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9화 (59/1,277)

##  59화

한적한 일요일 오후.

난 침대에 누워서 뒹굴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멍하니 중얼거리다가 창 쪽을 바라보았다.

점심을 먹고 평소 같았으면 연습실에 있을 시간이었다. 그대로 별다른 일이 없다면 저녁 식사 때까지 연습실에 틀어박혀서 연습을 하는 편이었다.

이렇게 늘어져 있으려니 정말 기분이 이상했다.

“…….”

오른손에 채워져 있는 손목 보호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 손목 보호대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리처드가 제안한, 2주일간은 피아노를 전혀 치지 않겠다는 약속의 증표였다.

참 어설프고, 근거 없고, 무책임한 방법이지만…… 난 리처드에게 설득되었다. 무턱대고 그냥 쉬어 버리라는 그의 말에 혹했다.

실제로 난 피아노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뒤로 하루도 쉬어 본 적이 없기도 했고.

그런데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난 벌써부터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래도 되는 거야, 정말? 진짜 피아노를 안 쳐도 된다고?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선 버릇처럼 옷을 갈아입고 연습실로 가려다가 손목에 족쇄처럼 채워진 보호대를 보고 나서야 멈칫했다.

그 정도로 내 생활은 패턴화되어 있었다.

아픈 적도 많았고, 기절해서 의식이 없었던 적도 있었지만 하루 이상 누워 있던 적은 없었고, 항상 일어나자마자 건반부터 찾았다.

내게 있어서 연습이란 그냥 숨 쉬는 것과 별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연습을 안 하려니 정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답답함을 끌어안고 3시간을 뜬눈으로 멍 때리다가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야 이대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껏 리처드와 한승우가 만들어 준, 정말 10여 년 만에 맞이하는 온전한 휴일이었다. 바보처럼 보낼 순 없었다.

평소엔 의식하지 않으려 하지만 난 쓸 수 있는 돈도 많고 이번엔 시간까지 있었다.

그야말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 난 즐거운 마음으로 과연 무엇을 해야 재미있을지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또 3시간 동안 멍 때렸다.

내가 평소에 뭘 했던가 아무리 떠올려 봐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운동을 즐기지도 않았고, 다른 특별한 취미를 가진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소비를 하며 스트레스라도 풀기 위해 외출하자니, 바로 어제 나가서 다쳐 온 마당에 또 나가겠다고 하는 것은 너무 생각 없는 짓인 것 같았다.

그건 날 걱정하는 사람들을 너무 무시하는 일이었다.

외출은 접어 두고, 집 안에서 뭘 할 수 있을지 궁리하다가 문득 우울해졌다.

내가 본래 재미없는 인간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남들처럼 어떻게 놀아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내가 아는 노는 방법은 연습곡 부점 연습하기, 조성 바꿔서 쳐 보기 등등 피아노로 하는 것뿐이었다.

난 피아노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점심까지 먹고 나서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다시 침대에 드러누운 것이 바로 지금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죄악감이 첩첩산중으로 짓쳐들었다. 그 와중에 금단현상처럼 자꾸 피아노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난 그 욕구를 지워버리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숙제도 예습도 미리 다 해 놔서 딱히 없지만 교과서를 펴 들었다.

세상엔 할 게 없어서 공부를 하는 미친 사람들도 있다고 하던데, 내가 그런 짓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책을 펴 들고 펜을 쥐었다가, 손목이 고정되어 있어서 이걸 잠깐 풀까 어쩔까 고민할 때였다.

“아가씨.”

나제즈다가 문을 노크했다. 난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예, 있어요.”

“……맙소사, 정말 괜찮으신 건가요?”

내가 손목을 다쳤단 이야기를 들었는지 나제즈다는 내 방에 들어오자마자 내 손목에 채워진 손목 보호대부터 보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을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화를 낸다.

“아가씨, 왜 이 와중에도 책을 펴셨어요. 정말이지…… 아가씨는 푹 쉬셔야 한다니깐요.”

“방금 편 거예요.”

“거짓말 마세요.”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책 편 지 2분도 안 되었는데.

나제즈다는 내 말을 믿지 않고 책상으로 가 책을 탁 덮었다. 그러곤 단호하게 말했다.

“쉬세요, 아가씨.”

“나제즈다. 저 이러다가 죽겠어요.”

“예? 그런 무서운 말씀 하지 마시고, 푹 쉬시면 되잖아요.”

“아뇨, 쉬다가 죽겠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

난 되도록 나제즈다가 날 걱정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싶었기에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할 일이 없어서 멍 때리다가 죄악감과 금단현상으로 죽겠다고? 휴일인데도 당직인지 일하러 나온 나제즈다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얌전히 나제즈다가 시키는 대로 침대에 누웠다가, 그녀가 나가고 벌떡 일어났다.

뭐라도, 뭐라도 해야 했다.

난 두터운 옷들을 꺼내서 입었다.

스웨터에, 아우터에 목도리까지 거의 외출용 무장을 하고 나서 난 그대로 집 밖으로 나가 벨카를 찾았다.

벨카는 자신의 집 안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벨카는 이 혹독한 겨울을 몇 번이나 이겨 왔겠지만 그래도 약간은 안쓰럽다.

“벨카.”

집 앞에 쪼그려 앉아서 조용히 부르자 벨카가 날 알아보고는 귀를 쫑긋 세우며 고개를 들었다.

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벨카가 집 밖으로 나와선 내게 몸을 부볐다. 난 양손으로 벨카를 끌어안고 쓰다듬었다.

“춥지 않아요?”

“컹.”

내 착각인지 짖는 소리가 좀 탁해진 것 같다. 추워서 그런 모양이다.

조금 더 강하게 벨카의 등허리를 손으로 마구 휘저었다. 혹시 차갑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변함없이 따뜻했다. 다행이었다. 내 손이 더 차가운 것 같았다.

“우리 따뜻한 데로 갈까요.”

벨카의 귓등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밖은 너무 추웠다.

보통 내가 이렇게 권유하면 벨카는 얌전히 내 뒤를 따라와 주곤 했다.

“컹.”

하지만 가끔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오늘이 그랬다. 벨카는 머리를 뒤흔들며 내 손을 뿌리치더니 몇 걸음 멀어졌다.

내가 망연히 바라보자 힐긋 날 보더니 다시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는 대신, 앞장서서 정원 쪽으로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같이 산책하자는 건가?

난 벨카와 산책하는 것도 좋아했지만 겨울이 찾아오고부터는 찬 바람만 조금 잘못 들이마셔도 바로 기침부터 하는 내게 그 역할은 맡겨지지 않았다.

잠시 내 복장을 점검했다. 꽤나 따뜻하게 입고 있었다. 어제 외출했을 때도 괜찮았지 않은가? 오늘도 벨카와 잠시 걷는 것 정도는 괜찮으리라.

* * *

“콜록, 콜록.”

“아가씨…… 아니, 그러길래 왜 그 추운 날 밖에서 2시간이나 개 산책을 시키신 겁니까? 이런 말 죄송합니다만, 제정신이십니까?”

“…….”

주말 이후로 빅토르가 나한테 좀 심하게 굴었다.

물론 난 지은 죄가 많았기에 빅토르에게 약해질 수밖에 없었지만, 제정신이 아니냐니 해도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난 살짝 불만 어린 눈으로 빅토르를 바라보다가 재차 기침했다.

“……콜록.”

솔직히 제정신이 아님은 인정해야 했다. 낮이라서 괜찮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어젠 기온이 더 떨어져서 한낮에도 영하 7도였다고 한다.

그 날씨에 2시간을 벨카와 밖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부터 해서 어제 당일은 그래도 괜찮았는데, 오늘 자고 일어나니 감기가 심해져 있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래도 학교엔 가겠다고 어떻게든 교복을 입고 나왔더니 빅토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 참…… 오늘은 그냥 쉬시지요, 아가씨.”

“……싫어요. 학교 가고 싶어요.”

어제 그렇게 뒹굴어도 결국 뭘 해야 할지 찾지 못했다. 오늘도 쉬어 버릴 순 없었다. 난 빅토르에게 말했다.

“37.5도라면 이전에도 몇 번 이런 적 있었잖아요. 콜록, 괜찮아요.”

이 정도 미열은 몇 번이고 난 적이 있었다. 그때도 학교에 가고 연습도 하고 평범하게 지냈다.

난 거의 감기를 달고 살고 있었고, 이정도 미열은 버틸 만했다. 이 정도 아프다고 학교를 다 쉬었다간 아마 겨울엔 출석일수도 제대로 못 채울 것이다.

빅토르는 약간 인상을 썼다.

“그땐 기침을 이렇게 하시진 않았습니다. 지금이 더 심한 것 아닙니까? 기침이 굉장히 깊으신 것 같습니다만.”

“괜찮아요. 마스크 할게요.”

“마스크 하시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리고 학교도 우선 갔다가, 일찍 조퇴할 거예요. 어차피 연습도 못 하니깐요.”

그리고 난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손목 보호대가 보였다. 이 손으론 레슨이고 연습이고 아무것도 못 한다. 난 오전 교과 수업만 하고는 조퇴해야 할 상황이었다.

이렇게까지 말하자 빅토르도 더는 말리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가시죠…….”

차에 타자 내 기침 소리를 들은 소로킨과 자하르 역시 나에게 쉬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말했으나 난 약간 고집을 부려서 일단 학교에 갔다.

도착하자마자 아나스타샤가 날 보더니 반갑게 인사하려다가 말고 기겁해서 달려왔다.

“무, 무슨 일이야, 타티아나!”

“살짝 다쳤어요…… 콜록.”

“아니, 너…….”

아나스타샤가 우왕좌왕하며 내 손을 만져 보려다가, 만져서 더 잘못되는 게 아닌가 싶었는지 다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순간 아나스타샤에게만큼은 사실을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굳이 리처드와 한승우의 이름이 나올 것도 없었다.

그냥 난 정말 괜찮고, 며칠 땡땡이 치고 놀고 싶어서 쇼 하는 중이라고만 해도 아나스타샤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아마 2주일 동안은 심심할 일 없도록 해 주겠다며 자신도 나랑 같이 조퇴해 버릴 확률도 높았다.

약간 고민하면서 아나스타샤를 보고 있는데, 그녀가 거의 울상이 되어서 한탄조로 말했다.

“원래 환자 같던 애가 진짜 환자가 되어 버렸네. 어떡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나스타샤가 너무 걱정 어린 얼굴을 해서 좀 미안해질 지경이었는데, 그 모든 미안함이 한 번에 싹 날아갔다.

원래 환자 같던 애라는 건 뭐야 대체?

하지만 아무리 내가 환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들, 손에는 보호대를 차고 입에는 마스크를 하고…… 말에 설득력이 하나도 없었다.

할 말을 잃자 아나스타샤가 진지하게 물었다.

“전치 몇 주래? 심각해?”

“…….”

어쨌든 난 연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구세프 선생님만 제대로 속여 넘기면 되는 일이긴 했지만 적을 속이려면 아군을 먼저 속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전치 2주요.”

“그래……? 그래도 많이 심하진 않은 모양이네. 후유증은 안 남는대?”

“절대 안 남을 거예요.”

그건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내 말을 듣고서야 아나스타샤는 약간 마음이 놓인 듯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속상한 마음이 풀리진 않았는지 약간 먹먹하게 말했다.

“왜 나 없는 사이 다치고 다녀…… 감기도 심한 것 같고. 내가 미쳐, 정말…….”

“…….”

나 진짜 그냥 얘한텐 사실대로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나도 사람이고 양심이라는 게 있는데, 어떻게 여기서 시치미를 뚝 떼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나스타샤, 저…….”

“안녕, 타티아나. 어젠 잘 쉬었어?”

막 사실대로 털어놓으려는 순간, 옆을 보니 이제 막 리처드가 등교하며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난 약간 어색하게 답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리처드.”

“손목은…… 보호대 차고 왔네.”

“그래야죠.”

“그래.”

“……?”

아나스타샤가 이상하다는 듯 우리 둘을 쳐다보았다.

난 리처드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친밀하게 인사하는 것을 처음 보았고 그건 아나스타샤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별 희한한 일을 다 보겠다는 듯 보더니 갑자기 내게 물었다.

“타티아나, 너 뭐야. 너 리처드랑 무슨 일 있지.”

“무, 없어요?”

“없긴 뭐가 없어. 저번 주에도 뜬금없이 이것저것 캐묻더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아나스타샤에게만큼은 사실대로 말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리처드와의 일을 중점으로 물어보니 대답하기가 영 곤란했다.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하지. 열 때문인지 머리가 잘 돌지 않는다.

그냥 리처드, 한승우와 토요일에 만났다고 해도 상관없었지만 그렇게 이야기할 바엔 차라리 리처드의 계획에 대해 처음부터 털어놓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럼 자연스레 이야기가 길어질 수밖에 없다.

내가 당분간 이 손목 보호대를 차고 다닐 생각이 있는 한, 듣는 귀가 많은 교실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 설명해 줄게요, 아나스타샤. 나중에.”

“……그래야 하는 이야기야?”

“예. 이따가…… 점심에 이야기해 줄게요.”

“……알았어.”

아나스타샤는 일단 납득한 듯 물러나 주었지만 그리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은 듯했다.

난 아마 사실대로 털어놓아도 아나스타샤가 화를 낼 것 같다는 직감을 느꼈다.

그녀가 화를 내는 건 정말 싫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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