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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74화 (74/1,277)

##  74화

알람 소리도 없이 자연스레 눈을 뜨니 아직 밖은 어두컴컴했다.

약간 뒤척이다가,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가장 처음 느낀 것은 호흡이 편안하단 것이었다.

항상 자고 일어나면 코와 호흡기가 건조하게 메말라서, 사막에서 숨을 쉬는 것처럼 힘겨웠던 것이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요 며칠 내가 생각을 조금 고쳐먹고, 성악을 시작하게 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 첫 번째가 건강이었다.

그간 난 정말 비정상적으로 망가진 몸으로 살고 있었다.

연주자로서가 아니라 평범하게 사는 데에도 지장이 있을 정도로 병약하고 문제가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서 건강은 계속 나빠져 가고 있었다.

아마 그대로 살았더라면 난 얼마 가지 못해 다시 병석에 드러누워야 했을 것이다.

“으.”

침대에서 내려와서 기지개를 켰다.

온몸에 피가 돌면서 기분 좋은 현기증이 살짝 일었다가, 정신이 맑게 돌아왔다.

서늘한 공기가 온몸을 훑어 내렸다. 겨울이 오자마자 바로 시작되었던 잔기침은 일지 않았다.

사람의 몸이란 참 신기했다.

영혼과의 부조화로 인해 제대로 숨을 편하게 쉬지도 못할 정도로 건강이 나빴다가, 급격하게 좋아지기도 했다.

제자리에서 잠시 스트레칭을 해 보았다. 항상 온몸이 저릿거리던 느낌도 거의 사라져 있었다. 난 그대로 욕실로 가서 세수를 했다.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이전처럼 핏기 없이 힘없어 보이진 않았다.

항상 보는 얼굴이라 별생각 없었는데, 건강을 조금 찾고 나서야 아나스타샤가 왜 맨날 나만 보면 환자 같다고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물론 혈색이 조금 돌아왔다고 해서 갑자기 팔다리에 살이 붙고 튼튼해지는 것은 아니어서, 난 아직도 굉장히 말라 있었지만 잘 먹고 잘 관리한다면 앞으론 좋아질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이른 새벽의 찬 공기를 들이쉬었다. 이전 같았으면 첫 숨을 마시자마자 바로 기침부터 했을 것이다.

곧장 향한 곳은 별관의 연습실이었다.

겉옷을 벗어 두고, 편안한 자세로 피아노 앞에 앉아서 스트레칭을 조금 하고, 하농 연습곡을 처음부터 시작했다.

그간 쉰 대가로 내 손은 꽤 굳어 있었다. 특히 유연성이 많이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순서대로 스케일을 쳐 나가다가, 아르페지오 연습에 들어갔다.

어제 했던 연습으로 감은 조금 찾았지만 아직도 조금 느리고, 저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조성을 바꿔 가며 아르페지오 연습을 마치고, 이번엔 바흐 평균율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피아노를 치면서 손이 굳어 테크닉적인 문제를 느끼는 것과 별개로, 한껏 예민해진 내 감각은 건반 너머의 해머와 현을 소름끼치도록 뚜렷하게 느끼고 있었다.

코앞까지 느껴졌었던 재능의 벽은 느껴지지 않았다.

난 연주자로서 발전할 여지가 분명히 더 있었다.

평균율을 다 치고 나선 요즘 배우고 있는 성악을 연습할 차례였다.

일어나서 음계를 따라 발성 연습을 시작했다. 이전과 똑같이 2옥타브를 오르내리는 연습이었다.

일어나자마자 고음을 내려니 목이 약간 잠겨 있는지 잘 되지 않았다.

건반을 누르면 음이 나오는 피아노와 달리 사람의 목은 때와 상황에 따라 음을 잘 못 내기도 했다.

난 무리하지 않고 따뜻한 물을 조금 마시고 다시 목소리를 내 보았다.

난 지금 올바른 길로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원했던 방향일 것이다.

“……음음.”

심지어 이렇게 끌어낼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자, 난 혼자서 성악과 피아노를 동시에 할 수도 있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서 전주를 시작했다.

어제 불러 본 곡 중에 마음에 들었던 곡을 떠올렸다.

이탈리아 작곡가인 쥬세페 조르다니의 ‘카로 미오 벤’. 전형적인 이탈리아 가곡으로 감미롭고 애타는 사랑의 정서를 그리는 노래였다.

그리 복잡하지 않은 선율과 가사는 한 번 듣고 불러 보면 외우기에 충분했다. 물론 정확하게 기억하진 못해서 코드에 맞춰 연주했다.

“오 내 사랑, 오 내 기쁨.”

피아노 소리 위에 목소리를 얹었다.

손으로는 단단한 화성이 무너지지 않게 유지하면서 가사를 떠올려 내고, 정확한 방법으로 발음했다.

제대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양손을 쓰는 피아노만큼이나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었다.

머리가 과부하에 걸릴 정도로 복잡한 일이었지만 난 반쯤은 노하우와 나머지 반은 감으로 조르다니의 가곡을 이 연습실에 홀로 재현해 냈다.

“…….”

짧은 가곡은 금방 끝났다. 손을 내렸다.

어제 처음 해 본 일이니 당연하겠지만, 그리 마음에 들진 않는다. 피아노도 완벽하지 않고, 노래도 어설프다.

하지만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굉장히 고무적이었다. 음악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음악의 범위가 넓어졌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연습을 더 한다면 꽤 자연스럽게 동시에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내가 시도하는 일은 손 따로 입 따로 움직여 하나의 음악을 만드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난 목소리를 쓰는 성악가가 아니라 기악을 하는 연주자였다. 수단과 목적을 착각해선 안 된다.

구세프 선생님과 한 내기는 근래 엉망이던 피아노 소리에 성악을 결부시켜서라도 조금 들어 줄 만하게 만들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피아노 소리였다. 거기에 내 성악 실력에 대한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내가 구세프 선생님 앞에서 혼자 반주를 하며 성악을 한들, 구세프 선생님은 코웃음이나 칠 것이다. 욕이나 잔뜩 안 먹으면 다행이었다.

여러 가지를 혼자서 구사하며 음악을 만드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나처럼 어느 하나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이것저것 할 수 있다고 까부는 것은, 그저 피아노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 부리는 잔재주에 불과했다.

난 그것을 잘 안다.

“어쩌지…….”

손을 뻗어 피아노 건반을 툭툭 눌러 보았다. 누르는 대로 소리가 생겨났다.

입을 열어 아아 하고 목소리를 내 보았다. 발성하는 대로 소리가 생겨났다.

그런데 이 목소리를 피아노로 옮기려니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막연하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음악을 가지고 있는지 보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난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성격이 엉망이었다는 것 외엔 성향도, 취향도. 아무것도 모른다.

무엇을 좋아했었는지, 어떤 음악을 즐겨 들었고 어떤 음식을 좋아했었는지, 또한 무엇을 싫어했었는지, 어떤 색깔을 싫어했고, 어떤 사람을 싫어했었는지, 난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따라서 그녀가 어떤 음악을 가지고 있는지 유추해 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 목소리뿐이었다.

큰 훈련 없이도 소프라노의 고음을 낼 수 있는 타고난 목소리. 내 것이 아닌 그녀의 재능이었다.

난 그것을 읽어 내어 건반 위에 올리고 싶었다. 이대로 그녀의 것은 그녀의 것으로 내버려 둘 수도 있었지만 난 연주자였다.

내가 알 수 있는 그녀에 대한 것, 이 목소리를 가공해서 보다 정교하고 객관적인 음색으로 피아노를 통해 드러내고 싶었다.

“…….”

말도 안 되는 망상인 걸까?

하지만 내가 여전히 날 증명하기 위한 곡을 찾아 헤매듯 그녀에게도 그녀가 존재했음을 증명할 수 있는 한 곡 정도는 마련해 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최소한 내가 스스로를 연주자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정도는 해내야 했다. 내 손은 두 명 분의 영혼을 담아낼 수 있어야 했다.

“픕…….”

불현듯 웃음이 터졌다.

구세프 선생님이 지금 내 생각을 들었다면, 그런 오만하고 자기만족밖에 모르는 생각으로 음악을 대할 거라면 당장 때려치우라고 호통을 치셨을 것이다.

그 괄괄한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리는 듯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젠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니까.

* * *

“타티아나…….”

“예?”

“뭐 해, 지금?”

연습실에 앉아 있던 아나스타샤가 참다 참다 이젠 못 참겠다는 듯 물어 왔다. 고작 10분 정도가 흘렀을 뿐인데.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연습이요.”

“그러니까 무슨 연습인데?”

“그냥 연습이라기보단…… 약간 연구 비슷한 것이라 할 수 있겠네요.”

난 그러면서 다시 건반을 주의 깊게 눌렀다. 건반이 들어가고 지렛대 운동을 하며 뒤쪽의 액션이 올라간다.

나무에 양모를 압축해서 붙인 해머가 밑에서부터 중력을 거스르며 올라와 현을 때린다.

그 모든 과정을 다시 주의 깊게 느끼고, 음색을 파악했다.

내 목소리를 어떻게 하면 피아노 위에 옮길 수 있을지 연구 중이었다.

당연히 연구는 쉽지 않았다. 난 거의 제대로 갈피도 못 잡고 헤매는 중이었다.

너무 조급하지 않으려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시간제한이 있다 보니 조금 마음이 급해지긴 한다.

그렇게 몇 번 더 쳐 보다가 옆을 돌아보니 아나스타샤가 드디어 정신 나간 사람을 보는듯한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난 머쓱해져서 말했다.

“그렇게 이상해 보이나요?”

“……타티아나. 네가 지금 해야 할 건 테크닉을 재활할 에튀드 아니니?”

“그것도 중요하지만, 이것도 중요해서요.”

“모르겠네, 정말.”

아나스타샤가 혀를 내둘렀다.

“타티아나 네가 듣고 있는 세계가 있겠지…… 난 이해가 안 가지만.”

“이해가 안 가실 리가 없어요.”

“진짜로 난 잘 모르겠는데?”

“……아나스타샤. 잠깐 와 보시겠어요?”

“응?”

내가 부르자 아나스타샤가 옆으로 다가왔다.

“앉으세요.”

피아노 의자에 반만 걸쳐 앉으며 빈 쪽을 손으로 탁탁 쳤더니 아나스타샤가 약간 어물거렸다.

“왜 그러세요?”

“아니, 아니야.”

아나스타샤가 옆에 딱 붙어 앉자 어깨가 닿았다.

이전 같았으면 난 일부러라도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난 아나스타샤와 필요 이상으로 신체 접촉을 하는 것을 조금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저번 주, 감기에 걸렸을 때 아나스타샤가 내게 해 준 것만으로도 그동안 내가 쌓고 있던 벽 따위는 한 번에 다 무의미해져 버렸다.

그리고 지금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보세요.”

난 건반을 눌렀다. 음이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다시 한 번 칠게요.”

이번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건반을 눌렀다. 조금 더 빠르지만, 얕게. 결과적으로 그 세기는 같아도 음색을 달리했다.

난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차이를 아시겠어요?”

“그…… 두 번째가 조금 더 날카로운 것 같았는데.”

“맞아요.”

이렇게 들으면 모를 리가 없지.

난 웃으며 말했다.

“제가 뭘 하고 있었는지 아시겠지요?”

아나스타샤는 가까이 앉아 집중해서 듣고서야 내가 무슨 연구를 하고 있었는지 알아차린 듯했다.

아나스타샤가 허탈한 듯 말했다.

“원하는 터치를 연습하려는 것처럼 보이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자유자재일 줄은…… 상상도 못 했네.”

“자유자재는 아니에요. 정말 그랬다면 제가 이렇게 연구를 할 이유가 없겠죠.”

“이게 자유자재가 아니면 뭐야? 곡마다 음색을 바꿔 가며 연주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유리한지 알잖아?”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난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곡 이전의, 음색 이전의 문제라서요.”

이건 나와 그녀에 대한 문제였다.

복잡하고, 질척질척한, 아나스타샤에게 설명해 줄 수 없는, 그런 문제였다.

“……타티아나.”

가만히 날 보던 아나스타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 이런 걸 해?”

난 더 뭔가 더 설명하기 싫었다. 그래서 대충 원론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으려 했다.

“그냥 전 제가 낼 수 있는 음색을 찾기 위해…….”

“아니,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진지한 목소리가 날 직격했다.

“음색이란 건 연주자 고유의 개성이야. 그걸 왜 억지로 찾아내려는 거야?”

“…….”

“그냥 자연스럽게 하면 안 돼?”

내 딴엔 원론적인 이야기라고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아나스타샤의 말처럼 연주자의 음색이라는 것은 연주자 개인의 성향과 음악을 가르친 선생, 경험, 지식, 등등 수많은 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연주자가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지 억지로 만들고 포장해서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 자연스러운 것이라곤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난 지금 억지로, 아무것도 모르니 이 목소리를 근거로나마 삼아 그녀의 음색을 찾아내려 하고 있었다.

“전 이렇게라도 해야 해요. 이게 저라는 사람이에요.”

중얼거리며 뱉어 놓고, 후회했다. 어디까지나 스스로에게 해야 할 말이지, 아나스타샤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

아나스타샤가 팔로 내 어깨를 둘렀다. 난 조금 놀랐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타티아나.”

“……예.”

“네가 뭘 원하는지 난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난…….”

“아나스타샤.”

난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 뒤에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가 슬픈 눈으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휩쓸려 버릴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리고 아나스타샤를 끌어안아 버릴 것 같았다.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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