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9화 (89/1,277)

##  89화

“와, 이 마카롱과 커피가 무료라고 하네요. 오빠. 열차에 타길 잘 했죠?”

“비행기에 탔으면 마카롱이 아니라 케이크가 나왔겠지.”

“에이, 비행기 표 값이 훨씬 더 비싸잖아요.”

“……타티아나. 난 도저히 네 금전감각이 이해가 안 간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루슬란 오빠가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내가 무슨 소릴 하는진 잘 모르겠다.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오빠에게 말을 걸었다. 안 하던 짓을 하려니 약간 자괴감까지 몰려온다.

하지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단지 조금 피곤하다는 이유로 넘겨 버릴 순 없었다.

끈질기게 말을 걸자, 오빠는 틱틱대면서 내 말을 받아 주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시선은 스마트폰에 가 있었다.

내 첫 번째 목적은 오빠의 시선을 스마트폰에서 떼어 내는 것이었다.

난 마카롱을 하나 내밀었다.

“이것 하나만 드셔 보세요.”

“뭐? 싫어.”

“어서요.”

“싫다니까.”

정말 매몰차게 거절한다.

혹시 단 것을 싫어하나?

“그렇다면 다른 것이라도 주문할까요? 과자 말고 다른 것도 있다고 하네요.”

“생각 없어.”

“……예.”

먹을 것으로 시선을 끌어 보려는 작전은 실패인 것 같다. 예상은 했지만 조금 허무하다.

대체 루슬란 오빠가 스마트폰으로 뭘 보나 힐긋 봤는데 그리 재미있는 걸 보고 있지도 않았다.

인터넷 뉴스를 슥슥 훑어보고 있을 뿐이었다.

난 다음 작전에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가방 안에서 태블릿 컴퓨터를 꺼냈다.

“…….”

그리고 전원을 켜고 큰 화면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대해 검색했다. 적당한 사진이 몇 개 나오자 난 다시 오빠를 불렀다.

“오빠.”

“왜.”

“이 사진에 나오는 건물은 어디예요?”

내 질문에 드디어 오빠는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떼고 내 태블릿 컴퓨터 화면으로 눈을 돌려 주었다.

“어딘데 이게.”

“……모르시나요?”

“사진만 보고 내가 어떻게 알아?”

루슬란 오빠는 모스크바 대학교에 다니는 대학생일 뿐이지 상트페테르부르크 관광 가이드가 아니었다.

사진만으로는 어딘지 알 수 없는지 오빠가 손을 내밀었다.

“줘 봐.”

그리고 루슬란 오빠는 태블릿 컴퓨터를 가지고 가선 그 사진이 올라간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모이카 궁전. 유스포프 대공이 살던 곳이라 유스포프 궁전이라고도 부른다고 하네.”

“그런가요?”

“왜, 가 보고 싶어?”

“어…… 글쎄요?”

“?”

딱히 가 보고 싶어서 구글에서 찾아낸 것은 아니었다.

루슬란 오빠는 이상한 사람 보듯 날 보더니, 결국 피식 웃어 버리곤 말했다.

“그건 그렇고, 정말 가지고 다니네.”

“무슨 말씀이세요?”

“이 태블릿 말이야.”

“아…….”

내가 가지고 있는 태블릿 컴퓨터는 생일 선물로 오빠가 선물해 준 것이었다.

오빠는 그것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피식 웃었다.

“쓸 만해?”

“그럼요. 이전에 쓰던 것보다 훨씬 빠르고 좋아요.”

“그럼, 다 좋은데 앱 정리는 좀 하자.”

“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되묻자 오빠는 그럴 줄 알았다면서 태블릿 컴퓨터를 조작해 이것저것 설정을 바꾸기 시작했다.

난 애초에 컴퓨터에 그리 익숙한 편이 아니었고, 대충 주는 대로 받아서 쓸 줄이나 알았지 저렇게 세세한 설정 같은 것은 할 줄 몰랐다.

나보단 훨씬 더 그쪽에 박식한 것 같은 루슬란 오빠가 이것저것 태블릿을 내가 쓰기 좋게 해 주는 것을 보며 조금 기분이 들떴다.

정말 내가 싫고 이 자리도 싫고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싫다면 저렇게까지 해 주진 않을 것이다.

대충 퉁명스럽게 묻는 것에만 대답해 주고 말았겠지.

“업데이트도 좀 받아 놓고…… 자주 안 쓰는 건 정리도 하고. 아무리 내가 순정으로 던져 줬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대로 쓰고 있냐?”

이전보다 내게 말이 조금 많아진 것 같은 것도 내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루슬란 오빠가 내 얼굴만 보면 피하기 급급했던 시절에 비하면 이미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잘 되니까 상관없지 않나요?”

“……그래. 상관은 없지. 답답아.”

말이 많아진 것과 동시에 어투도 조금 더 편해진 것 같기도 하다. 저번엔 내게 미쳤냐고 하더니 이번엔 답답이라고 했다.

난 기이한 만족감을 느꼈다.

이전처럼 거리감 있게 빙빙 도는 것이 아닌, 남매로서 날 편하게 대하는 것 같다는 현실감이 확 드는 느낌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가만 생각해 보면 차라리 오빠가 화끈하게 욕이라도 조금 해 줬으면 좋겠다.

그것은 오빠에 대한 처방이기도 했다. 아직까지도 오빠는 날 너무 어려워하고 있었다.

이참에 내게 욕이라도 시원하게 하고, 내가 거기에 상처받거나 맞받아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면 오빠로서도 조금 더 편하게 날 대할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조금 갈등하며 쳐다보자, 루슬란 오빠가 태블릿 컴퓨터를 휙 건넸다.

“자, 여기. 자세한 건 설명해 줘 봐야 잘 모르겠지. 대충 이전보다 조금 더 빨라졌을 거야. 쓰기도 편해지고.”

“그런데요, 오빠.”

“뭔데.”

이건 어떨까.

난 오빠의 분위기를 살피고, 지금이라면 괜찮겠다는 확신을 얻은 후 기폭 단추를 눌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친구가 올 수도 있다는 것, 거짓말이었어요.”

“뭐?”

루슬란 오빠는 크게 눈을 떴다.

난 괜히 웃거나 해서 오빠를 더 도발하지 않고 적당히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오빠를 낚아 올리기 위해 내걸었던 미끼를 빼내 버렸는데도, 오빠는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신경질적으로 퍼덕이거나 짜증을 내진 않았다.

대신 순간 놀랐던 감정을 가라앉히고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게 말했다.

“뭐…… 그럴 줄 알았어.”

“그럴 줄 아셨다고요?”

“그래. 네가 그렇게 내게 협조적일 리가 없지. 가만 생각해 보니 이상하더라고.”

“…….”

당연한 말이었다. 난 오빠도, 아나스타샤도 좋아하지만 그 둘의 사이에 무언가 협조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잘 설명할 순 없지만 꽤나 복잡한 마음이다.

어쨌건, 그런 내 태도는 이미 루슬란 오빠에게도 똑똑히 전해졌던 것이다.

오빠는 그리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은 눈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한 건 지금이야.”

“지금요?”

“그래. 네가 그 순간 날 미끼로 꾀어냈다는 건 알겠어. 상관없지. 그런데 네가 지금 그걸 털어놓을 이유는 없어.”

“……예?”

오빠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왜 자백을 하지? 타티아나?”

……음.

내가 루슬란 오빠를 너무 녹록하게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모스크바 대학교에 재학 중인데, 오빠는 최소한 나보단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그저 단순하게 오빠를 자극하면 내가 원했던 반응을 보여 주리라 생각했었는데, 내가 너무 안일했던 것 같다.

오빠는 내 행동 그 자체를 의심스러워하고 있었다.

“저기, 오빠.”

“말해 봐.”

오빠는 이겼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난 대놓고 내 의도를 털어놓았다.

“저에게 욕설을 조금 해 주실 수 있나요?”

“……뭐라고?”

되도록 별것 아니라는 듯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더니 그게 더 괴상하게 보인 모양이다.

오빠는 정말 정신병자를 보는 듯한 눈을 했다. 좋았어. 이제 지금 생각하고 계신 걸 그대로 말로 해 주시면 돼요.

하지만 오빠는 어이없다는 듯 말할 뿐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냥 해 주시면 안 되나요? 전 반격하거나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니까?”

“제가 어려운 부탁 하는 건가요?”

“어렵지 당연히. 장난해? 아버지가 날 죽일걸?”

“아버지가 아실 일은 없어요.”

난 루슬란 오빠에게 그 어떤 위해도 없을 것이라는 걸 이해시키기 위해 진지하게 말했다.

“이 달리는 열차 안에서 이루어지는 오빠와 저 단둘만의 대화인 거예요. 다른 그 무엇도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대체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바로 그거예요. 조금 더 강하게 해 보세요.”

“…….”

루슬란 오빠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뭔진 몰라도 내 의도에 따르면 안 된다는 직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억울했다.

난 정말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내게 거리를 두고 있는 루슬란 오빠에 대한 심리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내게 쌍욕을 퍼부어도 괜찮다는 안심을 오빠에게 주고 싶었다.

“괜찮아요, 정말로.”

“타티아나. 저리 치워.”

“오빠가 마음이 없어 보이니까, 제가 동하게 해 드려야죠. 안 그런가요?”

괜히 옆에서 쿡쿡 찌르자 오빠가 점점 짜증이 난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지금 무언가 심한 말을 생각하고 계시는 것 맞죠?

하나? 정말 하나?

“……그만해.”

“…….”

재미없게.

루슬란 오빠는 끝끝내 점잖은 태도를 지켜 냈다.

내가 너무 노골적이었던 것도 있지만 이 정도면 어지간해선 험한 말 한 번쯤 할 때도 되었는데, 인내심이 강한 것 같았다.

난 내 자리에 힘없이 늘어졌다.

잠시간 우리 사이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고속열차가 덜컹거리는 소리만이 요란했다.

화제를 좀 돌리는 게 낫겠다 싶어 입을 열려는 찰나 오빠가 선수를 쳤다.

“타티아나. 너야말로 나한테 반말 해 봐.”

“……예?”

묵직한 한마디에 순간 생각이 멈추었다.

루슬란 오빠는 자기야말로 할 말이 많다는 듯 말했다.

“왜? 못하겠어?”

“그, 저기…….”

난 눈도 들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생각도 하지 못했던 곳에서 기습을 당한 기분이었다. 난 자각이 전혀 없었다.

“갑자기 그건 왜…….”

“너야말로 갑자기 욕을 해 달라니 이상한 소리나 하면서, 반말은 왜 못 해?”

“그게 어디 쉽나요?”

볼멘소리가 절로 나왔다.

루슬란 오빠는 이젠 거의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게 더 쉽지. 왜 못해. 빨리 해 봐.”

“…….”

난 한국에서 온 한승우 딱 한 사람을 빼 놓고는 그 누구에게나 존대를 해 왔다.

여태껏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고, 이젠 거의 고착화되어서 바꿀 수도 없게 된 버릇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어에서의 반말은 곧 친근어였고, 가까운 사람에겐 반말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충분히 가까운 친구임에도 존대를 하는 것은 곧 친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과 같았다.

때문에 난 최소한 아나스타샤에게만큼이라도 반말을 해 보려 노력을 해 본 바 있었으나, 결국 실패했다.

어떻게 말해도 어색하고, 입술이 꼬인 것처럼 말이 잘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굳이 그렇게 애쓸 필요 없다고 해 주었다. 덕분에 아직까지 아나스타샤와는 자연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었지만,

오늘 루슬란 오빠는 그렇게 날 배려해 주지 않을 것 같다. 오빠는 무자비하게 내게 말했다.

“어서 해 봐.”

“……오빠가 먼저예요.”

“뭐라고?”

“오빠가 먼저 저한테 욕설을 해 주시면 저도 반말을 해 볼게요.”

“순서가 거꾸로잖아. 당연히 네가 먼저지.”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먼저 부탁드렸잖아요.”

“그 순서가 아니라 대화의 순서라는 걸 말하는 거야.”

그렇게 한참을 루슬란 오빠와 난 서로 먼저 반말을 해라, 욕을 해라 다투었다.

아마 아버지가 이 광경을 봤으면 기절하셨겠지만 다행히 이 열차에 타 있는 사람은 우리 둘과 객실 입구 쪽에 위치한 경호원들뿐이었다.

결국 오빠가 역정을 냈다.

“반말이 그렇게 어려워?”

사실 이 악물고 하면 못 할 것도 없긴 했다. 하지만 난 이제 약간 오기마저 생겨 있었다.

“오빠야말로 저에게 욕 한 마디 해 주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 예전 같았으면 분명…….”

거기까지 말한 나는 말실수를 했음을 깨닫고 뒷말을 삼켰다.

하지만 이미 다 뱉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순식간에 루슬란 오빠의 표정이 안 좋아졌고, 나 역시 그랬다.

“…….”

들떠 있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분명 그녀와 루슬란 오빠의 사이는 좋지 않았을 것이다.

나이 차가 다섯 살이나 나니 치고받고 싸우진 않았을지라도, 서로 심한 말을 총탄처럼 쏘아 내는 일은 아마 몇 번이고 있었겠지.

어쩌면, 난 지금 오빠의 깊은 상처를 들춰내려고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 좋았던 과거의 일을 떠올리게 하는 끔찍한 요구를 하고 있었을지도.

문득 떠올린 좋은 생각이라고 여겼지만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

난 후회하며 루슬란 오빠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

“그냥 전…… 죄송해요.”

사과밖에 할 말이 없어서 그렇게 말을 맺었다.

루슬란 오빠는 가만히 내 옆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타티아나. 지금 우리 진짜 이상한 거 알지.”

“……그런가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니 루슬란 오빠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우리 둘 다 미쳤다고 할걸.”

난 웃지도 못하고 물끄러미 오빠를 바라보았다.

오빠가 가만히 날 불렀다.

“타티아나.”

“예…….”

“네가 왜 갑자기 그런 이상한 소릴 하는진 알겠어.”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진 전해진 듯했다.

뜬금없이 욕해 달라는 미친 소리엔 그럴 만한 이유가 몇 되지 않으니까.

루슬란 오빠는 싱겁게 웃으며 말했다.

“널 그렇게까지 불안하게 만든 건 미안하지만, 난 나대로 지켜야 할 게 있었어. 그건 이해를 좀 해 줬으면 좋겠어.”

“……알겠어요.”

“그게 뭔지 묻지 않네.”

“제가 물을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정말 이렇게까지…….”

얼핏 애석하다는 듯, 안타깝다는 듯 날 바라보던 루슬란 오빠가 어깨를 조금 틀다가 멈칫했다.

난 오빠가 날 쓰다듬으려다가 말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루슬란 오빠는 잠시간 날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요 일주일간 널 데리고 다녀야 하니까…… 알아서 잘 따라다녀라.”

그러곤 잠시 고민하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망할 동생아.”

난 이것이 지금 루슬란 오빠가 내게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을 느끼고, 기쁘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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