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의 위클리 리사이틀을 축하하는 파티 이후로도 지난 한 달간 몇 번이고 베르체노프가에 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 을씨년스러운 타티아나의 방은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텅 빈 방에 정말 최소한의 가구들만 놓여 있었다.
화사하게 뭐라도 들여다 놓았으면 좋겠건만, 타티아나는 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말로 미루기 일쑤였다.
이 방은 순전히 타티아나가 스스로 원했기에, 이렇게 휑하기 짝이 없는 상태로 거의 방치되어 있는 것이었다.
“아나스타샤…….”
방 한편에 있는 침대에 누워 있던 타티아나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고개를 돌려 아나스타샤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더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아직 오후 레슨 시간이 남았는데…….”
“괜찮아.”
아나스타샤는 학교에서 갑자기 열이 올라 비틀거리는 타티아나를 부축해서 차에 태우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함께 동승해서 베르체노프가에 왔다.
타티아나는 열이 올라 혼미한 상태에서도 아나스타샤에게 계속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레슨은 받아야죠, 아나스타샤…….”
작게 콜록거리던 타티아나가 말했다.
“전 어쩔 수 없이 자업자득이지만…… 아나스타샤는 이렇게 시간 낭비하실 필요…… 없어요.”
“……타티아나.”
아나스타샤는 약간 샐쭉하게 말했다.
“시간 낭비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
오후 레슨도 내팽개치고 병문안을 온 친구에게 시간 낭비하지 말라는 것은 필요 이상으로 차가운 말이었다.
타티아나도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타티아나와 친하게 지낸 지 두 달이 넘어가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타티아나는 비슷했다.
재벌가의 영애이면서도 항상 조금 우울하고, 늘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관조하는 듯한 모습이고, 가끔은 애처럼 달라붙다가도 곧 명확하게 선을 긋곤 했다.
아나스타샤는 약간 섭섭하긴 했지만, 이젠 타티아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타티아나. 그렇게 범생이 같은 소리 하지 마.”
“예……?”
“아직도 날 몰라? 내가 학교 같은 걸 신경 쓸 것 같아?”
아나스타샤가 조금 더 다가가면 타티아나는 쉽게 태도를 무너뜨리곤 했다.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타티아나의 손을 아나스타샤가 쥐었다. 타티아나는 감전이라도 된 듯 어깨를 떨었지만 손을 뿌리치거나 하진 않았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타티아나가 말했다.
“감기 옮아요…….”
“옮으면 같이 드러눕지 뭐.”
“……그냥 학교 가기 싫으신 것 아니에요?”
“응.”
“그런…… 하아…….”
무슨 말을 하려던 타티아나가 곧 한숨을 쉬더니 말을 삼켰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 아나스타샤는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열 때문에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다가 실수하는 것은 싫었는지, 침착하게 말을 정리한 타티아나가 이윽고 조용히 말했다.
“아나스타샤…… 사실 저도 연습하기 싫어서 꾀병을 부리고 있어요.”
“무슨 소리야? 이렇게 열이 나는데.”
“감기 말고요…….”
타티아나는 이불 속에 들어가 있던 오른손을 꺼내어 보였다. 그 손목엔 뭉툭한 손목 보호대가 둘러져 있었다.
타티아나는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이 손이요…… 사실 하나도 안 다쳤어요.”
“……응?”
“멀쩡해요. 진단서는 조작된 거고요.”
“뭐라고?”
아나스타샤는 불과 30초 전에 범생이 같은 소리를 하던 친구가 진단서를 조작하면서까지 연습을 쉬려고 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예.”
아나스타샤는 멍하니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타티아나는 적어도 피아노에 있어선 학생들 중 그 누구보다 진지하고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냥 연습하기 싫다고 꾀병을 부릴 친구가 아니었다.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텐데, 타티아나는 그저 담담히 말했다.
“제가 그랬어요. 연습을 하기 싫어서…… 손목이 다친 척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 콜록, 리처드와 한승우는 절 도와준 것에 불과하고요.”
“무, 뭘 도와줬는데?”
“제가 의심받지 않고 다친 사람이 되는 것을요. 진단서에 관한 것도 저 혼자선 못했겠죠…….”
“…….”
아나스타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벌컥 화를 내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 타티아나가 리처드, 한승우와 한 일을 듣고 나니 기분이 걷잡을 수 없게 안 좋아졌다.
무슨 일인진 몰라도,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했다면 훨씬 더 확실하게 잘할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체 왜 그 둘이지? 그 애들이 믿음직스럽기라도 했어?
하지만 왜 자신을 부르지 않고 그 애들과 무언가를 기획하고, 시행했냐고 따져 물을 순 없었다.
대답을 듣는다면 지금보다 기분이 더 안 좋아지리란 것이 확실했기에. 그리고 기분에 따라 내뱉은 말은 보통 상대를 상처 입히기에.
조금 어두워진 아나스타샤를 보며 타티아나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리처드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모두 저 때문이고 제가 잘못한 거예요.”
하지만 책임소재에 관한 것을 명확히 하는 데엔 주저함이 없었다.
조금은 나누어도 좋으련만, 타티아나는 항상 모든 것을 홀로 감수하길 원하는 듯했다.
아나스타샤는 다시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타티아나가 잠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더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전 아나스타샤가 이렇게 신경 써 주시면 안 돼요.”
“…….”
“돌아가세요, 아나스타샤.”
다시 한 번, 거부를 표하곤 손을 놓아 버렸다.
크게 흔들리는 눈으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더니, 고개도 저편으로 돌려 버렸다.
아나스타샤는 이전에도 몇 번이고 타티아나가 이런 적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처음엔 그냥 원래 약간 차가운 애인 줄만 알았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기도 했다.
신경 쓰지 말라고 이렇게까지 거부하는 애를 굳이 가까이할 정도로 아나스타샤는 인정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젠 그렇게 내버려 두면 이 애가 혼자 울어 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타티아나.”
“……예, 윽?”
아나스타샤는 의자에서 일어나서, 침대 위로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양손으로 타티아나의 머리를 잡고 정면으로 고개를 돌려놓았다. 그 무자비한 손길에 타티아나가 놀랐는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항하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렸으나 감기에 걸린 몸으로 아나스타샤의 힘을 이겨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아나스타샤가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날 너무 우습게 보는 것 아니야? 겨우 연습이 싫다고 공들여서 핑계를 조금 만든 것 가지고 내가 널 달리 볼 거라 생각했어?”
“……손 좀.”
“내가 진짜 노는 게 뭔지 보여 줄까?”
완전히 위압당한 타티아나가 숨도 못 쉬고 움츠러들었다.
아나스타샤는 정말 리처드는 상상도 못 할 방법으로 이번 학기가 끝날 때까지 아예 푹 쉬어 버리게 만들어 줄 수도 있다고 말하려다가, 조금 겁먹은 듯한 타티아나의 눈을 보고는 그만두었다.
물론 아나스타샤는 이 순진한 친구를 데리고 무언가 할 생각은 없었다. 손을 놓고 물러선 아나스타샤가 조용히 말했다.
“……타티아나. 신경 쓰고 말고는 내가 정해.”
“아나스타샤, 전…….”
“그리고 감기 때문에 아픈 건 사실이잖아.”
지금 타티아나는 손목 때문이 아니라 정말 감기 때문에 드러누워 있는 상태였다.
타티아나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것도 제가 다 자초한…….”
“아 정말, 자꾸 그럴래?”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더 이상 듣기 싫었다.
“넌 그냥 지금 감기에 걸렸고, 난 병문안을 와 있는 거야. 알겠어? 그러니까 자꾸 돌려보내려고 하지 말고 필요한 게 있으면 말이나 해.”
“……하지만.”
“헛수고 그만하고.”
아나스타샤는 곧장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곤 어안이 벙벙한 듯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는 타티아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마치 들으라는 듯 똑똑히 말했다.
“아, 엄마. 저 오늘 집에 안 들어가요. 어디냐고요? 타티아나 병문안 왔어요. 오늘은 여기서 잘 거예요. 예? 몰라요. 이 큰 집에 나 하나 잘 곳은 있겠지.”
빠르게 전화를 마친 아나스타샤가 전화를 툭 끊었다.
이쯤 되니 타티아나도 헛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자고 가시게요?”
“응. 안 된다고 하면 밖에서 잘 거야.”
“12월이에요. 죽는다고요.”
“죽게 두지 말든가.”
밀어붙이거나 부탁하는 것에 약한 타티아나가 지금 아나스타샤를 거부할 방법은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이렇게까지 일방적으로 구는 스스로가 조금 비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뻔뻔하던 리처드의 얼굴을 떠올리자 다시 열불이 나는 것을 느꼈다.
잠시 주말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 애를 데리고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너희들은 나처럼 이렇게 할 순 없을 걸?
모종의 승리감을 느끼며 아나스타샤가 타티아나의 옆머리로 손을 뻗었다.
이번에도 타티아나는 움찔하며 본능적으로 거부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뭐 필요한 거 없어 정말?”
잠시 고민하던 타티아나는 이번엔 거절하지 않았다.
“……목말라요.”
“알았어.”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타티아나의 머리를 쓸어 주고는 방 밖으로 나섰다.
* * *
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발버둥을 치고 싶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조차 여의찮다.
이불이 너무 무겁다. 차라리 그냥 이대로 깔려 죽고 싶다.
도대체 난 어디까지 가는 거지?
“으…….”
정신연령이 높다는 것 따위, 이제 와선 정말 의미 없다는 것은 이미 옛날 옛적에 깨달았지만 난 아직도 이렇게 아나스타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수치스러웠다.
이젠 다 글러 먹은 게 아닐까 싶다. 이제 와서 내가 무슨 말을 한들 아나스타샤를 이길 수 있겠는가?
“……콜록.”
기침을 하다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베개를 움켜쥐고는 더더욱 몸을 말았다.
화딱지가 났다. 도대체 이 몸은 왜 이리 약해 빠진 거야? 어차피 쉬기로 하긴 했지만 이렇게 진짜 감기로 아프니까 더 서글퍼졌다.
스스로 진단하기에 나는 정말 심각하게 약했다.
기본 체력이 너무 약한 데다가 몸도 자주 저리고 저혈압에 천식에 냉증에 빈혈에……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
이해가 안 갔다.
이전의 타티아나는 집으로 진단서가 몇 번이고 날아왔을 정도로 막 나가는 인생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몸을 보면 도저히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물론 반년 사이 혼수상태로 누워 있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보통 몸이 이 정도로 망가지나?
잘 모르겠지만 뭔가 상식적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 감기 때문에 아나스타샤가 오늘은 하루 종일 내 옆에서 간호를 하겠다고 집에다가 전화까지 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 화끈한 성격으로 미루어 보면 지금 방에서 나간 김에 예고르를 찾아가 아예 허락까지 받아 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예고르라면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아나스타샤가 머물고 가게 된다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전에도 몇 번 놀러 온 적은 있었지만 한 번도 자고 간 적은 없기 때문이었다.
“…….”
사실은 그냥 그녀가 돌아갔으면 좋겠다.
피아노를 잡으면서 다른 모든 쓸데없는 것들은 집어던진 지 오래였지만 지금 난 아직도 스스로에 대해 정리가 안 된 상태였고, 나 자신을 신뢰할 수 없는 없는 상태였다.
때문에 지금 다른 누군가와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질 생각이 없었다.
난 아나스타샤가 가진 음악과, 그녀의 자유로운 성향을 사랑했다.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조차 믿을 수가 없다.
아직 난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다행히 난 겨우 열네 살이었고 아직 몇 년은 더 판단을 미루어도 괜찮았다.
그때쯤 되면 아마 굳이 어느 한쪽으로 결정을 내리려고 머리를 싸매지 않아도 저절로 결론이 나오리라 믿는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내 음악성에 대한 것뿐이었는데…….
난 지금 뭘 하는 거지.
그렇게 조금 막막한 상념에 잠겨 있자니, 다시 방문이 열리고 아나스타샤가 들어왔다.
그녀는 작은 쟁반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주전자와 머그컵을 가지고 왔다.
난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그녀를 보며 물었다.
“물인가요?”
“응. 따뜻한 물 많이 마시는 게 좋다더라고. 내가 하겠다고 했어.”
“아…….”
멍하니 있는 사이 아나스타샤는 침대 옆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더니 날 일으켜 주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난 그 손길에 따랐다. 그녀는 따뜻한 물을 따라서 내게 건네주었다.
“자.”
“……고마워요.”
조용히 감사를 표하며 머그컵을 받았다.
12월의 모스크바는 폐부가 얼어붙을 듯이 춥지만, 아나스타샤가 주는 것들은 정말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