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2화 (52/1,277)

##  52화

“……콜록.”

여느 때와 같이 아침 연습을 하다가 기침이 나와서 따뜻한 물을 조금 더 마셨다. 어느샌가 조금 차가워져 있던 몸에 온기가 돈다.

모스크바에 12월이 왔다.

한 달 전만 해도 이럭저럭 버틸 만했던 날씨가 순식간에 영하권으로 떨어졌고, 밤이면 눈발이 흩날렸다.

올 초에 겨울을 겪어 보긴 했지만 저택 안에만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모스크바의 겨울을 맞이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체 얼마나 추울지 몰라 막연한 무서움도 있었고, 가뜩이나 건강도 안 좋아서 따뜻하게 지낸다고 열심히 싸매고 살았는데도 밖에 나가서 찬 바람을 한 번 쐬는 순간 끝이었다.

난 감기를 달고 살아야만 했다.

수족냉증도 말썽이었다.

혈액순환이 좋지 않은지 손발이 너무 쉽게 차가워져서 늘 피아노를 연주하기 전에 따뜻한 물로 손을 녹여 주어야만 했다.

냉증이 심한 학생들이 겨울에 고생하는 것을 많이 보기도 했지만, 정작 내가 그 상황이 되니 눈물이 난다 정말.

하지만 어쩌겠는가. 주어진 것에 만족해야지.

숄을 조금 더 여미고, 따뜻한 물을 조금 더 홀짝이면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카메라를 켜서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벨카를 찍었다.

날씨가 추워진 이후로 밤이 되면 바로 이곳, 별관 연습실의 라디에이터 앞 방석 위가 벨카의 지정석이었다.

“…….”

마음 같아선 연습이고 뭐고 그만두고, 잠들어 있는 벨카를 끌어안고 눈이나 좀 더 붙이고 싶었다.

벨카는 따뜻하니까 충분히 더 잘 수 있을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갈등하면서 벨카를 멀거니 쳐다보다가 다시 건반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시 버릇처럼 하농을 처음부터 쳐 나갔다.

위클리 리사이틀이 끝나고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난 그사이 개인적으로 그 어떤 곡도 연습하지 않았다.

오로지 무감각하게 테크닉을 단련하는 연습곡과 학교에서 내어 주는 과제곡들을 연습할 뿐이었다.

선생님들이 내어 준 과제곡은 약속에 따라 당연히 내 해석을 완전히 배제하고 악보대로만 연주해야 했고, 그렇게 한 곡을 다시 처음부터 완성하면 난 그 곡에 대해 어떤 해석을 가지고 있었는지 잘 기억해 내지 못했다.

“…….”

점점 잊어버리고 있었다.

위클리 리사이틀에서 슈만 소나타 3번을 연주하고 내려왔을 때가 기점이었다.

그 전엔 쇼팽 소나타나 라 발스 등에서 무언가 찾아낼 수 있으리라 믿고, 따로 시간을 계속 투자해서 연습도 하곤 했다.

하지만 첫 연주회를 마치고 내려온 뒤로는 굳이 그렇게 미완성인 음악들을 자꾸 듣고 싶지 않았다.

그마저도 내 기억에 자꾸 혼선을 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방팔방 기억을 헤집으면서 적극적으로 되찾으려 하기보단 조금 방어적인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얌전히 지도에만 따라 준다면 선생님이 찾아낸 답을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했다.

난 그 약속을 믿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결국 난 설득된 것이다.

그렇게 한 달.

이따금 불안해지기도 하고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든다. 바로 이게 구세프 선생님이 유도하고 있는 길이 아닐까, 하고.

내 미련과 고집을 버리게 할 방법으로, 일단 조건을 걸고 시간을 끌어서 내가 서서히 지치고, 포기하게 만들려는 수일 수도 있다.

이건 정말 효과적이었다. 나라고 바보 천치가 아니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현실적으로 얼마나 많이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대체 내게 이 초자연적인 현상이 왜 일어났을까, 내게 계속 피아노를 하라는 모종의 계시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은 모두 터무니없는 착각일 뿐이고, 그건 내게 내려온 계시가 아니었고, 모든 기회는 끝났고, 망령의 미련일 뿐이며, 자기증명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노력과 고집으로는 이겨 낼 수 없는 어떠한 한계 때문에 내 미련이 그저 미련으로 남아 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그간 몇 번이고 들었던 생각이다.

구세프 선생님은 중앙음악학교에서 수십 년간 학생들을 다뤄 본 베테랑 선생님이고, 난 정신연령을 합쳐 봐야 구세프 선생님의 반절도 안 되었기 때문에 선생님은 내 이런 약한 부분을 꿰뚫어 보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구세프 선생님의 입장에선 좋은 의도겠지만 만약 정말 그런 의도라면, 내가 한 곡만 내어 달라고 애원했던 것을 그저 사소한 고집 정도로 해석하셨다면, 약속 같은 건 어쨌건 그때 내 지도가 옳았지 않았냐며 웃으며 넘길 수 있는 것으로 가볍게 여기셨다면…….

“또 쓸데없는 생각.”

난 언제부터인가 조금 늘어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건반을 짚었다.

아무 음악성도 없이 오로지 손가락을 혹사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이 연습곡은 평소보다 더 건조하게만 들렸다.

* * *

절대 원했던 일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내 얼굴은 학교 내에 상당히 팔려 있었다.

에르네스트와의 일도 있었고 베르체노바라는 내 성도 한몫했을 것이다. 복도를 지나가다 보면 알은체하는 학생들이 꽤 있곤 했다.

처음엔 조금 어색했지만 이젠 상냥하게 웃으면서 궁금해하는 것들에 답해 주는 것으로 익숙하게 대응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럴 땐 정말 곤란했다.

“선배님, 저희 이번 과제곡으로 슈만을 받아 왔는데 이 해석을 조금 봐 주시면 안 될까요.”

“…….”

내가 위클리 리사이틀에서 슈만 소나타 3번을 연주한 이후로 교내에 갑자기 슈만 붐이 일었다.

학교 사이트에 공식 촬영 영상이 올라오면서 그 열기는 더더욱 팽창해 갔다.

이게 대체 어쩐 일인지 모르겠다.

내가 기막혀 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학생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슈만을 연구하고 자유곡으로 슈만을 준비하는 일이 벌어졌다.

정말 난처했다.

난 나이에 비해 레퍼토리가 굉장히 넓었고 슈만 전에 단계별로 익숙해져야 할 작곡가들을 꽤나 연구했었기 때문에 슈만에도 손을 뻗을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다면 슈만은 상당히 까다로운 작곡가 중 하나였다.

애초에 슈만은 그리 쉬운 곡을 쓰지 않았다.

선생님들이 굳이 어린 나이에 슈만을 추천하지 않는 것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슈만을 독학으로 공부하면서 이 모든 사태의 시작인 날 찾아오기도 했다.

그 열정은 높게 사지만, 난 떨떠름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 저보단 선생님들을 찾아가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선생님들은 슈만을 싫어하세요! 날마다 바흐와 베토벤, 이젠 지겨워 죽겠어요. 선생님들은 낭만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시지만, 저희는 낭만을 원해요. 낭만을!”

이 무슨 최백호 씨가 기겁할 발언…….

난 약간 더 달래듯 말했다.

“낭만파 작곡가라면 쇼팽이나…… 라흐마니노프를 하시는 건 어떨까요? 저 개인적으로도 슈만보다는 쇼팽을 추천 드리고 싶어요.”

옆에 있던 학생 하나가 불쑥 소리쳤다.

“유행에 뒤처지잖아요!”

그러자 너 나 할 것 없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맞아요, 항상 고루한 곡들만 할 수는 없죠. 숨 막혀요.”

“우리 학교는 선생님도 애들도 다 낡아 빠졌다니깐요.”

100년에서 200년은 된 클래식을 하는 애들이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유행이라는 것은 이 아이들도 아는 것 같았다. 난 어떻게 하면 이 열정 넘치는 아이들을 진정시킬 수 있을지 고민했다.

“저희 반에선 이번엔 슈만 연구회도 만들기로 했어요.”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지 모르겠다.

후배 하나가 눈을 반짝이며 부탁해 왔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연구회 고문으로 선배님을 모시고 싶어요. 많은 시간을 뺏진 않을 거예요. 약속드릴게요. 그저 가끔 얼굴만 비쳐 주셔도 괜찮습니다.”

“…….”

여기 애들은 무언가 일을 벌이려면 일단 무슨무슨회부터 만들고 보는 건가? 에르네스트도 그렇고 이 애들도 그렇고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

반짝하고 말 유행이든 뭐든, 어쨌든 간에 내 슈만 소나타를 듣고 모인 애들이지 않은가?

난 내 위클리 무대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고, 이제 와서 다른 누가 뭐라고 하든 그 생각은 별로 바뀌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누구에겐 의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쉽사리 거절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시간도 여유 있게 남아돌곤 했다. 어차피 요 근래는 과제곡 외엔 연습도 안 하고 있고…….

나 혼자 또 무의미하게 시간을 써서 무의미한 음악, 무의미한 무대를 만들 바에야 차라리 이 애들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잠깐, 비켜 줄래?”

내 앞에 모여 있는 애들 너머로 애쉬브라운 머리의 남학생이 한 명 다가왔다. 모두가 우르르 물러섰다.

“리처드…….”

“반에 안 오고 뭐 해? 타티아나.”

녹색 눈동자가 무심하게 날 일견하더니, 주변을 훑었다.

“역시 인기인답네.”

“전 그게…….”

“얘들아.”

리처드가 말했다.

“미안한데, 타티아나에게 가장 먼저 약속이 있는 건 나라서.”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한 장난기도, 선배로서의 진지함도 없는 단조로운 말투였다.

하지만 거기엔 결코 거부하기 힘든 압력이 깃들어 있었다.

슈만 연구회에 들어와 달라고 했던 학생이 먼저 분위기를 읽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생각해 볼게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날 둘러싸고 있던 애들이 하나씩 흩어져 갔다. 잠시 후, 남은 것은 나와 리처드뿐이었다.

리처드는 말없이 내 옆에 서 있다가 손짓했다.

“가자.”

“……어디로요?”

“어디긴 어디야. 반으로 가야지. 수업 안 들을 거야?”

그리고 리처드는 바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난 아무 생각 없이 그의 뒤를 따라가다가 갑자기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런데 리처드.”

“뭔데.”

“화났……어요?”

리처드가 나에게 왜 화가 나?

내가 말해 놓고도 어이가 없었지만 난 어쩐지 그렇게 느꼈다.

다시 리처드를 봐도 그는 평소와 같은 권태로운 표정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선 예상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

“…….”

혹시나 했는데 정말이었다.

그가 이렇게 시원하게 인정해 버리자 거꾸로 할 말이 없어졌다.

리처드가 약간 힐난하는 눈초리로 말했다.

“갑자기 주목받는 기분은 어때?”

“……달리 기분이랄 게 있나요?”

“솔직히 말해 봐.”

주위엔 우리 둘 외에 아무도 없었고, 난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귀찮아요.”

“그런데 왜 그랬어.”

“무슨 말이죠?”

“왜 위클리에 슈만 같은걸 올렸냐고. 내가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분명 말해 줬던 것 같은데.”

그때 리처드는 분명 진심이었으리라. 내가 이렇게 귀찮아지는 일을 달갑잖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봤기 때문에 해 준 말이었다.

“……미안해요. 그렇게 되어 버렸어요.”

“되어 버렸다, 라고……? 난 널 그런 말을 할 애처럼 보진 않았는데.”

“선생님의 추천곡이었어요.”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

난 살짝 약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리처드가 대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이렇게까지 말한단 말인가?

약간 울컥해서 반항적으로 말했다.

“선생님의 추천곡이었고 저 역시 처음부터 슈만을 하고 싶었어요.”

“거짓말 같은데.”

“진짜예요.”

“네 무대는 결코 하고 싶은 곡을 치는 연주자의 무대가 아니었는데?”

그 말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리처드는 약간 고개를 기울이더니 작게 말했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

“타티아나, 담당 선생인 미하일 말고 구세프한테 지도받고 있어?”

별달리 조심성 없이 구세프 선생님의 레슨실에 몇 번 들락날락했으니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걸 매사 관심 없어 보이는 리처드가 알고 있다는 것엔 조금 놀랐다.

“그래요.”

“왜?”

“…….”

그러면 안 되는가?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짓거리는 진척도 없고, 구세프 선생님의 말마따나 퍼즐 맞추기나 하면서 모조리 망쳐 가고 있는 그림인데, 나라고 회의감이 안 들고 시간이 지나면 다 잘 되리라 희망적인 관측이나 하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도 사람이다. 지치고 힘들다. 그런 와중에 구세프 선생님이 자기 지도대로 하면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하는데, 그걸 붙잡으면 안 되는가?

“설명하기 힘든 이유예요…….”

“그래, 그렇겠지 뭐.”

리처드는 생각보다 시원스레 물러나는 것 같더니, 갑자기 무언가 결심한 듯 나를 불렀다.

“타티아나.”

“예.”

“나랑 약속했던 것, 기억은 하고 있어?”

“……?”

무슨 약속이었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자 리처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나랑 피아노로 대결하기로 했었어.”

“아, 아! 그랬죠. 맞아요, 리처드.”

한 달 전, 리처드는 내게 에르네스트와 있었던 일을 물으면서 나와 에르네스트가 피아노로 대결했다는 사실을 듣고는 자신과도 해 달라 했었다. 난 그것을 받아들였고.

하지만 지금 리처드가 말하기 전까지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사과 외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해요, 리처드.”

“괜찮아. 언제가 되든 시간은 상관없으니까.”

쿨하게 내 사과를 받으며 리처드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시간은 상관없지, 최고의 컨디션으로 준비만 된다면.”

“……리처드?”

“그래서, 타티아나.”

리처드가 냉랭하게 말했다.

“지금 나와 대결한다면, 내게 본 실력을 보여 줄 수 있겠어?”

난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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