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월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자마자 난 미하일 선생님의 연구실로 향했다.
내 손목엔 아직 손목 보호대가 채워져 있었지만 이것도 오늘까지였다.
리처드가 제안하고, 내가 받아들이고 스스로 약속한 2주일이 모두 흘러간 것이다.
그사이에도 몇 번이고 풀어 버리고 싶었지만 난 한 번도 약속을 깨지 않고 정말 2주일간 한 번도 피아노를 치지 않고 지냈다.
살면서 이렇게 긴 2주일이 있었을까 싶다.
“…….”
마음 같아선 당장 풀어 버리고 피아노를 찾아 연습실로 가고 싶었다. 한시라도 빨리 피아노 앞으로 복귀하고 싶었다.
하지만 적어도 날 걱정해 주신 선생님에게 맨 처음 보고는 해야 했다.
급히 연구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미하일 선생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렴.”
선생님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날 돌아보았다.
“타티아나.”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 오늘부터 복귀…… 아니지 먼저 제가 완전히 다 나았다는걸 보여 드리…….”
“하하하, 마음이 급하구나.”
두서없이 떠들자 미하일 선생님이 웃었다. 난 얼굴을 붉히며 선생님이 가리키는 의자에 일단 앉았다.
미하일 선생님은 연구실 구석에서 음료를 하나 꺼내선 툭 따서 건네주었다.
“일단 마시렴.”
“예, 예…….”
난 살짝 열린 병을 일단 받아 들고 들이켰다.
차가운 음료수를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다 마셔 버리고 나니 그제야 가슴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빈 병을 꼭 쥐고 머뭇거리고 있자 미하일 선생님이 손을 내밀었다.
“녀석…… 알았다. 손 이리 줘 보렴.”
오른손을 내밀자 미하일 선생님이 내 손을 잡고는 손목에 채워져 있는 손목 보호대의 벨크로를 풀어냈다. 손목에 해방감이 느껴졌다.
미하일 선생님이 내 손을 잡은 채로 유심히 바라보다가 농담조로 말했다.
“내 눈에서 초음파나 자기장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잘 모르겠구나.
실제로 초음파나 자기장이 나오더라도 딱히 문제를 발견하진 못하셨을 것이다. 난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선생님. 정말로.”
“자세한 건 의사한테 보이는 게 낫겠지만…… 일단 기초적인 재활법을 가르쳐 주마. 살살 따라 해 보거라.”
그러면서 미하일 선생님은 내 손을 놓고 양손을 깍지를 끼고 젖히거나, 손목을 아래로 내리고 서서히 돌리는 등 여러 동작을 보여 주셨다.
난 그 동작들을 똑같이 따라 했다. 중간중간 선생님은 혹시 아프진 않냐는 등 자꾸 걱정하는 말씀을 해 주셔서 난 그것이 죄스러웠다.
“정말 괜찮아요, 선생님. 아픈 곳도 하나도 없고요, 되레 그사이 푹 쉬어서 그런지 컨디션이 더 좋아진 것도 같아요.”
일단 미하일 선생님을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열
심히 내가 멀쩡하다는 것을 어필하자 선생님은 그제야 조금 안도하신 듯 편안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래, 다행이구나. 피아노는…… 천천히 시작하도록 하자꾸나. 지금 바로 하는 것보단 며칠이라도 더 쉬는 게…….”
“아뇨, 선생님. 당장 해도 괜찮아요.”
“이번 주는 성악에 집중하는 게 어떻니?”
난 단호하게 말했다.
“전 성악가가 아니고, 구세프 선생님의 시험은 성악이 아니에요.”
“그렇지…….”
“제가 성악을 배우는 것은 어디까지나 피아노를 위한 것이라는 거, 아시잖아요?”
“그렇지.”
내가 딱 잘라 말하자 미하일 선생님이 대견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 타티아나. 네가 피아노를 후순위로 미뤄 둘 리가 없지.”
“예. 당장 지금부터라도…….”
자신 있게 말하며 양손을 들어 올리다가 멈칫했다.
내 손톱은 항상 짧게 정리되어 있는 편이었다. 손톱이 길면 건반을 치는 데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탁탁거리며 건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건반 사이에 잘못 끼어서 부러지기도 한다. 손톱이 길면 피아노는 제대로 칠 수가 없다.
하지만 난 2주일간 피아노를 건드리지도 않았고, 그사이 손톱이 길게 자라 있었다.
긴 손톱을 보며 조금 생경했다. 내가 살면서 이렇게까지 손톱을 길러 본 적이 있던가?
내가 말을 멈추고 손을 내려다보고 있자 미하일 선생님이 웃음을 터뜨렸다.
“손톱이 많이 길었구나.”
“죄송합니다…….”
기본이 안 되어 있잖아, 기본이!
손톱깎이가 어디 있지? 난 급히 가방을 뒤적였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손톱을 다듬는 손톱용 줄은 있었지만 손톱깎이는 없었다. 큰일이네, 연습실에 있던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미하일 선생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서랍에서 손톱깎이를 꺼내 오셨다.
얼른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손 줘 보렴.”
“……예?”
난데없이 미하일 선생님이 내 손을 요구했다.
멀거니 되묻자 미하일 선생님이 아차 싶었는지 손사래를 쳤다.
“아니다, 미안하구나. 너도 여자애인데.”
미하일 선생님은 실수라 생각하신 것 같지만, 나보다 어린 학생들도 많이 제자로 두고 계시니 나에게도 별생각 없이 꺼낸 말인 것 같았다.
물끄러미 미하일 선생님을 올려다보았다. 미안하다는 듯 손톱깎이를 내밀고 있었다.
물론 생판 남이 내 손톱을 어떻게 하겠다고 하면 짜증부터 날 것이다. 더군다나 다른 부위도 아니고 손이지 않은가?
손톱깎이건 뭐건 다른 사람의 손에 들린 날붙이를 내 손에 가져다대는 것은 상당히 껄끄러웠다.
하지만 미하일 선생님은 남이라 할 수 없었다. 난 일부러라도 손을 내밀었다.
“……아뇨, 부탁드려도 될까요.”
손톱깎이를 받아 갈 수 있게 손바닥을 위로 한 것이 아닌, 손등을 위로 해서 손톱을 보인 채 손을 내밀자 미하일 선생님이 조금 당황했다.
선생님은 떨떠름하게 말했다.
“예쁘게는 못 한다.”
“상관없어요.”
내가 허락하자 미하일 선생님이 그제야 내 손을 받아 갔다. 그리곤 손톱깎이를 들어 검지부터 시작했다.
똑, 똑.
중요한 의식을 치르듯, 차분하게 미하일 선생님이 내 손가락을 하나하나 바꿔 들며 손톱을 잘라 나갔다.
그 눈빛이 사뭇 경건해서, 난 마음이 놓였다.
처음에는 막연한 불안감 등이 있었다.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어린 시절 빼고는 살면서 누가 이렇게 내 손톱을 잘라 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때문에 난 내가 견디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이를 꽉 물고 참아 내려 했다.
하지만 의외로 편안했다.
내가 내 힘 안 들이고 손톱을 잘라서 편안한 것이 아닌, 무언가 염려하지 않고 손을 맡겨도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미하일 선생님은 혹여나 너무 짧게 잘라서 상처가 날까 봐 조심스레 손톱깎이를 다루고 계셨다.
똑, 똑. 어쩐지 손끝과 손아귀가 조금 간지러웠으나 난 웃거나 빼지 않고 얌전히 손을 맡겼다.
“…….”
양손의 손톱을 다 자르는 데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치 감정사처럼 내 손톱들을 들여다보던 미하일 선생님이 이번엔 손톱용 줄을 들고 손톱 가장자리를 날카롭지 않고 둥글게 갈아 내었다.
내 손톱에 줄을 가져다 대며 선생님이 중얼거렸다.
“마음에 들지 모르겠구나……. 일단은 대충…… 아니지, 대충이 아니라 열심히 하는데 말이다…….”
난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생각해 보니, 세상에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지도 선생님을 네일아티스트처럼 부려 먹고 있잖아?
“괜찮아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것참…….”
손톱 다듬기도 끝나고, 난 오른손을 들었다. 길었던 손톱들이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엄지손가락에 다른 손가락 끝들을 대 보았다. 내가 평소 자르는 것 보다는 약간 길지만, 매끄러웠다.
다시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선생님이 저보다 훨씬 섬세하신 것 같아요.”
“하하, 무슨 소리냐 그게. 앞으로도 계속해 달라는 게냐?”
“아, 아뇨. 그럴 리가요.”
미하일 선생님은 늘 내게 나긋나긋했고 잘 대해 주셨지만 그래도 천하의 중앙음악학교의 기악지도 선생님이었다.
어리광도 적당히 피우고 알아서 선을 지켜야 했다.
“무슨 곡부터 해 보면 좋을까요? 평균율부터일까요?”
난 학생이고 내가 해야 할 것은 피아노 연습이었다. 미하일 선생님에게 묻자 선생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단 앉아 보렴.”
그리고 미하일 선생님은 연구실 옆에 있는 피아노를 가리켰다. 난 멍하니 다가가서 의자 앞에 앉았다.
2주일 만에 눈앞에 둔 건반들은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다.
원래 이랬던가?
겨우 2주일밖에 안 지났는데 상당히 어색했다. 난 뇌리에 남은 버릇을 끌어내어 의자를 조절하고 연습을 시작할 준비를 마쳤다.
미하일 선생님이 말했다.
“일단 하농부터 차근차근 시작해 보거라. 스케일과 아르페지오는 무리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그만두고.”
“예, 선생님.”
하농 연습곡 첫 곡이 어떻게 시작하더라. 이렇게였나?
불식간에 양손을 들어 첫 음을 쳐 보았다.
내 손의 움직임에 따라 피아노 건반이 눌리고, 레버가 들리고, 해머가 움직여 현을 때리는 일련의 과정이 생생하게 손에 전달되었다.
난 그것을 정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
이전에도 이러한 터치감에 대해 수없이 고민하고 연구한 바 있지만, 2주일이나 쉬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뚜렷하게 감각이 전해져 올 줄은 미처 몰랐다.
보통 그렇게 쉬면 감이 둔해져야 정상이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은 상당히 컨디션 좋을 때나 느낄 수 있던 감각들이었다.
조금 나아졌나?
잘 모르겠다. 왜지?
터치감에 이어 소리도 조금 더 명료하게 들리는 기분이었지만 하농 연습곡으로 많은 것을 알 순 없었다.
조금 더 어려운, 음악성을 지닌 곡들을 연주하고 싶었지만, 난 속도를 내지 않고 천천히 조금씩 손을 움직여 나갔다.
실제로 다치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오랫동안 피아노를 쉬었으니 재활을 한다는 기분으로, 피아노를 더듬어 나갔다.
지금 나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차고 넘쳤다.
한동안 건반을 맛보지 못했던 손가락이 갈증을 해소하고 희열에 떨었다.
단조로운 하농 연습곡을 내 손으로 치고 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난 그간의 보상을 한 번에 받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잘 모르겠다.
그간 쉬면서 뭘 느꼈는지, 내가 할 수 있는 음악이란 게 무엇인지.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든 것이 불안하고 어렵다.
잘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난 피아노를 쳐야 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
시야가 흐릿해져 온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난 울고 있었다.
슬프거나 우울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기쁨과 환희의 눈물. 흐느끼거나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도 저절로 눈가에서 눈물이 넘쳤다.
손수건을 꺼낼 틈도 없이, 미하일 선생님이 볼까 싶어 옷소매로 눈가를 닦아 냈다.
하지만 연습 소리가 멈췄는데 미하일 선생님이 내 쪽을 안 볼 리가 없었다.
눈가를 비비는 손등 너머로 미하일 선생님을 보니, 선생님도 안경을 벗고 한 손으로 콧잔등을 잡고 계셨다.
난 결국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미하일 선생님은 한동안 그대로 계시더니, 잠시 후 고개를 들었다.
“잘 됐구나, 타티아나.”
“선생님…….”
난 그저 선생님을 부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미하일 선생님이 말했다.
“난 그간 많은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타티아나, 너 만큼 열의가 넘치는 학생들도 많았지. 하지만 그중엔 연주자의 길을 포기해야만 했던 학생들도 있었단다.”
“…….”
“앞으론 다치지 말거라, 타티아나. 절대로.”
심장 깊숙이, 미하일 선생님의 말이 꽂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 가짜 진단서를 보고 일견 대수롭지 않다는 듯 편안하게 말씀하셨던 선생님도 사실 속으로는 깊은 속앓이를 하고 계셨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으면 됐다.”
미하일 선생님은 휘휘 손을 저었지만 난 죄책감으로 가슴이 아렸다. 선생님에겐 정말 큰 잘못을 했다.
연주자에게 부상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안다면 이래선 안 되는 것이었다.
“……앞으론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약속드릴게요.”
“그래, 고맙다.”
다시 한 번 단호하게 말하자 미하일 선생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활기차게 지도를 시작하셨다.
“좋아. 나쁘지 않아 보이는구나. 나쁘지 않아 보여. 그리고 그간 치고 싶은 것을 못 치고 참아 왔던 만큼, 하고 싶은 게 많겠지.”
“예.”
“하지만 지금처럼 차근차근 해 나가자꾸나. 오늘 연습도 길게 하지 말고, 15분씩 짧게 나누어서 하고, 휴식도 충분히 취해라.”
“예. 그렇게 할게요.”
“오늘도 성악 레슨이 있겠지?”
2시간쯤 뒤엔 성악 레슨 시간이었다.
마음 같아선 지금 성악이고 자시고 온종일 피아노에 달라붙어 있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 표정에서 그 마음이 다 드러났는지, 미하일 선생님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성악 레슨도 꼭 가고. 이전에 폴리나와 통화했었다.”
“……폴리나 선생님과요?”
“그래. 네가 성악에 꽤나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구나.”
“…….”
미하일 선생님이 날 천재로 보는 것처럼, 폴리나 선생님 역시 날 그렇게 보고 있었다.
생전 처음 하는 성악 기초 레슨이라지만 시창과 조음에 꽤나 많은 시간을 투자한 난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결국 큰 테두리에서 보면 같은 음악인 것이다.
난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건 제가 피아노를 배우면서 시창과 화성학 공부를 한 덕택이지 않을까요?”
“아니, 폴리나가 네가 피아노과라는 전제도 안 두고 보고 있었을 것 같으냐?”
미하일 선생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네 목소리 그 자체에서 많은 매력을 느낀 것 같았다.
“제…… 목소리요?”
“그래. 폴리나의 말로는 네 목소리가 소프라노 드라마티코, 즉 보통 소프라노들보다 기본 톤이 살짝 낮고, 감정적인 곡들을 부르는 데에 특화된 목소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미하일 선생님은 단순한 피아노 지도 선생님이 아닌, 음악가로서 내게 말했다.
“가지고 있는 건, 최대한 다 일깨워 보거라.”
여태껏 모르고 있었던,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