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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47화 (47/1,277)

##  47화

구세프는 줄담배를 피우며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슬슬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하교할 시간이었다.

중앙음악학교의 거의 모든 재학생들은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교외 기숙사 방향으로 하교하고 있었다. 구세프는 그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빛바랜 금발의 소녀가 학교 밖으로 나왔다. 구세프는 조용히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소녀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차량들이 세워진 곳으로 향했다.

거기엔 검은색 벤츠가 한 대 있었고 정장을 입은 남자 세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구세프는 저 남자들이 베르체노프가의 경호원이고, 그중 둘은 교내 경비팀과 함께 연계해서 치안 유지에 일조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베르체노프가에선 거기에 교내 보안시스템을 지원하기까지 했다.

침입자를 찾아내는 CCTV와 보안회사와 직통으로 연결된 회선, 총화기 등 그 종류도 다양했다.

중앙음악학교의 경비 수준은 기존보다 몇 배로 높아졌다.

돈이 넘치면 뭘 못하겠냐마는, 베르체노프가에서 타티아나를 얼마나 중요하게 보호하는지 굳이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전화가 올 수도 있겠는데.”

구세프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런 학생을 3시간이나 들들 볶았으니 혹시 모를 일이었다.

타티아나는 가문의 힘을 빌리는 것을 굉장히 꺼리는 듯했지만, 나갈 때 보니 약간 비틀거리는 것 같았다.

귀가해서도 문제가 생긴다면 분명 베르체노프에서 책임을 물어 올 것이다.

타티아나를 태우고 학교를 빠져나가는 검은색 벤츠를 보며 구세프는 마지막으로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고,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런 것을 신경 쓴다면 선생 노릇 진즉에 때려치워야 했다.

구세프는 철저하게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의 입장에서 타티아나를 대했고, 타티아나 역시 그렇게 받아들였다.

이 사이엔 그 어떤 외부적 요인도 개입되어선 안 되는 것이었다. 구세프는 그 점에 있어선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때, 레슨실 문이 열렸다.

“구세프.”

“올 때가 되었는데 왜 안 오나 했지.”

미하일이 안경을 고쳐 쓰고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표정엔 불만이 서려 있었다.

“내 입으로 부탁하긴 했지만, 너무하는 것 아닌가?”

“왜. 그 녀석, 울던가?”

구세프는 짐짓 킬킬거리며 말했다. 타티아나는 중간에 감정이 복받쳤는지 조금 울먹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힘들다고 징징거리진 않았다.

자존심으로 버텼지만 자기 선생에게 가선 울어 버렸을지도 모르지.

미하일은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듯 역정을 냈다.

“자네 정말 애처럼 뭐 하는 짓인가? 3시간 동안 휴식도 한 번 없이 괴롭히다니, 선생이 되어서 말이 되는 짓인가?”

구세프와의 레슨이 끝나고 그 내용을 보고하기 위해 타티아나는 미하일부터 찾아갔다.

그리고 이번 위클리 리사이틀엔 슈만 소나타 3번을 그대로 하기로 했고, 당분간은 기본기를 다지는 데에만 충실하기로 했다고 이야기를 마쳤다.

그 내용은 이상할 게 없었지만 그걸 말하는 얼굴이 너무 창백하고 힘겨워 보여서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3시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레퍼토리를 모두 끄집어내서 보이고 레슨받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장 쓰러지진 않을까 싶어 일단 레슨실에 잠시 앉혀 놓았다가 이제 막 집에 돌려보낸 참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미하일은 구세프의 레슨실로 쳐들어왔다.

아무리 그래도 적당히 선을 지켜 줄 줄 알았다.

미하일은 구세프가 이렇게 무식하게 타티아나를 다룰 줄 알았다면 그렇게 웃으며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후회와 분노로 얼룩진 얼굴을 보며 구세프가 비웃었다.

“물러 터졌군, 물러 터졌어. 미하일. 내 하나 묻지.”

구세프가 자신 있다는 듯 말했다.

“그 녀석이 내 지도에 대해 한 마디라도 불평하던가?”

“…….”

미하일은 곧장 답하지 못했다.

체력적으로, 심리적으로 완전히 탈진해 버렸을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타티아나는 단 한 마디도 구세프에 대해 악담을 늘어놓지 않았다.

타티아나 본인이 불만이 없다면, 미하일이 뭐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래도 적당히 좀 하지 그랬나. 아직 어린애일세.”

도의적인 추궁. 하지만 힘이 없다.

구세프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무르게 대하니 속에서 점차 썩어 들어가는 게 아닌가? 어리니까 더더욱, 때론 강하게 밖에서 깨 버릴 때도 있어야지.”

“자넨 그렇게 생각하는진 모르겠지만 난 아니었네.”

“아니라고? 그래, 도대체 왜 그렇게 가르치고 있나?”

구세프가 보기에 미하일의 교육방식은 거의 방임주의나 다름없었다. 타티아나가 하고 싶어 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가면서 지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하일의 실력이 부족해서 그렇진 않을 것이다. 애초에 실력이 없다면 여기서 십수 년간 선생을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구세프의 질문에 미하일은 조금 생각을 정리하고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난…… 타티아나를 일단 무대에 올리면 달라질 거라고 보네.”

“무슨 말인가.”

“저 애가 무대에 올라가서 연주하는 걸 자넨 못 봤지? 난 봤네.”

베르체노프가의 저택에서 피아노를 치던 타티아나.

테크닉적인 연습이 전혀 안 되어 있어서 손가락엔 힘이 하나도 없고, 제대로 건반을 누르는 데에도 온 힘을 다해야 하는 주제에, 타티아나는 단 한 사람의 청중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연주자의 업에 임했다.

천부적인 리듬감도, 초견 능력도 모두 천재적이었지만, 그 무엇보다 타티아나가 연주에 임하는 태도를 보고 미하일은 그녀를 학교로 데려오기로 마음먹었다.

“기본적으로 그 애는 연주자일세. 일단 무대에 세우면, 한두 명의 청중이 아니라 수백이 기다리는 무대에 일단 세워 놓으면 그 애 스스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네.”

미하일은 그래서 빠르게 타티아나의 스케줄을 앞당겼다.

무대에 빨리 세우면 세울수록 그녀가 마음을 다잡고 어떤 음악을 무대에서 보여야 할지 판단할 시간도 빨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였지.”

미하일은 타티아나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를 믿고 있었다.

미하일의 말을 듣고 구세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틀린 방법은 아닐지도 모른다.

미하일의 방식대로도 타티아나는 약간의 방황 끝에 바른 길을 찾아 나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믿어 주는 것도 선생이 할 일이겠지…….”

하지만 구세프는 미하일과는 다른 선생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상당히 위태로워 보였네. 자네 말마따나 그냥 무대에 올리면 스스로 일어설지도 모르지만…… 글쎄, 난 잘 모르겠군. 그게 더 잔인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나?”

“위태로워 보이다니?”

“흠, 뭐라 설명은 못하겠군.”

순간적으로 타티아나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던 감정들, 그녀의 입에서 뱉어진 말들.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 수 있는 주제에 음악이 없다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하던 모습에서 구세프는 섬뜩함마저 느꼈다.

그 처절함에 압도되었다.

이미 한 번 절망의 구렁텅이에 떨어졌다가 간신히 기어 올라온 듯한 모습이었다.

구세프는 그대로 타티아나를 내버려 두면 분명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거기에서 더 독하게 그녀를 꺾어 놓지 못하고 져 줬던 것이다.

“일단 시간을 좀 벌어 놨네. 3년. 조건을 걸었지.”

최소한 그사이에 큰 사고가 있진 않겠지.

입 밖으로 사고라는 단어를 내는 것조차 불길해서, 구세프는 뒷말을 삼켰다.

미하일이 물었다.

“무슨 조건 말인가?”

“아까 들었던 대로네. 3년간만 기본에 충실하게 잘 지낸다면 녀석이 하고 싶은 대로 도와주기로 했네.”

“그 묘한 해석 말인가?”

“그래. 말하는 걸 보니 그게 뭔지 모르는 것 같군? 왜 내버려 뒀나?”

“아직 미숙하고 묘하긴 하지만…… 완성할 수만 있다면 보통 여성 피아니스트와는 완전 격을 달리할 수 있을 것이라 봤네. 타티아나만의 특색이 될 수도 있겠지.”

그걸 어디서 배워 왔는지는 전혀 모르는 투였다. 구세프는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현재 사사하는 지도 선생에게도 이전 선생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

많은 이야기가 오가긴 했지만 아직도 타티아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다. 특히 미하일 이전의 선생에 대한 것은 정말 미스테리였다.

구세프는 타티아나로부터 찾아낸 역린을 살짝 건드려 봤을 때, 그녀가 순간적으로 보인 광기와 공격성을 다시금 떠올렸다.

3시간 동안 고집을 부리긴 했지만 그래도 최소한 학생으로서 선생에게 예의는 잊지 않았던 모습이 한순간 깨어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경멸로 차디차게 얼어붙은 눈으로 첨예하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아마 조금 더 강하게 나갔다면 타티아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세프의 입을 다물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어쨌든…… 3년 동안은 얌전하겠지.”

“자신감 넘치는군? 구세프.”

구세프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속으로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타티아나는 최선을 다해 약속을 이행할 것이다.

“선생에 대한 신의와 책임감은 조금 있는 편인 것 같으니 지금보단 나을걸세.”

구세프는 앞으로 타티아나가 자신에게 꽤나 매달리리라 확신했다.

물론 좋아서 그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디까지나 타티아나 본인의 목적을 위한 것이리라.

다른 건 그 무엇도, 심지어 이 중앙음악학교의 학생인 것조차 이전 선생이 가르친 음악을 완성하기 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다.

굉장히 집착이 강하고 고집이 센 아이였으니 아마 자존심 조금 죽이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겠지.

“피곤해지겠어.”

“지금보다 나아진다면 왜 피곤해지는가?”

“그런 게 있네.”

구세프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는,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 * *

“타티아나.”

“예?”

“너 블리니 좋아해?”

“?”

블리니는 팬케이크의 일종으로 전병같이 만든 베이스에 사워크림인 스메타나와 연어 알을 싼 음식이었다. 생각보다 담백하고 꽤 맛있었다.

“괜찮네요.”

“음…… 얘가 이렇게 행복하게 뭘 먹는 애가 아닌데.”

아나스타샤가 조금 미심쩍다는 눈으로 날 이리저리 보았다.

“생각해 보니까 오전 내내 이상했는데…… 너 묘하게 좀 밝아진 것 같아.”

“……?”

아나스타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난 어제 거의 초주검 상태로 집에 돌아가선 거의 기절하듯 뻗었던 사람이다.

얼마나 피로했는지 거의 처음으로 8시간 넘게 자 본 것 같다. 거의 죽은 사람처럼 그렇게 꿈도 안 꾸고 잤다.

구세프 선생님이 정말로 날 혹독하게 다뤘다.

거기에다가 3시간 만에 답이라고 내놓은 것이 미하일 선생님이 추천했던 슈만 소나타 3번 그대로인 데다가, 내가 원하는 곡을 꽁꽁 숨기곤 그걸 미끼로 앞으로 3년간은 악보대로만 연주하라고 약속까지 강요했다.

뭔가 기약 없을 것 같던 일에 날짜가 생기고, 삶에 목표가 생긴 것은 나쁜 기분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말도 안 된다.

3년? 그때까지 못 기다린다. 최대한 빨리 무슨 곡을 그렇게 숨기고 있는지 알아내고 말 테다.

“밝아지긴요. 그럴 리가요.”

“진짜야. 너 진짜 조금…… 화장품 바꿨니?”

“아뇨……?”

“아, 너 베이스 말곤 뭐 쓰는 것도 없다고 그랬지. 어쨌든 평소에 그렇게 울상으로 다니던 타티아나는 어디로 간 거야?”

“……아나스타샤.”

아무리 그래도 그걸 본인 앞에서 말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

물론 내가 근래 많이 우울해 보였다는 건 안다. 아나스타샤가 그래서 물심양면으로 날 케어해 주기도 했고.

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내가 밝아졌다면 이젠 좋아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날 더욱 우울하게 만들려는 것 같지?

“……저 먼저 가요.”

“아, 잠깐만. 나 아직 덜 먹었는데!”

애타게 부르는 아나스타샤를 뒤로하고 나 먼저 식당 밖으로 빠져나왔다.

밝아졌다는 게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어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되새기며 복도로 나오는데, 벽에 기대어 있던 에르네스트와 눈이 마주쳤다.

우린 연습실에서 있었던 대결 이후 한 마디도 제대로 나누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에르네스트.”

내가 살며시 이름을 부르자 에르네스트가 깜짝 놀라 했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음…….”

왜 불렀더라?

사실 별생각 없었다.

“그냥요.”

“……뭐?”

“진짜 고생 많았겠어요.”

갑자기 그런 말이 해 주고 싶었다. 알다시피 에르네스트는 구세프 선생님의 제자였다.

어제 하루 시달리고 났더니…… 갑자기 에르네스트의 얼굴을 보자마자 친밀감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렇다고 대놓고 네 선생님 진짜 인간성 더럽더라, 라고 할 수는 없기에 그냥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하하하…… 몰라도 돼요.”

“실없긴.”

에르네스트는 내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걸 보는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넘기고는 화제를 살짝 돌렸다.

“어쨌든…… 너 이번 주 위클리지?”

음? 그가 내 스케줄까지 보고 있을 줄은 또 몰랐다.

조금 놀라워하자 에르네스트가 인상을 구겼다.

“내가 네 위클리도 모를 줄 알았어?”

“아뇨, 뭐…….”

“어쨌든, 무슨 곡 올리…… 아니야. 들어 보면 알겠지.”

이전 같았으면 더 집요하게 캐물었을 에르네스트는 오늘은 무슨 일인지 쿨하게 고개를 저었다.

“기대하고 있겠어.”

그러더니 피식 웃으며 마지막으로 말하고는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

내게 한 번 당하기도 했으니 작은 연습실이 아닌 무대에서는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겠지.

솔직히 나도 궁금했다.

무대에서 내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그건 올라가 봐야 아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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