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여기까지 하죠. 미안해요, 리처드.”
솔직하게 사과하고 의자에서 내려왔다.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아무 내색도 않고 앉아 있는 그를 보며 내기 조건을 떠올렸다.
구세프 선생님의 지도를 거부하라고 했던가? 아무래도 좋았다. 당장 내일 구세프 선생님과 끝장을 보면 될 일이다.
분명 상당한 불이익이 있을 테고, 리처드가 그걸 막아 준다고 하긴 했지만, 그런 것도 다 필요 없었다. 그냥 내가 감수하고 말 생각이다.
그러니까 일단 오늘은 집에 가고 싶어.
“…….”
내가 지금 이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안다.
기분이 나빠도 리처드가 나빠야 할 상황이고, 난 최소한 컨디션이 좀 나아지면 나중에 다시 하자고 새로 약속을 잡기라도 해야 했다. 기본적으로 그게 정상적인 교우 방법이다.
하지만 나중이라고 해도 그게 언제가 될지 기약이 없었다.
무기력하게 그를 불렀다.
“리처드, 전…….”
“타티아나 선배님이 이기신 것 맞죠?”
“……?”
미처 리처드를 다 부르기도 전에 잠자코 있던 클라브디야가 벌떡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렇잖아요? 전 그렇게 빠른 프렐류드는 들어 본 적이 없는걸요.”
“…….”
말문이 막혔다.
난 지금 리처드와 무언가 상의할 것도 없이, 정신적으로 완전히 꺾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뒤숭숭한 분위기를 클라브디야 역시 느낀 것 같다. 그래서 더욱 말도 못 꺼내기 전에 끼어들어서 내 편이 되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녀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다시 주장했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전 모르겠어요. 앞서 친 곡들을 훨씬 더 빠르고 완벽하게 연주했는데 왜 타티아나 선배님이 진 것처럼 그러시는 거예요?”
제삼자인 그녀가 보기엔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일 것이다.
달리 그녀가 듣는 귀가 없어서 이러는 것은 아니다. 그냥 누가 보아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리처드가 처음 내게 보낸 곡을 내가 이해한 순간 암묵적으로 이 대결은 단순한 속주 대결이 아니었다.
그러나 난 리처드가 보여 준 곡에 답할 곡을 찾지 못하고, 결국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속주로 대응했다.
이 과정을 클라브디야에게 알아듣게 구구절절 설명하려니 구차하고…… 귀찮았다.
하지만 이미 데려와 버렸지 않은가. 아무리 제삼자라지만 참관인의 명목으로 이 자리에 앉혀 뒀다면 최소한 납득시킬만한 설명은 있어야 했다.
“클라브디야.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정말 지치고, 피곤했지만…… 최소한 패배를 자처한 내가 설명하고 승복해야 그나마 깔끔했다.
하지만 클라브디야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난 헛웃음이 나왔지만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제가…….”
그때, 갑자기 연습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내가 눈만 돌려 리처드를 바라보자 리처드가 난 가만히 있으라는 듯 손을 내밀더니, 연습실 문을 열었다.
밖엔 7학년 후배인 안나가 싸움이라도 걸려는 듯한 자세로 서 있었다.
리처드가 피곤한데 뭐냐는 듯 물었다.
“무슨 일이지.”
“타티아나 선배와 대결하신 분 맞죠?”
“……그런데.”
“할 말이 있어요. 들어가도 되죠?”
“…….”
이번엔 리처드가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허락해도 되겠냐는 뜻이었다.
고개를 끄덕여 허락을 표시하자 리처드가 가로막고 있던 문에서 슬쩍 비켜 주었다. 안나가 안으로 들어와서는 나와 클라브디야를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
그리곤 약간 원망하는 눈길을 보냈다.
“선배님. 절 데려오셨어도 됐는데.”
“미안해요. 안나를 못 믿었던 건 아니에요.”
“이해는 해요. 그리고 저도 죄송해요.”
안나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쩌다 보니 옆 연습실에서 다 듣고 말았어요.”
어쩌다 보니 옆 연습실에 들어갔다는 게 말이 되는가? 누가 봐도 안나는 내 뒤를 따라온 것임이 틀림없었다.
안나는 내 위클리 이후로 꽤나 열성적으로 날 따라다니곤 했다.
그전에 멀리서 지켜보던 에르네스트와는 달리 난 같은 여자이니까 따라다녀도 문제없다던가? 재미있는 논리였다. 난 그 당돌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난 재미없게 캐묻거나 하지 않고 웃으며 물었다.
“옆 연습실에서도 들리던가요?”
“예. 벽이 좀 얇나 봐요.”
“그래도 잘 안 들렸을 텐데요.”
모든 연습실의 벽면은 그냥 콘크리트에 벽지를 발라 놓은 것이 아니었다.
모두 꽤나 비싼 방음재를 발라 놓은 것이라 옆 연습실까지 소리가 들리는 것을 상당히 차단했다.
아무리 벽이 얇고, 소리가 새어 나가더라도 그 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진 않는다.
하지만 안나는 이 연습실에서 벌어진 모든 상황을 안다는 듯 말했다.
“잘 안 들렸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진 알아요.”
하긴 어느 정도 자신감이 없었다면 이렇게 당당하게 선배들이 대결하는 연습실에 쳐들어올 수 있을 리도 만무했다.
난 반쯤 체념한 채 또 한 명의 참관인을 인정했다.
그런 내 눈빛을 보자마자 갑자기 안나는 리처드를 향해 휙 돌아섰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뭐가 또.”
맥락 없이 나오는 비난에 리처드가 귀찮아 죽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리처드는 꽤나 샤프하고 단정하게 생겼지만 저렇게 대놓고 언짢은 표정을 하면 상당히 무서워지는 인상이었다.
안나는 지지 않고 이어서 뾰족한 어투로 말했다.
“선배님은 상대가 누구든, 어떤 마음이든 간에 이기기만 하면 상관없다는 건가요? 타티아나 선배님이 그렇게나 차분하게 대해 주셨는데 그걸 흙발로 걷어차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어머, 너무하시네요.”
안나가 숫제 비웃음까지 머금으며 비난을 이어 갔다.
“두 분이 어쩐 일로 대결에 이르셨는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분이 예의를 지켜 주시는 모습을 보였다면 최소한 그걸 과시적인 속주로 무시하진 않아야 했던 것 아닌가요?”
“뭐?”
“처음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모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두 번이나 기회를 줬으면 받아 주시는 시늉이라도 해 주셔야 하잖아요!”
“잠깐만…….”
“아, 물론 그렇게 어려운 길을 가고 싶진 않으셨겠죠, 선배님은 키도 더 크고 손도 크시니까 기교와 힘으로 타티아나 선배를 깔아뭉개고 싶으셨겠죠! 하지만 그러시면 안 되는 거예요!”
“…….”
리처드는 크게 당혹스러워했다.
나 역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안나가 열변을 토했다.
“그렇게 음악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단순하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대결의 승패가 결정나는 것, 저는 인정 못해요. 타티아나 선배님은 어디 그만한 기교가 없어서 그냥 당하고만 계셨는 줄 아세요?”
옆을 보니 클라브디야는 거의 기절할 듯 창백해져 있었다.
안나는 오해하고 있었다.
잘 들리지 않는 연습실 벽 너머로 나와 리처드의 연주를 듣고는 뒤에 이어지는 빠른 속주가 남자인 리처드의 것이라 생각한 듯했다.
물론 그게 상식적인 추론이겠지만…….
“제가 정말 어지간해선 이렇게 끼어들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냥 옆 연습실에서 듣고는 조용히 나가려고 했죠. 하지만 해도 해도 너무하시잖아요?”
“안나.”
“타티아나 선배님이 얼마나 속상하시겠어요? 두 번째로 라흐마니노프 전주곡까지 그렇게 뭉개 버리는 걸 듣고는 제가 다 화가 나서 정말……!”
“안나.”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잡았다.
날 돌아보는 안나의 눈빛엔 한 점 부끄러움도 없었다. 그 누가 가로막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순수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난 내 대신 이 대결을 정리해 준 안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저도 안나의 말에 동감해요. 고마워요.”
“타티아나 선배님.”
“그런데 안나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요.”
“그게 뭔가요?”
“…….”
급격하게 후회가 밀려들었다. 사태 파악을 빨리 하자마자 조금 일찍 안나의 입을 막았어야 했다.
너무 황당해서 넋 놓고 있었더니 그녀는 이미 너무 많은 말을 해 버린 상태였다.
난 그녀가 배신감을 느끼거나 자책하지 않기를 기도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리처드의 곡을 따라서 쳤어요.”
“……예?”
안나가 멀거니 되물었다.
갑자기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안나의 표정이 새하얗게 되었다. 정말로 미안했다.
“정말요……?”
“안나 미안해요. 하지만 리처드는 잘못이 없어요.”
내 말에 안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입만 뻐끔거리며 혼란스러워했다.
나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는 완전히 정면으로 내가 한 짓들을 비난한 셈이었고, 난 거기에 절절히 공감했다.
그런 비난에 내가 상처받을 일은 없었다. 되레 지금 상처받은 건 명백히 안나 쪽일 것이다.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그녀를 안아 주었다.
“괜찮아요.”
“서, 선배님…… 전 그럴 생각이 아니었…… 정말…….”
“저는 안나가 용기 있게 이 연습실까지 와 준 것도 고맙고, 또 들은 그대로 말해 준 것도 고마워요. 괜찮아요. 아무 문제도 없어요.”
“…….”
안나는 내가 조곤조곤하게 이야기하자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
애꿎은 후배 하나를 완전히 이상한 애 만들 뻔했다. 난 안나가 이렇게 저돌적인 스타일일 줄은 차마 몰랐다. 다음엔 조금 더 빨리 말리든가 해야지 원.
간신히 안나를 진정시키고 한숨을 내쉬는데 리처드가 다가왔다.
“난 그 후배처럼 생각한 적 없다?”
“흑…….”
“리처드!”
내가 나무라는 투로 그를 부르자 리처드가 양손을 들었다. 안나를 더 공격할 의도는 없다는 제스처였다.
리처드가 차분하게 말했다.
“타티아나. 차라리 네가 날 어떻게든 이기려고 굴었다면 좋았을 거야.”
“…….”
“하지만 넌 이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여.”
“그건…… 미안해요.”
어차피 변명밖에 되지 않겠지만 지금 난 뭔가 즉흥적인 대결을 펼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무작정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지만, 막상 상대를 두고 피아노 앞에 앉아 보니 정말 참담할 정도로 막막할 뿐이었다.
우울하게 사과하자 리처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야, 타티아나. 네가 제 실력을 제대로 보이지 못했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 네가 오전에 말한, 컨디션이 안 좋다는 말은 사실이겠지.”
“……그렇다면요?”
“실력이 아니라 대결 자체의 이야기야.”
리처드가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라는 듯 말했다.
“지금 넌 그냥 지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여.”
“……?”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럴 리 없잖아요. 제가 구세프 선생님에게 반항하고 싶었다면 굳이 내기를 걸 것도 없이 그렇게 했을 거예요.”
“내기의 이야기도 아니야. 아마 넌 자각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리처드는 어렵다는 듯 말을 흐렸다.
난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요새 약간 피곤한 건 사실이에요. 오늘은 승산이 그리 높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도 했고요. 하지만 제가 차일피일 미뤘어야 했나요?”
“그것부터가 이미 너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리처드가 제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억측은 그만둬 주세요.”
내가 처음부터 리처드를 이길 생각이 없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정말 리처드는 날 몰라도 너무 몰랐다.
난 단 한 번도 승부에 어설프게 임한 적이 없었다.
그건 내 컨디션이 어떻든 간에 관계없는, 내 승부욕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오늘 연주자로서 스스로 얼마나 엉망인지도 모르고 대결을 약속한 건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게 이길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모함이었다.
그렇게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되쏘려는 찰나 리처드가 쐐기를 박았다.
“그럼 계속해 볼래?”
“……예?”
“이번엔 속주로. 계속해 보자고.”
리처드가 고개를 까딱였다.
“속주 또한 엄연히 대결 방법 중 하나거든. 난 상관없어.”
곡들을 본래 템포보다 더 빠르게 연주하는 속주도 쌍방간 합의만 있다면 대결 기준으로 쓰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왜?”
“…….”
오늘은 더 이상 피아노를 치고 싶지 않았다.
“제가 진 걸로 끝내 주세요.”
“방금까지만 해도 지려는 생각 없다며?”
“……질 생각 없다고 해서 항상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죠.”
“이젠 다 귀찮아?”
조용히 침묵하자 리처드가 잠시 물끄러미 날 내려다보더니, 옆에 있는 두 후배에게 말했다.
“여기까지야. 다 들었지?”
“……선배.”
“이제 나가 줘. 둘이서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안나와 클라브디야가 나가고, 가만히 리처드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리처드는 꽤나 많이 실망했을 것이다.
난 바로 지금 이 순간도, 철부지처럼 구는 중이었다. 나도 이런 내가 싫다.
리처드는 날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이윽고 말했다.
“졌다고 인정하는 거지?”
“……예.”
“그러면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좀 내.”
“?”
그가 갑자기 리처드가 돌직구로 데이트 신청을 날렸다. 네가 이럴 줄은 정말 몰랐는데?
더듬거리며 말했다.
“가,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졌으니 내기 이행을 해야지.”
“그런 조건의 내기는 한 적이 없는데요?”
“무슨 조건?”
“제, 제가 왜 리처드와 데, 데, 데이트를 해야 하는데요?”
리처드는 무슨 소리냐는 듯 멀뚱거리며 내 얼굴을 보더니 킥 하고 웃었다.
“데이트? 그것도 재미있겠네.”
“그건 처음 했던 내기에 어긋나는……!”
“데이트라는 걸 굳이 내기를 통해서만 할 수 있는 건가?”
리처드가 처음 보는,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간 꼭 내 줘.”
내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