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막심은 앞에 선 두 후배를 보자 들떴던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조금 냉정해진 머리로 막심은 상황을 다시 파악했다.
이대로 타티아나와 무대 위에 올라가서 한바탕 놀아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타티아나가 눈치를 챘는지 모르겠지만 막심은 중앙음악학교에서 비밀리에 이어져 온 밴드부 기타리스트를 역임한 전력이 있었다.
이런 돌발적인 이벤트라면 언제라도 환영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흠.”
타티아나는 생각보다 약간 막 나가는 기질이 있어서 친구들이 가로막건 말건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지만, 막심은 이쯤에서 그만두어야 할 때라는 것을 느꼈다.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그래도 마냥 웃으며 보내 주기엔 약간 배알이 꼴렸다.
막심은 삐딱하게 앞에 선 두 후배를 쳐다보았다.
“일단 누군지 소개부터 하는 게 순서 아닌가?”
기분이 상했다는 듯,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막심이 말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건 너희 쪽이잖아?”
그 말에 에르네스트는 눈가를 씰룩였으나 발끈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피아노과 8학년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베샤스트니흐입니다. 타티아나와는 친구죠.”
“친구……?”
타티아나가 멀거니 중얼거렸다.
에르네스트에 이어 리처드도 자신의 소개를 했다.
“전 리처드 피츠앨런 하워드입니다. 타티아나와는 친구이자,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부탁도 받은 바 있죠.”
“부탁?”
“예. 이런 상황 말입니다.”
꽤나 날카로운 말이었다.
막심은 지금껏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음이 분명한 두 명을 보며 내심 혀를 내둘렀다.
타티아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리처드에게 아버지와 언제 그런 이야기가 오갔냐고 물었고, 리처드는 짧게 저번에라고 답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되는 듯했다.
막심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친구들이 마중하러 왔네. 타티아나.”
타티아나가 막심을 휙 돌아보았다. 그 얼굴엔 얼핏 떼를 쓰는 듯한 기색까지 보였다.
“참관이 늘었을 뿐이죠, 선배님. 앞으로 저희가 해야 할 일은 그대로예요.”
“그냥 가지 그래……?”
막심은 떨떠름하게 말하며 에르네스트와 리처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눈빛으로 이쯤에서 물러나 줄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꽤나 신사적인 태도지만, 가볍진 않다.
막심은 만만찮아 보이는 피아노과 학생들과 척을 질 생각이 없었다.
“타티아나. 다음에 하도록 하자.”
“다음에요……?”
“그래. 앞으로도 시간은 많아.”
“다음에 언제요? 당장 내일이면 방학인데요?”
이 애는 정말 저 8학년들이 날 죽이는 것을 바라는 건가?
막심이 난처해하는 모습에 에르네스트가 다시 나섰다.
“가자, 타티아나.”
“가긴 어딜 가요? 에르네스트. 할 일 없으면 무대에서 페이지터너나 해 주시…….”
되는대로 말하던 타티아나는 자신이 너무 나갔다는 걸 깨달았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에게 악보나 넘겨 달라는 말을 들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잘못했다는 것을 느낀 타티아나가 조용히 사과했다.
“미안해요, 에르네스트.”
“괜찮아.”
타티아나가 조금 얌전해지자 니콜라이가 약간 달래는 투로 말했다.
“저도 타티아나와 트리오를 하는 건 기대하고 있을게요. 다음 학기 중간고사 이전엔 조금 여유가 있으니까…… 3월 초 즈음에 어떤가요? 타티아나.”
“……그렇게 할게요.”
타티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막심과 니콜라이는 그럼 다음에 보자며 손을 흔들며 떠나갔고, 타티아나는 친구 셋과 남았다.
약간 힘없어 보이는 타티아나를 향해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가자.”
에르네스트는 그녀의 팔을 살짝 잡았다.
어깨와 팔이 훤히 드러난 드레스 차림의 타티아나는 세게 잡으면 부러져 버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그 부축을 뿌리쳤다.
“놔주세요. 걸을 수 있으니까.”
* * *
타티아나는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듯 비어 있는 연습실을 찾아 들어갔다.
“…….”
모두가 따라 들어와서 문까지 닫는 것을 확인한 타티아나는 드레스 자락을 정돈할 생각도 않고 의자에 털썩 앉더니 다리를 꼬고 고압적으로 말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많은 질문을 함축한 질문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이야말로 어떻게 된 거냐고 타티아나에게 묻고 싶었지만, 참고 타티아나에게 대답해 주었다.
“저쪽 편에 있었어.”
“거짓말, 제가 한참이나 찾아봤는데 없었…….”
“나중에 들어왔거든.”
에르네스트는 이런 사교파티에 참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어쩌면 타티아나가 파티에 참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교복차림 그대로 막 한창 파티가 진행 중인 홀에 들어서고 있었다.
타티아나가 석연찮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도…… 있으면 있다고 말이라도 해 주시지…….”
몇 번이나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파티장에 들어선 에르네스트는 평소와 같은 교복이 아닌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갖춰 입은 타티아나를 보고, 교복 그대로인 자신을 다시 내려다보고는 그냥 모르는 척 지켜보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최소한의 조건은 갖춰야만 했다. 하지만 다시 슈트를 빌려 오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그렇게 바보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리처드와 만나고, 그 다음엔 리처드와 함께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 앙숙이었던 리처드와 에르네스트는 얼굴만 마주치면 싸우기 바빴지만, 암묵적으로 일시적 동맹관계에 합의했다.
에르네스트가 변명조로 말했다.
“한참이나 있다가 널 발견했어.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타이밍이요?”
타티아나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리고 잠자코 있던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정말 우연히 파티장에 남자 둘만 와서 있다가, 정말 우연히 우릴 발견했다고 말하는 거야?”
“그래. 실제로 그리되었잖아?”
“어이가 없네.”
교복을 입고는 도저히 타티아나 앞에 나설 수 없었던 에르네스트와 괜한 분란을 바라지 않았던 리처드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약간 짜증을 품었다.
에르네스트가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어쨌든 잘 되었잖아. 그대로 창피를 당할 일도 없었고.”
“제가 창피를 왜 당하나요?”
타티아나가 뾰족하게 쏘아붙이고 나서야 에르네스트는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진정 화가 난 부분은 그쪽이 아닌 듯했다.
“그리고 그런걸 왜 에르네스트가 신경 쓰시나요?”
“그야…….”
“어차피 두 사람은 저에게 관심 없으시잖아요? 제 피아노에만 관심만만이시지 평소엔 말도 잘 않고, 먼저 권유 같은 거 해 주신 적 있어요?”
“……뭐?”
타티아나야말로 평소 그녀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들을 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타티아나의 피아니즘에 관심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바보라서 재대결을 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는 줄 알아? 나라고 왜 같이 파티에 가자고 권유를 하고 싶지 않았겠어?
수많은 변명과 억울함, 배신감등이 치솟아서 말문을 틀어막았다.
거기에 타티아나는 한술 더 떴다.
“아, 리처드는 있었죠…….”
에르네스트는 거의 목이 부러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속도로 리처드를 돌아보았다.
리처드는 평소와 다름없이 권태가 가득한 눈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너 그게 무슨 말…….”
에르네스트가 더듬거리며 입을 여는 찰나, 리처드가 번개처럼 말을 잘랐다.
“애처럼 굴지 마, 타티아나.”
타티아나는 사리분별을 못 할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그저 몸에 안 받는 탄산을 마시고 흥분해 있을 뿐이었다.
“흥…… 애가 애처럼 구는 게 뭐 어때서요.”
뾰로통하게 대답하는 타티아나를 보며 리처드가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 없겠다는 듯,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나랑 에르네스트는 갈 테니까, 문 열어서 바람 좀 쐬고 조금 진정되면 돌려보내, 아나스타샤.”
“네가 뭔데 명령이야?”
“그럼 내가 할까?”
리처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했고, 그와 상반되게 아나스타샤는 눈썹을 확 치켜 올렸다.
타티아나는 바람 좀 쐬라는 말을 듣고서야 파티장에 들어서고 나선 바람을 쐰 적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실수로 탄산을 마시고는 거기에 살짝 취해서 선배에게 거의 시비조로 말하고 무대에 오르자고 하는 바람에 이 연습실에 셋이나 모여 앉아서 으르렁거리고 있다는 것도.
이건 엄청난 민폐였다.
“가세요.”
타티아나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르네스트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들었다. 타티아나는 다시 말했다.
“저 때문에 세 분이나 시간 낭비를 하고 있으실 필요 없어요. 두 분, 감사했어요. 이만 돌아가셔도 되어요.”
타티아나는 종종 필요 이상으로 차갑게 말을 할 때가 있었다.
조용해진 좌중을 돌아보던 타티아나가 아나스타샤에게도 말했다.
“아나스타샤도…….”
“절대 안 가.”
“……알겠어요.”
타티아나는 얌전히 수긍했다. 아나스타샤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차에 태우고 나서야 돌아갈 것처럼 보였다.
“그럼. 가자, 에르네스트.”
리처드가 먼저 뒤돌아섰고 에르네스트는 약간 미련이 남은 듯 연습실을 둘러보았다.
타티아나는 그런 에르네스트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고, 에르네스트는 마지막으로 눈을 돌려 타티아나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드레스 정말 예쁘네. 이 말은 꼭 해 주고 싶었어.”
“……고마워요.”
“갈게.”
에르네스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돌아서서 리처드를 따라 나갔다. 둘이서 할 말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
아나스타샤와 타티아나만이 남은 연습실은 고즈넉했다.
방음 소재로 인해 조금 붕 떠 있는 기분을 느끼며, 타티아나는 조금 더 편하게 자세를 바꿔 앉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타티아나.”
“예.”
“너 저 애들과 같이 파티장에 가고 싶었던 거야?”
타티아나는 방금 했던 말이 잘 기억나지도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그런 말을 했었나요?”
“아니, 그렇진 않았지만…….”
에르네스트와 리처드에게 왜 권유도 한 번 않았냐고 말한 것이 바로 그들과 함께 가고 싶었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왠지 모를 짜증을 느끼다가도 그 짜증을 곧바로 투사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애초에 파티에 참가하고 싶다고 했던 것부터가 그 의미였다.
타티아나 역시 다른 애들처럼 왈츠를 추고 싶어 할 테지. 여자 친구와 함께 파티장에 멍하니 앉아서 춤추는 커플들을 본들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아나스타샤.”
“으, 응?”
어두운 상념에 잠겨 있던 아나스타샤는 화들짝 놀랐다.
조용히 그녀를 부른 타티아나가 말했다.
“제가 다른 남학생과 함께 파티에 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뭐?”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 애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무슨 소리야 그게?”
“그러니까…….”
타티아나는 말끝을 흐리며 조금 쑥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아나스타샤는 혹시 마음을 읽힌 게 아닌지 두려움에 떨었다.
거의 패닉에 빠져드는 아나스타샤를 향해 타티아나가 말했다.
“전 왈츠를 출 줄 모르니까요.”
“응?”
아나스타샤가 멍한 소리를 냈다. 타티아나가 부끄럽다는 듯 말했다.
“왈츠를 듣기도 하고 연주도 하고 그렇게 많이 해 봤는데 막상 춤으로 출 줄 모른다니 조금 이상하죠…….”
“…….”
왈츠를 출 줄 모르는 상태에서 필연적으로 왈츠를 추어야만 하는 파티장에 파트너를 데리고 참가할 순 없다는 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너무 순진한 그 말에 조금 실소를 머금었다가, 말했다.
“내가 가르쳐 줄까?”
“예?”
“왈츠 말이야.”
“정말인가요?”
타티아나는 눈을 번쩍 뜨며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았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었다.
“그래. 나도 잘하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인 스텝 정도는 가르쳐 줄 수 있지.”
뻗어 온 손을 잡고 일어난 타티아나가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그…… 전 항상 아나스타샤에게 너무 도움만 받고…….”
“나도 시험 보기 전에 너한테 얼마나 많이 도움을 받았는데. 신경 꺼.”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자연스럽게 왼팔을 들어 올리며 남자의 홀드 자세를 취했다.
“이리 와.”
“……실례할게요.”
타티아나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어색한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아나스타샤에게 다가갔다.
순간,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에게 왈츠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그녀가 같이 왈츠를 출 남학생과 함께 파티장에 가는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왼팔을 조금 더 위로 잡아.”
“이…… 이렇게요?”
“그래.”
하지만 타티아나가 필요성을 느껴서 왈츠를 배워야 한다면, 아나스타샤는 결코 그 기회를 다른 누구에게 넘겨 줄 생각이 없었다.
어색하게 품에 와서 팔을 올리는 타티아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자, 천천히.”
둘밖에 없는 조용한 연습실에서,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타티아나에게 왈츠의 기본적인 홀드법과 스텝들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다.
타티아나는 몸을 쓰는 것에 서투른 것인지 아니면 이 분위기 자체가 어색한지 쭈뼛거리며 움직였다. 아나스타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 박치는 아니겠…… 그럴 리가 없나.”
“아니에요, 지금 탄산음료 때문에……. 아까 초콜릿도 몇 개 먹었고요. 거기에 카페인이……..”
애써 변명을 해 보지만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를 리드하면서 그녀가 기본적으로 몸치라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
그리고, 그렇다면 더더욱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