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첫날 집에 묵었던 아나스타샤는 다음 날 아침에도 내 열이 내리지 않자 일단 혼자 학교에 갔다가 수업만 딱 받고는 오후에 조퇴해 다시 내 옆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이틀간 그녀는 내 옆에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거의 무슨 의무감에 사로잡힌 것처럼 내 간호를 해 주려고 했다. 마치 자신만이 할 수 있다는 것처럼.
이로써 확실해진 것은, 내가 앞으로 살면서 아나스타샤에게 우위를 점할 기회는 영영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
어쨌건 아나스타샤의 헌신 어린 간호 덕분인지 아니면 내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녀가 사흘이나 조퇴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인지, 난 감기로 드러누운 지 이틀 만에 일어나 정상적으로 등교할 수 있었다.
체온도 37도로 안정되어 있었고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짐짓 기운차게 교실 문을 열어젖혔더니 이른 아침부터 등교해 있는 학생은 몇 없었다.
그 몇 안되는 학생들 중, 창가에 앉아 있는 한 남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
“…….”
나도 모르게 멈칫하자 어색함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었다. 그건 나와 눈이 마주친 에르네스트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렇게 몇 초나 지났을까. 먼저 웃으며 인사를 해 온 것은 에르네스트 쪽이었다.
“좋은 아침. 타티아나.”
“아……. 안녕하세요. 에르네스트.”
“몸은 괜찮아?”
상냥하게 안부를 묻는 말에 난 창피해져서 괜히 머리를 쓸어내렸다.
월요일에도 내게 한 마디도 걸지 않았던 그가 갑자기 이렇게 말을 걸어오니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이건 어른답지 않은 태도였다.
마음을 가다듬은 뒤, 옆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열도 다 내렸고. 괜찮아요.”
“정말이야?”
“예.”
에르네스트가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럼 다행이고. 음, 네 손목은 아직 아픈 것 같지만.”
“손목은 2주일 진단을 받았거든요.”
“심각하네.”
에르네스트는 정말 걱정된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난 머쓱해져서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내 손목에 대해 에르네스트에게까지 설명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대화는 끊어졌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지금 주위에 아나스타샤도, 발렌티나도 없고 보는 학생들도 몇 없겠다, 그도 나름대로 내게 하고 싶었던 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진짜…… 관리 잘해. 감기도 그렇고, 손목도 그렇고.”
잠시 뜸을 들이던 에르네스트가 이어 말했다.
“네가 지금 아프면 안 되니까.”
“…….”
아프면 안 되는 건 또 무슨 소리람.
“제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도 아니잖아요?”
“내 말은…… 사람 놀라게 하지 말란 말이야.”
“……에르네스트도 놀랐나요?”
별 뜻 없이 물었던 건데, 에르네스트는 감정이 상했는지 인상을 썼다.
“그럼 당연히 놀라지, 네가 죽든 말든 내가 아무 신경도 안 썼으면 좋겠냐?”
“…….”
왜 네가 화를 내는 거야?
난 나도 모르게 조금 까칠하게 쏘아붙였다.
“그렇게 안 멀쩡해 보이면 월요일엔 왜 모른 척하셨는데요?”
월요일에도 난 손목에 보호대를 차고 있는 상태였다.
그간 암묵적 협의로 에르네스트와는 서로 데면데면하게 지내고 있었지만 그가 정말 날 조금이라도 신경 쓰고 있었다면 무슨 일인지 살짝 물어보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이제 와서 뭘 걱정하는 척이란 말인가?
에르네스트는 내 말에 무언가를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약간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타티아나.”
“예.”
“그, 뭐라고 해야 하지. 난 네가 나한테 그리 나쁜 감정이 있다곤 생각 안 해.”
꽤 직설적인 말이었다. 그의 말은 질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약간 떠보는 듯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거기에 일종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정답이기도 했고.
그간 일부러 에르네스트와 가까이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건 악감정으로 그러했던 것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내가 잔인하게 자존심을 꺾어 놓아도 거기에 무너지거나 악의를 품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줄 알았다. 심지어 날 지지해 주기까지 했다.
내가 어떻게 이런 그를 미워할 수 있겠는가?
“맞아요. 에르네스트.”
난 널 싫어하지 않고 되레 좋아하는 편이라고 덧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말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한 듯했다.
“다행이다.”
“다행이요?”
“……아무것도 아냐. 어쨌든, 네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언젠가 내가 준비가 되면 그때 다시 네게 인정을 받고자 했어.”
“……예?”
난 약간 어이가 없었다. 우리 학교 전교생과 선생님들은 물론 이미 전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에르네스트가 나 같은 것한테 인정을 받아 무엇한단 말인가?
하지만 짚이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저한테요?”
“그래.”
“전 에르네스트를 충분히 인정하고 있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그 말이 아니야. 난…… 아니다. 그건 나중에.”
“…….”
나는 나중에라고 얼버무리는 그를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가만 생각해 보면 에르네스트는 이전에 연구회를 만들자고 했을 때도 바로 나에게 무턱대고 요구를 하거나 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위클리 리사이틀 무대에 올라가서 스크리아빈 소나타를 보여 주고, 날 완전히 휘어잡은 뒤에 도저히 거부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는 결코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런 에르네스트가 또 무언가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예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새로운 무대, 새로운 연주. 우린 음악가였고 서로에게 무언가 보여 주고 증명해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으니까.
무언가 설욕전을 준비하고 있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에르네스트의 자존심은 어마어마하게 높기 때문에 그 다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최선의 준비를 해서 다시 내게 도전장을 내밀 것이다.
그리고 나에겐 그 도전장을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기든, 지든 간에.
“어쨌건.”
에르네스트가 손가락를 까딱였다.
“그래서였어. 월요일엔 기회도 별로 없었고. 네 옆엔 아나스타샤가 항상 붙어 있으니까…….”
“아나스타샤가 왜요?”
“……넌 모르겠지 그 애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속마음은 정말 착하고 배려심 깊지만, 상황에 따라 꽤 무서워지기도 하는 데다가, 얼마 전 리처드의 멱살도 잡았을 정도로 저돌적이기도 했다.
말하는걸 보니 에르네스트 역시 아나스타샤에게 무언가 당한 것 같기도 했다.
딱히 그럴 일은 없어 보였는데 뭔지 잘 모르겠다.
한 달 전만 하더라도 내게 에르네스트와 차라리 사귀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냐는 둥, 에르네스트를 그리 나쁘게 보고 있는 것 같진 않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에르네스트는 딱히 더 이상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도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난 적당히 이쯤에서 정리하기로 했다.
“일부러 절 무시한 건 아니란 거죠?”
“내가 널?”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묻는 투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날 다시 꺾어 놓을 때까진 절대로 날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걱정하고 신경 쓸 것이다.
난 그의 짧은 목표가 되어 줄 수 있었다.
문득 미소가 지어졌다.
“걱정해 주셨다니 고마워요. 앞으론 아프거나 다치는 일 없도록 주의할게요.”
“그래…… 그럼 됐고.”
에르네스트는 겸연쩍게 중얼거리더니 손을 내저었다. 난 그 옆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 * *
열이 다시 오르는 것 같진 않았고 몸 상태도 괜찮았지만, 오전 수업을 모두 마치고 나니 학교에 남아 할 일이 없었다.
난 오늘이야말로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 지 찾아보기 위해 적당히 조퇴하려 했다.
“타티아나.”
아나스타샤가 내 옆에 달라붙었다. 난 흠칫했다. 불안한 예감이 엄습해 왔다.
내가 미심쩍게 바라보자 아나스타샤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조퇴할 거지?”
“…….”
“나도 같이 가.”
“안 돼요.”
난 칼같이 거절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오늘로 사흘이다.
슬럼프에 문제 덩어리인 나와는 달리 아나스타샤는 연주자로서 촉망받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나가는 사람이었다.
나 때문에 레슨과 연습을 며칠이고 쉬게 할 순 없었다.
“전 정말 괜찮으니 오늘은 레슨을 받으세요.”
“레슨 없어. 오늘 종일 연습이야.”
“그럼 연습을 하세요.”
“난 너랑 놀고 싶은데.”
“……아나스타샤.”
팔짱을 끼고 서서 단호하게 말했다.
“사흘이나 연습을 쉬다니 말도 안 돼요. 비싼 학비가 아깝지도 않으세요?”
“……네가 그 많은 입바른 소리들을 내버려 두고 학비가 아깝지 않냐고 말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네.”
“…….”
말문이 막혀서 머뭇거리자 아나스타샤는 범생이 같은 소리는 할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정작 자기도 꾀병이면서.”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내가 반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장난스레 웃으며 몰아붙였다.
“혼자선 놀 줄도 모르면서.”
“…….”
“어젠 날 보고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제, 제가 언제요!”
“얼굴 보면 다 나오는…… 아, 왜 이래!”
“더 이상 말하지 말아요.”
내가 아나스타샤의 입을 막으려 들자 그녀가 고개를 휙휙 돌리며 피했다. 나보다 키도 크고 힘도 센 그녀를 내가 제압할 방법은 전혀 없었다.
다 끝났다. 난 이제 무슨 수를 써도 이 애를 이길 수가 없다.
체념한 채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자 아나스타샤가 킥킥 웃더니 말했다.
“나도 마냥 쉴 생각은 없어.”
“제발 그래 주세요.”
“타티아나.”
“예.”
“그럼 너도 가지 마.”
“……예?”
아나스타샤가 묘안을 냈다.
“나랑 같이 연습실 가서 놀자. 문 잠그면 되잖아.”
“전…….”
아나스타샤는 연습이 아니라 노는 목적으로 피아노를 치는 것은 상관없지 않겠냐고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내가 피아노를 치지 않기로 한 것은 리처드의 말을 듣고 생각을 해 본 결과, 스스로에게 약속을 한 것이었다.
어설픈 생각으로 장난이나 치자고 이 손목 보호대를 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난 피아노에 있어선 장난을 쳐 본 적이 없다.
정말 2주일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건반을 만지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날 가만 보더니 피식 웃었다.
“정말 피아노에 아주 진저리가 나나 보네.”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이게…… 조금 복잡해요.”
뭐라고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지금 내가 슬럼프고, 딱 2주일간만 건반을 쳐다보지도 않고 내버려 두면 좀 나아질 것 같아서 이러고 있다고 말해 봐야 어떻게 들어도 핑계로밖에 들리지 않은가?
게다가 이에 대한 근거를 낸 것은 어디 저명한 의사나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동급생인 리처드였다.
어물거리고 있자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그럼 그냥 따라와서 나 하는 거 봐 줘.”
“그냥요……?”
“응. 그냥. 아무것도 물어보거나 하지 않을 테니까.”
난 조금 고민했다.
아나스타샤는 내게 스트레스를 주는 일은 전혀 없을 것이라며 날 안심시켰고, 그녀는 스스로 내뱉은 말은 어지간해선 지키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너 집에 가서 할 것도 없잖아.”
“…….”
아파요, 아나스타샤. 제발 말로 그만 때려요.
난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아나스타샤는 기분 좋게 내 손을 잡아끌었다.
5층의 연습실에 들어선 아나스타샤가 간만이라는 듯 기지개를 켜며 심호흡했다.
그녀도 역시 연주자인지라 이틀이나 연습실에 발걸음을 하지 않은 것으로 꽤나 신경을 쓰는 듯했다.
연습실 구석에 가방을 던지며 그녀가 말했다.
“자 그럼 무슨 곡을…… 아니다, 아무것도 안 묻기로 했지.”
그러더니 정말 아나스타샤는 나에게 일절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곧장 피아노 앞에 앉아서 연습에 들어갔다.
“…….”
첫 음이 들리기도 전에, 손 모양을 보자마자 난 아나스타샤가 무슨 곡을 치려는지 알아차렸다.
프란츠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중 10번째 곡이었다. 저렇게 양손을 겹치는 형태로 시작하는 곡은 내가 알기로 그 곡뿐이다.
두 달 전, 내 추천으로 시작하게 된 리스트의 곡이었다.
양손을 겹친 채로 번갈아 건반을 훑어 내려온다. 그다음 아르페지오 선율이 감미롭게 이어졌다.
초절기교 연습곡이라는 그 이름에 걸맞게 상당한 난곡이다.
10번 곡은 그중에선 약간 쉬운 편에 속했지만 그래도 열네 살이 연주하기엔 어렵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곡을 시작한 지 겨우 두 달 만에 그녀는 어마어마한 발전을 보였다.
“…….”
아나스타샤는 별로 문제 될 부분 하나 없이 굉장히 유려하게 곡을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처음엔 까다로워했던 부분들도 이제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동시에, 내가 그녀에게 리스트를 추천한 이유도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기교도 기교지만 무엇보다 소리가 달라졌다. 아나스타샤는 이전보다 훨씬 웅장하고 카랑카랑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팔을 풀고 손목을 릴렉스한 채 속도만으로 건반에 힘을 때려 넣는 요령을 상당히 깊게 터득한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벽을 깨부수고 한 발자국 더, 내디딘 것이다.
“…….”
난 그렇게 보란 듯이 자신의 천재성을 뽐내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손이 근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미칠 듯이 피아노가 치고 싶어졌다.
꾹 눌러 참으며 다시 손목 보호대를 내려다보았다.
벗을 수 없게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참아야 했다. 오늘은 아나스타샤를 지켜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