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중앙음악학교 7학년 안나 니콜라예브나 코롤레바는 에르네스트의 열렬한 팬이었다.
에르네스트는 말 그대로 격이 달랐다.
안나는 앞으로 몇 년만 더 지나면 에르네스트가 정말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피아니스트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에르네스트에겐 그만큼 팬도 많고 따르는 사람들도 많다.
에르네스트는 그 모두를 거의 평등하게 대했고, 거기에 불만이 있는 학생은 없었다.
안나 역시 자신이 에르네스트에게 있어서 무언가 특별한 존재가 되길 바라진 않았다.
그런 안나에게 근래 아주 불쾌한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흥…….”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는 이름의 8학년 편입생은 에르네스트와 얽혀 단번에 교내에 도는 소문의 핵심에 자리 잡았다.
소문은 가지각색이어서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순 없었고 일주일도 채 가지 않아 식어 버렸지만 그래도 괘씸했다.
안나에게 있어 타티아나는 편입생 주제에 에르네스트에게 엄청난 민폐를 끼친 여자일 뿐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친구 이리나가 속삭였다.
“다음 순서야, 안나.”
“알고 있어.”
안나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한번 보자고.”
얼굴은 이미 봤다. 조금 병약해 보이긴 하지만 여자가 봐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예쁘고, 또 집안도 무슨 재벌이라던가…… 어쨌든 곱게 자란 아가씨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여기는 중앙음악학교다.
아무리 예쁘고, 집안이 좋아도 관계없이, 음악가로서 실력이 떨어진다면 얼마든지 손가락질하고 깎아내릴 수 있는 학교였다.
안나는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무대를 바라보았다.
편입생 선배. 어디 그 잘난 실력 좀 볼까요.
물론 제가 준비한 건 비웃음뿐이지만요.
매너에 어긋나는 큰 야유까지도 필요 없었다.
너무 드러내고 야유한다면 되레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다. 그녀가 동정심을 사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저 연주자인 타티아나 본인만 눈치챌 정도의 작은 제스처면 충분했다.
게다가 여기에 안나와 비슷한 생각을 지닌 학생들이 못해도 수십 명은 넘었다.
이번 위클리 리사이틀에 챔버 홀이 아닌 더 큰 콘서트홀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작은 제스처들이 모인다면, 연주자 하나를 무너뜨리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타티아나는 모르고 있겠지만, 연주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녀는 편견과 악의와 맞서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잠시 후,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아무리 예쁜 드레스를 입고 나와도 못마땅한 시선으로 평가하려고 마음먹고 있던 안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야, 저거? 누구 죽었어?’
순간적으로 드는 이미지는 상복이었다. 불길한 죽음.
안나는 연주회에 저렇게 칙칙한 옷을 입고 등장한 사람은 난생처음 보았다.
물론 색만 칠흑처럼 검을 뿐이지, 드레스 자체는 굉장히 우아했다.
타티아나의 몸을 감싸는 드레스는 그 이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어깨선으로부터 떨어지는 검고 얇은 숄은 스포트라이트의 빛을 반사하며 신비하게 흔들렸다.
다른 그 누가 입어도 저렇게 소화하긴 힘들 것 같았다.
그때, 타티아나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객석을 올려다보았다.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면서 본, 그 희미한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당하게 턱을 당기고, 목을 치켜세운 채 타티아나는 객석을 우에서 좌로 슥 훑었다.
안나는 소름이 끼쳤다.
보통 무대에 올라간 학생들은 저렇게까지 당당하기 힘들었다.
객석의 모두는 한 명 한 명이 다 연주자를 평가하는 심사위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객석을 쳐다보기는커녕 무슨 소리가 들리든 간에 아예 신경도 쓰지 않고, 온전히 피아노에만 집중한 상태로 자신이 연습해 온 것들을 드러내는 데에 힘을 써야 실수를 하지 않는 법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너무 자연스럽게 객석을 일견했다.
“……뭐지.”
안나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뭔데 저렇게 자신만만하지? 조금은 긴장해야 하는 거잖아? 수백이나 되는 학생들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건가? 베르체노바라는 재벌 가문의 딸이라서?
그렇게 조금 합리적이지 않은 편견들을 주워섬기며 약간 가증스럽다는 듯 타티아나를 보던 안나는, 타티아나가 피아노 앞에 앉아서 허리를 펴고, 차분하게 건반을 응시하는 모습을 보고는 숨을 멈췄다.
타티아나가 당당한 것은 안나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안나가 잘 모르는 스케르초가 타티아나의 손에서 연주되기 시작했다.
언뜻 듣기엔 베토벤이 떠올랐지만 절대 고전의 화성과 리듬은 아니었다.
왼손이 스텝을 밟고, 오른손이 춤을 추며 다가오는가 하더니, 곧 역할을 바꾸어 빠른 스텝으로 멀어져 간다.
그리고 다음엔 동시에 다가와서는 순식간에 얼굴 앞까지 다다랐다가, 깜짝 놀라기도 전에 다시 빙글빙글 돌며 떠나갔다.
번갈아 계속되는 무궁동은 여러 곡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형식이었지만 빠른 선율을 바닥에 깔고 구조를 만드는 것이 아닌, 이렇게 변화무쌍한 곡은 처음이었다.
교차되는 선율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살랑거리기도, 울렁거리기도 하는 리듬이 순식간에 콘서트홀을 장악하고 지배했다.
살짝 멀미가 날 것 같기도 한 기분을 느끼며, 안나의 뇌리에 순간적으로 한 작곡가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슈만?’
안나는 눈을 크게 떴다. 슈만? 슈만이었다.
슈만은 해석이 까다롭기로 이름 높아서 학생들이 브람스 다음으로 공부하기 꺼려 하는 작곡가였다.
그런데 열네 살이 슈만을 친다고? 한 살밖에 안 많은데?
안나는 자신이 느낀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옆을 돌아보았으나, 이리나는 거의 넋이 나간 듯 연주에 빠져들어 있었다. 도저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슈만이 작곡한 피아노곡은 그리 많지 않다. 안나가 아는 몇몇 곡들 중에 이런 곡은 없었다.
그렇다면 들어 보지 않았던 소나타 세 곡 중 한 곡, 그중에서도 한 악장일 확률이 높은데…….
거의 직업병처럼 곡의 이름을 찾아내려 하던 안나는 곧 생각을 모두 접었다.
지금은 그저 듣는 데에만 집중해도 모자란 시간이었다.
타티아나는 어떤 표정도 보이지 않고 연주에 집중했다.
연주자들은 각자 습관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건반에 파묻힐 정도로 머리를 가까이 들이밀고 연주한다든지, 허밍을 한다든지, 감정을 실어야 하는 순간엔 눈을 감고 그것을 음미한다든지 연주자마다 정말 천차만별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정말 그 어떤 습관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별로 힘을 들이지도 않고 또렷하게 곡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곡에 따라 거의 기계적으로 손과 발을 움직였고 거기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뭉개지거나 불분명한 음은 단 하나도 없이 그 모두가 작곡가의 의도대로, 악보대로 타티아나의 손에서 건반으로 흘러들어 갔다.
안나는 이 곡의 악보를 본 적도 없지만 단 한 부분도 틀리지 않았으리라 확신했다.
“…….”
눈으로 보기엔 그리 화려해 보이지 않지만 듣기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귀가 가렵다.
가슴 깊은 곳 어딘가가 근질거리며 안달을 내기 시작했다.
순간, 검은 드레스가 검은 피아노와 이어진 것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하나인 것처럼, 검은색의 덩어리로 보였다. 그 덩어리에서 슈만의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와, 검은 피아노 사이에 이어진 새하얀 손이 아니었다면 정말 그냥 피아노 치는 기계라 생각해 버렸을 것이다.
로베르트 슈만이 이 스케르초를 연주하기 위해 만들어 낸 정밀한 기계.
“…….”
계속되는 주제에 중반부터는 조금 지루해질 만도 했건만, 안나는 가면 갈수록 더더욱 빨려들어 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휘청거리는 리듬에 처음은 멀미가 날 것 같았지만 이젠 심장 소리조차 그 리듬을 따라가는 듯했다.
안나는 슈만에게 중독되고 있었다.
목구멍이 아닌, 귓구멍에서부터 갈증이 났다. 아무리 귓속 깊숙이 음들을 쑤셔 넣어도 모자랐다. 마치 마약 중독자처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안나가 허리를 들썩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곡이 끝났다.
“…….”
타티아나는 우아하게 의자에서 일어나서, 객석을 향해 작게 인사하고는, 그대로 무대 뒤로 퇴장했다.
우레와 같은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홀을 메웠다. 안나는 힘이 빠져서 좌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비웃음? 어림도 없는 소리. 대체 누가 저 천재를 비웃을 수 있단 말인가? 타티아나는 홀로 단 한 곡으로 그들 모두를 찍어 눌렀다.
안나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곤 허겁지겁 이리나에게 물었다.
“이리나, 방금 그거 슈만이지, 슈만. 응?”
“……그런 것 같아.”
“무슨 곡이야? 대체 뭘 친 거야?”
“모르겠어…….”
이리나는 여전히 넋이 나간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분명 에르네스트에게 추문을 불러일으킬 만한 자격이 있는지 한번 보겠다고, 뻣뻣하게 이 자리에 앉았던 것 같은데, 이미 그런 생각은 저 멀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 * *
잘했는지 모르겠다.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오니 내 뒤 순번이던 아이가 창백해진 얼굴로 스쳐 지나갔다.
아까까진 없던 시선들이 힐끗거리는 게 느껴진다. 내 알 바 아니지만 조금 신경 쓰였다.
아까 앉아 있던 의자에 다시 가서 앉았다.
방금 무대를 떠올렸다.
나쁘진 않았다. 확실히 나쁘진 않았다.
악보대로 교과서적인 해석과 기교로, 말 그대로 슈만이 어떤 작곡가인지에 대해서만 집중해서 연주했다.
거기에 피아니스트로서 내가 쌓아 올렸던 목소리는 단 하나도 섞여 있지 않았다.
거의 내가 스스로 연주하는 게 아니라 제삼자의 눈으로 관조하는 기분이었다. 꽤 신기하긴 했지만, 약간 불쾌하기도 했다.
“…….”
불쾌함을 느껴선 안 된다. 난 그런 작은 감정들도 찍어 눌렀다.
그토록 고대했던 무대였고, 생각보다 무난하지 않았는가?
앞으로도 버텨 내야 했다. 얼마나 될진 모르겠지만 난 당분간 앞으로도 이런 무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내 곡을 되찾기 위한 약속이기도 했고, 이렇게 어떠한 특징도 보이지 않고 악보대로만 연주한다면 최소한 누구를 속이진 않을 수 있었다.
대기실 밖으로 나오자 아나스타샤가 날 맞아 주었다.
“잘 했어, 타티아나.”
아나스타샤는 날 보며 잘했다고 말해 주었다.
“고마워요.”
아나스타샤의 얼굴을 보니 갑갑했던 가슴 한구석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상냥하게 웃던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확 돌변했다. 난 찔끔했다.
“무…… 뭐가요?”
“쉬운 곡 하기로 했었잖아.”
아나스타샤와 리처드는 날 위해서 당장은 조금 쉬운 곡을 위클리에 올리라고 조언했었다.
그리고 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아나스타샤는 오늘이 되기까지 한 번도 내게 무슨 곡을 연주할 것이냐고 묻지 않았다. 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해요…… 아나스타샤.”
미하일 선생님과 구세프 선생님이 추천한 곡이니 내가 사과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아나스타샤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아나스타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보더니, 피식 웃었다.
“아니야, 잘했어.”
“……?”
“내 말대로 조금 쉬운 곡들을 쳤으면 애들이 널 조금 얕잡아 봤겠지. 난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아나스타샤가 무언가 떠올리는 듯 눈매를 찡그리더니 말했다.
“아예 이렇게 시원하게 박살 내 놓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내가 다 시원하더라.”
“무슨 말이에요, 그게?”
“넌 몰라도 돼. 그냥 모르고 있어 줘.”
난 그냥 위클리 리사이틀에 내 차례가 돌아왔기에 무대에 올랐을 뿐이다. 그 누구도 박살 내거나 할 생각이 없었다.
조금 어리둥절해하는데 아나스타샤는 신경 쓰지 말라며 깔깔거리고는 내 옷을 마구 들춰 보았다.
살면서 연주회에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오는 사람은 처음 봤다며 난리였다.
“이 숄까지 감싸고 있어서 그런가. 아까 무대에선 진짜 머리만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니까.”
“그만해요! 아나스타샤!”
“우와, 꽁꽁 잘 싸매기도 했네. 난 여기까지 내려오는 거 입었다가 경고 먹었었는데.”
아나스타샤는 여기까지라고 말하며 거의 배꼽 부근을 가리켰다. 뭐야? 무슨 소리야 저게?
한동안 그렇게 아나스타샤와 놀고 있을 때였다.
“타티아나.”
구세프 선생님이 날 불렀다. 그 옆엔 에르네스트도 대동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어딘가 조금 김빠진 표정이었다.
구세프 선생님이 크흠, 하고 목을 고르더니 말했다.
“잘했다. 곡만 줬을 뿐이지 이렇다 할 레슨은 없었던 걸로 아는데, 멀쩡한 해석도 할 줄 아는군.”
“……감사합니다.”
난 감정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앞으로도 난 구세프 선생님에게 거스를 수 없었다. 적어도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한 곡은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한.
그렇게 얌전히 감사를 표하고 고개를 들었다. 구세프 선생님이 한 걸음 성큼 다가왔다.
“그런데 말이다.”
내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 날 직시했다.
“연주하면서 뭘 느꼈나?”
“……예?”
“오늘 무대에 서서 뭘 느꼈냔 말이다.”
뜬금없이 구세프 선생님은 그런 걸 물었다.
난 선생님이 뭘 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요.”
“아무것도?”
“예. 그걸 원하신 것 아닌가요……?”
구세프 선생님은 내가 원하는 음악을 굽히고 기본에 충실하길 주문했다. 난 그대로 했고. 거기서 뭘 느낄 여지 같은 건 없지 않은가?
물론 무대에 처음 올라갔을 땐 피가 끓는 듯한 희열을 느꼈다. 정말 피아노 한 대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연주를 진행하면 할수록 난 점점 동떨어진 느낌을 받았다.
내 피아노는 차갑고, 건조했다. 나중엔 거의 멀리서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타티아나.”
구세프 선생님은 그렇게 내 이름을 한숨 쉬듯 불렀다.
난 하라는 대로 했는데도 왜 이런 시선을 받아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미하일이 잘못 보지 않았을 수도…… 있겠군.”
“미하일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나요?”
“아무것도 아니다.”
그때 옆에 있던 에르네스트가 나섰다.
“선생님. 저도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에르네스트는 나와 동급생이지만 보통 동급생은 아니었다.
분위기만 잠깐 보더라도 구세프 선생님은 결코 에르네스트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래라.”
“타티아나.”
허락이 떨어지자 에르네스트가 날 불렀다. 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가 사심 하나 없이 사무적인 태도로 말했다.
“난 오늘 연주 별로였어. 예전의 그, 칼날 같던 음색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
놀라기도 잠깐, 에르네스트가 반항적으로 구세프 선생님을 돌아보았다. 말은 없었지만 비난하는 눈초리였다.
구세프 선생님은 황당하다는 듯 에르네스트를 보더니, 곧 마왕같이 인상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