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7화 (77/1,277)

##  77화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타티아나!

“미안해요. 미안해요, 아나스타샤.”

난 무조건 사과했다. 전화기에 대고 고개를 숙여 가면서까지 사과했다. 그 외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전화 너머로 한참을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소리를 치더니, 순간 맥이 풀렸는지 중얼거렸다.

- 미리 물어보지 않은 내가 잘못이다…….

“미안해요…….”

해가 바뀌었다.

오늘은 1월 5일. 금요일.

러시아의 1학기는 9월 중순부터 이듬해 1월 말까지였기 때문에 아직 학기 중이었지만 오늘은 작년 12월 31일부터 1월 8일까지 이어지는 러시아의 긴 휴일, 노비곳의 중턱이기도 했다.

덕분에 난 내 방에 앉아서 휴일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 봤자 취미라고 할 만한 것들이 별로 없는 난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기말고사 공부를 하거나 연습을 하는 것 정도였지만, 아나스타샤 같은 경우엔 12월31일이 되자마자 바로 이탈리아로 1월 8일까지 휴일 전부를 사용하는 가족 여행을 떠났다.

긴 휴일을 아나스타샤와 보내고 싶긴 했지만 가족 여행이라는데 방해할 순 없었다.

같이 신년을 보내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해 오는 아나스타샤에게 난 짐짓 씩씩하게 가족들과 즐거운 추억을 쌓길 바란다고 웃으며 보냈던 것이다.

내 생일이 1월 7일이라는 것은 까맣게 잊고.

“미안해요, 아나스타샤. 정말 할 말이 없어요.”

- 대체 어떻게 자기 생일을 까먹을 수가 있어?

“…….”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까먹고 있었다. 애초에 1월 7일이 내 생일이라는 것 자체가 아직 어색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날짜가 생일이 된 지 1년도 안 됐다.

오늘이 되어서야 나제즈다가 내 생일에 대해 이야기했고, 난 당장 모레 앞으로 생일이 다가왔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여행지에서 전화가 온 아나스타샤에게 내일모레가 내 생일이었다고 털어놓자, 그녀는 정말 여태 봐 왔던 것 중 최고로 화를 냈다.

갑자기 전화를 끊더니 화상전화를 걸어 오기에 더럭 겁이 나서 안 받아 버렸다.

화상전화를 안 받고 버텼더니 아나스타샤는 다시 전화를 걸어 왔다. 전화도 안 받을 순 없어서 받았다. 아나스타샤는 10분도 넘게 타박을 놓았다.

난 한 마디도 못 하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아나스타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 아, 정말…… 이럴 줄 알았으면 이런 여행 오지 않는 거였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아나스타샤의 가족 여행이 훨씬 중요…….”

- 네가 혼자 있다는 게 더 중요해!

……아나스타샤는 이런 사람이었다.

1월 8일까지 가족과 해외여행이라는 것을 듣고서도 1월 7일이 내 생일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의도치 않은 실수였지만, 이렇게 과격하게 나오는 아나스타샤를 보니 어쩌면 이게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아나스타샤가 가족 여행보다 내 생일을 중요시하는 게……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전 괜찮아요, 아나스타샤.”

- 괜찮긴 뭐가…… 하아……. 어쨌든, 내가 없어도 최대한 많이 불러. 발렌티나도 에르네스트도. 그…… 네가 원한다면 리처드나 승우 한도.

“저기…….”

“뭐야.”

“……전 아무도 부르지 않으려고 하는데요.”

“뭐? 왜?”

아나스타샤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자꾸 그녀가 큰 소리를 내게 만드는 것 같아 미안해졌다.

원래 러시아 사람들은 생일 파티를 성대하게 하는 편이었다.

무엇이든 크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슬라브 민족적 특성상, 생일 파티란 1년에 한 번 있는 굉장한 기념일이었다.

“전…….”

하지만 난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물론 크고 화려하게 친구들을 모두 부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가장 친한 친구인 아나스타샤가 가족 여행으로 일단 참석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려 놓고 생각하니 그렇게까지 크게 할 생각도 의욕도 사라졌다.

그냥 다음에……라는 생각이 뇌리에 들어섰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을 곧이곧대로 이야기한다면 아나스타샤가 부담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난 대충 둘러댔다.

“올해는 가족들과 보내고 싶었어요.”

- 그건 당연한 거고, 축하 파티도 해야지!

“…….”

- 해야 할 것 아냐!

소박하게 생일을 보내고 싶다는 내 말이 아나스타샤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듯했다.

그녀가 왜 화를 내는진 알겠지만, 연휴 내내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있다가 무언가 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머뭇거리고 있자 아나스타샤가 씁, 하는 소리를 내더니 빠르게 중얼거렸다.

- 안 되겠다. 너 가만히 있어. 내가 당장 비행기 표 끊을…….

“안 돼요!”

난 재빨리 말했다.

생일 파티 조금 성대하게 하자고 지금 이탈리아에 가 있는 아나스타샤를 부를 순 없었다.

난 그렇게까지 자기 위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안 돼요, 아나스타샤. 저 때문에 아나스타샤의 가족 여행을 망치게 둘 순 없어요.”

- 망치긴 뭘? 사실 여기도 심심하기만 하고…….

“아나스타샤.”

그 마음만큼은 정말 고마웠지만 눈물을 머금고 오늘은 단호하게 잘랐다.

“오실 때 선물 부탁드려도 되죠?”

- …….

내가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란 의지가 전화 너머로도 전해졌는지, 아나스타샤가 조용히 침묵했다가 서슬 퍼런 목소리로 말했다.

- 선물은 무슨, 너 혼날 줄 알아.

“기대할게요.”

아나스타샤는 정말 화가 많이 난 것 같지만…… 어떻게든 이해해 준 것 같다.

이렇게 내 첫 생일은 가족들과 도란도란하게 보내기로 했다.

* * *

아무도 초대하지 않고 우리 가족들만 모여 내 생일을 축하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기막혀하셨다.

“최고로 성대하게 하려 했건만, 타티아나. 다시 생각해 보거라.”

“아뇨, 그렇기에 더더욱 걱정을 끼쳐 드린 아버지, 오빠와 함께 보내고 싶어요.”

난 최대한 밝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제가 처음으로 맞는 생일이잖아요?”

“…….”

이유는 충분히 생각해 뒀었다.

아무 이유 없이 내가 생일을 단출하게 지내고 싶다고 해 봐야 아버지는 절대 내 말을 들어 주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다시 눈을 뜬 뒤로 처음 맞이하는 생일이었고, 거기에 아버지는 날 기억상실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이보다 더 중요한 날도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우리 집안의 스케일이라는 것도 있었고.

하지만 난 그걸 반대로 뒤집어 생각해 보았다.

무엇보다 가장 기억에 남을 처음 맞이하는 생일이라면, 굳이 그것이 화려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원한다면 처음만큼은 가족들과 오붓하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이다.

내 말에 아버지는 살짝 감동하신 듯했다.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네…… 첫 생일은 우리 가족끼리 보내도록 하자꾸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나야말로, 네가 그렇게 깊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구나.”

사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 난 아버지가 기뻐해 주시는 것 같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앞으로도 생일을 맞이할 일은 많을 텐데 한 번쯤은 이런 것도 좋잖은가?

난 당장 내일로 다가온 내 생일을 기대했다. 복잡하게 누구를 초대하고 할 일 없이 집에서 보낼 생각을 하니 되레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러시아의 1월 7일은 단순히 내 생일이 아니었다.

크리스마스이기도 했다.

12월 25일인 크리스마스가 러시아에선 1월 7일인 이유는 러시아 정교에서 쓰는 역법이 그레고리력이 아니라 율리우스력이기 때문이었다.

같은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지만 날짜가 뒤로 밀리게 되는 것이다.

덕분에 난 크리스마스에 태어난 셈이 되었다. 그게 무언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진 않겠지만, 최소한 나쁜 의미로 느껴지진 않았다.

처음으로 맞이하는 생일을 기념하며 케이크를 놓고…… 동시에 크리스마스도 축하하는 것이다.

저택의 전속 요리사인 드미트리는 파티시에 자격증도 가지고 있으니 근사한 케이크를 만들어 줄 것이다.

솔직한 말로 난 아직도 케이크나 과자에 대해 아기자기함도 잘 모르고 맛도 잘 모르지만 그간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와 다닌 카페가 열 손가락도 넘어가기 때문에 이젠 그럭저럭 좋고 싫음을 따질 수 있는 감각은 생겼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것이다.

드미트리가 어떤 케이크를 만들어 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 * *

페더레이션 타워.

모스크바 중심지의 스카이라인을 그리는 빌딩으로서, 보스토크라는 이름의 이스트 타워와 자파드라는 이름의 웨스트 타워로 이루어진 두 빌딩을 한데 통틀어 칭하는 이름이었다.

이렇게 설명하면 단순히 모스크바 중심지에 위치한 큰 건물이겠거니 싶지만, 자파드가 63층짜리 빌딩이고, 보스토크는 97층짜리 빌딩으로, 374미터의 높이를 자랑하며 유럽 전역과 러시아를 통틀어 최고층의 마천루였다.

“…….”

그렇게 스마트폰으로 눈앞에 있는 건물에 대해 검색해 보고, 난 거의 목이 뒤로 꺾일 정도로 고개를 처들었다. 어마어마하게 높다.

“아버지……?”

난 간신히 옆에 있는 아버지를 불렀고, 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신기한가 보구나. 이렇게 높은 건물은 처음 봤지?”

“예…….”

현대에 이르러 대도시들엔 이런 고층 건물들이 꽤 많다고 들었지만 내가 실제로 본 빌딩 중에선 이 페더레이션 타워가 가장 높았다.

“들어가자.”

하마터면 난 정말요? 라고 물을 뻔했다.

아버지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건물 출입구로 걸어가셨고 그 뒤를 오빠 루슬란과 경호원들이 뒤따랐다. 아버지의 경호원만 5명이었다.

“…….”

크리스마스이자 내 생일인 오늘은 얌전히 집에서 케이크나 먹고 있을 생각이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외식을 하러 나가자 하셨다.

아버지는 항상 바빴기 때문에 이렇게 가족 단위로 외식을 나가는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 난 약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말이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나까지 이렇게 세 명의 가족 외식이지, 말처럼 그렇게 단란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동시에 움직이는 차량만 세 대였다. 가운데에 있는 차량에 우리 가족이 타고 앞뒤로 경호원들이 탑승한 차량이 따라붙었다.

나만 해도 항상 경호원이 따라붙는데 아버지나 오빠는 그보다 훨씬 더했다.

그렇게 철통같은 경호 속에서 이대로 패밀리레스토랑에라도 간다면 조금 웃기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97층짜리 건물을 마주치자 그야말로 넋이 나갔다.

“가시죠, 아가씨.”

빅토르가 멍하니 있는 날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발걸음을 옮겼다.

작년 12월에 완공된 이 건물은 새 건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인지 건물 내부는 번쩍였지만 어쩐지 좀 휑한 느낌이 있었다. 아직 들여와야 할 것들이 다 들어오진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돌아다니는 사람은 꽤 많았고, 이쪽을 바라보며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수십 명이나 한꺼번에 움직이니 눈에 띌 만도 했다.

난 두리번거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아버지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탔다. 층수를 고르는 버튼이 97개나 되었다.

아버지는 몇 번 와 본 적이 있는지 자연스럽게 89층을 눌렀다.

약한 현기증을 느끼기도 잠시,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목표했던 층에 도착해 있었다.

“와.”

89층은 마치 호텔 로비처럼 거대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내가 신기해하자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신기하니?”

“예.”

“오늘 널 위해 전세 냈다, 타티아나.”

“……예?”

난 어안이 벙벙해져서 되물었고 아버지는 이어 약간 못마땅한 듯 말했다.

“마음 같아선 이 층만이라도 사 버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순 없다고 하더구나. 이 빌딩을 통째로 매입하자니 굳이 이런 비즈니스 빌딩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서.”

“잠시만요, 아버지.”

아버지가 말하는 규모를 도저히 따라가질 못하겠다.

“빌리셨다고요?”

“그래.”

너무 당당하게 말씀하시니 할 말이 없었다.

말을 잃고 있자 아버지가 말했다.

“원래 집에서 파티를 열 생각이었다만…… 이번 네 생일은 우리 가족들끼리 보내자고 했잖느냐?”

“예.”

“우리 가족들끼리 집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좋지만, 너와 함께 외식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아서 말이다.”

아버지가 설명을 다 마쳤다는 듯 팔을 벌려 보였다.

“그래서 빌렸다.”

“?”

잘 모르겠다.

난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아버지는 내가 놀라는 모습을 보이면 보일수록 더더욱 흥이 나시는 듯했다.

“자, 가자꾸나. 타티아나. 오늘 함께 빌린 레스토랑의 쉐프는 미슐랭 스타를 받은 레스토랑에서 총괄 쉐프를 담당했던 사람이라더구나. 어떤 음식을 선보일지 기대되지 않니?”

한껏 들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버지를 따라가며 난 약간 생소함을 느꼈다.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이 많은 분이셨던가……?

기분이 좋아 보이시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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