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6화 (76/1,277)

##  76화

구세프 바실리예비치 알레니체프.

모스크바 음악원 출신의 피아니스트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와 루빈슈타인 콩쿠르에서 수상, 이후 바흐 스페셜리스트로서 이름을 날리며 연주와 음반 활동에 힘쓰다가 모스크바 음악원 부속 중앙음악학교의 피아노 지도 선생으로 취임.

요컨대, 천재들을 가르치는 천재이시다.

“며칠이라도 늦춰 달라 할 줄 알았는데, 약속은 잘 지키는구나, 타티아나. 그 점은 높게 사마.”

“……감사합니다.”

“하지만 시간 약속 말고 다른 약속도 잘 지킬 수 있는진 들어 봐야 알겠지.

“…….”

마주 앉아 있는 구세프 선생님을 슬쩍 올려다보자 선생님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곰처럼 거대한 몸집에 인상도 사납기 그지없는 구세프 선생님이 미간을 찌푸리자 모골이 다 송연해졌다.

많이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조금 무섭다.

물론 구세프 선생님은 피아니스트로서 유명한 분이시고 성향이 폭력적이거나 비합리적이지도 않다.

굉장히 냉철하고 지적인 분이라 어떤 상황에서도 믿을 만했다.

하지만 가끔 그 냉철함은 칼날이 되기도 했다.

구세프 선생님이 치켜 올린 눈으로 날 똑바로 노려보았다.

“지난 일주일간 시간 낭비를 했다는 것만을 내게 증명했다간, 그리 재미있는 소리는 듣기 못할 게다. 난 선생이니까.”

차가운 칼날이 목에 와 닿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부터, 내가 성악을 조금 배워 보겠다고 하자마자 구세프 선생님은 그따위 시간 낭비 하지 말고 연주자라면 연주자답게 피아노에나 집중하라고 호통을 쳤었다.

바흐 스페셜리스트로 유명한 구세프 선생님의 음반들을 들어 보면 그 정갈하고 객관적인 연주 스타일을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때문에 구세프 선생님은 나처럼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한 음악을 하는 연주자들을 안 좋은 시선으로 보고 계시는 듯했다.

“…….”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선생님에게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학생이었다면, 그 전에 다시 피아노를 잡고 인생 어렵게 살 생각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제대로 보여드리고 싶다.

난 약간 용기를 내어 대꾸했다.

“시간 낭비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 드리면요?”

구세프 선생님이 흥미진진하다는 듯 의자에서 허리를 떼고 고개를 쭉 내어 내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무시무시했다.

“그건 타티아나 네가 내게 마법이라도 부리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 텐데?”

난 지지 않고 대꾸했다.

“음악은 사람이 부릴 수 있는 유일한 마법이죠. 아닌가요?”

“뭐?”

구세프 선생님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묻곤 감탄했다.

“말은 잘하는군!”

그렇게 반박할 줄은 몰랐다는 듯 구세프 선생님이 무릎을 탁 쳤다. 즐거워하시는 것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선생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다.”

그러곤 팔을 옆으로 쭉 뻗어 옆을 가리켰다.

그곳엔 피아노가 있었다.

“보여 봐라.”

내가 요 며칠간 연구 아닌 삽질을 하다가 류보비의 연습을 도와주면서 우연찮게 발견한 이것이, 과연 또 한 갈래의 음악인지 아니면 작곡가를 모독하는 헛짓거리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다만, 존경하는 음악가인 구세프 선생님에게 인정을 받는다면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 뿐이다.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하기에 적합하도록 자리를 조정하고, 구세프 선생님을 돌아보았다.

선생님은 이렇다 저렇다 말없이 가만히 날 바라보고만 계셨다.

난 곧장 곡을 시작했다.

프란츠 리스트의 가곡인 기쁨과 슬픔.

19세기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프란츠 리스트.

그의 곡들이 피아니스트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가곡들은 그리 많이 불린다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난 리스트의 가곡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방향성과 닮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굉장한 피아니스트로 유명했던 리스트는 곡을 쓸 땐 피아노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조차 모두 피아노에 담아내려 했었다.

피아노라는 악기의 다채로움을 끌어내는 데에 있어선 리스트만한 작곡가가 드물었다.

주법도 한정적이고 모노톤인 피아노로 콜레뇨, 피치카토 등의 사운드를 구사하기 위해선 터득해야 할 것들이 많지만, 한 단계만 벽을 넘어서면 표현할 수 있는 세계 자체가 달라진다.

그런 리스트가 쓴 가곡이다.

난 이 곡을 성악가 없이 피아노 한 대로 연주할 수 있도록 편곡했다.

마음속으론 리스트에게 사과했지만, 한편으로는 리스트가 살아서 이걸 듣는다 해도 그리 나쁜 반응을 보이진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기악곡들이 오페라나 다름없는 모차르트나 이탈리아 오페라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은 쇼팽과 달리 리스트는 철저하게 기악만을 다뤘지만 편곡에도 일가견이 있는 리스트에게 이렇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들려준다면 분명 재미있어 하지 않았겠는가?

피아노로 화성을 쌓아 기본적인 틀을 만들고, 그 위에 노래를 시작했다.

다성부 음악 자체는 흔하고 흔했다. 당장 바흐의 평균율만 보더라도 4성부 푸가였다.

하지만 성악을 화성에 섞으면서도 동시에 완벽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연주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듣기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될 수준까지 완성도를 만들기 위해 어젯밤엔 잠도 몇 시간밖에 못 자고 종일 자연스러움을 끌어 올리는 데에 매달렸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서야 어렵게 만들어 낸 이 편곡은 꽤나 신기하게 들렸다.

피아노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본래 곡이 피아노와 성악, 독립적인 두 소리를 한데 엮어서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철저하게 두 소리가 들리도록 했다.

본래 가곡이었던 곡을 피아노 솔로로 편곡해서 성악 파트만을 집중적으로 조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금 깊고, 확실한 공간감과 무게감을 가지고 있는 음색.

내 목소리로부터 유추하여 이끌어 낸 그녀의 음색이었다.

결코 과도하게 느끼하거나 혼자 독백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도록, 최대한의 호소력을 실어 손가락으로 노래해 나갔다.

한 대의 피아노와 한 명의 사람.

하지만 지금 난 솔리스트가 아니었다.

“…….”

3분이 채 안 되는 짧은 곡을 끝마치고 손을 늘어뜨렸다.

짧은 시간 내에 내가 보일 수 있는 건 이 정도였다.

구세프 선생님을 돌아보자 뭔지 모를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선생님이 보였다.

난 침을 꿀꺽 삼켰다.

최선을 다했지만 열심히 한 것과 잘한 것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잘 안다.

난 나름대로 제대로 목소리를 냈다고 생각하지만 저 깐깐한 선생님이 그걸 예쁘게 봐 주실진 나도 모르는 일이다.

“……타티아나.”

“예.”

불안하게 바라보자 구세프 선생님이 피식 웃었다.

“네 녀석, 마법을 부렸구나.”

“……!”

당황해서 말을 못 잇자 구세프 선생님이 이어 말했다.

“노래하듯 연주하는 것은…… 세상 모든 연주자들의 꿈이라 할 수 있지. 그게 어려우니 아예 성악곡을 가지고 왔군.”

툴툴거리는 어투와는 다르게 어딘가 따뜻한 목소리였다.

“편법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저…… 정말인가요?”

구세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말해 주시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슬쩍 뺨을 꼬집어 보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 선생님이 이런 분이 아니었는데?

도저히 못 믿겠다는 눈초리를 하고 있자 구세프 선생님이 벌컥 성을 냈다.

“나쁘지 않단 것이지 잘했다고 하진 않았다. 그렇게 보지 마라.”

아니나 다를까.

약간 김이 샌 표정으로 바라보자 구세프 선생님이 담배를 꺼내며 말했다.

“내가 이전에도 말했지. 음악을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고.”

“……예.”

“넌 아주 철저하게 음악을 도구로 사용하더군. 마법을 걸어 사람을 홀리고, 매혹하는 도구로. 거기에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지만…….”

담배가 날 겨누었다.

“난 속지 않는다.”

난 약간 기분이 상해서 입을 삐쭉였다.

인정해 주시는 것 같더니 아예 본질적으로 글러 먹었다 하시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항상 느끼는 바이지만 구세프 선생님과는 아예 음악관이라는 것 자체가 어긋나 있는 기분이었다.

물론 나에 비해 구세프 선생님은 훨씬 유명하고 권위 있는 피아니스트이자 내 선생님이었으니 나 따윈 상대도 안 되겠지만…….

약간 의기소침해져서 입을 다물고 눈치를 살폈다. 그냥 나가고 싶다.

그런 날 보던 구세프 선생님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아 당긴 후 넌지시 말했다.

“차라리 작곡을 제대로 배워 보는 건 어떠냐, 타티아나.”

“작곡요?”

“그래.”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생각도 못 하고 있던 것이 구세프 선생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쓸데없는 짓이라 생각했지만 확실히 괜찮았다. 여태껏 봐 온 넌 작곡가로도 꽤 대성할 재목이야.”

“……제가요?”

“이전부터 느끼고 있었던 것인데 오늘 편곡해 온 곡을 듣고서 확실해졌다. 네 다성음악적 재주, 다양한 음색을 피아노로 활용하려는 독창성, 실험 정신,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아카데믹한 화성에 기조를 둔 치밀한 논리성…….”

어안이 벙벙해져서 가만 듣고 있자니 구세프 선생님이 미동도 않으며 담담하게 내 평가를 이어 나갔다.

“머리가 나쁘지도 않고, 물론 조금 설익긴 했다만 네 나이를 보자면…… 비범한 축에 속하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피아노로 이렇게 칭찬받았다면 정말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쌩뚱맞게 작곡 이야기로 이렇게 칭찬을 하시니 당황스럽다.

뭐든 간에 칭찬이면 좋은 것이긴 한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

절로 바보 같은 목소리가 더듬거리며 나왔다.

“그…… 작곡을 배울까요?”

“바보 같으니.”

“……?”

아니, 방금 전까진 배우라면서요?

확 신경질이 난 눈으로 쳐다보자 구세프 선생님이 시큰둥하게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내가 조금 듣기 좋은 소릴 했다고 해서 금세 혹할 정도라면 다 때려치워라. 네가 언제부터 내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고 귀를 쫑긋거리느냐?”

“전 귀를 쫑긋거린 적 없…….”

“쯧. 하던 피아노나 제대로 하거라.”

……정말 짜증난다.

난 도끼눈을 뜨고 구세프 선생님에게 거의 시비조로 말했다.

“오늘 제가 친 것이 무의미하진 않았죠?”

“뭐, 그래.”

“그럼 하나만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뭐냐.

난 그간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을 대놓고 물어보았다.

“예전에 약속하셨던 것 기억하세요?”

“약속이라…….”

잠시 말을 흐리던 구세프 선생님이 대답했다.

“그래. 네게 맞는 곡을 추천해 주기로 했었지.”

“몇 년쯤 걸릴까요?”

“3년.”

“줄여 주실 순 없나요?”

“안 된다.”

“오늘 제가 한 게 제 목소리라 한다면…….”

갑자기 구세프 선생님이 내 말을 끊고 들어왔다.

“하나 묻자, 타티아나.”

“예?”

“그 이상한 해석을 버릴 생각은 전혀 없는 게냐?”

“…….”

정말로 난 내가 이 거대한 선생님에게 어떠한 위협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지만, 차라리 여기서 날 죽이면 죽였지 타협할 생각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드러냈다.

“전혀 없어요.”

“……그래.”

“약속이었잖아요, 선생님.”

“그렇지.”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구세프 선생님은 의자에 앉은 자세 그대로 미동도 않고 날 바라보았다. 손에 끼워져 있는 담배가 타들어 가며 재로 변했다.

잠시간 나와 구세프 선생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로 눈도 깜빡이지 않고 서로를 응시했다.

이윽고, 구세프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오늘 네가 한 것 말이다. 특히 성악 파트.”

“……예.”

“그거면 충분하지 않느냐?”

구세프 선생님은 약간 의아하다는 듯 그렇게 물었다.

어디까지 꿰뚫어 보신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달라졌음을 분명히 느끼신 듯하다.

난 혼자만의 음악성을 추구하며 솔리스트로 사는 것이 그녀와 함께 공멸하는 길이라는 것을 충분히 깨달았다.

현재 처한 상황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앞으로도 난 이렇게 살 수밖에 없으리라.

이 듀엣은 내가 다시 죽는 날까지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게 단 한 곡만 내 달라고 했던 것이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다.

난 잘못하지 않았다. 내가 왜 노예로 살아야 한단 말인가?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게 그녀인 것 같은가?

“충분하죠. 하지만 안 돼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게 욕심이 많아 보이진 않는데.”

“전 욕심이 많아요.”

“……그래?”

구세프 선생님은 날 들여다보며 무언가 찾아내려는 듯한 눈빛을 했다.

잠시 그렇게 보시더니, 곧 피곤하다는 듯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알겠다. 한 가지만 말하지. 불안해할 필요 없다. 약속은 지킬 테니.”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놓이네요.”

“그 시간도 3년이라고 했지만 더 줄여 줄 수도 있다.”

“예?”

난 눈을 번쩍 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곧 죽어도 3년이라고 못을 박으시더니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단 말인가?

“저, 정말인가요?”

“네가 하는 걸 봐서.”

“당연하죠. 뭐든 시키시는 대로 할게요.”

“말은 잘 하는군. 항상 제멋대로 이상한 짓이나 하면서. 성악을 배우질 않나…….”

투덜투덜거리던 구세프 선생님이 담뱃재를 털며 말했다.

“당장 다음 달 기말 시험부터 보도록 하지. 그리고 방학엔 미하일이 준비한 콩쿠르도.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

음…….

시험공부도 열심히 하고 콩쿠르 준비도 열심히 해라.

당연한 말이고 나 역시 허투루 할 생각은 없지만, 왠지 손해 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무슨 까닭인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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