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시계를 보니 슬슬 연습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었다.
“음…….”
손목을 털며 곡을 다시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구세프 선생님과의 레슨 이후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날 죽이고, 이젠 연주자의 부분조차 타티아나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그렇게 되어 버렸다. 구세프 선생님이 내건 조건과 약속이 나로 하여금 타협안에 날인하도록 강요했다. 다 넘겨주었다.
내가 지키고 있던 마지막 부분이었는데, 그냥 구세프 선생님으로부터 곡을 받기 전까진 그렇게 해 보기로 했다.
이제 당장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대에 오른다면 타티아나로서 가능한 실력을 보이면 그만이었다.
“으음…….”
그 준비로 요 며칠은 바빴다.
우선, 나는 슈만 소나타 3번을 치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습관 등을 모조리 거둬 냈다.
힘든 일이었지만, 의식적으로 몸을 컨트롤하는 것이 곧 직업인 연주자에게 습관을 고쳐 나가는 일 정도는 가뿐히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이 몸은 내 것이 아니었고, 내가 맡게 된 지 겨우 반년이 지났을 뿐이다. 생각보다 지우기 쉬웠다.
그리고 하나하나 복습해서 이끌어 냈던 해석도 지웠다. 페달과 악상을 빼 놓고 인템포부터 시작해서 곡을 다시 처음부터 쌓아 올렸다.
악보 자체는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단순히 내 음악을 숨기고, 연막을 친 음악만 내놓는 것에서 그쳐 봐야 구세프 선생님에게 금방 들켜 버릴 것이 뻔했기에 난 철저하게 나 자신을 죽이고, 정말 타티아나의 음악을 다시 쌓아 올렸다.
이 몸이 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 갔다.
당장은 인정해야만 했다.
구세프 선생님의 지도대로 지금 곧장 무대에 올릴 곡을 만드는 데엔 이렇게 기본적인 부분부터 쌓아 올리는 편이 완성도가 훨씬 높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악보를 보고 몸이 따라가는 대로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몸과 정신이 충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음악인 것이다.
열네 살짜리의 실력인 것이다.
“하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연습에 들어갔다. 학교에 가면 리허설 시간은 딱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연습을 아무리 더 해 봐야 내 음악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 연습할 생각도 들지 않았겠지만, 지금 난 오늘 있을 위클리 리사이틀을 평생의 첫 무대로 치러야 하는 학생이었다.
최선을 다해 연습에 임했다.
* * *
연습을 마치고 내 방으로 돌아오니 나제즈다와 마가리타 선생님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이 드레스입니다, 나제즈다. 어떤가요?”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마가리타 선생님이 물빛 드레스를 양손에 들고 펼쳐 보였다. 나제즈다는 그야말로 눈이 반짝반짝해져선 감탄사를 연발했다.
“…….”
이 저택에 날 도와줄 사람은 많았지만, 여자로서의 날 도와줄 사람은 별로 없었다.
어머니는 없었고 아버지와 예고르는 중년 아저씨였고 루슬란 오빠는 여전히 날 피해 다녔다.
때문에 그간 내가 여자로서 살고, 스스로를 가꿀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은 나제즈다와 마가리타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오늘같이 연주회에 입고 나갈 드레스를 고르는 일은 두 분의 낙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구조는 조금 이상했다. 저걸 입어야 하는 건 나인데 왜 내 의사는 아무도 안 물어봐?
“아가씨! 어서 입어 보세요. 어서요.”
“그리고 규정에 따르면 보석류는 안 된다고 들어서 제가 이 리본을…….”
“세상에!”
나제즈다는 리본 하나를 보고도 너무나 기뻐했다.
난 정말로 좋아해 주는 나제즈다를 보면서 산통을 깨는 소리를 할 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렇게 두 명에게 옷이 갈아입혀지고 화장하는 데에 얼마나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정신줄을 놓고 하라는 대로 손을 들었다가,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하면서 휘둘려지다 보니 어느새 완성이 되어 있었다.
“다 되셨습니다. 어떠세요?”
나제즈다의 말에 그제야 눈을 제대로 뜨고 거울을 볼 수 있었다.
색이 옅은 금발과 흰 피부 때문에 평소의 난 거의 생기가 없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은 나제즈다가 얼마나 힘을 썼는지, 그런 힘없는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거울 너머엔 활기 넘치는 열네 살 소녀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멀거니 중얼거렸다.
“……화장의 힘은 정말 대단하네요.”
“아가씨는 본판이 워낙에 좋으셔서 화장으로 가리기보다는 본 얼굴을 드러내는 데에 신경 썼답니다.”
“드러낸다고요?
“그럼요. 화장은 덮기만 하는 게 아니랍니다.”
“…….”
맨얼굴에 무언가를 묻히고 바르는 게 화장인데 그게 덮는 게 아니라면 대체 뭐라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너무 행복하다는 듯한 웃음을 짓는 나제즈다를 보자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은 마가리타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드레스는 어때요?”
“…….”
장담하건대, 평생을 여자로 살았어도 이런 드레스를 입으면 어색할 것이다.
물빛 드레스는 어깨를 훤히 드러낸 것이 조금 부끄러웠다.
가뜩이나 난 말라서 팔을 드러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마가리타 선생님이나 나제즈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등 쪽도 조금 파여 있는 것 같고……. 허리에서부터 나풀거리는 얇은 망사는 어디서 시작돼서 어디서 끝나는지도 잘 모르겠다.
학교 연주회 드레스코드 규정은 분명히 있었고 이 역시 그걸 준수한 드레스이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 더 얌전한 것은 없었을까?
“……예쁘네요.”
“그렇죠?”
모르겠다. 이제 와서 나한테 무슨 힘이 있겠는가. 이미 포기하는 것엔 익숙해졌다.
그대로 입고 나제즈다의 손에 이끌려 복도로 나왔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예쁘다며 아우성이었다. 와, 이건 진짜 좀 창피한데.
나제즈다가 날 창피하게 만들기 위해 방 밖으로 끌고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대로 우리는 아버지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버지.”
“…….”
집무실에서 전화를 받고 있던 아버지가 잠깐 이따가 오라는 듯 손을 내저으려다가, 순간 입을 벌린 상태로 굳어 버렸다.
전화 너머로 상대가 무언가 시끄럽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있었다.
난…… 어마어마하게 어색했다.
“어떻습니까? 유리 님.”
“…….”
“오늘 연주회에 나가실 타티아나 아가씨, 정말 예쁘죠?”
“…….”
아무 말도 못 하는 아버지를 보며 나제즈다가 내게 주문했다.
“아가씨, 한 바퀴만 돌아보시겠어요?
난 그 자리에서 빙그르 한 바퀴 돌았고, 다시 제자리에 서자 아버지는 전화기를 떨어뜨린 상태였다.
“아버지……?”
그 근엄하던 아버지가 이렇게 당황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조금 재미있기도 했지만 곤란하기도 했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 스르르 들어왔다. 놀라서 보니 집사장 예고르였다.
“유리 님.”
예고르는 무언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아버지에게 건네주었다. 아버지는 그게 뭔지 모르겠다는 듯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뭔가 이게, 예고르.”
“DSLR입니다. 실내 인물 피사체 세팅은 되어 있으니 촬영만 하시면 되겠습니다.”
“……뭘?”
“뭐겠습니까?”
예고르는 옆으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아버지는 다시 날 보고, 카메라를 내려다보고, 예고르를 다시 보았다.
“언제 준비했나?”
“언제라도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예고르는 아버지도 모르는 사이 이것저것 많은 준비를 한 듯했다.
그 일 처리엔 항상 탄복할 지경이지만 이번엔 아버지도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카메라를 잡더니, 아버지가 말했다.
“타티아나.”
“……예.”
“사진을 한 장 찍어도 되겠느냐.”
“여러 장 찍으셔도 괜찮아요.”
달리 선심 쓰는 건 아니다. 어차피 다 포기한 마당에 사진 몇 장 찍힌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아버지는 아직도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지만 난 정말 상관없었다.
그렇게 몇 장 사진을 찍고는, 이번엔 예고르가 카메라를 잡고 나와 아버지를 찍어 주었다.
난 평소 사진이라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찍히는 것은 더더욱 질색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어쩐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예고르가 카메라를 내리며 말했다.
“다 되었습니다.”
“…….”
아버지는 여전히 어색해하셨다.
원래 아버지는 타티아나와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았다.
내가 근래 많이 바뀐 모습을 보여 주어서 꽤 믿어 주시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시각적으로 확 달라진 모습이 드러나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시는 듯했다.
예고르만이 침착했다.
“그런데, 아가씨.”
“예.”
“그 드레스, 너무 살갗을 많이 드러내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만, 연주회를 하는 여자 연주자라면 모두가 이렇게 입는데 나만 유별나게 굴 순 없지 않은가?
내가 괜찮다고 하려는 찰나였다.
“그래, 그 드레스는 좀 아닌 것 같구나.”
“……예?”
아버지가 갑자기 반대파로 돌아섰다.
거의 감격하시는 것처럼 사진까지 다 찍어 놓고선 갑자기 왜 이러시지?
“아버지?”
“무, 물론 안 어울린다는 건 아니다만, 그, 등도 너무 많이 보이는 것 같고…….”
“원래 이런 옷인데요…….”
“아무튼 안 되겠다. 다른 드레스로 하거라.”
“…….”
왠지 알 것 같긴 하다.
“말씀대로 할게요.”
난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평소의 진지한 모습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되도록 얌전한 것이 좋겠구나.”
“알겠어요.”
“색도 그렇게…… 화려하지 않고 수수하게 말이다.”
“그렇게 할게요.”
“그래, 그래야지. 학생이지 않느냐?”
“그렇죠.”
아버지로부터 다시 코디를 받아서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나제즈다는 별말 없었지만 내심 속상한 듯했다.
“나제즈다.”
“예, 아가씨.”
“갈아입으러 갈까요.”
“……정말.”
나제즈다가 처음으로 울분을 표출했다.
“유리 님도 너무 야속하신 것 아닌가요. 아무리 학생으로서 신분에 충실한 것도 좋지만, 그래도 첫 무대인데…… 첫 무대인데!”
난 나제즈다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아버지를 야속하다고 표현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깜짝 놀랐다.
“틀린 말씀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너무하시잖아요.”
“괜찮아요, 나제즈다. 그리고…….”
전 나제즈다를 조금 더 실망시킬지도 몰라요.
* * *
무대 뒤에 있는 대기실엔 오늘 위클리에 나가는 학생들이 모여서 저마다 준비 중이었다.
몇몇은 악보를 다시 보기도 하고, 서로 대화를 하며 긴장을 풀거나, 전화를 하기도 했다. 십자가를 쥐고 기도를 하고 있는 학생도 있었다.
그 모두가 화려했다. 남학생들은 거의 모두가 턱시도를 입고 있었고 포마드로 머리에 한껏 힘을 주었다.
여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모두 사람이 아니라 무슨 나비 같았다.
난 고개를 내려 다리 부근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입은 검은색 드레스가 보였다.
처음부터 난 이게 입고 싶었다.
나제즈다와 마가리타 선생님은 필사적으로 반대했지만 난 약간 고집을 부려서 다른 드레스들을 모조리 쳐 내고 이 검은색 드레스를 입었다.
딱 오늘 하루만이다.
“…….”
고개를 들었다.
대기실 안에 설치된 텔레비전으로 무대 상황이 보이고 있었다. 방금 나간 남학생이 이제 막 연주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수 소리가 무대를 넘어 이곳 대기실까지 들렸다.
개인 연주회가 아니기 때문에 앙코르는 없다.
잠시 후, 대기실 문이 열리고 그 남학생이 들어왔다. 표정이 울상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연주를 망친 모양이었다.
모두가 잘할 수만은 없었다. 항상 무대엔 알 수 없는 걸림돌들이 산개해 있었고 연주자는 그 모든 것을 헤치고 싸우며 자신이 준비한 것들을 내보내야 했다.
그 후로도 몇 명이 대기실과 무대를 오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시 순번을 확인하진 않았지만, 어렴풋하게 내 순서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 한 여학생이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음,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무대 위로 올라가세요.”
대기실 문 옆에 서 있던 교직원이 날 불렀다.
“예.”
난 대답하고 그쪽으로 향했다.
문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무대와의 문 하나를 앞에 두고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미 몇 번이고 겪어 본 상황이지만 지금은 완전히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이 학교에 들어와서 남들 앞에서 피아노를 친 것은 많아 봐야 세 명 정도를 앞에 두고서였다.
오늘은 2백 명이 넘었다.
잘할 수 있을까? 엉망으로 망쳐 버리진 않을까.
내가 이 곡을 제대로 준비한 것은 기껏 해 봐야 사흘 정도였다.
그런데도 무대에 서도 되는 것일까?
더 이상 무언가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다.
난 마지막으로 잡념을 떨쳐 버리고, 대기실 문을 열었다.
순간 내 쪽으로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에 눈이 부셨다.
바로 앞에는 검은색 광택이 흐르는 그랜드 피아노가 날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관성적으로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주 익숙한, 작은 웅성거림이 귓가에 메아리친다.
문득 고개를 돌려 객석을 바라보았다. 어두컴컴한 가운데에 실루엣들만이 가득했다.
기대감, 신기함, 열기, 지루함, 응원, 호기심, 놀라움 등등 2백 명이 발산하는 다양한 감정들이 무대 위로 쏟아졌다.
난 조금도 긴장하는 것 없이 그것들을 마치 공기처럼 받아들였다.
그렇게 두서없이 내게 투사되던 것들이, 내가 피아노 앞에 앉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바로 지금부터, 내가 저들 모두의 연주자였다.
“아…….”
잃어버리고, 체념하고, 소진되고, 포기하고, 물러서고, 버리고, 내려놓은 끝에, 돌아온 것이다.
무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