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연주자들은 어떤 의미에선 스포츠 선수와 비슷하다.
똑같은 규격의 악기를 가지고 똑같은 조건에서 몸을 사용한 타인과의 경쟁에 익숙하고, 스포츠맨십이라고 할 수 있는 우호정신 또한 가지고 있다.
때문에 모두 경쟁자이기도 하지만 동료이기도 하다.
나 역시 스스로를 연주자라고 규정하기 때문에 어떠한 알력에서 빚어진 대결이 아닌 친선전이라면 언제든지 좋았고, 리처드가 숨겨 둔 실력을 보고 싶기도 했다.
이 미스테리한 영국 친구와 친해질 기회였다.
“…….”
하지만 본 실력을 보여 줄 수 있느냐고 묻는 리처드를 보며 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난 별로 상태가 좋지 않다. 리처드가 어느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을진 모르겠지만 괜한 실망만 살 확률이 높았다.
“리처드, 지금은 제가…….”
“뭔가 문제라도 있어?”
“…….”
리처드의 녹색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난 그가 한 말을 곱씹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문제라고 말하긴 싫었다.
최소한 문제를 해결 중이라고 말해야 지금 내가 멍청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게 된다.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다행이야. 그럼 내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예.”
“얼마나? 3년 정도?”
“!”
갑자기 3년이라는 시간이 리처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난 깜짝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리처드가 내 쪽으로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는 항상 안전거리를 유지하려는 듯 나와 거리를 두는 편이었는데, 갑자기 그게 훅 좁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3년은 너무 긴데.”
“리처드……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예요?”
“별로.”
리처드는 다시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사실 언제든지 상관없어. 우리가 무슨 계약서에 도장 찍은 것도 아니고, 그렇잖아?”
“그런 건 아니에요, 리처드. 저도 약속을 지키고 싶어요.”
“너무 그렇게 신경 쓸 것 없어.”
정말 드물게, 리처드가 미소를 지었다.
“난 얼마든지 기다려도 괜찮으니까.”
“…….”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3년 이라는 키워드를 꺼냈다는 것은, 리처드가 이미 내가 무엇에 묶여 있는지 어느 정도 접근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체 어디서 그것을 알아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명백히 날 도발하고 있었다.
조금, 그간 흑백영화처럼 조금 흐릿하던 시야가 색을 되찾으며 또렷해졌다.
이렇게까지 해 준다면 나 역시 의욕이 생긴다.
“……리처드는 평소에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 관심이 없으신 것처럼 보였는데요.”
“실제로 그래.”
“관심받기도 싫어하시는 것 같고요. 그래서 성적도 일부러 숨기시는 건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내가 살짝 떠보자 리처드가 재미없게 그러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타티아나. 그건 날 이겨서 대답을 강요해 보는 게 어때?”
“……적극적이시네요.”
“흥미 없어?”
그럴 리가. 내가 지금 묻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데.
“오늘은 조금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되네요. 리처드.”
“나쁘게 보이진 않았으면 좋겠어.”
“전혀요.”
피아노에 맹세코, 난 이런 종류의 도발을 매우 사랑했다.
“전 감기에 걸려 있어요.”
“그건 안됐네.”
“근래 들어 매우 우울하고, 실력도 나락이죠. 절망적이에요.”
“유감이야.”
근 한 달 사이 내어 본 목소리 중 가장 행복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요컨대, 절 이기려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예요.”
“절대 놓치면 안 되겠는걸.”
리처드가 깔끔한 태도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에 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그는 재미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 * *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
“얘가 왜 이래?”
난 그녀와 함께 식당으로 내려가다 말고, 휴게실에 멈춰 섰다. 아나스타샤가 별일을 다 보겠다는 듯 내 손에 이끌려 왔다.
어렸을 때부터 이 학교에 다녔던 아나스타샤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리처드는 언제부터 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리처드?”
아나스타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걔는 왜?”
“갑자기 궁금해져서요.”
“?”
아나스타샤는 약간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이었으나 내 질문엔 성실하게 답해 주었다.
“글쎄…… 4학년이었던 것 같은데. 그 전엔 딱히 음악학교는 안 다니고 그냥 영국의 학원에서 배웠다고 들었어.”
“그래요?”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래? 리처드랑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은 앞으로 있을 예정이죠.
그에 대비해 일부러 리처드에 대한 약점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캐내기 위해서 이렇게 묻는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내가 여태껏 리처드에 대해 너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의외라는듯한 눈빛을 했다.
“뭐지? 리처드가 너랑 얽힐 일이 없는데…… 희한하네.”
아나스타샤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걔는 기본적으로 그 누구도 터치하지 않거든. 요즘 선생님이 시켰다면서 승우 한이랑은 잘 지내는 모양이지만…….”
“선생님이 시켰다고요? 어떤 선생님이요?”
“나야 모르지? 그냥 리처드가 그러던데.”
리처드는 본인이 자진해서 한승우와 친하게 지내는 중이었지 결코 누가 시켜서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걸 선생님이 시켰다고 핑계까지 대야 하나?
그마저도 귀찮은 시선을 받기 싫었던 모양이다. 정말 대단하다…….
난 그를 조금 변호하고 싶어져서 말했다.
“그래도 한승우와 잘 지내는 걸 보면 리처드가 원래 붙임성 없는 성격은 아니지 않나요?”
“좀 차갑긴 하지만, 괜찮은 녀석이지.”
아나스타샤가 작게 투덜거렸다.
“에르네스트랑 사이만 안 나빴어도 좋았을 텐데…… 왜 그렇게 척을 지고 사는지 모르겠어.”
“에르네스트요?”
“그래. 에르네스트와 사이가 안 좋은 유학생과 친하고 싶은 애들은 드물거든.”
“아…….”
“그래도 처음엔 가까이하던 애들이 몇 있었던 것 같은데, 그마저도 리처드가 마다한 것 같고.”
에르네스트는 지금처럼 번쩍번쩍한 커리어를 지니기 이전의 훨씬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서 이름깨나 날리고 다녔다고 한다.
몇백 년 만에 한 번 나올 천재라고 어릴 때부터 유명해서 신문에도 몇 번이나 나왔다던가…….
그런 에르네스트와 사이가 안 좋은 리처드는 자연스럽게 주류에선 멀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에르네스트와 사이는 언제부터 안 좋았었나요?”
“거의 처음부터 그랬지? 한 번 치고받은 적도 있어. 피아노 치는 애들이 손 망가지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몰라.”
아나스타샤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투였지만, 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딱히 피아노를 하고 클래식을 공부한다고 해서 성격이 차분해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매일같이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들으면 무언가 명상이라도 하는 줄 아는가? 막상 그 두 작곡가는 성격이 지랄 같기로 유명했다.
본래 성정이 불같다면 싸움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큰일 나죠.”
“그러다가 사고 나면 저들만 손해지.”
물론 나도 성격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손으로 주먹을 쥘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렇게 한다 한들, 이렇게 약해 빠져서야 누굴 위협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번 잃어 본 만큼, 그 소중함을 알기에. 난 조금 무섭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남학생들은 무섭네요.”
아나스타샤는 괜찮다는 듯 팔을 뻗어 내 어깨를 토닥였다.
* * *
아무도 없는 복도.
나와 리처드는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거의 180cm는 되어 보이는 그에 비해 내 키는 겨우 160cm밖에 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올려다보는 구도가 되었지만, 난 더욱 위협적으로 그의 턱 밑까지 다가갔다.
“약속을 늦게 지키게 되어서 미안해요.”
“지금이라도 그럴 생각이 들었다면 괜찮아. 그런데 말이지.”
리처드가 고개를 비틀어 모로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진짜 오늘 안 해도 되는데? 컨디션 괜찮아?”
“게임은 승패가 모호해야 재미있지 않겠어요?”
난 한 달 전에 리처드가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그는 게임이라는 단어를 썼었다.
리처드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우리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은데.”
“그래요?”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상당히 솔직하게 말해 주는 것 같아서 난 웃음으로 답했다.
리처드가 먼저 조금 물러서서 거리를 벌렸다. 난 우리 바로 옆의 연습실을 일견했다.
약간 긴장되었다.
리처드는 기악 실기평가도 중급 수준에 머무르는 학생에 불과했지만, 난 그가 어느 정도 실력을 감추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물론 난 학교에서 최고라는 평가를 듣는 에르네스트를 상대로도 당당하게 싸움을 걸었을 정도로 이러한 대결엔 자신이 있었고, 또 그에게서 승리를 얻어 냈지만 그때랑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난 요 근래 최악이었다.
기존 가지고 있던 레퍼토리는 잘 떠오르지도 않았고, 악상들도 안개 뒤에 숨어 버린 듯 흐릿했다.
어차피 화성이라는 것이 다 수학이라지만, 수학이라는 학문의 핵심은 추론과 근사다.
지금 난 그것이 아예 안 되고 있었다. 직관성이 완전히 날아가 버리고 그저 사칙연산에서 벗어나지 못한 산수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스스로도 이따위로 엉망인 것을 알면서도 대결을 받아들이다니, 음악가로서 거의 끝장난 듯한 기분이었지만, 이기든 지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리처드를 보고 있는데, 리처드가 갑자기 엉뚱한 소릴 했다.
“일단 참관인을 구해 보자.”
“……예?”
무슨 소리야, 그게?
“참관인이 필요 있어요?”
“당연한 소리 아니야?”
“……?”
난 리처드와 나 사이에 서로 암묵적 신뢰가 형성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음악가로서 자존심을 걸고 서로 보여 줄 수 있는 것을 보인 후엔, 누가 더 우세한지 굳이 따지지 않아도 스스로가 더 잘 알고, 또한 깔끔하게 승복하리라 믿고 있었다.
참관인이라니 약간 마뜩잖았다.
“굳이 그럴 필요 있겠어요? 그냥 쳐 보면 알 텐데요.”
쳐 보면 안다. 서로에게 믿음이 있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리처드는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한 것 같았지만 고개를 저었다.
“승패에 필요 없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문제가 아니야.”
“……그럼요?”
리처드는 그저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쨌든, 가서 아무나 여자애 하나만 데리고 올래? 아마 우리 대결에 참관인으로 세우고 싶다고 한다면 누구라도 흔쾌히 들어줄 거야.”
음…….
설마 리처드, 이 와중에도 나랑 단둘이서 밀폐된 연습실에 들어가는 건 안 된다는 건가?
막상 난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리처드는 아닐 수도 있었다.
새삼 그와 연습실에 들어가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도록 문까지 잠가 버리려고 했던 내가 얼마나 무방비했는지 자각이 들었다.
나 조금 문제 있는 건가?
“그……럴게요.”
“기다릴게.”
살짝 김빠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리처드가 불편하다면 나 역시 예의를 지켜 줘야 했다.
터덜터덜 복도를 걸어 나오자 지나다니는 학생들이 보였다.
좀 어색했다. 저 중에서 아무나 잡아 오라고?
정말 아무나 상관없긴 했지만, 그래도 아무한테나 막 말을 걸기엔 준비가 덜 되어서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였다.
“타티아나 선배.”
낯익은 여학생 하나가 날 불렀다. 검은 머리가 찰랑이며 허리선까지 떨어졌다. 이름은 안나 니콜라예브나. 7학년 후배였다.
“안녕하세요, 안나.”
“와, 기억해 주시네요?”
“그럼요.”
난 웃으며 대답했다.
안나는 내 위클리 이후로 슈만을 공부하다가 나에게 조언을 구해가기도 한 후배 중 하나였다.
안나 말고도 그런 학생들은 많았지만 안나는 특이하게 손편지까지 써서 건넨지라 기억에 조금 더 남아 있었다.
“어디 가세요, 선배? 레슨 가시는 거 아니면 연습하시는 거 옆에서 봐도 되나요?”
“…….”
날 따라오겠다는 것 같다.
안 그래도 난 사람이 하나 필요했다. 그냥 안나를 데리고 가도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난 참관인에게도 영향력이 분명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영향력이 나를 향해 일방적으로 기울길 바라진 않았다.
“음…….”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안나. 전 약속이 있어서 잠시.”
“아…….”
내가 이만 가 봐야 한다고 말하자 안나는 얌전히 떨어졌다.
미안해요. 아주 작은 핑계도 만들고 싶지 않아서.
안나와 헤어진 나는 다시 복도를 돌아다니다가 네 번째로 마주친 여학생을 붙잡았다.
그러곤 이름도 묻지 않고 지금 비공식 일 대 일 피아노 대결을 하려는데 참관인을 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클라브디야라는 이름의 여학생은 단번에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수락했고, 난 그녀를 데리고 리처드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갔다.
리처드를 본 클라브디야는 더더욱 눈을 빛냈다.
“남학생분과 대결하시는 건가요?”
“예. 그래요.”
“정말요? 이런 경우는 처음 봤어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리처드는 내가 여자라는 건 상관치 않고, 내가 에르네스트를 상대로 이겼다는 사실 하나만 놓고 자신과도 겨뤄 주길 바랐으며 나 역시 리처드가 남자라는 건 전혀 관심에 두지 않았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엔 그렇게 보이지 않는 듯했다.
리처드가 먼저 연습실로 들어간 사이, 클라브디야가 나에게 바짝 다가와선 속삭이며 물었다.
“그런데 혹시…… 두 분, 무슨 일로 대결하시는 건가요?”
“별것 아니에요.”
이렇게 대충 말하면 더 오해받기 쉽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달리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클라브디야가 말 안 해도 사정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힘있게 말했다.
“꼭 이기셔야 해요?”
난 싱겁게 웃으며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