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5화 (75/1,277)

##  75화

하루하루를 바쁘게 지내자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연습을 되풀이해서 굳어 있던 손을 유연하게 풀어내자 테크닉은 금방 돌아왔고 한층 예민해진 감각에도 점차 익숙해질 수 있었다.

신체적인 한계는 어쩔 수 없이 그대로였지만, 재능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던 절망적이었던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웃음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그렇게 연주자로서 자신감을 조금 찾고 나자 가장 첫 번째로 든 생각은 내 기억 속에 있는 음악들을 되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였다.

내가 원하는 음악에 대해선 당분간 포기하기로 구세프 선생님과 약속했었지만 혼자서 조금 알아보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혹시나 싶어 내 기억 속에 있는 음악들을 재차 되찾으려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전부 실패했다.

실패했을 뿐만이 아니라 더더욱 심각해졌다.

이전까지 난 적어도 쇼팽 소나타 1번의 5초 남짓의 한 패시지를 기억 속의 음악과 똑같이 재현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몇 주만에 다시 쳐 본 그 패시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다른 곡들과 똑같았다. 테크닉적 문제는 없지만 음색을, 뉘앙스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난 덜컥 겁이 나서 얼른 다시 모든 기억들을 덮어 두었다.

머릿속에서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 것인진 잘 모르겠지만, 기껏 찾아내었던 것도 점점 변질되더니 사라져 버렸다.

흐릿해지는 기억 속에서 음색들이 서로 뒤섞이고 있었다.

혹시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지만, 결국 안 된다는 걸 깨닫고 나니 모든 것이 허무해졌다.

이제 와서 내가 뭘 할 수 있는가.

애초에 사라져 가는 기억에 의존할 것이 아닌, 음반이라도 하나 냈다면 이렇게까지 조급할 필요도 없을 텐데. 그냥 모든 것이 내 잘못이었다.

별수 없이 그녀를 우선시하기로 했다.

막막하고 희망도 없는 날 우선하기보단 성악을 시작함으로써 잠재력을 막 개화하기 시작한 그녀를 먼저 앞세우는 것이 나았다.

그러다 보면…… 잘 모르겠다.

그렇게 연구에 들어간 지 오늘로 사흘째.

난 여전히 내 기존 목적인, 목소리를 피아노로 옮겨 보겠다는 목적에 다다르지 못했다. 별 수확 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무엇이 문제일까.

물론 사흘 만에 모든 것을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정도로 자만해 있진 않았다.

하지만 당장 내일이면 구세프 선생님이 날 붙잡고 피아노 전공생으로서 성악을 배워 대체 뭘 얻어 내었는지 증명해 보라고 하실 것이다.

내게 바흐 전문가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중앙음악학교의 선생인 구세프 선생님의 그 깐깐한 귀를 속일 재주는 없었다.

아무것도 내보이지 못한다면 구세프 선생님에게 거스를 방법이 없다.

적어도 어떠한 실마리라도 찾아내야 했다. 난 조금 초조해졌다.

“…….”

굳이 이 목소리를 피아노로 표현하려는 것은 내 고정관념과 욕심에 불과할 수도 있었지만, 난 연주자이고 싶었다.

내가 스스로를 연주자라 말하려면, 이 정도는 해내야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안 되는 거야?

* * *

어느샌가 익숙해진 성악 레슨실 문을 노크했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 대신 익숙한 고양이 소리가 들려왔다.

“미야앙…….”

“후후…….”

오늘도 류보비가 혼자 와 있는 모양이었다. 난 웃으며 문을 열었다.

“류보비. 안녕하세요.”

“야아아앙.”

얘가 오늘 왜 이럴까.

류보비의 고양이 울음소리는 저번 주에 비해 한층 더 원숙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깊고 심원한 소울이 담겨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난 실없이 웃으며 류보비 옆에 가서 앉았다.

어딘가 별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검은 고양이가 날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가만히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선생님은요?”

대번에 류보비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 애는 폴리나 선생님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둘이 있을 때 자신에게 신경을 써 주지 않고 다른 사람을 찾으면 짜증을 내곤 했다.

일부러 류보비를 살짝 골려 준 뒤 말했다.

“그럼 우리 둘밖에 없으니…… 같이 놀까요?”

“……!”

내 제안에 류보비가 눈을 번쩍 떴다.

급한 나머지 그녀의 입에서 사람의 말이 나왔다.

“뭘 하고 놀아요? 예?”

“음…….”

잔뜩 기대 어린 시선에 마음이 조금 약해졌지만 난 어디까지나 이 애의 선배였다.

“노래를 해 보죠.”

“……이양.”

확고한 거절이었다. 난 쓰게 웃었다.

류보비는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고양이 이중창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음을 잘 잡지 못하고 있었고, 요 며칠간은 급격히 집중력이 떨어진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전 같았으면 기뻐하면서 같이 부르자고 졸랐을 텐데, 오늘은 정말 의욕이 없어 보인다.

“연습이 잘 안 되나요?”

“……네.”

“괜찮아요. 하루하루 많이 좋아지고 있는걸요. 옆에서 듣는 전 알 수 있어요.”

“그치만…….”

류보비가 입을 삐쭉이며 고개를 숙였다.

“타티아나 언니는 하루에도 몇 곡씩 부르잖아요……. 그런데 전 가사도 없는 고양이 소리로 일주일도 넘게 이게 뭐예요.”

“사실 제가 듣기엔 가사가 없어서 더 어려운 것 같기도…….”

“아무튼요.”

류보비의 말대로 내가 하루에도 가곡을 몇 곡씩이나 부른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가곡의 모티브가 되는 시에 대한 것도, 시인과 작곡가에 대한 것도 아무것도 모르고 악보만 보고 따라 부르는 것에 불과했다.

물론 악보야말로 그 곡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매체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아무런 공부도 하지 않고 따라 부르면서 그걸 제대로 소화해 냈다고 말할 순 없었다.

폴리나 선생님은 몇 곡을 추려 집중적으로 연습시키는 것보다 이렇게 여러 가지를 불러 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류보비가 날 보면서 약간 잘못된 버릇이 들거나 생각을 할까 봐 그게 걱정되기도 했다.

지금처럼.

“류보비. 전 피아노과잖아요. 그래서 깊게 배우지 않는 것이에요. 노래 하나를 제대로 배우는 데엔 일주일도 짧아요. 류보비는 올바르게, 차근차근 배우고 있어요.”

“좀처럼 나아지지가 않는걸요.”

“어떤 부분이요?”

“자꾸 부르다 보면 내가 뭘 부르는 건지 음을 못 찾겠어요.”

노래를 하다 말고 중심을 잃고 음을 잃어버리는 것은 음감과 시창이 약한 류보비의 문제점이었다.

그건 그냥 뇌리에 각인을 시키듯 외워 버리는 수밖에 없는데……. 아무래도 류보비는 불안한 모양이었다.

난 류보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의기소침하게 말했다.

“연습이 잘 안 되면 화가 나죠. 저도 그래요.”

“언니도요?”

“예.”

“언제요?”

“……지금요.”

“……예?”

류보비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난 진심이었다. 성악은 폴리나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하고 있으니 잘 모르겠지만, 피아노에 있어선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대책 없이 헤매고 있었다.

“류보비가 성악 연습을 하는 것처럼 저도 피아노 연습을 해요.”

“그 피아노 연습이 잘 안 돼요?”

“요즘…… 조금 그렇네요.”

말하고 나서 조금 부끄러워졌다.

애한테 웬 푸념이람.

동병상련을 느낀다고 말해 봐야 우리 둘 모두에게 좋을 일 없었다.

난 조금 우울하게 짓고 있던 표정을 얼른 흩어 버리곤 환하게 웃었다.

“제가 류보비에겐 아무것도 들려준 적 없었죠? 음…… 피아노를 잠시 써도 될까 모르겠네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류보비가 자리를 탁 차고 일어나더니 날 피아노 쪽으로 떠밀었다. 내가 피아노 치는 것을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서 난 잠시 멍하니 있었다.

혼자 있을 땐 그래도 거의 기계적으로, 어떤 에튀드를 쳐서 손의 유연함을 끌어 올리고 또 어떤 곡으로 집중적으로 손가락을 단련시킬지에 대한 것들이 대충 그려졌었다.

그래서 그렇게 대충 치면 되었는데, 류보비라는 청중을 옆에 두니 갑자기 또 막막해졌다.

리처드와 대결을 했을 때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던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드뷔시의 ‘달빛’ 쳐 주시면 안 돼요?”

“……다행이네요.”

“다행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달빛이라고 하셨죠? 알겠어요.”

다행히 류보비의 신청곡이 있었다.

드뷔시의 ‘달빛’. 분명히 내 레퍼토리에 있는 곡이었다. 난 머리 한편에 잠들어 있는 그 곡을 끄집어냈다.

달빛이라는 제목의 이 곡은 프랑스의 작곡가 클로드 아실 드뷔시의 베르거마스크 모음곡에 있는 전주곡, 미뉴에트, 달빛, 파스피에 중 세 번째 곡으로, 몽환적이고도 따뜻한 선율로 굉장히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현대에도 자주 연주되는 곡이다.

피아노 앞에 앉아서, 천천히, 섬세하게 곡의 시작을 열었다.

음 전체가 어디론가 떠나가 버릴 것처럼, 여리게 들리면서도 동시에 충분한 부피를 가지도록 천천히 건반을 쳐 나갔다.

이전보다 훨씬 정확하게 피아노를 손끝으로 느낄 수 있게 된 나는 그리 어렵지 않게 음향을 조절해 나갈 수 있었다.

전개부의 화성을 점점 키워 나가며, 양손으로 끊이지 않게 아르페지오를 전개했다.

정갈하게 리듬을 유지하지 못하고 심취하면 자칫 너무 느끼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만 주의한다면, 지금 내게 있어 기술적으로 그리 어려운 곡은 아니었다.

인상주의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드뷔시. 내가 생각하는 그는 잔잔한 호수였다.

내가 지금 만들어야 할 이미지는 명확했다. 달 그 자체가 아닌 수면에 비친 달을 그려 나갔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차갑고 멀지만, 물 위에 비친 달빛은 따뜻하고 물결에 따라 살며시 흔들리고 있었다.

손을 대면 촉촉하게 젖을 것 같은 느낌으로 곡을 만들었다. 이 이미지엔 드뷔시의 또 다른 곡인 물의 반영이 적절하게 섞여 있었다.

“……와.”

곡을 끝마치고, 손을 떼자 류보비가 탄성을 터트렸다. 이어지는 박수.

류보비가 입을 벌리고 망연히 중얼거렸다.

“언니 정말 피아노과였구나…….”

“……그럼 제가 거짓말이라도 했겠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난 어쩌면 언니가 성악과로 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요?”

“어…….”

약간 말을 흐리던 류보비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불쑥 말했다.

“언니, 언니. 저 고양이 이중창 연습 한 번만 도와주세요.”

“고양이 이중창요?”

“네. 언니가 해 주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독주곡이 아닌 성악 반주라면 선생님이 하나 내가 하나 별반 차이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귀여운 후배가 연습을 도와 달라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이 한 번이라도 더 연습해서 류보비가 잘하게 되면 좋지 않겠는가.

“알았어요.”

악보는 필요 없었다. 그간 류보비와 폴리나 선생님이 연주하는 것을 몇 번 들으면서 외웠기 때문이다.

“바로 시작할게요. 준비되셨어요?”

“아, 음. 잠깐만요.”

아아. 발성 연습을 조금 해 보던 류보비가 이윽고 내게 말했다.

“네. 다 됐어요.”

난 곧바로 건반을 짚었다.

고양이 두 마리가 야옹거리는 소리를 주고받는 것이 중요한 곡이었다. 난 되도록 무게를 주지 않고 가볍게 피아노를 연주했다.

“미야앙.”

류보비는 입을 열어 노래를 시작했다. 굉장히 집중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음을 못 찾는 일 없이 정확하게 음정을 잡고 노래했다. 새침하게 야옹거리는 고양이 소리가 무척이나 간드러진다.

난 전체적인 분위기를 유쾌하게 유도하며 류보비가 쉽게 노래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급격하게 류보비의 음정이 불안해졌다.

피아노 소리에 휩쓸리는 게 귀에 훤히 들릴 정도였다.

어떡하지.

난 손을 멈추지 않으면서 머리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피아노 소리를 더 희미하게 낮추어도 류보비가 잃어버린 길을 다시 되찾긴 힘들어 보였다.

스스로의 음감에 자신이 없는 아이에게 길을 찾아 주려면…….

순간적으로 오른손을 길게 뻗어 류보비가 노래해야 할 선율을 반주에 섞어 넣었다.

더욱 거대해진 화성이 나와 류보비를 한데 집어삼키며 하나로 만들었다.

“미양…….”

노래를 하던 류보비가 깜짝 놀란 듯 우물거렸다. 난 류보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부를 분리해서 독립적으로 부르는 게 어렵다면, 다 함께 엮어서 들려줄게.

네 선율을 찾아서 따라 부르면 돼.

난 머릿속에 있는 악보에 음표를 그려 넣으며 임의로 계속 편곡하여 연주해 나갔다.

생각보다 꽤 수월하게 즉흥적인 편곡을 만들 수 있었다.

적어도 협주곡을 피아노 솔로로 편곡하여 연주하는 것보단 훨씬 쉬운 작업이었다.

잠시 갈피를 못 잡는 듯하던 류보비가, 내가 추가한 선율에 따라 정확하게 노래하기 시작했다.

전체적인 화성에 비하면 얇디얇은, 한 줄기의 선율이었지만 류보비가 붙잡고 따라오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동시에, 나 역시 손가락으로 성악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류보비를 위해 추가한 선율이 곧 내가 성악으로 부르는 고양이 이중창이었다.

혼자서는 아무리 찾아도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던 그녀의 소리가, 바로 지금 내 손에서 성악 파트로 구현되고 있었다.

짧은 곡을 마치고 난 방금 들었던 음색을 다시금 떠올렸다.

의심할 바 없이 내가 바랐던 음색이었다. 심지어 그 특징마저도 내 목소리와 닮아 있었다.

혼자 반주를 하면서 성악을 했었던 일이 떠올랐다.

몇 번이고 해 봤지만 이렇게 그걸 피아노로만 압축할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던 것 같다.

갑자기 이렇게 해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류보비를 도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계속 상상도 못 해 봤을 것이다.

“언니!”

갑자기 옆에서 류보비가 확 덮쳐 왔다. 난 놀라서 양팔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거의 의자 너머로 떨어질 뻔했다가 간신히 버텼다.

가까스로 그녀를 안아 들자 류보비가 갑자기 내 뺨에 기습적으로 입을 맞췄다.

“!”

“언니, 정말 고마워요!”

“……예?”

“저 처음이에요. 안 틀리고 끝까지 불러 본 거. 진짜요!”

그건 정말 축하할 일이지만 약간 당혹스러웠다.

내가 혼란에 빠져 있건 말건 류보비는 다시 내 목을 꽉 끌어당겼다.

“언니 덕분에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도 이번엔 웃으며 답해 주었다.

“저도요. 류보비 덕분에.”

방금 류보비만 득을 본 것은 아니었다. 나 역시 그간 막혀 있던 것에 대해 어느 정도 해답을 얻어 냈기 때문이다.

지금은 솔직한 말로 류보비보다 내가 더 감사를 표해야 할 판이었다.

“에헤헤.”

류보비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파고들었다.

그런데 목은 좀 놔 주면 안 될까요. 점점 뻐근해지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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