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버릇처럼 일어나 눈을 부비며 시계를 보니 새벽 5시경이었다. 난 정말 어지간해선 늦잠을 자는 일이 드물었다.
미미하게 비치는 조명 외엔 전부가 어두컴컴했다. 겨울의 러시아는 굉장히 해가 늦게 뜬다.
특히 계절에 따라 일출과 일몰의 차이가 극심해서 6월엔 백야 현상까지 일어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2월엔 9시가 다 되어서야 해가 뜬다.
“으음…….”
부담스러울 정도로 폭신한 이불을 걷어 내고 일어났다.
어제 돌아다닌 피로가 아직 풀리지 않았는지 팔다리가 조금 욱신거렸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자 조금 쌀쌀한 공기가 잠기운을 날려 버린다.
침대에 앉아 스트레칭을 하면서 옆 침대를 바라보았다. 루슬란 오빠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얼굴을 반대편으로 하고 있어서 어떻게 자고 있는지 보이진 않지만 곤히 잠들어 있을 것이다.
하품을 하며 어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루슬란 오빠가 예약했던 레스토랑은 정말 훌륭했다.
듣기론 누구에게 부탁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골랐다고 하는데, 네바 강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아주 멋진 레스토랑이었다.
난 오빠에게 이런 센스가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식사도 훌륭했다. 난 바닷가재의 조리법이 그렇게 다양한 줄은 처음 알았다.
애석하게도 난 식도락에 취미가 없지만, 음식을 찾아다니는 것을 삶의 낙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이해가 갈 정도로 다채롭고 맛있는 식사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도 좋고 완벽한 하루의 마무리를 향해 나아가는 기분이었다.
문제는 호텔방으로 돌아와 루슬란 오빠와 놀다가 비치되어 있는 와인과 보드카를 발견하면서 벌어졌다.
난 루슬란 오빠에게 술을 먹이고자 하는 작은 미련을 못 버린 상태였고, 보드카를 한 병이라도 열기 위해 오빠와 설전을 벌였다.
루슬란 오빠는 성인이긴 하지만 음주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거절했지만, 난 이 비싼 호텔방에서 어메니티로 제공되는 술들을 안 마시고 그냥 간다는 것은 돈 낭비라는 주장을 억지로 밀어붙였다.
서민 그 자체인 내 주장에 오빠는 어처구니없어 했지만, 결국 백기를 들고 와인 한 병을 오픈했다.
그리고 한 번 고삐가 풀린 루슬란 오빠는 그야말로 보드카 못 마셔 죽은 귀신이 붙은 사람처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루슬란 오빠가 음주를 별로 즐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엄살이나 다름없었다. 어쨌든 간에 오빠도 러시아인인 것이다.
그렇게 몇 시였던가, 내가 오빠의 취중진담을 듣기도 전에 오빠는 내 분위기가 수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들어가서 자겠다며 바로 침실로 들어가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난 먼저 들어가 버린 오빠를 멀거니 보다가 빈 병들과 자리를 정리하고, 그 와중에도 꼼꼼하게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침대에 들어갔고, 눈을 뜬 것이 지금이었다.
“…….”
괜히 그랬나.
조금 후회가 된다.
일주일이나 넉넉하게 시간이 있으니 차차 해도 될 일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대체 어디로 가고, 첫날부터 알콜로 루슬란 오빠의 속내를 캐내려 한 거지?
간신히 조금 사이가 좋아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괜히 루슬란 오빠가 더더욱 경계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터덜터덜 거실로 나왔다. 어두운 실루엣만이 비치는 초호화 거실은 을씨년스러웠다.
“차가.”
차갑게 식은 쇼파에 멍하니 앉아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가, 숙취해소 방법 등을 포스팅한 블로그를 발견하고는 정독했다.
루슬란 오빠가 숙취에 시달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소파 등받이 너머로 부엌을 바라보았다. 각종 조리도구들은 부엌에 거의 다 준비되어 있었다.
당장 재료만 사 온다면 간단한 요리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았다.
얼핏 생각하기엔 나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지만, 사실 지금 쉽게 도전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일단 우리가 묵고 있는 이 호텔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최고라고 할 수 있는 호텔이었으므로 뷔페식 조식이 어지간한 레스토랑 저리가라 할 정도로 잘 나온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난 아직도 요리 같은 걸 할 줄 모른다.
저택에 상주하는 쉐프, 드미트리 같은 수많은 고용인들 덕분에 아직도 난 일방적으로 의식주를 제공받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 내가 요리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간단한 라면류라면 또 모르겠지만, 호화로운 호텔 조식을 제쳐 두고 라면을 끓여서 같이 아침을 먹자고 했다간 루슬란 오빠가 퉁퉁 불은 면발을 내 코에 집어넣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이건 장난이 아니라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였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또 언제 내가 요리를 해 보겠는가? 그것도 루슬란 오빠에게.
언제까지고 내가 요리를 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간 평생토록 내 손으로 무언가를 해서 루슬란 오빠에게 먹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루슬란 오빠는 그런 것을 바라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젠 그냥 내가 하고 싶어졌다.
혼자 만들어서 내 입에 넣을 것이라면 이렇게 무언가 요리를 할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남의 입에 넣어 줄 생각을 하니 어쩐지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을 들고 바로 인터넷에서 블로그들을 탐방하기 시작했다. 술을 먹고 난 다음 날 숙취에 좋은 아침 식사로는 무엇이 좋을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
평생 칼도 제대로 잡아 본 적 없지만 아마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난 요리를 끔찍하게 못하지만 그녀에겐 요리에 대한 재능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 * *
“……으.”
루슬란은 베개에 머리를 묻고 한동안 신음성을 흘렸다.
그는 술이 강한 편이었고 보드카는 숙취가 별로 없는 술이었지만 와인과 맥주도 함께 마셨던 것이 문제였다.
루슬란은 머리를 싸맸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도 안 좋은 것이 분명한 숙취 증상이었다.
오늘도 타티아나를 따라다녀야 할 텐데 이렇게 컨디션이 안 좋아서 어떻게 하나 생각하다가도 거의 억지로 술을 마셔 보라고 하던 타티아나를 떠올리면 열불이 났다.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토록 바라던 여행지에 와선 첫날부터 오빠에게 술을 강요하다니, 이게 정상적인 열다섯이 할 짓이란 말인가?
루슬란은 타티아나의 억지에 넘어간 자신도 문제이긴 하지만,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쓴소리를 조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작정하고 고개를 들어 옆에 있는 타티아나의 침대를 본 루슬란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뭐야?”
타티아나가 자고 있어야 할 침대는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마치 아무도 잔 적이 없었던 것처럼.
루슬란은 순간 섬뜩한 생각이 들어 벌떡 일어나선 번개처럼 침실 밖으로 나왔다.
“타티아나!”
자신이 취해서 침실로 들어가 잔 사이 그 병약한 애에게 큰 문제라도 생겼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루슬란은 그렇게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허겁지겁 거실로 향했다.
“일어나셨어요?”
엉뚱하게 부엌 쪽에서 타티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슬란이 황망하게 부엌 쪽으로 향하자, 벌써 한 상 가득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오믈렛과 토스트, 샐러드, 그리고 지금 막 타티아나가 무언가를 집어넣고 있는 냄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것은 콩소메 수프에 고기와 야채를 듬뿍 넣은 솔랸카임이 분명했다.
“……?”
루슬란이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엉거주춤 서 있자 타티아나가 그를 돌아보았다.
긴 머리를 뒤로 묶고 앞치마까지 한 모습이 이질감이 들면서도 본격적이었다.
타티아나가 손을 들며 말했다.
“앉아 주세요. 다 되면 깨워 드리려 했는데 조금 일찍 일어나셨네요.”
“……뭐야 이게?”
“아침 식사예요.”
그리고 타티아나는 조금 조심스럽게, 루슬란의 눈치를 살폈다.
“제가 처음으로 해 본 건데…… 괜찮으실까요?”
“…….”
루슬란은 할 말을 잊었다.
요리를 했다고? 저 타티아나가?
아직도 침대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루슬란은 뒷목을 툭툭 두드렸다.
모든 것이 이상했다. 타티아나가 직접 요리를 한다는 것도 이상할뿐더러…… 애초에 어떻게 요리를 할 줄 아는 거지?
눈을 가늘게 뜨고 부엌을 보니 그 옆에 태블릿 컴퓨터가 세워져 있었다.
요리에 관련된 정보들을 띄워 놓고 따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루슬란은 헛웃음을 흘렸다. 저런 방향으로는 또 잘 써먹는다니까.
그렇게 한참 동안 루슬란이 멍하니 타티아나 쪽을 보며 상황 파악을 하고 있는데, 타티아나는 약간 안색을 어둡게 하며 말했다.
“아니면…… 호텔 조식을 드셔도 괜찮아요. 10시까지는 제공한다고 하니…….”
“아니!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루슬란이 당황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렇게까지 준비해 놓고 호텔 조식을 운운하는 건 너무 비겁했다.
안 먹고 내려가 버리면 이후로 타티아나와 볼 생각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급히 토스트부터 하나 집어서 입에 넣었다.
버터에 정성스레 구운 토스트의 향이 입안에 가득 차며 허기를 끌어냈다.
한 입만 먹고 내려놓으려던 루슬란은 정신없이 토스트 하나를 다 먹었다.
그렇게 루슬란이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타티아나가 안도했다는 듯 어깨에 들어간 힘을 풀어냈다.
“솔랸카도 거의 다 되었어요. 기다려 주세요.”
“…….”
루슬란은 타티아나에게 물어볼 것이 굉장히 많았지만 한 가지도 묻지 못했다.
어지러운 머리로 생각을 정리하며 샐러드를 찍어 먹을 뿐이었다. 샐러드도 상큼하고 신선했다.
“타티아나. 자꾸 물어봐서 미안한데, 이 샐러드 재료는 어디서 난 거야?”
“잠시 나가서 사 왔어요.”
“……뭐?”
“아, 걱정 마세요. 깨어 계시던 경호원분에게 부탁해서 함께 나갔다 왔으니까요.”
혼자 나가지 않은 건 참 잘했는데, 그게 아니라.
“너 대체 몇 시에 일어난 거야?”
“5시쯤이요.”
루슬란은 들고 있던 포크를 툭 떨어뜨렸다.
루슬란은 타티아나가 평소 학교에 가기 전에 별관에 있는 자기 연습실에서 아침 연습을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항상 4~5시면 일어난다는 것까진 모르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거의 9시였다.
“일어나서 4시간 동안이나 이 아침식사를 만들었다고?”
“아뇨, 그렇진 않아요. 전 요리를 할 줄 모르니 공부도 조금 해야 했고, 시장이 열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고요.”
타티아나는 태연하게 말했지만 루슬란은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굳이 긴 시간 동안 타야 하는 열차를 고집했던 것과 어제 하루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함께 돌아다녔던 것으로 동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 만큼 알게 되었지만, 이렇게까지 열의를 다할 줄은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다.
죄악감이 밀물같이 들이닥쳐서 양심을 쓰라리게 두드렸다.
다섯 살이나 어린 동생이 이렇게 최선을 다할 때, 오빠인 자신은 대체 뭘 했단 말인가? 예전 일들을 떠올리며 저울질이나 하고 있었지?
루슬란은 가만히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일어나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타티아나는 이미 솔랸카의 마무리를 앞두고 거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루슬란이 지금 뭔가 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우스운 짓이었다.
루슬란은 자괴감과 죄책감으로 어쩔 줄 모르고 머뭇거리다가, 자신이 식사를 하지 않으면 타티아나가 오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르게 오믈렛을 잘라 입에 집어넣었다.
처음 만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맛있었다.
“…….”
그렇게 말없이 시간이 조금 흘렀다. 타티아나는 계속 태블릿 컴퓨터와 냄비 안을 살피며 요리에 집중했고, 루슬란은 그 옆모습을 보며 차마 뭐라고 말을 걸지 못했다.
여전히 루슬란은 타티아나에게 묻고 싶은 질문들과 혼란스러움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잠시 후, 타티아나가 완성된 솔랸카를 접시에 덜어 루슬란의 앞에 가져다주었다.
“드셔 보세요.”
“……그래.”
러시아의 대표적인 수프 요리 중 하나인 솔랸카는 고기와 야채도 많이 들어가 있고 강렬한 풍미를 가지고 있어서 숙취해소용으로 자주 메뉴에 올라가는 요리 중 하나였다.
이 메뉴 자체에서 타티아나의 배려가 느껴졌다.
루슬란은 솔랸카를 한 입 먹어 보았다. 짜고 신, 솔랸카 특유의 맛이 느껴졌다.
“…….”
고급 음식에 익숙해져 있는 루슬란의 입맛에 이 솔랸카는 조금 지나치게 담백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루슬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맛있네.”
“정말인가요? 다행이에요.”
타티아나가 그제야 제 몫의 오믈렛을 가르며 털어놓았다.
“처음이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잘 몰랐는데, 나와 있는 대로 하니까 어떻게든 만들 수 있었어요. 그…… 물론 이 호텔 조식에 비하면 턱없이 맛없겠지만…….”
“무슨 말…….”
“오늘 아침만큼은 어쩐지 제가 직접 해 드리고 싶었어요.”
“…….”
“생각보다 재미있네요. 요리도.”
루슬란은 호텔 조식이 다 무어냐고, 네가 만든 이 솔랸카와 오믈렛이 수천 배는 더 맛있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말하지 못했다.
이전까지 타티아나와 있었던 일 따위 때문이 아니었다. 평범하게 쑥스러울 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친한 남매일지라도 이렇게 직접 만든 아침 식사를 칭찬하기는 쉽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루슬란이 잘 먹어 주기만 해도 기분 좋다는 듯 흐뭇하게 자신 역시 식사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