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순식간에 흉흉한 분위기가 펼쳐졌다.
“무슨 소리냐, 에르네스트. 설명해 봐라.”
구세프 선생님은 잠시간 에르네스트를 노려보더니 낮게 윽박질렀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지도 선생인 구세프 선생님이 날 레슨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레슨으로 인해 내가 음색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날 정확히 봤다.
하지만 내 음색은 내가 내려놓은 것이니 아무 문제도 없었다. 에르네스트의 돌발행동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얼른 끼어들어 말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무리 구세프 선생님이 에르네스트를 아낀다지만, 이건 도를 넘어선 무례였다.
나 때문에 에르네스트가 피해를 입는 것은 원치 않았다.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힐긋 내게 눈짓했다. 잠시 보고 있어 달란 뜻이었다.
“원래 타티아나는 이렇게 재미없는 연주를 하지 않았습니다. 기본적인 연습은 연습실에서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무대 위에선 자신의 음악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그렇게 날 긍정했다.
모두 오해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순간 가슴 한편이 찢어질 듯 아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넌 할 수 없다고, 3년 뒤에나 곡을 던져 줄 테니 시도해 보라고 딱 잘라 말하는 구세프 선생님에게 3시간 내내 한 마디 반론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놓아 버린, 어쩌면 조금 지쳐 버렸을지도 모르는 나 대신, 에르네스트가 날 변호하고 있었다.
난 그게 너무 고맙고도…… 아파서, 입술을 깨물었다.
구세프 선생님이 눈썹을 세우며 말했다.
“재미? 그래, 이전까지 이 녀석이 하던 음악이 꽤 재미나게 들리긴 했겠지. 하지만 그게 엉망으로 뒤틀려 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느냐?”
너무나 단호하고, 냉정한 평가였다.
난 이런 박한 평가에도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꿋꿋하게 맞섰다.
“원래 타티아나는…… 뒤틀려 있을지언정, 치열한,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 돋게 하는 그런 연주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전혀 없었죠. 그저 슈만, 슈만이었습니다.”
“에르네스트. 네가 콩쿠르 심사위원이라면 오늘 연주에 몇 점을 주겠느냐?”
“거의 만점을 줘야겠죠. 하지만 이건 연주회이지 않습니까?”
심사위원들에게 안정적으로 점수를 따야 하는 콩쿠르와 연주회는 그 성격이 조금 다르긴 했다.
구세프 선생님이 지긋지긋하다는 듯 말했다.
“사람 숨통을 옥죄는 듯한…… 섬뜩한 음색이 그렇게 좋단 말이냐?”
숨통을 옥죈다는 표현이 너무나 날카롭게 느껴졌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초조해진 내가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시도하고, 노력하고, 아등바등하는 것이 구세프 선생님의 귀에는 그렇게 숨 막히게 들렸던 것이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가볍게 웃어넘겼다.
“저도 거기에 당해 본 적 있지만, 그것 또한 타티아나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에르네스트는 이쪽을 보지 않았다. 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내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자신이 없었다.
사실 그건 내 음악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난 에르네스트에게 제대로 된 내 음악을 들려 준 적이 없었다.
에르네스트가 들었던 것은 나 스스로도 불만족하고, 부정하는, 그저 내 발악의 잔재 같은 것에 불과했다. 뭐라고 한마디로 표현하기조차 어려웠다.
어떤 한 피아니스트의 고집과, 피아노를 배운 지 반년밖에 안 된 열네 살짜리의 소리와, 미련과 초조함 그 모든 것이 뒤섞인 이상한 소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것 또한 내 것이라고 해 주었다.
내 발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구세프 선생님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되쏘았다.
“그게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나? 그 어두운 소리가?”
“사람이 선하다고 음악까지 선해야 합니까?”
그 말에 구세프 선생님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에르네스트. 너, □□□□□ 네가 지금 사적인 감정이 전혀 없다고 장담할 수 있느냐?”
“객관적으로 보아도 그렇습니다.”
에르네스트는 정말 한 마디도 안 지고 대꾸했다.
“선생님도 타티아나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걸 느끼신 것 아닙니까……?”
“뭐라고?”
“그래서 오늘 무대에서 뭘 느꼈냐고 물어보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저 역시 타티아나가 오늘 만족했다고 했다면, 이렇게 끼어들지 않았을 겁니다.”
분명 구세프 선생님은 날 보자마자 칭찬을 조금 하더니, 내 눈을 보고는 다가와서 오늘 뭘 느꼈느냐고 물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상당히 다급한 태도였다.
대체 내게서 뭘 보신 걸까.
“…….”
에르네스트는 지금까지 너무 심하게 말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여기까지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난 큰 위안을 얻었다.
그리고 괜찮았다.
이미 난 마음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내려놓았기에, 그렇게 했기에 무대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 □□□□.”
구세프 선생님이 낮게 중얼거리더니, 다시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에르네스트.”
“예.”
“네 말도 옳다. 음악성이라는 것은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러다가 이 녀석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이냐?
“타티아나가 왜 잘못돼요……?”
순간 에르네스트의 태도가 와르르 허물어졌다. 당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나도 당황스러웠다. 내가 뭘 잘못된단 말인가?
구세프 선생님이 내 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항상 조금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얼굴이 지금은 약간 암울해 보였다.
“타티아나…… 날 믿어 달라 하고 싶다.”
갑자기 왜 약한 말씀이시지.
“믿고 있어요, 구세프 선생님. 전 선생님 말씀대로 할 거예요.”
난 순종적으로 대답했고 구세프 선생님은 조금 아련한 시선으로 날 보았다.
보다 더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추구하는 음악은…… 지금 네 성장을 방해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더 심각하게 악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저번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죠.”
못 알아듣진 않았다.
내 몸이 자연스레 가꾸어 나가려는 음악을 내 정신이 계속 뒤틀고 꺾어 놓고 있었다. 이래서야 문제가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조급하고 성급한 짓이다. 나도 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망각의 구름은 점점 내 기억을 덮어 가고 있었다.
내가 지금 구세프 선생님의 지도에 따르는 이유는 단 하나. 구세프 선생님이 내게서 찾아낸 한 곡, 그 곡의 이름을 알기 위해서였다.
약속은 3년이었지만 내가 더 충실하게 노력하면 할수록 시간은 단축될 것이다.
난 가능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서 단 하루라도 빨리 구세프 선생님으로부터 곡을 얻어 내야만 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들을 모두 잊어버리기 전에.
“그래서 시키신 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려는 것 같더군. 오늘 무대에서 네 각오와 약속은 똑똑히 보았다. 넌 선생을 믿을 줄 아는 학생이지.”
“……?”
“하지만 난 네가 왜 갑자기 무대에 서는 의미까지 잊어버렸는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 말하면서, 구세프 선생님은 답지 않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손가락을 들어 내 눈을 가리켰다.
“정말 무대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게냐? 아무것도?”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투였다.
물론 나라고 어떻게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겠는가? 나 하나를 향해 쏟아지는 수백 명의 열기를 모를 수 있겠는가?
난 연주자로서 다시 무대에 서길 지난 반년간 두려워하면서도 기다려 왔다. 준비해 왔다.
그토록 고대했던 무대였다.
“느꼈죠. 하지만…….”
하지만 내가 만들어 내는 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어쩔 수 없었다.
붕 뜬 것 같은 부유감, 멀어져만 가는 현실감. 갑자기 감정이 날아가 버린 느낌.
딱히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조금 무의미하다고 느꼈을 뿐이다.
이 모두가 결국 구세프 선생님과의 약속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으니, 내가 굳이 무언가 복잡하게 생각하고 느낄 필요는 없었다.
구세프 선생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난 내가 그리 좋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약간 조소를 머금었다.
선생님도 참. 그럼 제가 절 버리고 무대에 올라가선 박수 좀 받으면 만족하리라 생각하신 거예요?
그렇게 단순한 분이신 줄은 몰랐는데.
기왕 이렇게 된 것, 난 조금 더 나쁜 애가 되어 보기로 했다.
“선생님.”
“……그래.”
“지금, 제가 제 곡을 달라고 하면 주실 건가요?”
그 말에 힘없이 풀어져 있던 구세프 선생님의 눈이 갑자기 힘을 되찾았다.
“아니.”
“음…… 그렇죠.”
정말 딱 한 곡만 되찾으면 난 만족하고 더 이상 억지 부리지 않을 자신 있는데. 역시 어림도 없나.
하지만 난 짜증내지 않고 배시시 웃었다.
알았어요. 참아 볼게요.
어디까지나 음악가로서, 지도에 따라, 약속을 지켜서 제 곡을 찾고 싶어요. 저는 보잘것없는 망령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프로로 있고 싶으니까요.
그러니 그렇게 안타깝다는 듯한 눈으로 보지 말아 주세요. 화가 날 것 같으니까요.
가만히 날 쳐다보던 구세프 선생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말했다.
“마지막으로 묻자, 타티아나.”
“예.”
“내 레슨 없이 오늘 무대에 올랐다면, 미하일의 말대로 네가 고민하고 네가 하고 싶은 곡을 무대에서 보여 줬다면 어땠을 것 같나.”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어떠했을진 안 봐도 뻔했다.
내 발악을 에르네스트는 좋아했고, 구세프 선생님은 싫어했고, 난 만족하지 못했다.
“에르네스트는 흡족하고, 선생님은 실망하고, 저는 괴로워했겠죠.”
순간 에르네스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내 말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다. 하지만 난 그를 상처 입힐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난 환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전 에르네스트에게 굉장히 감사하고 있어요…… 정말 고마워요. 절 긍정해 줘서, 지지해 줘서.”
스스로도 회의감을 느끼고, 구세프 선생님의 질타엔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던 나를 재미있다고 해 줘서,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었던 것을 알아봐 줘서 고마워.
너처럼 자신감 있고 당당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난 이제 자신감은 하나도 없이 고집만 남았어.
“하지만 전 구세프 선생님의 지도에 따르기로 했어요. 덕분에 전 오늘 괴로울 일이 없었죠. 선생님 말이 맞아요. 이렇게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 나가다가…….”
잠시 숨을 골랐다가 구세프 선생님을 보며 말을 맺었다.
“제 곡을 되찾으면 되는 일이에요.”
다시 한 번 내 목적을 정확하게 전했다.
애초부터 그런 약속이었고, 이제는 거의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조용히 날 지켜보더니 툭 던졌다.
“지켜보겠다, 타티아나.”
“예.”
“그 눈 좀 어떻게 하고.”
“……예?”
갑자기 내 눈이 왜?
무슨 말씀이냐고 묻기도 전에, 구세프 선생님은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따라와라.”
그렇게 에르네스트와 구세프 선생님은 함께 떠났다. 난 에르네스트가 무례한 행동을 보인 것으로 과하게 혼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타티아나.”
그때까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아나스타샤가 말을 걸어왔다.
“무슨 말이야? 아무것도 못 느꼈다니. 구세프 선생님과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음…… 아나스타샤.”
난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다.
아나스타샤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구세프 선생님과 어떤 약속을 했는지, 내가 무엇을 내려놓고 무대에 올라갔는지.
“타티아나!”
누군가 확 눈앞에 날아들었다. 깜짝 놀라서 보니 발렌티나였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반짝이는 미소를 뽐내며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굉장했어, 타티아나! 네 피아노는 처음 들어 봤는데 기대 이상이었어. 너 아나스타샤보다 더 잘 치는 것 아니야?”
다른 뜻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찬사에 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사실 발렌티나는 아직도 나와 조금 서먹서먹했다.
하지만 백 마디 말로 친해지는 것 보다 훨씬 간단하고 빠른 방법이 있었고, 발렌티나 역시 그 방법에 익숙해 보였다.
아나스타샤가 눈을 흘기며 투덜거렸다.
“비교할 거면 자기랑 하지 나는 왜 끌어들여?”
“나보단 무조건 잘 치는 것 같으니까 그렇지. 세상에, 슈만이라니? 아나스타샤. 너 슈만 칠 줄 알아?”
“어린이의 정경 말고는 쳐 본 적이 없지.”
“나도 똑같아. 것 봐. 그럼 우리 셋 중에 타티아나가 제일 낫네?”
음악원 선배들도 슈만이라면 도망가기 바쁘다며 한참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던 발렌티나가 갑자기 내 쪽을 휙 돌아보며 말했다.
“타티아나, 나 네 무대를 보고 났더니 엄청나게 슈만이 치고 싶어졌어.”
“……그러신가요?”
“그간 슈만은 한 번도 안 쳐 봤는데…… 나도 할 수 있을까? 응?”
같은 동급생인 내 말에 무슨 힘이 있겠냐마는, 난 고개를 끄덕였다. 발렌티나의 실력은 상당히 괜찮았다.
소나타 2번이나 크라이슬러리아나 정도는 공부를 조금 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물론이죠, 발렌티나.”
“그 전에 말이야……. 나 오늘 네가 무대에 올렸던 그 곡 한 번만 더 쳐 주면 안 돼?”
“열 번이라도 들려 드릴게요.”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