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할아버지는 이전에 선물 받은 좋은 차가 있다며 집으로 날 초대했다.
곁에 있던 자하르는 말없이 잠시 날 보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골목 어귀로 사라졌다. 아마 허락한 것이리라.
그렇게 찾아간 집은 그리 멀지 않았다.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있는 주거단지에 위치한 허름한 건물이었다.
“들어오렴.”
“실례합니다.”
난 조심스레 집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 하나가 전부인 작은 원룸이었다. 그래도 여기서 꽤 오래 사셨는지 가재도구들이 나름대로의 정돈 기준을 가지고 조화롭게 놓여 있었다.
집이 좁은 것은 어쩔 수 없는지라 이곳저곳 늘어서 있긴 했지만 그 모습이 어색하게 보이진 않았다.
“……와.”
그리고 거실 한쪽에 빼곡히 있는 음반들을 보고 난 탄성을 터뜨렸다.
상당히 오래된 음반들에다가 심지어 LP판들도 굉장히 많았다. 요즘은 저 LP판들도 죄다 디지털로 다시 녹음해서 잘 찾아보기 힘든데, 정말 생소했다.
신기하게 음반들을 구경하고 있자 할아버지가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 놓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흐르는 물에 손을 씻고,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찬장에서 찻잎 통을 꺼내셨다.
음반을 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난 재빠르게 그사이 이 할아버지의 정체에 대해 실마리가 될 단서들을 수색했다.
내 기억 속에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중엔 딱히 연결되는 사람이 없었지만, 바흐와 파가니니로 그 정도 수준 높은 연주를 보이는 분이 무명의 음악가일 리가 없었다.
난 어느 정도는 확신했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나 아샤 하이페츠 같은 구소련의 바이올리니스트처럼 유명세를 떨치진 못했지만 분명 연주회도 하시고 음반도 내시고, 어느 정도는 이름이 있으신 분이어야만 했다.
분명 무언가 찾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난 눈으로 거실을 살폈다. 무언가 상패라든가, 메달이라든가, 트로피라든가.
“…….”
그런데 오래 살펴볼 것도 없이 아무것도 없었다.
거실에 있는 음반들과, 바이올린을 빼면 그 누구도 이 원룸에 음악가가 산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이나 별달리 특색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조금 멋쩍게 말했다.
“그리 재미있는 건 없을 텐데.”
“…….”
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선생님. 제가 몰라봬서 정말 죄송한데…… 그래도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가르쳐 주시면 안 될까요.”
“허, 허허허. 몰라보는 게 당연하지. 신경 쓰지 말고 여기 앉겠니.”
“…….”
끝까지 성함을 말씀해 주지 않으실 모양이었다. 계속해서 성함을 물어보기도 죄송스러웠다.
“아이야.”
할아버지는 거꾸로 내 이름을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저 이 정도의 인연으로, 이름도 모르지만 단지 음악에 이끌려 잠시 차를 한잔 하게 되는 정도로 가볍게 스쳐 지나가려고 마음먹으신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더더욱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야만 했다.
난 조금 낙담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예.”
“다시 한 번 고맙다고 하고 싶구나. 바이올린을 찾아 줘서.”
할아버지가 고개를 숙였다. 나 역시 마주 고개를 숙여 답했다.
“별말씀을요.”
본데 있게 응하자 할아버지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또 고맙구나. 사흘이나 내 연주를 들으러 와 줘서.”
“…….”
그렇게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해 오셨다.
평범하게 생각한다면 이것 역시 가볍게 답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난 어제부터 계속 뇌리에 맴도는 불길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며칠이고 나올게요…… 그러니까…….”
“그럴 필요 없단다.”
딱 자르는 말에 멈칫했다.
물이 다 끓었고, 할아버지는 준비된 찻잔에 물을 따라 잎을 우린 다음, 내 앞에 내밀었다.
“마시렴.”
“…….”
향긋한 허브차였다. 난 바로 마시지 않고 물끄러미 찻잔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는 난처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난 내일부턴 거리에 나가지 않는단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난 더듬거리며 물었다.
“왜…… 왜죠?”
할아버지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춥잖니.”
“…….”
순간 할 말이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요 근래 며칠 따뜻하긴 했지만 이제 곧 모스크바는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된다.
영하권의 날씨에 밖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난 납득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대충 이렇게 넘기시려는 것 같았지만 난 굳이 묻고야 말았다.
“그런데 바이올린은 왜 절 주려고 하셨어요? 겨울이 추워서 거리 공연이 안 된다면…… 봄이 오면 다시 하셔야죠.”
할아버지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곤 대답했다.
“난 여기까지 하고 싶구나.”
“…….”
혹시나 하는 내 욕심과 아쉬움으로, 결국 대답을 듣고 나서야 후회했다.
차라리 묻지 않고 듣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우울하게 쳐다보니 할아버지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자리는 다른 재능 있는 친구들에게 넘겨주어야지. 언제까지 모스크바에 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순 없잖니?”
“……떠나실 건가요.”
“친구를 만나러 갈까 싶구나.”
“…….”
난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한동안 말없이 찻잔만 기울였다.
낡디낡은 원룸에서 이름도 모르지만 존경하는 연주자와 티타임을 가질 기회가 앞으로 몇 번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이 아늑함이 당장 내일이면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데에 약간 공포를 느꼈다.
난 무작정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연주회를 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지난 사흘간 몇 번이고 고민했고, 입 밖까지 거의 내었다가 다시 삼켰던 말이었다.
정말 주제넘는 소리라는 것은 잘 안다. 어쩌면 기분 나쁘게 들으실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내 의도를 곡해하진 않으신 듯했다.
“마음은 고맙구나.”
기분 좋게 웃으셨지만 결국 거절하셨다.
어렴풋이 이분이 거절하시리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젠 더 이상 무언가 제안할 수도 없었다.
“…….”
“이제 나처럼 낡은 연주자는 물러날 때가 되었지.”
“낡다니…… 그런 말씀 마세요. 더 오래 연주하셔야죠…….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하지만 할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앞으로도 현역 연주자로 충분히 활동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다.
갑자기 맥이 쭉 빠졌다. 이름도 알리지 않고, 연주도 그만두고, 이만 은퇴하시려는 분을 내가 괜히 붙잡고 있는 걸까?
복잡한 심경으로 입을 다물고 있자 할아버지가 찻잔을 들며 말씀하셨다.
“그래도, 안심이 되는구나.”
“……예?”
“내가 물러나도 재능 있는 아이들이 계속 클래식을 이어 갈 테니 말이다.”
흠칫했다.
난 중앙음악학교 피아노과 학생이었다.
중앙음악학교는 이 모스크바뿐만이 아니라 이 러시아, 전 세계에서 손꼽는 음악학교 중 하나이다. 그런 학교에 다니는 나는 의심할 바 없는 천재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난…….
“전 사실 재능이 별로 없어요.”
뜬금없는 내 말에 할아버지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말이니?”
“…….”
뭐라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이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이제 내 몸에 내재되어 있는 잠재력은 거의 한계에 다다라 있다. 난 그걸 알 수가 있다.
얼마나 웃기는 소리로 들리겠는가?
조용히 찻물만 홀짝이자 할아버지가 턱을 괴고 날 유심히 바라보셨다. 그 시선이 조금 따갑다.
할아버지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니?”
“……그렇죠.”
할아버지는 중앙음악학교는 재능이 없는 애들을 받는 곳이 아니지 않느냐, 같은 말씀을 하진 않았다.
그건 결국 다른 사람의 평가였고 스스로 느끼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내게 흥미를 가지신 듯했다.
“무언가 들어 볼 수 있으면 좋겠다만…… 손을 다쳤구나.”
“…….”
사실 다치진 않았지만 이 원룸엔 피아노도 없었고 내가 뭔가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은 전무했다.
피아노가 없는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재미없는 사람에 불과했다.
잠시 그렇게 날 보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제안했다.
“노래를 해 보련?”
“예?”
난 거의 경기를 일으켰다.
“노, 노래요?”
“그래. 지금 내게 들려 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지 않겠니?”
애초에 난 노래란 걸 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전에도, 지금도.
정제된 음으로 음악을 만드는 기악에만 미친 사람들 중엔 종종 나 같은 사람들이 있곤 했다.
보통 사람들은 무언가 악기를 전공하면 노래 역시 잘하리라 생각하고 실제로 그런 연주자들이 많았지만, 난 내 손을 거치지 않고 내 목으로 무언가 노래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했고 불편했다.
더듬거리며 거절했다.
“저…… 전 노래 같은 건 못해요.”
“피아노 전공이라 그랬으니 가곡 같은 걸 해 보라는 게 아니란다. 카츄사나…… 머나먼 길 같은 민요라도 어떻니.”
“민요도 잘 할 줄 몰라요.”
“잘하라는 게 아니란다. 그냥 해 보련.”
“…….”
차라리 지금이라도 이 손목 보호대를 풀고 피아노가 있는 곳으로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식탁 앞에서 일어나시더니 바이올린 케이스에서 바이올린을 꺼내 들고 있었다.
당장 바이올린으로 반주라도 하실 기세였다. 난 기겁했다.
“자, 잠깐만요. 저 정말 가사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서……!”
“어디 보자, 악보가…….”
음반들을 꽂아 놓았던 곳 한쪽 구석엔 A4 용지들이 쌓여 있었다. 그 종이 뭉치를 조금 뒤적이던 할아버지가 이윽고 한 장의 악보를 찾아냈다.
“머나먼 길밖에 못 찾겠구나.”
“…….”
도망칠 구멍도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악보를 받아 들었다. 단선율로 그려진 악보에 가사가 붙어 있었다. 보자마자 시창에 능숙한 내 머리가 저절로 음계를 읽어 냈다.
“잠시만요. 좀 읽어 볼…….”
“그러면 재미없잖니. 자, 시작하자.”
그리고 할아버지는 곧바로 바이올린을 들고, 활을 그었다
바로 시작되는 호화로운 전주를 들으며 급하게 악보를 훑었다.
피아노만 있다면 이것보다 열 배는 더 복잡한 악보도 초견으로 쳐 낼 자신이 있었는데, 입으로 노래를 하려니 단선율의 악보도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눈앞이 팽팽 돈다. 악보도 가사도 잘 보이지 않았다.
진짜 해야 하는 거야?
정말?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들었지만, 할아버지는 아예 날 보지도 않고 눈을 감고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아, 전주가 끝나 간다. 이젠 노래를 시작해야 했다.
생전에 노래라곤 해 본 적이 없는데 내가 잘할 수 있을 리가……. 난 기절할 것 같은 가운데에서도 나도 모르게 반주에 따라 입을 열어 소리를 냈다.
“트로이카를 타고 떠나는 밤…….”
정말 이게 내 목소리가 맞는지 의아해할 틈도 없었다.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
난 처음으로 노래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잘못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난 정확한 음정으로 가사를 부르고 있었다.
바이올린 반주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난 거의 반쯤 홀린 것 같은 기분으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달빛 밝은 밤, 머나먼 길을 따라…….”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노래를 하려니 식은땀이 다 흘렀다.
이상하고, 창피하고, 긴장되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평소 내 귀로 듣는 내 말소리와는 또 다른 목소리였다.
그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고 오로지 잠재되어 있는 능력으로만 부르는 노랫소리는, 내 생각을 몇 단계는 더 뛰어넘고 있었다.
내 목소리는 내가 바라는 것 이상으로 맑고 청아하게 울렸고, 얼마든지 높은 음이라도 구사해 낼 수 있을 것처럼 여유 있게 올라갔다.
처음 보는 노래를 부르는데도 전혀 막힘이 없었다.
난 지금껏 내가 많은 것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단 것을 깨달았다.
이 몸의 잠재력이 연주자로서 기악을 하는 데에 있어서 굉장히 부족하다는 것만을 보고 음악가로서의 전체적인 잠재력 또한 굉장히 수준이 낮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못 박았다.
음악성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을 것이 뻔하니, 기존 내가 가지고 있는 음악을 되찾고 살려 내는 것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아주 성급한 생각이었다.
대체 왜 그렇게 쉽게, 간단하게 포기해 버렸지.
왜 덮어 버렸지.
“라…….”
노래를 마치고 악보를 툭 내려놓았다.
할아버지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정말 처음 불러 보는 것은 물론이고, 어디서 들어 본 적도 없는 것 같구나.”
“……예.”
“그런데도 정말 훌륭하게 불렀지. 음악에 재능이 없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거라.”
난 비틀거리며 의자에 가서 앉고는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감쌌다.
근래 계속 참아 왔던 울음이 뒤늦게 터져 나왔다.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한데 뒤섞여 걷잡을 수 없이 날 무너뜨렸다.
“…….”
난 평생을 솔리스트로 살아왔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 처해서도 끝까지 솔리스트로 스스로를 증명하고 지켜 내고자 했다.
그래야만 날 오롯이 세울 수 있고, 이겨 낼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때문에 늘 부채감을 말하면서도, 행동은 이기적으로 하며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해 왔다.
하지만 음악가의 재능과 음악성을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노래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음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
흐느끼는 내 등 위로 포근한 손길이 와 닿았다.
그리고 담담하게, 목소리가 내려앉는다.
“내가 떠나기 전에 널 만날 수 있어 다행이구나.”
난 급하게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울먹이면서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스스로 듣기에도 꼴불견이었다.
“떠나시지…… 않으면, 계속 계시면…… 안 될까요. 제가…… 아니, 아버지도 제가 선생님을 소개시켜 드린다면 분명…….”
“괜찮단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가야지.”
“…….”
대체 왜 자꾸 그렇게 떠나시려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 태도가 너무 단호하고, 오랜 고민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난 말을 잇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그대로 바이올린 케이스에 바이올린을 집어넣고는 내 쪽으로 건넸다.
“자.”
“……안 돼요. 이건 제가 받을 수 없…….”
필사적으로 거부하자 할아버지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가져가렴.”
“전 피아노밖에 못 친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가지고 가서 네가 보기에 이 바이올린을 건네줄 만한 사람을 찾는다면 그 사람에게 주려무나.”
“……예?”
“거리에서 네가 날 찾았듯,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하면 된단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끝끝내 내 손에 바이올린 케이스를 쥐여 주었다.
“이름 모를 아이야.”
* * *
바이올린 케이스를 안고 원룸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난 하염없이 울었다.
억지를 써서라도, 말 그대로 내 마음대로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수십 번씩 생각하다가도 다시 쓴웃음을 지으며 거절하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수십, 수백 번을 제안하더라도 아마 모조리 거부당할 것이다.
할아버지는 끝까지 내 이름을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스스로가 너무 무력하게 느껴져서 계속 눈물이 나왔다.
죄책감인지 무엇인지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빅토르도 자하르도 사정을 묻지 않았다. 난 설명을 할 수도 없었기에 그들의 침묵이 고마웠다.
집에 돌아와서, 내 방 책상 위에 바이올린 케이스를 올려놓고 나서야 조금 진정되었다.
“아가씨.”
그제야 자하르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제가…… 어제 비밀리에 그 바이올리니스트에 대해 조사를 좀 해 봤습니다.”
“…….”
멀거니 고개를 드니 자하르가 이어 말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
내가 말만 하면, 자하르는 무엇이든 답해 주고 무엇이든 해 줄 것이다.
그분의 이름을 알고 싶다고 하면 이름을 가르쳐 주고 나이를 알고 싶다면 나이를 가르쳐 주고 혹시 음반을 낸 것이 있냐면 가져와 주겠지.
하지만 난 그분의 배려를, 이제야 느낄 수 있는 그 따뜻함을 발로 차 버리는 짓을 할 순 없었다.
“조용히…… 조용히 이 바이올린값만 넉넉하게 드릴 수 있겠어요?”
“……가능합니다.”
자하르는 많은 것을 알고 있겠지만, 난 딱 그분이 원했던 만큼만 아는 선에서 그치기로 했다. 이 또한 내가 그분에게 할 수 있는 배려였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내가 최소한으로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금전적인 것뿐이었다. 이조차도 주제넘는 짓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 정도는 정말 내 마음대로 하고 말 테다.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자하르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바이올린은 척 봐도 값싼 물건이 아니었지만 자하르에게 맡긴다면 믿어도 괜찮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전…… 조금 잘게요. 고마워요, 자하르.”
“쉬십시오.”
자하르가 나갔다.
난 옷도 제대로 안 벗고 침대에 누워 바이올린을 바라보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