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1화 (51/1,277)

##  51화

나는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단독 리사이틀도 아니고 학교에서 하는 위클리 리사이틀인데 약간 유난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오늘 저택에선 날 위한 저녁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다.

아마 오늘도 내 무대를 보러 오지 못한 아버지의 미안함이 담긴 파티일 것이다.

손님은 내 지도 선생님인 미하일 선생님 외에는 전혀 부르지 않고, 우리 가족과 고용인들만이 함께하는 작은 축하연이었다.

그래도 혹시 괜찮겠나 싶어 아버지에게 친구를 데리고 가고 싶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친구가 있느냐고 되물었다.

도저히 딸의 친구라는 개념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모습이었다.

한숨을 푹 쉬며 오늘 저녁에 증명해 드리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정말 전화 너머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기뻐하셨다.

초대받은 발렌티나는 조금 긴장해 있는 것같이 보였다.

사과와 이해가 오가고, 그간 나와 지내면서 조금 친해지긴 했지만, 베르체노프가 전체를 편하게 느끼긴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제발 그렇게 어디 잡혀온 듯한 얼굴 하지 말아 줘, 발렌티나. 미안해지잖아.

그런데 구원자가 나타났다.

“왕.”

정원 쪽에 있던 벨카가 날 보더니 이쪽으로 달려왔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내 앞까지 온 벨카가 우뚝 멈춰 서서 혀를 내밀자 발렌티나는 곧 만면에 화색을 띠며 벨카에게 다가갔다.

벨카는 처음 보는 두 명을 보면서도 짖거나 으르렁거리지 않고 순둥이처럼 굴었다.

마치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내 친구라는 것을 아는 듯한 모습이었다.

“우리 집 애들은 누가 오면 너무 짖어서 고생인데…… 정말 착하다, 착해. 타티아나. 이 친구는 이름이 뭐야?”

“벨카예요.”

“벨카…… 어떡해. 너무 귀엽다.”

그 누구도 벨카의 마성엔 저항할 수 없었다.

발렌티나는 한결 풀어진 눈으로 헤죽거리며 벨카를 쓰다듬었다.

난 흐뭇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벨카에게 몇 가지 부탁을 했고 벨카는 충실하게 내 말에 따라 주었다.

발렌티나는 벨카가 사람 말을 완벽하게 알아듣는 것 같다며 놀라워했다.

“벨카, 저와 악수하시겠어요?”

“왕.”

벨카와 악수를 하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짜게 식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인진 잘 알겠지만…… 나도 버릇이 된 걸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게 벨카와 조금 놀다가 저택 본관으로 들어왔다.

아나스타샤도 발렌티나도 평범한 서민 가정의 아이들은 아니었다. 모두 러시아에서도 꽤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유복하게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큰 저택은 별로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발렌티나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고용인이 몇이라고……?”

“얼마 전에 들었을 땐 스물세 명이었어요.”

“기절하겠네, 정말.”

거기에 날마다 로테이션으로 바뀌는 경호원들까지 합치면 얼추 마흔 명이 넘는 것 같다.

이 저택에 베르체노프의 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 봐야 단 세 명뿐이었지만 아버지는 여기에서 더 고용인을 줄이려 하지 않았다.

나는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를 데리고 저택 이곳저곳을 안내해 주었다.

안내라고 해 봐야 별것 없었지만 워낙에 커서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방이었다.

문 앞에 선 아나스타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기대되는걸.”

“……뭐가요?”

“이렇게 큰 집에서 가장 화려한 공간이 바로 네 방일 것 아냐? 타티아나. 기대가 되지 않겠어?”

“실망하실 텐데요.”

중얼거리며 내 방문을 열었다.

“……?”

아무리 좋게 말해도 내 방은 화려하지 않았다.

침대와 옷장, 책상, 화장대 정도가 전부였다. 방 한가운데에서 춤을 춰도 될 정도로 빈 공간이 많았다.

지난 반년 동안에도 전혀 손을 대지 않아서 방 주인의 색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황량한 방이었다.

그간 익숙해져서 별생각 없었는데, 이렇게 다시 보니 열네 살의 방치고는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방 안이 복도보다 더 차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안 그래도 나제즈다가 방에 가져다 놓을 것 없냐고 몇 번 말하긴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일부러 인형이라도 좀 이것저것 가져다 놓을 걸 그랬다.

난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깔끔하죠?”

실없는 소리를 하자 아나스타샤가 정말 기묘한 얼굴로 날 돌아보았다.

그러곤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생각하다가, 고민하다가, 결국 그만두었다.

발렌티나도 이 살풍경한 광경엔 적응이 안된다는 듯 어깨를 옹송그렸다.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은 셋이서 손잡고 빙글빙글 도는 것 정도뿐인 것 같았다.

어쩐지 미안해져서 두 사람에게 말했다.

“제 방 말고, 연습실로 갈까요?”

“연습실? 그래, 그러자.”

“피아노가 필요해…….”

이상한 소리를 하면서 발렌티나가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난 쓰게 웃으며 내 방의 문을 닫았다.

밖으로 나온 우리 셋은 별관에 있는 내 개인 연습실에 도착했다.

연습실엔 그래도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큼지막하게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주변에도 음반과 홈시어터가 설치되어 있어서 최소한 황량한 느낌이 들진 않았다.

피아노와 음반들을 보자마자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의 눈빛이 달라졌다.

난 작게 웃었다. 역시 얘들은 태생부터가 음악가였다.

발렌티나가 내 손을 붙잡더니 발을 동동 굴렀다.

“타티아나, 나 저 음반들 구경 좀 해도 돼?”

“나도.”

“그럼요.”

난 흔쾌히 허락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발렌티나는 음반을 꺼내 볼 때마다 감탄사를 토하며 연신 중얼거렸다.

예고르가 엄선해서 세팅한 저 음반 목록은 정말 명반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들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악보들이 꽂혀 있는 곳에서 이것저것 뽑아 보더니 날 돌아보고 물었다.

“타티아나, 이것들 그냥 사다만 놓은 거지?”

내 연습실엔 작곡가별로 거의 모든 악보들이 있었다. 내 키만 한 책장으로만 네 칸. 아마 고전부터 낭만까지의 피아노곡이라면 다 모여 있을 것이다.

물론 다 보진 못했다. 예고르가 그냥 사다 채워 놓은 것이다.

“당연하죠.”

“이 중에 얼마나 칠 수 있는 거야?”

보기야 한 절반은 본 것 같은데.

“글쎄요……?”

굳이 대답하지 않고 얼버무렸다. 아나스타샤는 기가 막히다는 듯 다시 악보들을 뒤적였다.

“이거 다 헨레판이네…… 거기에 해석이 갈린다 싶으면 개정판이랑 파데레프스키판도 중복으로 사 놨고.”

“공부는 아무리 해도 모자라니까요.”

나는 나지막하게 웃으며 피아노 앞에 앉았다.

“아, 발렌티나.”

“응?”

“아까 슈만이 다시 듣고 싶다고 했었죠. 지금 어때요?”

“어? 좋아 좋아.”

얼른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음반들을 보던 발렌티나가 눈을 반짝거리며 의자를 끌고 와서 내 옆에 앉았다.

난 방금 무대에서 쳤던 슈만 소나타 3번의 4악장을 다시 치기 시작했다. 별로 색다를 것도 없었다.

이대로 몇 번이고 발렌티나를 만족시켜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발렌티나는 신기하다는 듯 내가 슈만을 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연주를 끝내고, 발렌티나는 이전의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지 으아아,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머리를 싸매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물끄러미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묘하다는 투로 말했다.

“아까 구세프 선생님이랑 에르네스트도 이상한 소릴 했었고…… 너 슈만만큼은 음색이 약간 다른 거 알아?”

난 그녀의 평가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나스타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진 않은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자 아나스타샤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타티아나. 너 그것 말고, 전에 들려줬던 캐논 변주곡 한번 쳐 볼래? 그거 정말 괜찮았거든.”

“캐논이요……?”

“응.”

아나스타샤는 뭔가 확인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난 약간 당혹스러웠지만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

건반에 손을 올렸으나 조금 막막했다.

연습실에서 카페인과 콜라, 그리고 분위기에 취해 즉흥적으로 쳤던 것이라서 정확하게 기억이 날 리 만무했다.

물론 맨정신일 때 더 잘해야 정상이겠지만, 그냥 어떻게 해야 할지 악상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건반을 놓고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니.

주선율을 한 번 쳐 나가면서 속도와 강약을 잡고, 대충 이렇게 저렇게 변주를 해 나가기 시작했다.

음…… 이렇게 했던가.

머리가 굳어 버린 기분이었다. 그렇게 두 번쯤 변주를 지나가고 나니 자신감이 확 없어졌다.

어쩔 수 없이 방식을 조금 바꿨다.

내가 아는 변주곡들만 해도 수십 곡들이었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모차르트의 작은별 변주곡, 파가니니 변주곡, 슈만의 아베크 변주곡, 라흐마니노프의 코렐리 변주곡, 쇼팽 변주곡 등등 엄청나게 많았다.

생각나는 대로 이디엄들을 뽑아내서 주선율에 섞었다. 재즈 편곡의 요령과 비슷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쳐 나가는데, 힐긋 옆을 보니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이상했다.

숨이 턱 막혔다.

“…….”

결국 손을 멈췄다.

“이게 아니었나요?”

아나스타샤는 이 말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한참 고민하는 것 같더니 툭 내뱉었다.

“요 며칠 밝아진 것 같긴 한데, 피아노 소리는 왜 이렇게 딱딱해졌어?”

건반을 앞에 두고서 좀 멍하긴 했지만, 가끔 그럴 때도 있을 수 있다. 나라고 언제나 악상이 넘칠 순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괜찮아요. 어떻게든 연주해 냈잖아요?”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들었지만, 나보다 수천 배는 위대한 작곡가들의 변주곡 형식을 빌려서, 섞어서 연주해 내지 않았는가?

지금은 그 정도면 되잖아.

* * *

저녁이 되어 드레스를 차려입은 우리들은 다 함께 거실에 도착했고 거기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고용인 분들이었다.

“아가씨! 오셨습니까.”

“정말 친구분들이십니까?”

“이런 일을 다 보…… 윽.”

“조용히 해. □□□.”

눈물 나는 반응들이 쏟아졌다.

기억상실이고…… 반년이나 지났지만 고용인들은 아직도 날 막 나가던 시절로 기억하곤 했다.

난 언제쯤이면 이 평판을 바꿀 수 있을까. 반년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건가.

난 화사하게 웃으며 한 명 한 명에게 모두 함께해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잠깐 그렇게 새삼스레 인사를 나누고, 축하를 받고 하다 보니 오빠 루슬란도 합류했다.

“타티아나. 오늘 못 가 봐서 미안하다.”

정말 상투적인 인사였지만 어쨌건 이 정도라도 가까이 해 줘서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아니에요, 루슬란 오라버니.”

“컥.”

루슬란이 갑자기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더니 켁켁거리며 기침을 했다. 사레라도 들린 듯했다.

그러더니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다신…… 날 그렇게 부르지 마, 타티아나.”

“왜요?”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냐?”

일부러 이러고 있기야 하지만 이게 문제 될 것 같진 않은데요.

루슬란이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귀를 마구 문댔다.

그때 발렌티나가 갑자기 내 옆으로 스르르 끼어들었다.

그러더니 무슨 암살자처럼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 내 옆구리를 찔렀다. 순간 칼침이라도 맞은 줄 알고 놀라 허리를 비틀었다.

“윽!”

“어머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루슬란이 인사를 받아 주자 방긋방긋 웃는다.

얘 이런 애였어?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베르체노프 자체에 약간 겁먹고 있던 애가 맞는지 의문이 든다.

어쨌건 난 다시 발렌티나가 내 옆구리를 기습할까 봐 얼른 그녀를 소개했다.

“제 친구 발렌티나 페트로브나 메체티나라고 해요. 발렌티나, 이쪽은 제 오빠 루슬란.”

루슬란은 나와 부칭도 성도 같았기에 더 길게 소개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내 말에 루슬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발렌티나를 바라보았다. 저 실례되는 눈초리는 대체 뭐지?

“타티아나와 친구라고?”

“예. 그렇답니다.”

“혹시 뭔가 약점이라도 잡힌…… 무슨 짓이냐, 타티아나!”

“제가 뭘요?”

순간적으로 발을 콱 밟았더니 루슬란이 역정을 냈다. 하지만 지금 화낼 사람은 나다.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이 있어야죠, 오라버니. 제가 이렇게까지 사근사근하게 대해 드리는데 제 친구 앞에서 무슨 말이에요, 지금?

루슬란은 네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낼 줄 알았다는 듯 쌍심지를 켰다.

“뭐 해? 발렌티나.”

“…….”

그런데 그때 우리 옆으로 다가온 아나스타샤를 보고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잠깐만, 잠깐. 루슬란은 지금 열아홉 살이다. 우리랑은 다섯 살이나 차이가 난다.

“저분도 네 친구시냐? 타티아나.”

“…….”

말투가 완전 이상해져 있었다.

난 어처구니가 없어서 루슬란을 올려다보았다. 완전 경멸하는 시선으로 쳐다보니 루슬란이 헛기침을 하더니 눈을 똑바로 떴다.

“친구라면 소개 좀 해 주련.”

“……싫어요.”

“왜!”

“그냥요.”

내가 괜히 퉁명스레 거절하자, 아나스타샤가 불쑥 다가오더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타티아나의 친구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이즈마일로바입니다. 타티아나의 오빠 되시죠?”

“예…….”

다섯 살이나 연하 상대로 말 어물거리지 말라고!

도대체 나한테 얼마나 당했길래, 루슬란은 나와 같은 나이의 여자애를 보고도 꼼짝도 못했다.

아나스타샤가 상큼하게 말했다.

“어쩐지, 보자마자 알겠더라고요.”

“어떻게……?”

아나스타샤가 시크하게 웃으며 두 눈을 마주쳤다.

“그 눈동자가 참 똑같거든요.”

“…….”

루슬란이 숨도 못 쉬고 굳어 버렸다.

잠깐만, 아나스타샤. 너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면 사람이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알아?

갑자기 이상해지는 분위기에 위기감을 느낀 발렌티나가 아나스타샤에게 시비를 걸고, 아나스타샤는 평소 그 자유롭던 태도는 어디로 던져 버렸는지 우아한 태도로 어린애랑 못 놀겠다고 손사래를 치고, 루슬란은 와인이 필요하다며 어른의 도피처를 찾아 떠나고……

난 그 모두를 지켜보면서 웃고, 떠들었다.

잠시 후, 아버지가 거실 저편에서 걸어왔다.

워낙에 바쁘신 분이라 이제 퇴근하자마자 오신 모습이었다. 그 옆엔 미하일 선생님도 함께였다.

난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와 같이 아버지와 미하일 선생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버지.”

“그래, 타티아나. 내가 오늘 늦을 것 같아 미리 시작하라고 했는데, 즐기고 있는 것 같구나.”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덕분에요.”

“음, 그래도 네 축하연인데 건배라도…….”

“괜찮아요, 아버지. 아, 그리고 이쪽은 제 친구들이에요.”

“오, 그래.”

아버지는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와 인사를 나누면서 정말 기뻐하시는 듯했다.

드디어 난 친구 하나 없는 딸이라는 오명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자신과 발렌티나가 중앙음악학교에서 0학년부터 다닌 친구라고 말하자 아버지가 껄껄 웃었다.

“그렇군. 타티아나는 편입생이니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 줬으면 좋겠구나.”

“별말씀을요, 유리 알렉세예비치.”

아나스타샤의 말에 아버지가 정말 처음 보는 모습으로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지 말거라. 그냥 아저씨라고 해도 된단다.”

……이렇게 좋아하실 줄은 정말 몰랐는데.

물론 좋은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처음 보는 아버지의 모습에 살짝 식겁해서 옆을 돌아보았다.

“미하일 선생님. 어서 오세요.”

“그래, 타티아나. 오늘 위클리 잘 봤다. 구세프도 전혀 트집 잡을 구석이 없었을, 좋은 연주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 말대로 구세프 선생님은 내 연주 자체는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그저 무대에 대해 물었을 뿐이다.

미하일 선생님이 정말 만감이 교차한다는 듯 거실을 보고, 피아노를 보더니 나에게 말했다.

“여기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지, 타티아나.”

“예.”

미하일 선생님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날, 네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넌 그때부터 이미 연주자였고, 이 거실을 완전히 무대로 휘어잡고 있었지.”

“…….”

“그때 내가 널 잡은 것이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예. 저도 미하일 선생님의 손을 잡은 것이 지난 반년간 최고의 선택이었죠.”

“후후,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구나.”

가볍게 웃으며, 미하일 선생님이 물었다.

“이 작은 거실과 비교해서, 학교의 콘서트홀에 서 본 느낌은 어떻더냐?”

2백 명을 청중으로 큰 무대를 겪은 내게 어떠한 감동이 있었으리라 생각하시는 듯했다.

연주자에게 있어 단 한 번의 무대가, 때론 엄청난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당장 나만 보더라도 그렇다.

마지막으로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사고를 당한 탓에 생긴 미련은, 날 계속해서 연주자로 묶어 두었다.

만약 내가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사고를 당했다면, 그리고 이 몸으로 눈을 떴다면, 난 그냥 평범한 소녀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피아노를 아주 놓아 버리진 못했을 테고, 다시 연주자로서의 삶을 시작했을지도 모르지만, 한 곡이라도 내 음악을 되찾겠다고 지금같이 바보처럼 살진 않았을 것이다.

내게 주어진 기회는 모두 끝났다고 여기고, 깔끔하게, 그냥 타티아나에게 가능한 음악을 하면서 평범하게 사는 데에 만족했을 것이다.

마치, 지금 흉내 내고 있는 것처럼.

문득 고개를 돌려 거실을 바라보았다.

오늘 내 첫 연주회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저마다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난 병석에서 쾌차한 지 반년 만에 이런 행복한 광경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나름 뿌듯함을 느껴도 되지 않을까 싶다가도, 서리가 내리듯 뇌리가 차갑게 얼어붙는다.

“…….”

구세프 선생님은 날 보고 단박에 뭘 느꼈냐고, 어떻게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수가 있느냐고 따져 물었지만, 미하일 선생님은 그렇게까지 내 폐부를 찌르는 듯한 질문을 하진 않았다.

큰 무대에 서서 어떤 느낌을 받았냐는, 평범한 질문이었다.

물론 간파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거짓말을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그래, 그랬겠지.”

하지만 이건 내 잘못이 아니지 않은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