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타티아나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했다.
“…….”
생각도 못 한 리처드의 기습에 잔뜩 당황해서 데이트니 뭐니 자폭했지만, 머리를 식히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저 착각일 확률이 높았다.
타티아나는 기본적으로 리처드를 상식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렇게 신사답지 않은 일, 예를 들어 내기를 핑계로 여성을 데이트에 끌어들이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 믿고 있었다.
적어도 여태껏 봐 온 리처드는 그렇게 행동하며 타티아나에게 믿음을 주었다.
타티아나는 생각보다, 심지어 리처드 본인보다 더 리처드를 믿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태블릿 컴퓨터로 약속 장소를 검색해 보다가 양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침대에 머리를 박았다.
그런데 대체 왜 약속 장소가 모스크바 시내 한가운데란 말인가?
스스로 자초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처음 타티아나에게 시간을 내 보라고 했던 리처드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담백했다.
다른 이유 없이 그저 내기 이행에 관한 것만 타티아나에게 전하려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데이트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순간, 리처드의 눈에 장난기가 서렸고, 그걸로 모든 것이 정해졌다.
대체 무슨 일로 만나자는 거냐며 타티아나가 아무리 캐물어도 리처드는 대답해 주지 않고, 약속 시간과 약속 장소만을 강조할 뿐이었다.
나오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의미심장한 압력 또한 함께했다.
“아닐 거야…… 아니겠지……?”
침대에 얼굴을 파묻은 채 타티아나가 웅얼거렸다.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토요일을 맞이해 버렸다. 이젠 어떻게 돌이킬 수도 없었다.
가뜩이나 타티아나는 리처드에게 추태를 보인 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대결 내용도,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도 돌이켜 보면 모두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리처드를 그렇게 대한 지 불과 며칠이나 지났다고, 이렇게 미적거리다가 당일이 돼서야 도저히 못하겠다고 리처드를 바람맞혀 버렸다간 정말 그 어떤 경멸을 당해도 한 마디 반박도 못 하게 될 것이다.
“…….”
타티아나는 거기까지 가면 정말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최소한의 책임감은 보여야 했다.
약속 장소에 가서 리처드를 보고, 용건을 듣고 나서 거절하고 되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나가긴 나가야 했다.
타티아나는 힘없이 일어나서 한숨을 푹 쉬고는, 밍크 청바지와 니트를 입었다.
거기에 감색 코트, 폭스 퍼 머플러까지 목에 둘러 완전히 무장하고 나서 살그머니 자신의 방을 빠져나왔다.
그다음은 빅토르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조금 생각하던 타티아나는 일단 저질러 놓고 보기로 했다. 남자애들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한다면 흔쾌히 따라와 줄 것이다.
나중에 남자애들이라는 것이 밝혀진다고 해도 그 자리에서 끌려가진 않을 것 같았다.
타티아나는 문득 예전에 들었던 명언을 떠올렸다.
허락받는 것 보단 용서받는 것이 쉽다.
“…….”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이제 와서 그만두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저택의 경비를 맡고 있는 고용인들이 머물고 있는 숙소로 찾아갔다.
똑똑똑, 가볍게 노크하자 누군가 문을 열어 주었다.
“누구…… 아가씨?”
타티아나의 전속 경호원 빅토르 이바노비치 키셀로프는 눈을 비비며 문을 열다가 멈칫했다.
낮잠으로 약간 흐리멍텅했던 머리에 갑자기 비상 신호가 울렸다.
“무, 무슨 일입니까?”
“저 외출을 하려고 하는데…… 따라와 주실 수 있나요?”
휴일인데 미안하다는 듯 타티아나가 부탁했다.
빅토르는 한 점 귀찮음도 느끼지 않고, 되레 기뻐하기까지 했다.
그는 이 아가씨가 늘 피아노 연습에만 빠져 있는 것을 꽤 안쓰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휴일 외출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었다.
“멀리 나가시는 건 아니죠?”
“예. 그냥 시내에…… 학교 친구랑 만나기로 했어요.”
타티아나의 친구라고 해 봐야 한 달 전 집에 초대했던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 정도라는 것을 아는 빅토르는 그것을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금만 깊게 생각했다면 왜 타티아나가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말했는지 이상하게 여길 만도 했지만.
“알겠습니다. 오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빅토르는 길게 묻지 않고 쾌활하게 겉옷과 권총을 챙기며 나갈 채비를 했다.
타티아나는 그런 빅토르를 보며 더욱 미안해졌지만 빅토르는 타티아나의 표정을 다르게 해석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타티아나는 기억을 잃은 뒤로 너무 상냥해졌다. 경호원들은 기본적으로 휴일 따윈 없다.
경호 대상이 필요로 한다면 휴일이든 뭐든 반드시 따라나서야 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하지만 빅토르가 보기에 타티아나는 휴일에 빅토르를 움직이게 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것 같았다.
“가시죠! 아가씨.”
“아, 네.”
빅토르는 이 생각 많은 아가씨가 더 무언가 생각하기 전에 얼른 자동차 키를 집어 들고 앞장서서 나갔다.
* * *
모스크바에서 가장 젊은 층들이 많이 다니는 번화가는 신아르바트 거리였다.
타티아나와 리처드와의 약속 장소 역시 이곳이었다.
“지금부턴 은밀히 경호하겠습니다. 걱정 마시길.”
“예…….”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거리까지 타티아나를 데려다준 빅토르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게 빅토르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타티아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약속 장소로 향했다.
“…….”
12월 초 날씨는 타티아나에게 매섭고 차가웠다. 그만큼 타티아나는 방한 대책을 철저히 한 상태였다.
여전히 감기 기운은 있었지만 한낮에 거리를 못 돌아다닐 정도로 허약한 것은 아니었다.
홀로 거리를 걸으며 타티아나는 조금 불안해했다.
이렇게 휴일에 시내로 자신을 불러낸 리처드의 의중을 도저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턱대고 나왔더니 기분이 이상했다.
타티아나는 약속 장소인 한 매장에 다다라,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매장 앞에 서 있던 애쉬브라운 머리의 남학생이 한 손을 들며 알은체를 했다.
“왔구나, 타티아나.”
회색 겨울 코트를 입은 리처드가 인사해 왔다. 셔츠와 조끼까지 갖춰 입고 긴 목도리를 걸친 모습이 꽤나 세련되었다.
“리처드…….”
타티아나는 조금 안도하다가도 긴장했다.
리처드와 했던 내기는 타티아나가 구세프의 지도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 내기에 있어서 이 만남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리처드는 설명해야만 했다.
타티아나가 약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리처드가 조금 웃었다.
“우리 이렇게 학교 밖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지?”
“그렇네요.”
타티아나는 조금 사무적으로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무슨 일로 밖에서 만나자고 하셨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학교 안에선 할 수 없는 일 때문이지.”
“끝까지 가르쳐 주지 않으실 건가요? 미리 말씀드리는데, 전 깜짝 서프라이즈 같은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서프라이즈? 음, 타티아나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리처드가 약간 말을 골랐다.
“난 이게 네게 있어 선물이 되리라 생각해.”
“…….”
달갑지 않아. 타티아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변명이었다. 타티아나는 그에게 별 뾰족한 수가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차갑게 말했다.
“제 생일은 다음 달이에요. 지금 선물 같은 걸 받을 이유가 없어요.”
“타티아나, 난 같은 반 여자애들 생일 선물이나 챙겨 주고 다니는 이상한 놈이 아니야.”
“리처드, 장난치지 마시고…….”
“아, 이제 나오네.”
매장 안에서 패딩 점퍼를 입은 키 큰 남자 한 명이 나왔다. 타티아나는 깜짝 놀라서 반걸음 물러섰다가, 기성을 질렀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안녕.”
리처드의 옆에 선 것은 또 다른 중앙음악학교 8학년 학생, 한승우였다.
타티아나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리처드를 바라보았다.
“한승우가 왜 여기 있죠?”
“이제 좀 긴장이 풀려?”
“……?”
타티아나는 무슨 소리냐는 듯 리처드를 보다가 스스로 깨달았다.
리처드는 한 번도 단둘이 은밀하게 만나자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런 그에 비해 타티아나는 혼자 방에서 고민하고, 이불을 발로 걷어찼을 뿐이었다.
“으…….”
부끄러움에 꽉 쥔 주먹을 떠는 타티아나를 보며 리처드가 웃음을 베어 물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뭘 할 거죠?”
“그건…… 차차 즐거움으로 남겨 두고. 뭐든 간에 해가 지기 전엔 집에 갈 수 있을 테니.”
“이젠 제발 좀 알려 주시…….”
그때 타티아나의 스마트폰 벨이 울렸다. 그녀는 잠시 양해를 구하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빅토르였다. 타티아나는 올 게 왔다고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 아가씨. 외람되지만 여쭐 것이 있어 전화 드렸습니다.
“예.”
- 뭡니까? 그 두 놈?
적개심이 전파를 타고 전화를 통해 흘러나오는 듯해서, 타티아나는 스마트폰을 살짝 귀에서 떼었다.
- 설명해 주시죠.
“오늘 만나기로 했던 학교 친구들이에요.”
- 저 커다란 놈은 전에 봤었고…… 그 옆에도 아십니까?
“예.”
- …….
빅토르는 조금 상황 파악을 하려는 듯 침묵하다가 말했다.
- 일단 실례되지 않도록 지켜보겠습니다.
“고마워요.”
- 하지만 5시 전엔 반드시 귀가할 겁니다.
“알았어요.”
전화가 툭 끊어졌다.
타티아나는 차마 주위를 둘러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분명 저 어디에서 감시하고 있을 빅토르를 떠올렸다.
그가 당장 튀어나오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해야 했다.
그런 타티아나를 보며 리처드가 실없이 말했다.
“해가 떨어지면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와서 나랑 승우를 죽이겠군?”
타티아나는 이 와중에 그런 살벌한 농담이 나오냐는 듯 눈을 흘겼다.
“그럴 일 없도록 하세요.”
“괜찮아.”
리처드는 유쾌하게 코트를 펄럭이며 뒤돌았다.
“각오는 되어 있으니까.”
“각오가 아니라, 그럴 일 없게 하시라고요.”
“알았어, 알았어.”
리처드는 대충 대답하며 한승우와 앞장섰다.
타티아나는 갑자기 리처드와 뭔가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을 느꼈으나 별수 없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이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막연하게 두려우면서도 약간 기대가 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
리처드의 주도로 이 세 명이 처음 도착한 곳은 신발가게였다.
타티아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리처드에게 물었다.
“신발 사시려고요?”
“응.”
“지금요?”
“나 말고 승우 거야.”
“……?”
도저히 상황 파악을 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타티아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 뒤를 따라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리처드와 한승우는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리처드, 다음에 사도 되는데.”
“그게 벌써 2주일 전 이야기다. 닥치고 오늘 무조건 사.”
리처드는 험악한 말투까지 써 가면서 한승우를 닦달했다.
학교에 올 때야 지정된 구두를 신고 온다지만, 그 외에 한승우는 신발을 한 켤레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겨울에 신발을 빨고는 슬리퍼를 끌고 돌아다니는걸 보곤 리처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한승우는 힐긋거리며 뒤편을 바라보았다.
타티아나는 이젠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는지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들 뒤를 따라오며 주변을 구경하고 있었다.
“원래 우리 계획에 이런 건 없었잖아.”
“상관없어.”
“그녀가 곤란해 보이는데.”
“신경 쓰지 말고 넌 네 신발이나 사라고, 좀.”
리처드가 한승우를 퍽퍽 치며 매장 한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렇게 한승우가 벽면에 걸린 신발들을 구경하는 와중, 리처드가 타티아나에게 말을 걸었다.
“너도 하나 사지 그래.”
“…….”
타티아나는 재차 리처드에게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설명하라고 물어보려다가 계속 그러는 것도 바보같이 느껴져서 그만두었다.
어차피 해가 질 때까지다. 그때까지 그냥 리처드와 한승우, 이 두 사람과 어울려 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전 운동화를 신을 일이 없어요.”
“그래도 조깅화 같은 건…….”
“지금 저보단 저기 한승우나 도와주시지 그러세요?”
“자기가 알아서 고르겠지.”
“아닌 것 같은데요.”
리처드가 다시 한승우를 찾았다. 한승우는 한눈에 봐도 등산화로 보이는 신발을 들고는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야. 뭐 해, 도대체.”
리처드는 기가 막히다는 듯 그쪽으로 향했고 타티아나도 따라갔다.
한승우는 대체 뭐가 잘못되었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답도 없었다.
그대로 세 명은 한동안 한승우의 신발을 골라 준다고 머리를 맞대고 의논에 들어갔다.
한승우는 돈이 별로 없는지 튼튼하고 오래 신을 수 있는 신발을 원했고 리처드는 보다 깔끔한 것을 추천했다.
타티아나는 신발 끈 대신 와이어가 있어서 다이얼로 한 번에 조일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을 사라고 했다.
리처드는 신발 끈이 없는 그런 운동화는 딱 질색이었다. 그래서 왜냐고 물어보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신기하니까요.”
“…….”
타티아나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운동화들을 들여다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타티아나는 신발들을 구경하고, 한승우에게 신겨 보면서 즐거워했다. 리처드가 보기에 그녀의 감각은 약간 괴상했다.
“돌려놓고 와. 그게 뭐야 도대체?”
“왜요, 예쁜데.”
타티아나가 이번엔 새빨간 운동화를 가지고 왔다. 리처드는 어이가 없어서 당장 가져다 놓으라고 말했다.
시무룩해져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리처드는 실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