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6화 (86/1,277)

##  86화

학기를 마무리하는 파티도 끝나고, 중앙음악학교에서의 첫 학기는 마무리되었다.

여러모로 시끄러운 일도 많았고, 내가 제대로 해냈는지, 앞으로 잘할 수 있을지도 모호했지만 적어도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었다.

이제 2월 중순경에 시작되는 2학기를 기다리며 약 2주간의 짧은 방학을 보내면 된다.

나는 그동안 콩쿠르를 준비하기로 했다.

난 지금 벌써 8학년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벌써부터 청소년 콩쿠르 등에 나가서 수상하거나 오케스트라와 협연 등을 해서 커리어를 몇 개씩 가지고 있는 나이이기도 했다.

쉴 틈은 없었다.

연습하던 곡을 마치고 손을 내렸다. 미하일 선생님은 흡족한 듯 미소 지었다.

“훌륭하다, 타티아나.”

방학 사이에 잡아 놓은 콩쿠르에 올릴 곡들을 레슨하기 위해 난 방학임에도 미하일 선생님과 만났다.

이런 경우엔 내가 직접 찾아가는 것이 예의였지만, 미하일 선생님은 직접 방문지도를 하시는 것을 선호하셨다.

별관에 있는 내 연습실엔 피아노가 한 대밖에 없었기 때문에 미하일 선생님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계셨다.

미하일 선생님이 말했다.

“음색이 점점 안정되어 가는 것 같구나.”

“감사합니다. 신경 쓰고 있어요.”

“그래.”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로만 신경 쓰는 것이 아니란 것을 잘 아시기 때문이었다.

“네가 성악을 배우면서 얻어 낸 성과가 빛을 발하는구나. 하지만 이 부분은 다시 조금 볼까?”

그리고 레슨이 시작되었다.

내가 연주하면서도 조금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부분들이 선생님의 손에 지적되어 적나라하게 까발려졌다.

아직도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은 산재해 있었다.

성악을 배우게 된 이후로 내 피아노는 굉장히 많은 변화를 맞았다.

앞으로는 피아노 솔로가 아닌, 듀오를 해야 한다는 자각이 든 무렵부터 몸은 건강을 되찾았고 손끝의 감각은 예민해졌다.

당연히 기존에 쌓아 온 안 좋은 버릇과 관념들은 다시 갈아엎어야 했다.

그렇게 기본적으로 훨씬 높은 곳을 노릴 수 있게 된 잠재력과 보다 넓어진 감정의 스펙트럼을 잘 정돈하며, 동시에 그녀의 목소리를 피아노로 옮기는 데에 집중했다.

처음엔 성악곡을 편곡하는 방법을 거쳐야 드러났던 음색들은 이제 꽤 수월하게 이끌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하듯 연주하는 것은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약 1시간가량의 짧은 레슨이 끝나고, 홍차 한 모금으로 갈증을 달랜 미하일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타티아나. 콩쿠르 날은 기억하고 있겠지?”

내가 이번에 참가 신청서를 넣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음악 콩쿠르는 2월 중순, 학기가 시작하기 거의 직전에 총 이틀에 걸쳐 진행되는 콩쿠르였다.

당일 날 도착해도 상관없겠지만, 그렇게 촉박하게 가진 않으려 한다.

“그럼요. 하루 정도 빨리, 적어도 다다음 주 월요일쯤에는 가려고 해요.”

“흠…… 타티아나.”

미하일 선생님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런 제안을 하셨다.

“차라리 조금 더 일찍 여유를 두고 가 보는 건 어떠냐?”

“……더 일찍요?”

“그래.”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저 멀리 지구 반대편에 있는 도시에서 열리는 콩쿠르에 참가해야 한다면 며칠 여유를 두고 가서 시차 적응도 하고 컨디션을 조절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도시다.

모스크바에서 비행기를 타고 1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시차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일찍 가 봐야 뭘 하겠는가?

내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단 것을 발견한 미하일 선생님이 이유를 설명했다.

“넌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지?”

“…….”

미하일 선생님은 내게 이전까지의 기억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분 중 한 명이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없어요. 가 본 적은 있을지도 모르지만요.”

“그래서 하는 말이다.”

안경을 고쳐 쓰며, 선생님이 진지하게 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어떤 면에선 모스크바보다 훨씬 더 예술집약적인 도시지. 가서 보면 배울 게 많을 게다.”

미하일 선생님의 말마따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제국 시절 200년 동안 러시아의 수도였으며 문화예술적인 발전이 엄청나게 이루어져 있는 예술도시였다.

심지어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솔직한 말로 그 위대한 예술도시를 관광하고 돌아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난 여행 같은 것을 그리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아무리 관광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100여 개의 섬을 500여 개의 다리로 이어 붙여 놓은 예술도시라는 데엔 정말 눈이 뒤집힐 만했다.

“…….”

하지만 난 당장 집중해야 할 일이 있었다.

“죄송하지만 선생님. 콩쿠르에 집중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피눈물을 머금고 난 그렇게 말했다.

콩쿠르까진 2주일 정도밖에 시간이 안 남아 있었다.

아직 곡에 대해 자신도 없는데 여유롭게 관광 같은 걸 하고 다닐 순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자신이 넘쳐흘러도 그렇게 여유를 부렸다간 콩쿠르의 신 같은 분께서 천벌을 내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으로 간신히 상트페테르부르크 관광에 대한 욕망을 지워 내고 있는데, 미하일 선생님이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구나. 제자와 이런 대화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건 없고.”

미하일 선생님이 웃음을 거두고 조금 더 진중하게 제안했다.

“콩쿠르를 앞두고 연습 대신 관광을 하라는 말이 불안하게 들린다는 건 알겠다만, 난 네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거리를 보고 오는 것이 이 콩쿠르와는 별개로 네 음악을 한층 더 성숙하게 할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계기……요?”

“그냥 내 예감이다만.”

난 이런 예감이라는 것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미하일 선생님의 판단엔 항상 선험적인 직관 같은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한평생 피아노만을 연구하고 가르친 분의 예감은 더더욱 무시할 수 없는 것이리라.

진지하게 미하일 선생님의 제안을 고려해 보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관광? 정말 바라는 것이지만 굳이 콩쿠르를 앞두고 시간을 그렇게 보낼 이유가 있을까?

“콩쿠르를 마치고 둘러보는 건…… 시간이 안 되겠네요.”

“그래. 바로 2학기가 시작하니까.”

난 조금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럼 며칠쯤 투자하면 좋을까요?”

“투자? 하하하. 타티아나, 넌 가끔 정말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약간 단어 선택이 글러 먹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을 붉히자 미하일 선생님이 괜찮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일주일도 좋고 당장 내일부터라도 좋다. 그리고 연습을 아예 못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서 오전엔 관광을 하고 오후엔 연습실을 빌리면 되지 않겠느냐? 그건 걱정 말거라. 내가 그쪽 음악원에 있는 친구에게 기별을 넣어 둘 테니. 아, 가능하다면 네 레슨도 조금 봐 줄 수 있냐고 물어봐야겠군.”

“……?”

가만히 미하일 선생님의 말을 듣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저 혼자서 가나요?”

“무슨 말이냐. 내가 따라갈 순 없지 않느냐?”

너무 당연하다는 듯 잘라 말하시니 왜 그럴 수 없냐고 묻기도 힘들었다.

미하일 선생님이 담당하고 있는 학생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선생님이 내게 조금 더 신경 써 주신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 때문에 모스크바에 남아 있는 다른 학생들을 모두 뒷전에 두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의식중에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했다는 것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미하일 선생님은 왜 엉뚱한 소리를 하냐는 듯 바라보았다.

“타티아나. 네가 왜 혼자지? 네 부모님이라든지…….”

그러다가 고개를 저으며 애석한 얼굴을 하셨다.

“유리 알렉세예비치는 바쁜 사람이지.”

“……알아요.”

난 아버지가 날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시간을 내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 일정은 아버지에겐 상당히 부담 되는 일일 것이다.

미하일 선생님이 턱을 쓸며 말했다.

“흠, 네 경호원들이 대동하겠지만 그들이 널 지켜 주는 것과 돌봐 주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니…….”

빅토르나 자하르, 소로킨은 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유능한 사람들이고, 아마 내가 혼자 다녀도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일은 내 경호다. 보호자로서 곁에 있는 것과 경호는 약간 달랐다.

“홀로 다녀 보는 것도 또한 좋은 경험이 되겠지만…… 가족 없이 홀로 호텔에서 숙박하게 두는 건 아직은 조금 걱정이 되는구나. 흠…… 아니지, 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친척이 있거나 하진 않느냐?”

“그건…… 모르겠어요. 아버지께 여쭈어 봐야 할 것 같아요.”

이 세상에 베르체노프라는 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곤 세 명밖에 모르는 내가 그 외의 다른 사람을 알 리가 없었다.

“…….”

미하일 선생님이 고뇌에 빠진 날 바라보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타티아나. 일단 알겠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널 맡길 사람이 있는지 유리 알렉세예비치에게 내가 물어보고, 만약 없다면 허락을 받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교수로 있는 내 친구에게 널 부탁해야…….”

순간, 아주 괜찮은 생각이 번뜩였다.

“선생님. 같이 가 줄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오, 그래?”

가능할지 아닐지는 부딪혀 봐야 알겠지만요.

* * *

“…….”

생경한 문 앞에 선 나는 그 문을 두드리길 망설였다.

내 방과 정반대 쪽 복도에 위치한 이 방은 다름 아닌 루슬란 오빠의 방이었다.

평소에 이곳에 올 일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전에 몇 번 왔을 때도 루슬란 오빠의 문전박대에 쫓겨나기 일쑤였다.

“음음.”

하지만 오늘은 그렇게 허무하게 쫓겨날 수 없었다. 각오를 다지고 문을 노크했다.

똑똑.

“누구야, 들어와.”

모스크바 대학교에 다니는 오빠 역시 방학 중이었다. 늘어지는 목소리가 방에서 흘러나왔다.

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분명히 들어오라고 허락했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침대에 누워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던 루슬란 오빠가 곁눈질로 내 모습을 발견하더니 스프링처럼 튕겨 일어났다.

“뭐, 무, 뭐…… 뭔데. 타티아나. 네가 왜 내 방에 마음대로 들어와?”

“루슬란 오빠.”

난 최대한 밝게 그 이름을 불렀다. 루슬란 오빠는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뭐야.”

말없이 방문을 닫고, 문을 잠갔다.

“뭐야!”

목소리가 커진다. 난 희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하세요?”

“내가 뭘 하든?”

“아뇨……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해하시는 것 같아서요.”

내 말에 루슬란 오빠는 어디 찔리기라도 한 듯 흠칫했다.

올해로 스무 살.

대학이 방학에 들어서자 그대로 거의 반백수처럼 늘어져 버린 것이 훤히 보인다.

이전엔 따로 아버지가 경영수업이라며 일터에 데리고 가는 일도 있었지만, 요즈음 아버지는 정말 오빠를 데리고 다닐 틈도 없을 정도로 바쁘신 듯했다.

아버지가 바쁜 덕에 오빠는 정말 원 없이 쉬고 있는 중이었다.

기왕에 쉴 거면 조금 더 좋은 곳에 가시지 않겠어요?

러시아의 베네치아라고 불리는 도시에.

“혹시 방학 내내 일정 같은 것…… 있으세요?”

“당연히 있지. 내가 그렇게 여유로운 사람처럼 보여? 난 바빠.”

“그런가요? 그래도 방학 내내 일정이 있진 않으시겠죠. 정확히 언제부터 여유가 조금 생기실까요? 알려 주실 수 있나요?”

“그…….”

음악밖에 모르는 나와 다르게 루슬란 오빠는 모스크바 대학교에 들어갈 정도의 수재였다.

그 뛰어난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다.

대체 왜 방학 일정을 묻는 건지, 또 어떻게 해야 간섭당하지 않을 수 있을지, 그렇다면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아무리 바쁘다고 억지를 쓴다 한들 2주일이라는 긴 시간 내내 한 번도 틈을 낼 수 없이 바쁘다고 할 순 없으니, 내가 내민 덫에서 오빠가 벗어나기 위해선 내가 오빠를 필요로 하는 날짜와 겹쳐서 포기할 수밖에 없는 날짜를 골라야 했다.

기간은 2주일. 선택할 수 있을까?

“……7일부터 주말까지야. 학교에서 하는 행사가…… 그 후로…….”

“4초나 걸리셨네요.”

“뭐?”

“그 변명을 만드시는 데에 걸린 시간이요.”

정말 아무 날짜나 말하고 얼버무릴 거라면 1초도 생각하지 않고 바로 말했어야지. 4초나 걸리다니 너무 어색했다.

루슬란 오빠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변명이 아니라 진…….”

“모스크바 대학교에 전화해서 물어볼까요? 무슨 행사가 있는지.”

자비 없이 일격을 날렸다.

대충 둘러대고 아무 날짜나 말하면 내가 납득하고 돌아가 줄 줄 알았겠지만, 난 오늘 작정하고 이 자리에 서 있다.

완전히 코너에 몰린 오빠는 결국 뻔뻔하게 나오기로 한 것 같았다.

“그래? 마음대로 해 보시든가.”

“정말 그래도 되나요?”

“응. 그리고 좀 나가 줄래? 난 오후에 외출 약속이 있어서 옷을 갈아입어야 하거든.”

그 약속도 방금 급조하신 것 같은데요.

내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든 말든, 오빠는 정말 나가려는 듯 옷장 문을 열었다.

난 오빠가 앞에서 옷을 갈아입든 스트립쇼를 하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쳐다볼 수 있었지만, 내가 사수해야 할 숙녀로서의 명예와 비위를 위해 자리를 피해 주기로 했다.

방 밖으로 나와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나 때문에 오빠가 무작정 밖으로 나가 거리를 배회하는 모습을 떠올리자 조금 안쓰러워졌다.

저렇게 불쌍한 영혼을 굳이 더 괴롭힐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한편으론 화가 났다.

이쯤 하면 그만 좀 할 때도 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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