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4화 (64/1,277)

##  64화

아나스타샤를 따라 조금 더 가까이서 보니 연주자는 60세는 훨씬 넘었을 것 같은 할아버지였다.

머리도 수염도 하얗게 세었고, 이마엔 주름이 깊었다. 입고 있는 정장은 가까이서 보니 꽤 낡아 보였다.

하지만 그 두 눈엔 지성이 가득했고 연륜이 가득한 연주는 결코 낡아 있지 않았다.

나는 피아니스트의 길을 걸으면서 소리라는 것을 연구하기 위해 한때 바이올린도 공부했었다. 그 덕분에 이 소나타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벨기에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외젠 이자이의 소나타다.

이자이라는 이름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닌 사람들에겐 생소하지만, 현재 세계 3대 기악 콩쿠르 중 하나인 벨기에의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전신이 바로 이자이 콩쿠르였다.

그만큼이나 영향력 있고 위대한 음악가다.

그 이자이의 독주 바이올린 소나타 여섯 곡 중 세 번째 곡이 거리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

이자이 특유의 서정적인, 그러면서도 극도의 기교를 필요로 하는 연주가 이어졌다.

삼중 피규레이션에 몇 번이고 바뀌는 박자, 노련한 백발의 연주자는 선율을 감았다 풀었다 하면서 숨 막히는 소리로 청중들을 옭아매었다.

우울한 단조의 음색이 가슴을 저밀 듯이 짓쳐들었다.

이 이자이 소나타 3번이 현대에도 앙코르곡으로 굉장히 많이 연주되는 이유는 달리 있지 않았다.

단악장으로 이루어진 8분 남짓의 짧은 소나타지만 이 안엔 쇼팽의 발라드의 구조, 루마니아의 춤곡, 벨기에 특유의 정서 그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어떠한 다른 악기의 도움 없이 짧은 시간 안에 바이올린 단 한 대로 많은 이미지를 전달하기엔 이만한 곡도 드물지만, 보통 연주자들은 그중 하나도 잘 끌어내기 힘들다.

그런데 이 연주자는 그 모두를 한데 섞어 내보이고 있었다.

“…….”

난 양손을 쥐고 연주에 빠져들었다.

길거리에서 이런 연주를 들을 수 있다니, 행운이었다. 이 곡 만으로도 난 오늘 밖에 나온 보람을 찾을 수 있었다.

날이 추운 것도 잊고 그렇게 넋 놓고 감상에 빠진 사이, 소나타는 금방 끝났다. 아쉬울 정도였다.

주변에서 작게 박수가 이어졌다. 연주의 수준에 비해 박수소리가 너무 작았다.

난 주위를 살폈다. 의외로 이 연주를 들어 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조금 우울하게 들리는 이자이 소나타로는 불특정 다수의 시선을 크게 끌기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조금 신경질이 났다.

이 정도로 뛰어난 연주에 이 정도 호응밖에 없다니, 세상이 이러면 안 되잖은가?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지 바이올린을 내리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추운 날씨에 입김이 훅 뿜어진다.

팁박스 대용으로 앞에 놓인 모자에 동전과 지폐가 툭툭 던져졌다. 나도 바로 지갑을 꺼내려고 했다.

“타티아나.”

아나스타샤가 내 팔을 붙잡았다.

“예?”

“얼마나 낼 거야?”

“…….”

별로 생각해 둔 금액은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말했다.

“너무 많이 하진 마.”

“……알아요.”

양심적으로는 바이올리니스트 리사이틀 관람료 정도는 내야 저울이 맞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마음의 저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내 멋대로 내 기준에 따라서 관람료를 냈다간 눈앞의 백발의 연주자로부터 혹여나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 그런 슬픈 상황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난 아나스타샤와 함께 적당히 관람료를 꺼내 모자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이 정도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문득 고개를 들자, 날 내려다보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난 경의의 뜻으로 짧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조금 의아하다는 듯한 눈빛이 이어졌다. 돈을 내면서도 왜 감사를 표하냐는 것 같았다.

난 당연히 감사해야만 했다. 지금 이것은 내가 들은 연주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값을 치른 것에 불과했으므로.

* * *

다음 날도 난 구아르바트 거리로 나섰다.

어제 아나스타샤와 돌아다니면서 취미거리로 삼을 만한 것을 찾아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나스타샤에겐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난 이 거리에서 혼자 즐길 거리는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다시 거리로 나온 것은, 어제 거리에서 들었던 바이올린 연주 같은 것을 다시 한 번 들을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난 막연하게 전문 연주자들은 버스킹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누구라도 콘서트홀이 아닌 거리에서 관리도 잘 안 된 업라이트 피아노로는 제대로 된 실력을 보이긴 힘들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전문가는 장소와 도구도 잘 따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간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한자리에 놓고 지속적인 관리가 어려운 피아노로는 힘들겠지만, 휴대가 가능한 바이올린으로 실외에서 펼쳐지는 연주는 일반적인 연습실이나, 무대에서 듣는 것과는 또 차원이 다른 울림을 가져왔다.

“…….”

난 은밀히 경호하는 빅토르와 자하르를 대동하고 구아르바트 길거리의 예술가들을 집중적으로 찾아보았다.

때마침 오늘은 토요일이었고 어제에 이어 날씨도 영상권으로 올라와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제보다 더욱 활기찬 모습이었다.

초상화를 그려 주는 화가들도 많았고, 러시아의 국민시인 푸쉬킨이 생전 살던 집 앞에는 시집을 파는 사람도 있었다.

푸쉬킨의 시집인가 했더니 자작 시집이었다.

푸쉬킨같이 위대한 시인의 집 앞에서 자작 시집을 팔다니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조금 마음에 들어서 한 권 구매했다.

거리의 음악가들도 상당히 많았다. 어제완 다르게 버스킹이 가능한 구역엔 한 곳도 빼놓지 않고 연주자들이 들어서 있었다.

가요, 클래식, 재즈 등등 많은 음악들이 들렸다. 노래를 하는 목소리와 기타 소리가 쟁쟁했다.

들리는 음악들은 많았지만 잘 모르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난 백 년 전 음악들에 대해선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었지만, 50년 전 음악들에 대해선 잘 몰랐고, 5년 전 음악에 대해선 아예 모르는 축에 속했다.

수백 년 전 음악이 아니면 감동을 느끼지도 못하는 낡은 취향을 가지고 어째서 21세기에 태어났는진 나도 잘 모르겠다.

“…….”

그래도 관심을 가지고 들어 보려고 이곳저곳 기웃거리긴 했지만, 내 흥미를 확 잡아 끌 연주는 들리지 않았다.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날씨도 춥고 다리가 아파서 카페에 들어가 따뜻한 커피를 한 잔 주문하곤 잠시 쉬었다.

어젠 정말 뜻밖의 수확을 얻을 수 있었는데. 오늘은 아무것도 없는 걸까.

생각해 보면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다.

애초에 클래식 음악은 이렇게 길거리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클래식 연주회를 원한다면 당장 하루에도 몇 군데에서나 벌어지는 공연장을 찾아가면 된다.

정당한 관람료를 치르고, 깔끔한 연주를 편안하게 즐기는 것이 정상적인 형태였다.

지금 나처럼 이렇게 12월의 모스크바에서 추위에 떨어 가며 거리에서 클래식을 연주하는 사람이 없나 찾아다니는 것은 정말 멍청한 짓이었다.

하지만…….

“……하아.”

시계를 보니 벌써 2시간 가까이 흐른 시간.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어제 가 봤던 그 장소에 가 보고 싶어졌다. 별 희망 없이 어제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던 곳으로 향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연달아 나와 계실 수도 있지만 보통 매일같이 그렇게 나오진 않을…….

“……!”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아까 지나쳐 왔을 땐 아무도 없었던 그 장소엔 백발의 할아버지가 막 중절모를 내려놓고, 바이올린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난 마치 무엇에라도 홀린 듯 그쪽으로 다가갔다.

어제의 그 할아버지는 말 한 마디 없이 조용히 바이올린 상태를 점검하며 시험 삼아 몇 번 활대를 움직였다. 청명한 소리가 사방에 퍼졌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할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그 앞엔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발견한 할아버지의 눈에 조금 이채가 깃들었다.

어제도 왔었다는 것을 알아보시는 것 같았다. 난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고 할아버지도 마주 인사해 왔다.

혹시 무슨 말이라도 해 주실까 싶었는데, 그런 건 없었다.

바로 바이올린 소리가 이어졌다.

처음부터 난곡이었다.

19세기 초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도 불렸던 니콜로 파가니니의 카프리치오 스물네 곡 중 첫 번째 곡.

파가니니는 당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수준 높은 기교로 유럽 일대에 거의 신드롬을 일으켰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어린 프란츠 리스트가 파가니니의 연주를 보고는 자신은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며 화려한 피아니즘에 천착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런 파가니니의 카프리치오 1번은 마치 쇼팽의 연습곡 25-12번 같은 아르페지오의 반복이지만 바이올린으로 구사하기에 극도로 까다롭다.

하지만 백발의 바이올리니스트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가볍게 연주를 펼쳐 보였다.

황망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정말 이걸 나 혼자 들어도 되는 거야?

하지만 청중이 나 혼자라고 해서 연주를 잠시 멈춰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아마 내가 없었더라도 파가니니로 시작했을 것이다. 앞에 몇 명이 있건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백발의 연주자는 연주를 이어 나갔다.

곡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다음 곡이 시작되었다.

이번엔 파가니니 카프리치오 9번이었다. 리스트가 편곡한 연습곡으로 나 역시 연주해 본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바이올린 원곡은 그보다 더 맑고 뚜렷한 주제를 보였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지는 24번.

플래절렛 톤스라고도 부르는 하모닉스 주법이 거의 무슨 마술처럼 들렸다.

이 배음의 마술을 이토록 자연스럽게 현실로 이끌어 내는 연주자는 본 적이 없었다.

거기에 이어지는 변주에서 환상적으로 펼쳐지는 왼손 피치카토의 향연, 이 24번 카프리치오의 꽃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오른손으로는 활로 보잉하고 왼손으로만 빠르게 넣는 이 피치카토로 바이올린에서 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해 보지 않은 사람들도 그냥 보고, 들으면 알 수 있었다.

멍하니 듣고 있다 보면 파가니니가 생전에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단 것이 이해가 갈 정도다.

“누구지? 바이올리니스트?”

“유명한 사람인가?”

그렇게 세 곡쯤 이어지자 주위에 사람들이 웅성이며 북적거렸다. 족히 수십 명은 되어 보였다.

어제 했었던 이자이 소나타가 결코 수준이 낮거나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파가니니의 카프리치오는 그보다 훨씬 화려하고 눈길을 끌기 쉬웠다.

그 누구라도 이것이 초인적인 연주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기교적으로는 이 이상 가는 독주곡이 드물었다. 클래식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몰려들 법했다.

그 뒤로도 파가니니의 곡들이 몇 곡 더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자 왜 시작부터 파가니니 카프리치오로 빠르게 연주를 시작했는지 이해가 갔다.

이 작은 연주회는 적당히 빨리 마무리되어야 했다.

길게 이어지기엔 파가니니의 한 곡 한 곡이 연주자에게 주는 피로도가 너무 심했고, 연주자는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였다.

심지어 여긴 12월의 모스크바이기까지 했다. 기온은 영상이었지만 밖에 서서 연주하기엔 추웠다.

시간을 느긋하게 끌면서 이러저런 이야기도 하고,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때문에 준비한 것들만 빠르게 보인 것이다.

오늘 준비한 프로그램이 모두 끝나고, 마지막 앙코르곡으로 몬티의 차르다시로 공연을 마무리한 할아버지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이번엔 어제보다 훨씬 많은 청중들이 모여 있었기에 팁박스로 쓰는 모자가 순식간에 두둑해졌다. 나 역시 그 위에 지폐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돌아서서 나오려던 때였다.

“아이야.”

정확하게 지칭하진 않았지만 그것이 날 부르는 소리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할아버지가 날 보며 웃었다.

“내일도 오겠니?”

“……!”

개인적으로 이런 말까지 들을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기에 갑자기 기분이 들떴다.

좋아하는 가수가 팬미팅에서 알은척을 해 준다면 이런 기분일까? 물론 상대는 가수가 아니라 내 나이의 네 배도 훨씬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지만, 나이가 무엇 중요하겠는가?

“그럼요. 내일도 올게요.”

가능하다면 언제 이 거리에 나오시는지 시간을 물어보고 매번 나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할아버지가 선선히 고개를 주억거리셨다.

난 그 모습에서 직감적으로 약간 이상함을 느꼈다. 굳이 내게 묻고 그것을 근거로 스스로에게 무언가 약속을 하시는 듯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더 무언가를 물어볼 순 없었다.

난 모자에 담긴 돈과 바이올린을 정리해서 자리를 떠나는 할아버지의 뒤를 바라보며 여러 충동을 느꼈다.

당장 그 뒤를 따라가 볼 수도 있었고, 내가 그러기 힘들다면 보다 전문가인 빅토르나 자하르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다.

“…….”

고개를 저어 이상한 생각들을 떨쳐 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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