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8화 (88/1,277)

##  88화

출발 전날 난 캐리어를 받아 온 다음에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가는 데에 필요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옷장을 열어 놓고 뭘 꺼내야 할까 올려다보았지만 음악 외의 미적 감식안이라곤 완전히 끝장나 있는 내가 본다 한들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차라리 교복처럼 매일 같은 걸 입으면 편할 텐데.

“……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방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계십니까?”

“아, 나제즈다.”

일주일간 여행을 가야 하는데 뭘 챙겨야 할지도 모르겠고, 정말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던지라 반색했다.

“……뭐 하시는 건가요?”

그런데 나제즈다는 정색을 하며 날 내려다보았다.

난 순간 모든 동작을 멈추고 얼어붙었다. 내가 뭐 잘못이라도 했나……?

쭈뼛거리며 바라보자 나제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캐리어를 받아 가셨다길래 혹시나 했는데……. 아가씨. 어디서 보셨는진 모르겠지만, 손수 짐을 싸실 필요는 없어요.”

나제즈다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그런 말을 했다.

“…….”

“아무도 말씀을 안 해 드린 것 같군요?”

“그건…….”

“그렇다면 모르실 만도 하죠. 하지만 걱정 마세요. 이 옷장 자체를 그대로 특수화물로 옮길 테니깐요.”

“……예?”

상상도 못 한 말에 당황했다.

나제즈다는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는 듯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게 말이 되나요?”

“아가씨는 검소하셔서 가지고 계신 물건이 많지도 않지요. 옷장도 두 개뿐이시고요. 전혀 문제 되지 않아요.”

“그럼 제가 묵을 호텔방에 이 옷장들을 그대로 들여놓는단 말인가요?”

“예. 필요하신 물건들도 전부.”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본래 아가씨는…….”

순간 옛날이야기를 입에 올리려던 나제즈다는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철벽같은 그 반응에 난 쓴웃음을 지었다.

자기 방에 있는 옷장을 공수해서 여행지에 가져다 놓는다는 건 내 상식으로는 도무지 떠올릴 수 없는 것이지만 타티아나에겐 당연한 일이나 다름없었으리라.

갑자기 여태껏 뭘 한 건지 허무해져서 캐리어를 옆으로 밀어 버리고 침대 위에 앉았다.

나제즈다는 날 달래듯 옆에 앉아 말을 걸어왔다.

“루슬란 님에게 직접 여행을 권유하셨다고 들었어요.”

“예. 맞아요.”

“이전에 해 드렸던 말, 잊지 않고 계셨군요.”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앞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상냥하게 대해 준다면 모두 좋아질 것이라는 말.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제즈다는 후후 웃으며 말했다.

“분명 좋은 여행이 될 거에요, 아가씨.”

난 물끄러미 나제즈다를 올려다보다가 불쑥 제안했다.

“나제즈다도 같이 가지 않으시겠어요?”

“저요?”

“…….”

그녀를 귀찮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도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돌아보고,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쇼핑 등을 하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나제즈다는 고개를 저었다.

“루슬란 님이면 충분해요. 제게 신경을 쓰실 필요 없답니다.”

“……전 나제즈다도 신경 쓰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아가씨.”

확고한 거절이었다.

나제즈다는 내 담당이 아니라 저택을 담당하고 있는 사용인이었다.

그녀는 날 편애하고 나 역시 그녀를 편애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녀는 저택에서 일하는 것으로 보람을 느끼는 성실한 사람일 뿐이었다.

몇 번이고 은연중에 제안하긴 했지만, 나제즈다는 내 생활에 더 깊게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난 나제즈다를 존중하기로 했다. 물론 내 제안은 영원히 열려 있을 것이다.

“그럼…… 지금 절 도와주실 순 있죠?”

“그럼요, 아가씨.”

나제즈다는 밝게 웃으며 옷장에 있는 옷들을 꺼내서 어떻게 맞춰 입으면 좋은지에 대해 강의를 시작했다.

센스라곤 전혀 없는 나로선 매번 들어도 매번 다르고 이해가 안 가는 강의였다.

그간 많이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였다. 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대체 난 언제쯤 알아서 의식주를 챙길 수 있게 되는 걸까.

* * *

모스크바에서 700km정도 떨어진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가는 방법은 세 가지 정도가 있다.

첫 번째 방법은 상트페테르부르크행 일반 기차를 타는 것이다. 8시간 정도 걸린다.

두 번째는 최신 고속열차인 삽산을 타는 것이다. 이 고속열차로는 4시간 정도 걸린다. 일반 기차보다 훨씬 빠르다.

그리고 가장 빠른 세 번째 방법은 직항 비행기를 타는 것으로, 1시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탑승 수속 및 모든 과정을 다 합쳐도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너 미쳤어?”

“와…….”

루슬란 오빠가 내게 이렇게 격한 말을 하는 건 처음이라 조금 설레기까지 했다.

냉랭하게 대하는 것보단 이게 훨씬 나았다. 조금 과격할지언정 우리 남매 사이는 점점 좁혀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감격스럽다.

하지만 오빠는 진심으로 내 정신건강을 의심하는 듯했다.

“열차를 타자니 무슨 소리야. 8시간이나 걸린다는 말 못 들었어?”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웃기지도 않는 소리 마. 네가 열차를 고집한다면 난 절대 안 가.”

“오빠도 처음이시잖아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전혀 안 궁금해.”

8시간 동안 같이 붙어 앉아 있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싫은지 루슬란 오빠가 질색을 했다.

거기에 생전 한 번도 안 타 본 일반열차라 더더욱 거부감이 드는 듯했다.

싫을 수도 있다는 건 이해하겠는데 너무 단호박 같은 태도라 조금 슬프다.

루슬란 오빠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말했다.

“전용기를 쓰는 게 싫다는 것까진 알겠어. 이해하지. 하지만 항공사의 비행기도 못 타겠다는 이유가 뭐야 대체?”

“저 비행기 공포증이 있어서요.”

“이전엔 잘만 타던…… 아니, 그게 아니라.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는 비행기에 공포증이 있는지 없는지 그걸 어떻게 알아?”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네요?

살짝 말문이 막힌 사이 루슬란 오빠가 이젠 날 구슬리기 시작했다.

“타티아나. 잘 생각해 봐. 너나 나나 시간이 넘치는 사람들이 아니잖니? 길거리에 시간을 버리고 다닐 이유가 없다고. 경영학적으로 우린 효율을 따질 필요가 있어. 느려 터진 기차보단 비행기를 타고 네가 원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는 게 훨씬 빠르고 효율적이잖니?”

루슬란 오빠의 말투가 굉장히 기분 나쁘게 변했다. 대충 복잡한 척하는 이야기를 하면 내가 납득하리라 생각한 듯했다.

난 마치 다 알아들었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오빠가 흡족하게 웃었다.

“좋아, 알아들었으면…….”

“그럼 삽산을 타죠.”

“……가는…… 뭐?”

환희에 차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절망으로 물든다.

“삽산?”

“예. 고속열차요. 4시간이면 된다고 하네요.”

“타티아나…….”

루슬란 오빠가 당장 기절하고 싶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대체 네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생각이요?”

“그래. 넌 나랑 4시간이나 붙어 앉아 있고 싶어?”

“…….”

그래도 붙어 앉는단 이야기를 하는걸 보니 같이 타면서 좌석을 떨어뜨려 앉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것만으로도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그럼요.”

“뭐라고?”

“4시간이 아니라 8시간쯤이면 좋겠어요, 저는요.”

루슬란 오빠는 아직도 내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1년이 다 되도록 친오빠에게 이렇게까지 믿음을 얻지 못하면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상상도 안 가지만.

어쨌든 내 잘못이 아니라고 나 몰라라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이전까지는 몰라도 앞으론 내 인생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앞으로 잘 지내고 싶다는 마음과 달리 1년이 다 되도록 신뢰받지 못하는 것은 내가 보다 적극적이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그저 시간이 흘러가면 알아서 해결되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이젠 미룰 수 없었다.

움직이는 열차에서 오빠가 도망가지 못하고 옆자리에 앉아 있다면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난 이 기회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이런 시간은 4시간이건 8시간이건 길면 길수록 좋았다.

“싫으신가요?”

조금 낯부끄럽긴 하지만 난 진심 그대로를 말했다.

루슬란 오빠는 여태껏 짜증난다는 듯 툴툴거리던 태도를 지우고 가만히 날 내려다보았다.

그 푸른 시선이 날 꿰뚫고 멀리 떨어진 무언가를 보는 듯, 아득해져 갔다.

“…….”

“예?”

“……알았어.”

항복 선언이 떨어졌다.

난 기쁨에 겨워 오빠를 껴안으려다가, 그랬다간 역효과가 날 것이 뻔하다는 걸 느끼곤 간신히 양팔을 추슬렀다.

루슬란 오빠가 말했다.

“네가 가고 싶어 하는 여행이니 네 뜻대로 하자. 마음대로 해.”

오빠가 이어서 조금 가라앉은 톤으로 말했다.

“난 널 지켜보기만 할 테니.”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관광하는 날 옆에서 지켜보며 보호자 역할만 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의미인지 알 순 없었지만 어쨌거나 기분이 좋았다.

“정말요? 제 마음대로 해도 되나요? 그러면 우리 일반열차 타죠.”

“적당히 좀 해!”

오빠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 * *

“아나스타샤?”

- 아, 타티아나. 무슨 일이야?

난 아나스타샤에게 일종의 보고 전화를 걸었다.

물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같이 가자고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저번에 인사시켜 준 이후로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은 오빠가 옆에 붙어 있기 때문에 만약 아나스타샤가 오겠다고 하더라도 뜯어 말려야 할 판국이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아무런 것도 알리지 않고 몰래 갈 순 없었다.

내게 있어 아나스타샤는 가깝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충분히 진지하게 대해야 할 친구였다.

“요즈음 어떻게 보내고 계세요?”

- 응? 어떻게 보내긴. 최선을 다해서 뒹굴고 있지. 저번에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아나스타샤는 이번 방학엔 아무 생각 없이 쉴 거라고 이야기했었다.

그녀가 말했다.

- 타티아나 넌 콩쿠르 준비?

“예.”

-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음악 콩쿠르라고 했던가? 으음…….

“예, 그리고 말인데, 저 내일부터 여행을 가려고요.”

- 여행?

내 말에 아나스타샤가 깜짝 놀라 했다.

여행이란 연습실에서 피아노와 씨름하는 걸 삶의 낙으로 여기는 내게 정말 안 어울리는 단어 중 하나다. 아나스타샤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정말 의외라는 듯한 투로 그녀가 말했다.

- 갑자기 무슨 여행? 그런 말 없었잖아?

“아나스타샤의 말대로 갑자기 생긴 일정이에요. 다른 곳으로 가는 건 아니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갈 거예요. 콩쿠르 전에 일주일 정도.”

- ……뭐?

여행지가 다른 어딘가가 아닌 콩쿠르가 열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사실을 듣고, 아나스타샤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변했다.

갑자기 왜 그런진 모르겠지만, 방금까지만 해도 편안했던 아나스타샤의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날 쫓아올 것같이 다급한 목소리로 돌변해 있었다.

- 미안한데, 누구랑 가? 아니, 물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좀 들어 놓고 싶어서…….

“오빠랑요.”

- 네 친오빠?

“예.”

- 아…… 그래?

내 대답에 아나스타샤는 수화기 너머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안도하더니, 한층 밝아진 어투로 말했다.

- 가족 여행인 거네?

“예. 그렇죠.”

- 그럼 됐어. 난 또, 왜 갑자기 너도 여행을 간다고 하나 해서…….

“저도요?”

- 아니, 아무것도 아냐.

아나스타샤는 대충 얼버무리더니 킥킥 웃었다.

- 그나저나 네 오빠가 어쩐 일이래? 네가 그랬잖아. 오빠랑 사이 별로 안 좋다고.

“앞으로도 계속 사이가 안 좋을 순 없잖아요?”

- 그것도 그렇지. 평생 안 보고 살 것 아니라면 말야.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아나스타샤가 문득 궁금해졌다는 듯 물었다.

- 그런데 있잖아, 타티아나. 하나 물어봐도 돼?

“예?”

- 기분 나쁘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 넌 대체 어떨 때 화가 나?

“……예?”

너무 앞뒤 맥락 없는 질문이라 뭘 묻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이해를 못 하자 아나스타샤가 다시 말했다.

- 솔직히 말해 넌 평소에 적을 만들고 다니는 타입은 아니잖아?

“……그런가요?”

- 그래. 그런데 척 보기엔 사람 괜찮아 보이던 네 오빠랑 네가 사이가 안 좋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서.

아나스타샤가 보기엔 나와 루슬란 오빠의 관계가 굉장히 기이하게 보이는 듯했다.

그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제가 오빠에게 잘못한 것이 있어요.”

- ……그래? 그 오빠가 널 폭발하게 만든 게 아니라?

“아닐 거예요.”

- 무슨 말이 그래?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진 저도 모르니까요.

진실은 단 몇몇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난 잠시 침묵했다.

아나스타샤는 껄끄러운 걸 물어봐서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 어쨌든 좋은 기회인 것 같아, 타티아나.

“예.”

- 가족이라는 건 어쨌거나 한 명이라도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더라고. 네 오빠랑도 잘되었으면 좋겠네.

“고마워요,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와의 통화가 끊어지고도, 난 한참 동안이나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

난 어떻게 해서든지 루슬란 오빠와 경원시하는 사이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그것은 한 점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문득 겁이 나기도 했다.

매사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루슬란 오빠가 그녀를 먼저 자극해서 사이가 틀어졌을 리도 없고, 만약 그랬다면 루슬란 오빠가 지금까지 날 피할 이유도 없었다.

정황상으로는 어떻게 보더라도 그녀가 무언가 막돼먹은 짓을 저지른 것이 분명했다.

난 그걸 드러내어 바닥에서부터 수습하고 다시 루슬란 오빠와의 관계를 정상화시키고 싶었고, 오빠가 내게 보이는 태도를 보면 용서받는 것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희망에 차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내 희망일 뿐이었다.

루슬란 오빠는 바보가 아니었고, 그녀는 항상 상상을 초월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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