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3화 (63/1,277)

##  63화

사흘 내내, 난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아나스타샤가 연습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는 리스트 외에도 다양한 곡들을 다채롭게 연습했다.

과제곡으로 보이는 곡들을 몇 번씩이나 바꿔 가면서 같은 구간을 열 번씩 내리쳐 보기도 하고, 리듬을 바꿔 보기도 하고, 속도를 느리게 해 보기도 하고, 페달을 떼 보기도 하면서 나름대로의 연습을 홀로 해 나갔다.

그런 아나스타샤의 연습을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나로서도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당장에라도 아나스타샤에게 내 감상을 전하고, 나 역시 그녀와 함께 연습하고 싶었다.

평생 해 온 일을 참고 있으려니 강박증이 스멀거렸다. 오늘로 연습을 쉰 지 벌써 닷새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기량이 떨어지고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더니 아득해졌다.

처음 작정했을 때부터 기량 저하와 재활을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지만, 그래도 두렵고 불안했다.

“…….”

하지만 그런 불안감도 아나스타샤를 보고 있다 보면 사라져갔다.

그녀는 정말 뛰어난 연주자다. 타고난 천재였고, 눈부신 재능과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난 그 모습을 조금 흐뭇하게 지켜보다가도 문득 부러워졌다.

그때였다.

피아노에 집중하는 것 같던 아나스타샤가 건반을 쿵 찍더니 고개를 들어 내 쪽을 바라보았다.

“도저히 못 참겠어.”

“예?”

연습을 중단한 아나스타샤가 날 쏘아보았다. 난 형형한 눈빛의 그녀를 보며 조금 움찔했다.

“왜 그러세요? 아나스타샤.”

“너 정말 오늘도 그렇게 지켜보고만 있을 거야?”

“……예. 그러려고 해요.”

아나스타샤를 따라 연습실에서 그녀의 연습을 견학하면서 난 그간 느낀 것도 많고 배운 것도 많았다.

이 시간은 이제 내게 있어서 꽤 소중한 시간이 되어 버렸다.

담담히 대답하자 아나스타샤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있지 말고…… 폰이라도 가지고 놀든지. 응? 타티아나, 제발.”

“제가 어떻게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어요. 무례하게.”

정론이긴 하지만 내가 스스로 말하고도 조금 멍청한 소리처럼 들렸다.

나 지금 연습 쉬겠다고 손목에 보호대 차고 가짜 진단서를 학교에 제출한 사람 맞지?

아나스타샤가 역정을 냈다.

“내가 지금 무슨 연주회 해? 그냥 연습 중이잖아.”

“……그렇죠.”

“뭘 그렇게 경청을 하냔 말야. 어차피 네가 듣기엔 죄다…….”

더 무언가 말을 하려던 아나스타샤가 뒷말을 삼켰다.

난 봐주지 않고 나오다 만 말꼬리를 잡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아나스타샤의 연습은 충분히 경청할 만해요.”

“……그건 고마워. 아니, 고맙지않아.”

“……예?”

아나스타샤가 정말 보기 드물게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아예 내 쪽으로 돌아앉았다.

“타티아나.”

“예.”

“어제까지만 해도 내가 연습실에 널 끌고 와서 아무 말도 없이 연습만 하고 있으면 네가 심심해서라도 나가자고 할 줄 알았어. 그렇잖아? 이게 대체 무슨 재미가 있겠어?”

그저 친구의 연습을 지켜보는 일. 사흘쯤 되니 지루할 만도 했다. 아나스타샤가 집중적으로 연습하는 곡들은 몇 곡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하루가 아니라 1시간 단위로도 점점 나아지는 걸 지켜보고 있자면, 지루할 새 없이 즐거웠다.

이건 친구의 시선이 아니라 선생의 시선인 것 같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난 되도록 아나스타샤가 기분 나빠 하지 않도록 말했다.

“재미가 중요하진 않아요, 저는 저 나름대로 얻는 것이 많아요.”

아나스타샤가 맥이 빠진 듯 중얼거렸다.

“그래 네가 정말 싫었다면 비명을 지르고 나가 버렸겠지…….”

“그러진 않았을 거예요.”

“만약 네가 나한테 네 연습을 사흘간 지켜보기만 하라고 했다면 난 그랬을 거야.”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투로 말한 아나스타샤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건반을 툭툭 때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제 와서 고백하는데, 약간 오기 같은 것도 있었어.”

“오기요?”

“난 너한테…… 아니지, 그냥 네가 놀자고 하는 소리를 들어 보고 싶었거든. 피아노를 잠시 내려놓고 쉬는 사이에 못 할 것 뭐 있겠어?”

아나스타샤는 내가 심심하다고 우는 소리를 하는 것을 바랐던 것 같다.

그렇게 매달리면 날 데리고 나가기 쉬울 테니, 내가 놀자고 하면 언제든지 같이 놀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던 그녀는 짧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전혀 아냐. 넌 피아노에 있어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진지한 그 타티아나 그대로야.”

그녀의 손가락이 내 손목께를 가리켰다.

“그건 대체 왜 찬 거야?”

“…….”

정말 단순하게, 피아노 연습하기가 싫어서 도피하려고 이 손목 보호대를 찼다면 지금 연습실에서 사흘 동안이나 친구의 연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아나스타샤는 알아차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내가 근래 겪고 있는 슬럼프에 대해 털어놓아야 할 것 같았다.

물론 그 원인을 말하기 위해 거기서 조금 더 깊게 들어간다면 구세프 선생님과 한 약속, 즉 내가 원하는 단 한 곡에 대한 것까지 설명해야 하지만 그 부분은 내 본질, 망령으로서의 내 미련에 대한 부분이기 때문에 깊게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아나스타샤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가벼운 슬럼프라고 하는 것이 가장 간단한…….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예?”

아나스타샤는 조금 늘어진 채, 내 쪽을 향해 물었다.

“타티아나. 피아노 말고 뭔가 원하는 건 없어?”

“……피아노 말고요?”

“그래. 네가 노는 데엔 아예 취미가 없다는 걸 아니까 그런 건 묻지도 않겠는데, 그래도 가끔은 혼자 있다 보면 심심하거나 그렇지 않아?”

“…….”

아나스타샤가 내게 몇 번 농담조로 취미도 없냐며 묻는 일은 있었어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말없이 표정을 살피니, 아나스타샤 역시 이건 조금 심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을 무를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녀로서도 몇 번이고 참고 참았다가 하는 말임이 분명하리라.

어쨌든, 나도 사람인데 어찌 심심함을 못 느끼겠는가? 아나스타샤의 연습을 구경하는 건 괜찮았지만, 집에 돌아가면 당장 할 것이 없었다.

피아노를 칠 수 있다면 혼자 내버려 둬도 며칠이고 집 밖으로 안 나가는 것도 가능했지만, 피아노 없는 난 정말 구제불능 그 자체였다.

“…….”

그렇게 제대로 된 취미도 하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다시 자각하자 절로 우울해졌다.

집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난 정말 하고자 하면 종이접기부터 승마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취미를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 며칠간 아무리 취미거리를 찾아보려고 해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엄두도 안 날뿐더러 별로 흥미가 생기지도 않았다.

애초에 피아노라는 악기 자체가 전신을 이용해서 연주해야 하는 거대한 악기였다.

콘서트용 그랜드 피아노 같은 경우엔 600kg가까이 되는데 이런 걸 가지고 놀다가 다른 걸 하려니까 눈에 찰 리가 만무했다.

내 표정을 보던 아나스타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너무 작게 말해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러더니 피아노 건반 덮개를 쾅 닫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나가자.”

“예?”

“나가자고, 타티아나.”

아나스타샤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우린 피아노 말고 다른 것들도 즐길 권리가 있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멀거니 올려다보자 아나스타샤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가자.”

* * *

아나스타샤와 함께 향한 곳은 구아르바트 거리였다.

이전에 리처드, 한승우와 함께 간 신아르바트 거리에서 조금 걸어오면 있는 거리였다.

그 역사가 오래되었는지 건물만 보아도 구시가지 느낌이 나는 곳이었다.

넓은 대로와 고풍스러운 건물들. 각양각색의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 이 추운 날씨에도 밖에 나와 있는 거리의 예술가들.

사실 놀 거리를 찾는다면 신아르바트 거리로 가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난 이곳의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아나스타샤는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는 날 끌고 근처에 있는 가게로 향했다.

“여기에 오려고 했어.”

“애완동물숍이네요?”

“응.”

건물이나 간판은 족히 20년은 되어 보이는, 낡은 외견이었지만 막상 안에 들어오니 내부는 꽤 잘 꾸며 놓은 애완동물샵이었다.

벽면에 애완동물들의 케이지가 죽 늘어서 있었다.

강아지나 고양이뿐만 아니라 이구아나 같은 파충류도 있었다. 한편엔 각종 용품들도 진열되어 있었다.

난 이런 곳에 와 보는 것은 또 처음인지라 조금 신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뭔가 정해 놓은 것 없이 이것저것 두리번거리는 폼이 딱 봐도 무언가 사러 온 사람은 아니었지만, 가게 주인은 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카운터를 지키고 서 있었다.

앵무새를 보고 있는 아나스타샤에게 가서 살짝 물어보았다.

“아나스타샤, 앵무새 키우고 싶으신가요?”

“응? 아니.”

아나스타샤는 어깨를 으쓱했다.

“넌 네 집에 있는 벨카를 상당히 아끼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혹시 동물들을 좋아할까 싶어서.”

“저요……?”

“응.”

아나스타샤는 뭔가 원하는 애완동물이 있어서 온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날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

이런 마음씀씀이는 정말 고맙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해졌다.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했고.

아나스타샤가 보기에도 내가 얼마나 재미없어 보였기에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난 조금 의무감을 가지고 혹시 내 내면에 잠들어 있는 애완동물에 대한 애호심이 깨어나진 않을까 싶어 종류 불문하고 탐색을 시작했다.

“…….”

음…….

하지만 내가 벨카를 좋아하게 된 것은 내가 개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냥 벨카가 특출 나게 귀엽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어떤 동물들을 봐도 그닥 와닿지 않았다.

아나스타샤 역시 내가 갈수록 흥미를 잃어 가는 것을 느꼈는지 그리 오래 머물지 않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강아지는 좋아할 줄 알았는데.”

“…….”

아나스타샤의 말에 약간 죄책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짓말을 할 수도 없잖은가?

아니, 해야 할 때인가.

“아나스타샤, 전…….”

“그럼 다른 걸 찾아볼까?”

활기차게 웃으며 아나스타샤가 앞장섰다.

난 그 자리에 조금 멍하니 있다가 그녀를 따라갔다.

분명 아나스타샤는 내가 그녀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말을 지어내거나 좋아하는 척하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난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그녀와 함께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휴대폰 판매점에서 스마트폰 케이스를 새 것으로 바꾸기도 했고, 액세서리점이나 귀금속을 취급하는 가게에 가서 보석들을 보기도 했다.

학생들이 구경하기엔 고가의 상품들만이 가득했지만 아나스타샤는 내가 돈에 연연할 필요가 없단 것을 잘 알았다.

그냥 쇼핑보다는 약간 관심거리가 생길 만한 곳들을 위주로 돌아다녔다.

오락실에 가 보기도 했는데 아나스타샤는 기가 찰 정도로 게임을 잘했다. 한두 번 와 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 정도 돌아다녔을까.

난 여전히 내가 뭘 좋아하는지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리처드, 한승우와 함께 신아르바트 거리를 쏘다녔을 때도 그랬다. 난 평범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일들을 할 때, 그 시간만큼은 즐거웠다.

하지만 바로 돌아서고 나면 나 홀로 무언가를 취미로 즐기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난 일반적인 아이들과는 달랐으니까.

오늘도 그냥 마음 놓고 아나스타샤와 놀러 다니는 시간이었다면 별 신경 쓰지 않고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무엇이라도 좋으니 내가 흥미를 가질 수 있을 만한 것을 찾는다는 목적을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그 목적은 정말 이루기 어려워 보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난 조금씩 풀이 죽었다. 지치기도 했고.

“아나스타샤…….”

조금 단단히 각오를 하고 아나스타샤를 부른 그때 내 귀를 사로잡는 소리가 들렸다.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수염을 기른 한 노인이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차림새는 꽤 말쑥했지만 모자를 뒤집어 앞에 놓은 걸 보니 거리의 악사인 모양이다.

그 모습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바이올린 소리였다.

예술가들이 많은 이곳, 구아르바트 거리를 거닐면서 꽤 많은 악사들을 마주쳤지만 이렇게 특출 나게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바이올린 소리는 낮고 중후했지만, 순식간에 내 신경을 모조리 낚아채 갔다.

아나스타샤가 내 쪽을 돌아보더니, 멍하니 있는 날 보곤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

그리고 그녀는 자연스레 앞장섰다.

“가까이 가서 듣자. 좋지?”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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