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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44화 (44/1,277)

##  44화

미하일 표도로비치 볼콘스키는 학과장과 면담을 마치고 다시 자신의 레슨실로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야기가 좀 길어져 버렸다.

레슨 스케줄에 따르면 지금은 타티아나의 순서였다. 미하일은 마음이 급해졌다.

레슨실에는 대화를 하다 만 구세프 바실리예비치 알레니체프 선생이 남아 있었다.

타티아나가 시간에 맞춰 레슨실을 찾았다면 그 둘이 마주쳤을 것이다.

미하일은 구세프가 말이 험해서 그렇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기 때문에 딱히 타티아나에게 나쁜 영향을 주리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되도록 자신의 보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후.”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레슨실까지 돌아온 미하일은 숨을 고르고, 곧장 문을 열고 들어섰다. 담배 냄새가 가득했다.

인상을 찌푸리기도 전에,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냉랭하게 울려 퍼졌다.

“대체 무엇이 완성되었다는 건가요? 선생님. 제대로 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난 완성되었다고 한 적 없다. 완성에 다다르고 있다고 했지. 그런데 너는 네 스스로 그걸 다 망치고 있어.”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미하일은 항상 고상한 어투만 사용하는 타티아나가 이렇게 날을 세우고 싸늘하게 대꾸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타티아나의 적대 어린 태도에도 구세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막 문을 열고 들어선 미하일을 힐긋 일견할 뿐이었다.

“물론 너도 이해가 안 가겠지. 나도 이해가 안 가니까. 미하일, 왔나.”

“이해가 안 가신다 하시면…… 예?”

그제야 타티아나는 고개를 돌려 미하일을 확인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세를 바로 했다. 미하일은 쓰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타티아나, 미안하다. 무슨 이야기인진 모르겠지만 난 네 편이다.”

“……예?”

“어이, 미하일. 내가 이 녀석과 싸우기라도 했다고 착각하는 건가? 지금 나한테 실례하는 것 같은데.”

미하일은 손을 뻗어 타티아나의 어깨를 짚으며, 구세프에게 눈을 부라렸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왜 곡의 완성을 놓고 내 제자에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가? 다른 교과목에 대한 이야기라면 자네 권한이겠지만, 최소한 이 애의 피아노에 관해서만큼은 월권하지 말게.”

“월권?”

구세프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킬킬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미하일, 그건 맡은 바 책임을 다했을 때나…… 할 수 있는 소리 아니겠나?”

“무슨 말인가, 그게.”

“저 녀석이 오늘 무슨 말을 했는지 아나? 위클리 때 슈베르트를 치겠다고 했네.”

“……?”

미하일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는 타티아나에게 슈만을 추천했고 타티아나 역시 그것을 받아들여 꽤 잘 준비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이냐? 타티아나.”

타티아나는 살짝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

“……예. 선생님.”

“…….”

타티아나가 하고 싶은 곡을 연주하는것도 나쁘진 않지만 무대를 며칠 앞두고 곡을 바꾼다면 준비가 미흡해질 수밖에 없다.

미하일은 약간 타이르는 투로 말했다.

“타티아나, 슈베르트도 괜찮지만 아무래도 위클리엔 조금 더 준비가 된…….”

“하하하, 글렀군. 글렀어.”

갑자기 구세프가 박장대소했다. 미하일은 이쯤 되면 참아 줄 만큼 참아 줬다는 듯 사납게 일갈했다.

“구세프, 자네 너무 심하지 않나?”

“심해? 내가? 아니지. 잘 보게, 저 녀석한테 누가 심하게 구는지.”

미하일은 구세프가 가리키는 대로 타티아나를 내려다보았다.

타티아나는 이를 앙물고 있었다.

구세프가 딱 잘라 말했다.

“지도 선생이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 저 녀석은 슈베르트와 결코 어울리지 않아.”

“자꾸 알 수 없는 소릴 하는군.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아나? 저 애는 아직 열네 살일세.”

“열네 살이지만 저 녀석은 이미 슈베르트가 어떤 작곡가인지 충분히 알고 있어. 하지만 지금 저렇게 여유가 없어서야 무대에 올릴 수 없단 걸세. 왜 그걸 모르는지, 정말 이상하군.”

구세프가 신랄하게 쏘아붙였다.

“미하일. 그간 가르치면서 자기 제자의 눈을 제대로 본 적도 없나?”

“뭐라고?”

“저 녀석이 어딜 봐서 방랑하는 바람인가? 전쟁터의 불길이지.”

그 말을 듣고서야 미하일은 타티아나를 다시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젠 비싼 돈 주고 염색하지 않는 이상 찾아보기도 힘든 백금발, 또래 아이들에 비교해도 현격하게 타고난 미모.

그리고 언제나 조금 우울하게 가라앉아 있는 눈동자. 덧없이 옅고 푸르지만, 그것은 결코 맑고 폭신폭신한, 구름의 푸르름이 아니었다.

“……타티아나.”

대체 언제부터였던 걸까.

수천 도가 넘어가는 불꽃에서나 볼 수 있는 푸른 화염을 머금고 있는 눈동자를 단순히 우울한 구름 같다고 착각한 것이.

타티아나는 곧 고개를 휙 돌려 시선을 피해 버렸다.

미하일은 여태껏 타티아나가 열네 살의 사춘기 소녀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저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 언젠가 극복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여길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구세프가 그것 보라는 듯 말했다.

“정말 슈베르트가 어울릴지 아닐지, 모르겠다고?”

“……타티아나는 아직 더 작곡가들을 배워 봐야 하는…….”

“물론 그렇겠지. 앞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니. 하지만 당장 지금, 위클리 곡으로 슈베르트는 단연코 아니지. 뭣하면 당장 쳐 보라고 해 보겠나?”

“…….”

미하일은 거기에 대꾸하지 못했다.

사실 이렇게 말싸움 따위로 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심플하게 타티아나를 피아노에 앉혀서 슈베르트를 쳐 보도록 시키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미하일은 이 순간, 그렇게 타티아나의 슈베르트를 들어 봤자 구세프의 승리만 확실해질 뿐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번엔 미하일이 타티아나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

레슨실에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상황은 명백하게 구세프의 우위였다.

타티아나는 아무런 반론도 펼치지 않았고, 미하일은 더 이상 자신의 제자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구세프는 길게 미적거릴 생각이 없었다. 패배자 둘을 남겨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위클리 기대하겠네, 미하일. 아까 하던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잠깐.”

레슨실 밖으로 나가려는 구세프를 미하일이 멈춰 세웠다. 구세프가 의아하다는 듯 돌아섰다.

“뭔가?”

“타티아나를 좀 도와주게.”

“뭐?”

예상치 못한 말에 구세프는 물론이고 타티아나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미하일은 누구보다 진지하게 다시 말했다.

“이 애를 데리고 가서 위클리 무대에 어떤 곡을 올려야 할지 같이 찾아봐 주게.”

“이 사람 정말 미쳤군. 지도 선생을 두고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방금 전에 자네 입으로 월권행위는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허락하겠네.”

“그게 문제가 아니라…….”

구세프가 정말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자존심도 없나?”

“제자의 일인데 내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지.”

미하일은 자포자기로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지금 구세프만큼 적절한 선생도 드물었다.

그간 타티아나와 계속 엇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이끌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미하일은 타티아나를 가르칠 계획은 완벽하게 세워 두고 있었지만 그녀의 내면을 들여다보진 못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다른 피아노 선생인 구세프가 등장해서 한눈에 타티아나를 알아보았다.

미하일은 구세프가 조금이라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내 준다면 단순히 부탁이 아니라 무릎까지 꿇을 생각도 있었다.

선생으로서의 자존심? 당연히 상했다. 아마 타티아나로부터 신뢰도 많이 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무엇보다 타티아나는 미하일의 것이 아니었다. 미하일은 그렇게 오만한 생각을 갖는 선생이 아니었다.

타티아나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든 간에 제대로 된 연주자로서 바른 길을 찾을 수만 있다면 다른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미하일의 생각에 타티아나 같은 학생을 감당하고, 제대로 키워 내려면 선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그렇게 쿨하게 결정한 미하일과 달리, 타티아나는 거의 남의 집에 팔려 가는 강아지 같은 얼굴로 매달렸다.

“미하일 선생님! 잠시만요, 제가 잘못했어요. 저 그냥 슈만 칠…….”

“타티아나.”

미하일은 타티아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내가 네 지도 선생을 그만두겠단 말이 아니다. 앞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앞으로도 함께할 게다. 하지만 당장 위클리를 앞두고 있지 않느냐?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오늘은 구세프의 도움을 받거라.”

“그렇지만…….”

“지금까지 말 안 했지만…… 타티아나, 난 독신이다.”

“……예?”

난데없는 발언에 타티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마흔도 넘은 나이에 독신이라는 것이 크게 흠인 세상은 아니었지만, 지금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조금 이상했다.

타티아나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미하일이 눈을 찡긋했다.

“그런데 구세프는 기혼자인 데다가 네 또래의 딸도 있지.”

“……?”

조금 의외라는 듯 타티아나가 구세프를 돌아보았다. 구세프가 오만상을 쓰며 도끼눈을 했다.

“어이, 미하일.”

“아마 지금 나보단 널 잘 이해하고, 네 이야기를 잘 들어 주리라 생각되는구나. 그렇지 않나? 구세프.”

“내가 미쳤는가? 난 하겠다고 한 적 없네.”

“오늘 자네가 레슨해야 할 학생들은 내가 봐 주겠네. 내 레슨실로 다 보내게.”

“한다고 한 적 없다고!”

구세프가 버럭 고함을 지르건 말건, 미하일은 타티아나를 보며 다시 말했다.

“혹시 배신감 같은걸 느끼는 것은 아니겠지?”

“……약간은요.”

“솔직해서 좋구나.”

“그리고 선생님들은 절 이해하기 힘드실 거예요.”

그렇게 말하던 타티아나는 스스로 뱉은 말을 곱씹더니 실수했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무슨 말을 해도…….”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튼, 말씀하신 것도 다 미하일 선생님이 절 위해서 생각하신 거니까…….”

타티아나도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말씀대로 할게요.”

“그러거라.”

멋대로 진행되는 이야기에 급기야 구세프가 험한 소리를 입에 담았다.

“사제가 나란히 정신 나갔군. 대체 뭘 마음대로 정하는 건가? 난 저 녀석에게 그 어떤 레슨도 할 생각이 없네.”

“선생님.”

미하일이 타티아나를 놓아주고, 타티아나가 스르르 몸을 돌렸다.

순간 구세프는 움찔했다. 타티아나의 눈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불타고 있었다.

“선생님의 레슨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데요.”

학생이 선생에게 할 말투로는 부적절했지만 구세프는 무례하다고 혼을 낼 생각도 들지 않았다.

타티아나가 또박또박 말했다.

“제 곡에 문제가 많다고 하셨죠. 저 역시 동의합니다. 하지만 선생님도 이해가 안 가고 잘 모르겠다고 넘어가 버리시면 제가 어떻게 납득해야 할까요?”

“납득이고 뭐고…….”

타티아나는 답잖게 삐딱한 태도로 물었다.

“저와 아직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지 않으신가요?”

“……하.”

구세프는 헛웃음을 토해 냈다.

이 꼬맹이가 중앙음악학교 선생을 상대로 대놓고 도발하고 있었다.

말로는 선생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제자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지만, 그 태도엔 음악가 대 음악가로 한번 붙어 보자는 자존심이 엇비쳤다.

구세프는 기가 막혔다. 또래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중앙음악학교 선생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연륜에서 상대가 되지 않을뿐더러 구세프는 피아니스트로서도 십수 년간 활동한 프로였다.

물론 음악가로서 쌓아 온 시간이 반드시 그 무게를 결정짓진 않는다. 나이가 어려도 재능에 따라 충분히 깊이 있는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구세프 역시 천재였고, 시간 또한 이 정도 격차가 벌어진다면 그 차이는 절대적이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굴하지 않고 구세프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요것 봐라?

구세프는 약간의 흥미를 느꼈다.

근 몇 년 만인 것 같았다. 이렇게 자존심 세고 당돌한 학생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구세프가 지도한 수많은 중앙음악학교의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이 얌전했고, 심지어 그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에르네스트조차 곡의 해석이나 지도에 있어선 구세프의 말에 반발하지 않고 따르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여리여리하게 생긴 타티아나는 어디 부숴 볼 테면 부숴 보라는 듯 머리를 디밀고 있지 않은가?

이미 미하일로부터 허락도 떨어졌고.

그럼 봐줄 필요는 없겠지?

“할 이야기? 많지.”

구세프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선생의 입장에서 지도하는 것이라면 지켜야 할 도리도 많고 참아야 할 것도 많기 때문에 귀찮아서 거부했을 뿐이다.

하지만, 음악가 대 음악가로 누구 하나 백기를 들 때까지 해 보겠다면 구세프는 피할 생각이 없었다.

다른 선생의 제자? 그 말 많은 베르체노프 가문의 영애? 심지어 딸보다 어린 여자애? 그따위 것들은 모조리 다 상관없었다.

구세프 역시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라면 하늘을 찌르는 러시아인이었고, 러시아인은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따라와라, 타티아나.”

“예.”

그렇게 구세프와 타티아나는 미하일의 레슨실을 빠져나갔다.

미하일은 스스로 결정해서 타티아나를 보냈으면서도 조금 걱정스레 닫히는 문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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