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솔리스트의 삶이란 어떠한가.
난 그것에 대해 그리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모두가 오케스트라를 원하는 유럽에 비해, 내가 음악을 배운 한국은 모두가 솔리스트를 원했다.
연주자들은 악기와 일대일로 마주하고 스스로를 쏟아붓는데에 익숙했고, 그것으로 순위를 따지는 것을 곧 자기증명으로 여겼다.
이러한 기조에서 훈련받은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 솔리스트 외의 자신은 몰랐다.
물론 합주를 하기도 하고, 협주곡을 연주하기도 했지만 난 언제나 솔리스트였다.
내 세상에 피아노가 메인에 나서지 않는 음악은 없었다.
“…….”
이것이 얼마나 균형이 어그러진 독선인지 난 조금 알 것 같았다.
저녁에 눈을 뜨자마자 난 연습실에 틀어박혀서 러시아의 민요, 가곡, 가요 등등 닥치는 대로 검색해서 듣고, 악보를 받아서 따라 불러 보았다.
난 어떠한 반주 없이도 곧장 음정을 잡고 노래를 불러 낼 수 있었다.
처음엔 조금 어색했던 내 노랫소리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맑고 깔끔해졌다.
폐활량이 이렇게나 엉망인데도 불구하고 성량도 꽤 있었고 음의 스펙트럼도 다채로웠다.
노래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이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것 같았다.
이 재능은 내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렇게 악보만 보고 노래들의 음정을 잡아내는 시창 능력과 기본적인 박자 감각 등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피아노라는 중계 없이 곧바로 목에서 만들어 내는 이 음악은 타고나지 않고선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제대로 된 발성법 없이 훈련되지 않은 목소리는 곧 한계를 드러냈다.
늘 달고 있는 감기로 가뜩이나 목도 안 좋은데 생목으로 노래를 따라 불렀더니 약하디약한 목이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소프라노들이 부르는 가곡을 따라서 어떻게 해 보려다가 목 뒤 어딘가가 아주 파업을 선언해 버린 것 같았다.
왜 안 하던 짓을 하느냐고 시위 중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았다. 난 따뜻한 물로 목을 축이고, 의자에 앉았다.
가만히 앉아서 방금 내가 했던 노래들을 떠올렸다.
난 솔리스트로서의 내 아집이 이 몸이 가지고 있는 소리를 얼마나 틀어막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클래식을 연구하는 음악가로서 내 음악을 추구하는 것도 좋았지만, 최소한 한 번 쯤은 타티아나로서 할 수 있는 음악도 돌아보았어야 했다.
하지만 난 그간 단 한 번도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타티아나가 할 수 있는 음악을 완전히 무시하고 짓밟았다.
설령 할 수 있다 한들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음악성이란 솔리스트로서의 내 것 외엔 있을 수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단 한 곡이라도 내 음악만 할 수 있다면 다른 음악들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내팽개쳐 두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인간이었다.
피아노를 치지 못한다 해서 음악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본래 내어야 했을 목소리가 있었다.
“…….”
내가 가지고 있던 정체성과 과거 등을 버리고 타티아나로 사는 것에 대한 반대급부로 음악만큼은 내 것이어야 공평한 거래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공평하지 않았다.
정말 망령으로서 내 몫의 한 곡을 원했다면 적어도 나머지는, 최소한 그 나머지 중에서라도 한 곡은 타티아나를 위한 음악이어야 했다. 그래야 공평해지는 것이었다.
“…….”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새삼 느끼면서 상념에 잠겨 있는데, 끼이이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벨카가 연습실로 들어왔다.
연습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잠가 놓지 않는다면 벨카는 그걸 열고 들어올 줄 알았다.
벨카가 똑똑한 것도 있었지만, 문손잡이가 레버처럼 되어 있어서 그냥 밑으로 누르면 열리기 때문이었다.
“벨카……? 갑자기 왜…… 억.”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벨카가 앉아 있는 내 무릎 위로 머리를 올렸다.
벨카는 애교가 많긴 했지만 내가 워낙 허약해서 이런 식으로 달라붙어서 어리광을 부리는 일은 드물었는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유난이었다.
난 무릎 위에 놓인 벨카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이렇게 어리광이시고.”
아래턱이 닫힌 채 우웅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벨카가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무언가 해 달라는 것 같아 보여서 머리를 더 쓰다듬고, 귀 뒤편도 긁어 주었다.
지금 이 자세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더 이상 무언가를 해 주려면 벨카가 머리를 치워 주어야 했다.
하지만 벨카는 두 눈을 들어 날 바라보면서도 도저히 비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채로 한동안 벨카를 쓸어 주다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노래를 불러 드릴까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벨카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난 어쩐지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벨카가 갑자기 내게 와서 이럴 이유가 없었다.
목이 아파서 뭔가 크게 목소리를 내어야 하는 노래는 할 수가 없었다. 난 가만히 입을 열어 아까 봐 두었던 자장가를 한 곡 불렀다.
벨카는 그제야 귀를 쫑긋 세웠다. 한동안 내가 노래를 하며 뒷목을 쓸어 주자 잠시 눈꺼풀을 끔뻑이더니 곧 눈을 감고 축 늘어졌다.
정말로 내 노래를 원했던 것 같다. 신기할 정도로 쉽게 벨카는 내 무릎을 베고 잠들었다.
난 흐뭇하게 벨카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렇게 자 버리면 난 어떻게 움직여?
* * *
월요일 아침, 내 목소리는 완전히 쉬어 있었다.
어제만 해도 조금 아프긴 했지만 괜찮았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거의 다 죽어 가는 사람처럼 색색거리는 소리밖에 내지 못했다.
생전 처음 노래를 해 본 주제에 무리를 한 결과는 정말 끔찍했다.
나제즈다가 기절할 듯 놀라서는 구급차를 부르려는 걸 간신히 막았다.
그렇다고 노래 연습을 하다가 목이 쉬어 버렸다고 말하기는 또 창피해서 그냥 목감기가 걸린 것 같다고 얼버무렸다.
별것 아닌 것처럼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이래서야 설득력이 하나도 없었다.
나제즈다는 목감기도 감기이니 학교를 쉬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난 열도 하나도 없었고 기침도 별로 하지 않았다.
괜찮다고 우기고 우겨서 간신히 등교할 수 있었다.
“타티아나. 주말은 잘 지냈어? 뭐 했어?”
“…….”
아나스타샤가 날 맞아 반갑게 인사해 왔지만 난 대답하지 못하고 손을 흔들었다.
아나스타샤가 이상하다는 듯 날 보더니 갑자기 새파랗게 질려서 날듯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너, 어디 아픈…….”
어쩔 수 없이 잔뜩 쉰 목소리로 색색거리며 짧게 말했다.
“말 못 해요.”
“……? 너 목소리가 왜 그래.”
“…….”
난 원치 않게 묵언수행에 돌입했다.
더 이상 말 시키지 말라는 뜻으로 양손으로 내 목 부근에 엑스 자를 그려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날 보더니 정말 가지가지 한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불쑥 손을 내밀어 내 이마에 대었다. 난 흠칫 놀랐지만 가만히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중얼거렸다.
“열은 없는 것 같고…….”
“…….”
그 뒤로도 아나스타샤는 유심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슬슬 부담스러워질 무렵, 그녀가 헛웃음을 흘리더니 말했다.
“아니…… 무슨 락 콘서트장 가서 소리라도 고래고래 질렀어? 목소리가 어떻게 그렇게 확 가?”
“…….”
비슷하긴 한데 제가 그렇게 화끈하게 놀 사람은 아니죠?
아나스타샤는 내 마음의 대답을 들었는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 없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굳이 따로 결백을 주장할 것도 없었다.
난 희미하게 웃으며 내 자리로 향했다.
아나스타샤는 내가 쉰 목소리를 내는 것을 창피해한다는 것을 느꼈는지 그 이상으로 길게 말을 걸진 않았다. 대신 스마트폰 메신저로 대화를 걸어왔다.
[오늘은 이걸로만 이야기하게 생겼네?]
[그러게요.]
[그런데 이것도 조금 웃긴다. 그냥 난 말로 하고 너만 이걸로 대답하면 안 될까?]
[안 돼요. 그건 불공평하잖아요.]
[불만이면 너도 말로 해.]
이렇게 서로 손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아선 채팅으로 대화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아나스타샤도 나도 타자가 그리 느린 것은 아니지만 말로 하는 것 보다는 느릴 수밖에 없어서, 말을 보내 놓고 아나스타샤가 답장을 보내는 동안 웃으며 그녀의 윗머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든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뭐야.”
“…….”
그냥 재미있어서요.
그렇게 아나스타샤와 마주 앉아서 메신저로만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보니 난 이런 상황이 그리 낯설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문득 한승우와 태블릿 컴퓨터를 사이에 두고 대화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상황이 지금과 똑같았다. 서로 말소리 하나 없이 활자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제 한승우는 어느 정도 기본 회화는 하는 것 같고 중요한 것들은 리처드와 영어로 대화하니 나와 이제 그렇게 이야기 할 일은 없겠지만…….
이전에 한승우에게 왔던 문자 메시지를 다시 찾았다. 번호를 주고받긴 했지만 한승우와 나 사이엔 교류랄 게 거의 없었다.
[고맙습니다.]
가장 최근에 온 문자가 한 달 전, 중간고사 첫날 시험을 마치고 짧게 날아온 것이었다.
무슨 의미일까? 지금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다.
물론 내가 그를 도와준 일도 있으니 고맙다고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내게 고마움을 표하고, 무언가 해 주고 싶어 하는 듯했다. 난 어렴풋이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저번 주만 하더라도 한승우는 리처드의 계획에 동참하고 직접적인 시행자가 되기까지 했다.
그때 우리 집에서 조용히 넘어갔기에 망정이지, 그 상황에선 아버지가 이성을 잃고 대노하실 수도 있었다.
그걸 생각해 보면 한승우는 엄청나게 위험한 일을 자처한 것이었다.
일이 험악하게 돌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앞으로도 무언가 빚을 갚겠다고 나설 필요 없으니 그렇게 위험한 일을 자처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이건 좋다 싫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딱 하나. 그저 한승우가 이 학교에서 잘 적응해서 한 명의 연주자로 성장하는 것이었다.
그에겐 충분히 그럴 만한 잠재력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가 뛰어난 연주자가 된다면, 내게 있어선 그것 이상 가는 보람이 없을 것이다.
너무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인데 이걸 왜 몰라준단 말인가?
“타티아나.”
“……?”
고개를 드니 아나스타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답장 안 해 줄 거야?”
아차.
난 황급히 다시 메신저를 켰다. 이미 아나스타샤가 몇 번이나 메시지를 보낸 상태였다.
되는대로 답장하려는데, 아나스타샤가 내 옆으로 휙 다가왔다.
“뭐 보고 있었어?”
“…….”
“나랑 이야기하는데 다른 사람 생각하는 거야?”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예기가 서려 있었다.
난 행여나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내 스마트폰을 빼앗을까 봐 몸을 뒤로 뺐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물론 아나스타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짐짓 장난기 어린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
“남자면 봐줄게.”
귀신인가?
“…….”
“진짜야?”
아나스타샤의 목소리가 떨렸다.
난 급하게 그럴 리 없다고 변명했지만 이미 표정에서 다 드러나 버린 모양이다.
아나스타샤는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 꼬치꼬치 캐물었다.
급격하게 피곤해졌다. 아나스타샤가 생각하는 게 뭔진 알겠지만 난 그렇게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꿈에도 모르겠지만 난 당장 아나스타샤만 해도 어떻게 거리를 두어야 할지 헷갈리는 중이었다.
하물며 남자? 지금은 세계 최고의 미남이 벤츠를 타고 나타나도 날 유혹할 순 없을 것이다.
세계 최고 미남까지 갈 것도 없었다. 당장 같은 반인 에르네스트만 보더라도 난 그보다 잘생긴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난 그를 떠올려 보다가 순간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친구 관계로는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지만 그 이상으로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은 아직 엄두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도 쭉 이러리라 장담을 할 순 없었다.
난 요 1년도 안 되는 사이 이미 굉장히 많이 변하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진 나도 모른다.
그리고 그간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입장 또한 있었다.
타티아나라면 응당 남자와 사귀고 싶어 하지 않았겠는가?
“…….”
그건 정말 모르는 일이다. 타티아나가 여자와 사귀고 싶어 했을지 또 누가 아는가? 혹은 남녀 누구든 전혀 상관없어 했다면?
음악에 관한 일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되는대로 따라가려고 했지만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