했던 이유였다.

내가 방랑자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깊게 되새길 것도 없이, 그간 단어로 정리되지 않던 생각들이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구세프 선생님의 말대로였다. 방랑, 그만큼 나와 거리가 먼 단어도 없었다.

난 스스로 의지를 정할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오로지 한 길에만 정진해 왔고, 그것은 말 그대로 죽었다 깨어나서도 이어졌다.

하지만 그걸 구세프 선생님이 어떻게 아셨는진 모르겠다. 조금 당혹스러웠다.

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제게…… 베토벤이 맞다고 생각하시나요?”

하지만 구세프 선생님은 이번엔 확답을 내지 않고 한 발자국 발을 뺐다.

“그건 모르지.”

“선생님, 전 지금 진지…….”

“나도 진지하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준비한 곡이 무엇인지나 말해.”

“……슈만 소나타 3번이요.”

“슈만. 그게 미하일의 추천이었군. 그렇다면 슈베르트 운운한 것은 온전히 네 생각이렷다?”

“……예.”

“슈만 소나타를 칠 정도라면 알 만큼 알 텐데. 왜 그따위 헛소릴 했지.”

그 수많은 작곡가들 중에, 왜 자유롭게 방랑하는 영혼들에게나 어울릴 슈베르트를 떠올렸을까.

나도 알 수가 없다.

“별 이유 없어요……. 슈베르트는 저번에 읽어 뒀던 곡이라.”

“읽어 둔 곡들은 많을 테지, 왜 슈베르트냔 말이다.”

“그나마 최근에 과제곡으로 제가…….”

“또 거짓말하는군. 타티아나.”

구세프 선생님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갑자기 짜증이 확 치밀었다.

“사실은 힘들어서 그랬습니다, 선생님.”

“힘들어? 네가? 뭐가.”

“달거리 중이라서요.”

그 말엔 천하의 구세프 선생님도 낯빛이 새하얗게 되었다.

신랄하던 비난을 멈추고 당혹스러움이 가득한 두 눈만 끔뻑이시는 모습이, 아무리 봐도 내가 많이 선을 넘은 것 같다.

난 실제로 생리 중이었으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타인에게, 그것도 나이 지긋한 남자 선생님에게 대놓고 공격적으로 말하는 것은 거의 폭력을 행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약간 후회가 됐다.

나도 부끄럽다. 왜 안 부끄럽겠는가? 하지만 여태껏 그 누구에게도 짜증을 전가하지 않고 잘 참았는데, 그런 내 입에서 이런 말까지 나오게 만들었다면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아니, 자꾸 열 받게 하잖아. 막말로 내가 슈베르트를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선생님들이 내 인생 대신 살아 줄 건가?

울컥해서 마지막으로 한 움큼 남아 있던 내 존엄성을 전력투구해 버렸지만, 거기에 얻어맞은 구세프 선생님 역시 상당한 타격을 받은 듯했다.

“그…… 흠, 미안하다.”

“아뇨.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내 눈도 똑바로 못 쳐다보는 선생님을 보니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한 것인가 어마어마한 창피함이 엄습해 온다.

난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슈베르트가 아니라면 무슨 곡을 하면 좋을까요.”

“……그건 네가 정해야지. 난 모르겠다.”

구세프 선생님은 도망가려는 것 같았다.

난처하게 만들어 버리긴 했지만 난 나에게 슈베르트가 맞지 않다고 딱 잘라 지적해 준 뛰어난 선생님을 놓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이건 어떨까요, 선생님. 한번 봐 주시겠어요?”

“…….”

구세프 선생님은 약간 질색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기악 지도 선생님이었다.

학생이 부탁하는 데에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슨 곡이냐.”

“쇼팽 소나타 1번이요.”

“……쳐 봐라.”

봐 주시겠다는 것 같았다. 난 감사를 표하고, 학생용 피아노 앞에 앉았다.

쇼팽 소나타 1번. 겨우 5초 남짓이지만, 현 시점에서 내가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패시지를 딱 한 구간 가지고 있는 곡이었다.

구세프 선생님에게 보인다면 뭔가 힌트를 얻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위클리에 내보일 곡도 아닌 곡을 내 선생님도 아닌 분에게 멋대로 레슨받는 기분이었지만 지금 기회를 놓친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난 손을 풀고, 차분하게 쇼팽 소나타 1번의 마지막 악장인 4악장을 바로 시작했다.

왼손을 들어 호쾌하게 건반을 찍어 나갔다. 프레스토. 빠르지만, 고르고 정갈하게 쳐야 하는 곡이다.

유려하고, 부드러운 느낌은 많이 옅었다. 강하고 열정적으로 곡을 이끌어 나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

“…….”

이전 피아니스트 시절의 내가 이 곡을 연주했을 때와 똑같은 노랫소리가 내 손을 타고, 건반을 넘어, 피아노에서 흘러나왔다.

겨우 5초. 하지만 그 무엇보다 소중한 5초였다.

그렇게 곡을 마무리 짓고, 건반에서 손을 떼었다.

“선생님…….”

무슨 말이라도 좋다. 구세프 선생님은 보기엔 무섭고, 날 대하는 태도도 딱딱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내 성향을 상당히 읽어 내고, 또 내가 추구하는 음악 또한 꽤나 이해하고 계신 것으로 보였다.

분명 해 줄 말씀이 있으실 것이다.

구세프 선생님은 평소와 같이 이맛살을 찡그린 상태로 날 보더니 마지막 담배를 깊게 빨고, 재떨이에 비벼서 꺼 버렸다.

그 목소리에 정말 귀찮다는 듯한 뉘앙스가 팍팍 묻어났다.

“왜 자꾸 이상한 짓거릴 하는 거냐? 왜 거의 완성된 곡에 □□□□ 색을 넣지?”

“…….”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으나 저게 비속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거지같은? 뭐 비슷한 뜻이리라.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가 혈압이 확 치솟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어금니에서 빠득 하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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