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교과 수업들이 끝나고, 난 가장 먼저 미하일 선생님을 찾아갔다.
어쨌거나 부상을 당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지도 선생님인 미하일 선생님에게 보고를 해야만 했다.
인대 부상으로 전치 2주였다. 자칫 연주자 인생과 직결될 수도 있는 것으로 거짓말을 하려니 양심이 쿡쿡 찔렸다.
하지만 기껏 리처드가 준비해 준 것들을 이제 와 그만둘 순 없었다. 정말 눈 딱 감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생님을 속여 보기로 했다.
“기침을 하는 걸 보니 감기까지 걸린 것 같구나. 일찍 돌아가서 무조건 안정하거라. 알겠지? 넌 아직 나이도 어리니 푹 쉬면 금방 나을 수 있을 게다.”
마음을 굳게 먹고 진단서를 내밀었다. 미하일 선생님은 처음엔 깜짝 놀라더니 진단서를 보고는 의외로 무덤덤하게 내 휴식을 허락해 주셨다.
난 다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죄송할 건 무어냐. 물론 다친 건 안됐다만 심한 것 같진 않고, 그냥 삐었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이번 기회에 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가요?”
“그래.”
안경을 고쳐 쓰며 그렇게 말씀하시는 미하일 선생님의 태도는 어쩐지 리처드와 닮아 있었다.
선생님의 입장에선 내가 몇 주간 쉬게 된 것이 시간낭비겠지만, 그런 말씀은 일절 없었다.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조금 궁금하기도 해서,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어쨌든 2주일간 잠시 피아노를 놓고 쉬면서 다른 것들도 해 보거라. 손목은 절대 쓰지 말고. 알았지?”
“예.”
면담은 생각보다 가볍게 끝났다. 난 미하일 선생님을 크게 걱정시키진 않은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 놓였다.
“…….”
그리고 내가, 리처드와 한승우가 이 쇼를 만들게 된 장본인이 남아 있었다.
구세프 선생님의 레슨실로 향하며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사실 공식적으로 구세프 선생님과 나 사이엔 아무것도 없었다.
지난 한 달간 거의 일방적으로 구세프 선생님에게 계속 찾아가서 지도를 구한 것은 전적으로 내 쪽이었다.
선생님과 나 사이엔 약속이 하나 있었고, 난 그 시기를 앞당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아쉬운 것은 내 쪽이었고, 조금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조금 예외적인 사제관계가 이루어졌고, 그 지도는 정말 고되고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한 달.
난 리처드가 슬럼프라고 말할 정도로 이상해져 있었다.
구세프 선생님의 지도는 어느 한 곳 잘못된 데 없이 훌륭했지만, 그 훌륭한 지도를 받으면서도 내 연주는 딱딱해졌고, 즉흥적인 악상을 떠올리는 데에도 문제가 생겼으며 무엇보다 의욕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기계적으로, 관성적으로 해 오던 연습을 할 뿐이지 거기엔 어떤 향상심 같은 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엉망진창인 내 상황은 구세프 선생님도 잘 알고 계신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진단서까지 보여 드리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화를 내실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슬퍼하실까?
그런 유치한 생각을 하며 구세프 선생님의 연구실 앞에 서서 머뭇거리다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평소와 다름없는, 건조하면서도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특별히 연기를 하거나 하진 않았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래. 타티아나.”
의자에 기대어 앉은 채 담배를 물고 있던 구세프 선생님이 날 돌아보았다. 날카로운 눈빛이 날 통째로 저밀 듯이 번뜩였다.
그렇게 잠시간 날 보던 구세프 선생님이 말했다.
“넌 안녕하지 못하겠지?”
“…….”
눈만 내려 내 손목을 확인한 구세프 선생님은 어딘가 약간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목소리에 비난이 섞였다.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냐? 깁스까지 하진 않은 걸 보니 심각해 보이진 않지만, 너처럼 어린 나이일수록 잘못 다치면 안 된다는 걸 모르느냐?”
미하일 선생님과 달리 구세프 선생님은 정색을 하고 화를 냈다.
구세프 선생님은 내가 내민 진단서도 받아서 살펴보더니, 한숨을 푹 쉬고는 날 다시 바라보았다. 이걸 어떻게 할까 고민하시는 모습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제아무리 구세프 선생님이라도 날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껏 해 봐야 이론 공부 정도일 텐데 그 정도야 문제없…….
“잘되었군. 그 오른손이 나을 때 까진 고도프스키를 쳐라.”
“……예?”
당황해서 되묻자 구세프 선생님이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레오폴드 고도프스키 말이다. 그가 쓴 왼손 연습곡들을 치면 되겠군. 좋은 기회라 생각해라, 타티아나.”
“……콜록.”
난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레오폴드 고도프스키. 19세기에 살았던 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의 이름이었다.
별명은 피아니스트들의 피아니스트. 당대에 기교로는 그를 따라갈 피아니스트가 없어 공연을 열면 일반 청중만큼이나 피아니스트들이 그의 연주를 보러 찾아가곤 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다.
그리고 그 엄청난 기교를 기반으로 작곡된 곡들은 난해하고 어렵기로 이름이 높았다.
난곡을 쓰기로 유명한 리스트의 곡들도 기교적으로 고도프스키의 곡들에 비하면 쉬운 편에 속할 정도였다.
때문에 현대에 와서는 보리스 베레조프스키나 마르크 안드레 아믈렝 같은 소수의 천재 비르투오조들이나 고도프스키의 곡들을 다시 재현해 내곤 할 뿐이다.
그런데 그걸 지금 나더러 치란다.
난 구세프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다 알아들었지만, 듣고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망연자실하게 되물었다.
“고도프스키의 왼손 연습곡이라면…… 쇼팽 연습곡을 편곡한…… 그 곡들 말씀이신가요?
고도프스키가 작곡, 혹은 편곡한 곡들 중엔 쇼팽 연습곡에 의한 연습곡이라는 것도 있었다.
쇼팽의 연습곡들을 편곡해서 한층 더 난곡의 경지로 끌어 올린 작품들이었고,
총 53곡 중 22곡은 왼손만을 사용해서 연주하도록 만들어놓았다.
양손으로 연주해도 어려운 쇼팽의 연습곡을 왼손 하나로 치도록 한 것이다.
고도프스키가 지닌 별명들 중 하나가 왼손의 사도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삐딱하게 날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른손을 못 쓰는 이번 기회에 집중적으로 왼손을 단련해 놔라. 앞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게다.”
“……진담이세요?”
“내가 농담 같은 걸 하는 걸 본 적이 있느냐?”
“…….”
구세프 선생님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강적이었다. 미안해, 리처드.
2주일간 휴가를 얻으려다가 팔자에도 없는 고도프스키를 연습하게 생겼다.
전 세계를 뒤져 봐도 아마 열네 살에게 고도프스키를 시키는 선생은 없을 것이라 장담한다.
정말 대단한 학교에, 대단한 선생님이다.
“……후후.”
“뭘 웃느냐?”
나도 모르게 조금 웃었더니 구세프 선생님이 물었다. 난 선생님과 눈을 마주쳤다.
오른손을 다쳤으니 왼손으로 할 수 있는 연습곡을 하라는 것도 좀 무자비하긴 해도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당연히 해야 한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는 구세프 선생님을 보니 어쩐지 마음이 편안하게 가라앉는 기분마저 들었다.
“알겠습니다.”
“……음?”
“무슨 곡부터 하면 될까요?”
“어디보자, 10-4번이나 10-12번 같은 것이 좋겠군. 고도프스키는 각각 몇 번이라고 명명했는지 모르겠다.”
26곡의 쇼팽 연습곡을 모티브로 53곡을 썼으니 당연히 곡 넘버링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콜록, 도서관에 내려가서 악보를 빌려 올…….”
“농담이다.”
“……?”
구세프 선생님은 한껏 인상을 쓰고 있던 얼굴에 힘을 풀더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농담이었다, 타티아나.”
“농담이요?”
“그래. 원 참, 진지한 것도 이 정도면 병이군, 병.”
한숨을 푹 내쉬더니 내 쪽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열네 살에게, 그것도 다친 학생에게 고도프스키를 시킬 정도로 내가 미친놈으로 보이나?”
“……어차피 왼손 연습곡들은 오른손을 안 쓰니…….”
“그래서 아픈 오른손은 등 뒤로 묶어 두고 왼손만 써서 연습을 하겠다? 넌 스스로가 인간이 아니라 무슨 기계라고 생각하는 게냐?”
구세프 선생님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말했다.
난 거기에 반박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지금이야 실제로 부상을 당한 상태도 아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별문제가 없었지만, 만약 내가 정말 오른손을 다치게 된 상태에서 구세프 선생님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면 이렇게 태연하게 반응할 수 있었을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전…….”
“됐다. 간만에 눈이 좀 살아 왔길래 농담이나 좀 해 보려 했더니, 내가 잘못 본 모양이다.”
“…….”
아무런 대꾸도 못 했다. 구세프 선생님 역시 그 이상 이러쿵저러쿵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담배 한 대를 끝까지 태우고, 재떨이에 비벼 끄시고는 날 불렀다.
“타티아나.”
“예.”
“고도프스키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
“…….”
사실 그에 대해선 깊게 공부한 적이 없어서 잘 모른다. 연주자들을 다룬 책에서 봤을 뿐이다.
“고도프스키는 세상엔 그리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테크닉으로는 최고의 연주자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기교적으로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열 손가락들을 완전히 따로 구분해서 흡사 10성부 연주를 하는듯한 효과를 낼 줄도 알았다고 하죠.”
“그리고.”
“……글쎄요. 아인슈타인과 친구였다는 것 정도?”
“그래.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고도프스키의 팬이긴 했지.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구세프 선생님은 머리를 긁적이시더니 재차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도프스키는 어마어마한 연주 실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완벽주의 때문에 무대나 녹음실에선 제 실력을 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나?”
“……그런가요.”
“그래. 그는 당대의 모든 피아니스트들로부터 찬사를 받았지만 불행했다. 늘 강박관념에 시달렸고.”
선생님은 그리고 잠시 말을 끊었다가 날 똑바로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피아노를 떠나서는 비참했다.”
“…….”
“네가 그렇게 살진 않았으면 좋겠군.”
고도프스키는 세기의 피아니스트였다.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이라면 응당 닮아야 할 연주자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구세프 선생님은 정면으로 그렇게 살아선 안 된다고 말했다.
절대 날 그렇게 가르치진 않겠다고 정확하게 그 뜻을 전했다.
구세프 선생님은 손을 내저었다.
“가서 쉬어라.”
“……예.”
“기침을 하는 걸 보니 감기도 걸린 것 같은데, 몸조리 잘 하고.”
아픈 기색 안 보이려 했는데 나도 모르게 몇 번 기침을 한 모양이다. 그런데 어쩐 일로 걱정을 다 해 주시지?
조금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았으나 구세프 선생님은 할 말 없으면 나가라는 듯 문 쪽으로 손짓할 뿐이었다.
* * *
오늘 할 일은 다 마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피아노는 칠 수 없는 것으로 선생님들에게 말까지 다 전했으니 연습실로 갈 일도 없었다. 이대로 조퇴해서 집으로 갈 생각이다.
이렇게 대놓고 땡땡이를 쳐 본 것은 처음이지만, 어쩐지 조금 두근거리기도 했다.
“콜록…….”
사실은 진짜 아프기도 했고. 아무래도 기침이 자꾸 심해진다.
그냥 돌아가기 전에 아나스타샤를 찾아서 이야기를 좀 하려고 교실로 다시 돌아왔다.
운 좋게도 아나스타샤는 교실에 있었다. 리처드도 함께.
“…….”
운 나쁘게도 둘 사이의 분위기는 상당히 험악해져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리처드를 낮게 윽박질렀다.
“그래서, 너랑 승우 한이랑 둘이 타티아나를 주말 내내 끌고 다녀서 손목도 다치게 하고 감기까지 심해지게 만들어 놨다는 것 아냐.”
“…….”
“정신 있어? 걔 안 그래도 몸 안 좋은 거 몰라?”
감기는 일요일에 내가 2시간 동안 밖에 있다가 심해진 것이지만, 아나스타샤는 내가 토요일 외출로 인해 그리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리처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묵묵히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그랬어. 타티아나에겐 미안할 따름이지. 하지만 아나스타샤 너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잖아.”
“뭐?”
갑자기 아나스타샤가 불식간에 달려들어 리처드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러곤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너 이 □□□□□. 조금 괜찮은 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완전 □□□잖아?”
아나스타샤가 욕설을 퍼부어도 리처드는 가만히 아나스타샤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리처드보다 키가 작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한 대 후려치기라도 할 기세였다.
이렇게까지 폭력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그녀는 처음 보았다. 난 기겁해서 끼어들었다.
“아나스타샤! 그만해요.”
“타티아나…….”
아나스타샤가 그제야 내가 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손을 놓고 물러섰다. 하지만 표정은 굉장히 안 좋았다.
난 급히 말했다.
“모두 오해예요, 아나스타샤. 리처드는 절 도와준 거예요.”
“도와? 뭘?”
“그게 전부…….”
“타티아나.”
리처드가 날 불렀다. 난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해가 안 가서 물었다.
“왜요……?”
“그럼 내가 설명해야 하잖아.”
왜 자신이 굳이 시간을 내서 내게 그런 핑계까지 만들어 주었는지 이유를 설명하기 싫다는 말이었다.
정확하게 자신이 감수할 수 있는 귀찮음은 거기까지고, 그 이상은 싫다는 소리였다.
난 그게 한편으론 이해가 가면서, 한편으론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험악한 오해를 받아?
“싫어요. 말할래요.”
“……그래?”
“아나스타샤는 이해해 줄 것이라 믿어요.”
난 가족들도, 선생님들도 속이고 있지만 아나스타샤에게는 주말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할 생각이었다. 한 명 정도에겐 마음 편하게 말하고 싶었다.
잠시 날 보던 리처드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든가.”
그리고 그는 교실 밖으로 휙 나가 버렸다. 아나스타샤는 어딜 가냐며 붙잡으려고 했지만 내가 뜯어 말렸다.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 잠깐만요. 제가 설명해 드…… 콜록, 콜록. 설명해 드릴게요.”
“설명이고 자시고 그럼 저 자식도 데리고 와야……. 타티아나, 너 괜찮아?”
“괜찮…… 콜록.”
뭐지…… 갑자기 눈앞이 핑 돈다.
아나스타샤가 옆에서 날 부축했다. 부축? 왜 부축을 하지. 난 멀쩡히 설 수 있는…….
“하…… 아나스타샤…….”
“너 열이…… 열이 왜 이렇게 높아?”
이마에 닿는 아나스타샤의 손이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웠다. 그만큼 이마가 뜨거워져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제대로 설 수가 없었다. 난 간신히 아나스타샤에게 부탁했다.
“미안해요…… 저 주차장까지만 좀 데려다주실래요……?”
“아,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아나스타샤에겐 계속 미안하고 면목 없을 뿐이다. 혹여나 옮지 않았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