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지 이틀째.
루슬란 오빠는 날 새로이 봐 주려는 듯한 노력을 하고 있었고, 그것은 나에게도 충분히 전해졌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난 꽤나 충동적으로 도전한 요리에 성공해서 루슬란 오빠에게 아침 식사를 만들어 줄 수 있었고, 루슬란 오빠는 이제 거의 빚이라도 진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난 그런 오빠의 태도를 즐기고 부려 먹을 정도로 약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딱하고 미안했다.
그 아침 식사에 약간 계산적인 생각이 아예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루슬란 오빠가 이렇게까지 무겁게 받아들이니 되레 내가 엄청나게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난 이렇게까지 루슬란 오빠에게 심리적 부채감을 떠안기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냥 평범하게 먹어 주고 조금 편하게 대해 줬으면 했을 뿐이다.
뭘 이렇게 유난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만큼 과거 그녀가 보인 패악질과 지금 내가 하는 행동에 차이가 심하단 뜻이겠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시 루슬란 오빠와 적대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으니, 앞으로도 잘 해나갈 생각이다.
난 오늘 스케쥴을 보며 루슬란 오빠에게 말했다.
“오늘은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가 보면 어떨까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래. 나쁘지 않지.”
”그리고 오후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가서 레슨을 받아야 하니 잠시 떨어져야겠네요. 그리고 나중에 저녁에 다시 뵈면…….”
“아냐. 나도 따라갈게.”
“……예?”
루슬란 오빠는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나 혼자선 할 것도 없어. 네가 레슨 받고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
“그…… 그러실 필요 없는데요.”
“왜 없어?”
그러더니 대뜸 묻는다.
“싫어?”
“……싫은 건 아니지만요.”
“그럼 됐네.”
오빠는 결정되었다는 투로 말을 맺었고, 난 좋아해야 할지 부담스러워해야 할지 조금 헷갈리기 시작했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니콜라이 안드레예비치 림스키-코르사코프 국립 음악원.
정식명칭은 이렇게나 긴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은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안톤 루빈스타인에 의해 1862년 설립된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 된 공립 음악원이었다.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에 의해 1866년 만들어진 모스크바 음악원보다 조금 더 오래되었다.
차이코프스키,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같은 굉장한 음악가들이 이 학교를 졸업했고,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그렇게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대해 이러저런 정보를 찾아보기도 잠시, 마린스키 극장 바로 맞은편에 있는 거대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우리는 도착할 수 있었다.
“…….”
차에서 내리자 모스크바에 있는 음악원보다 훨씬 크고 웅장한 건물이 날 맞이했다.
이전까지 봐 왔던 궁전들과 비슷한 바로크 양식의 외견에, 멀리서 봐도 보일 정도로 거대한 홀까지. 얼핏 보아도 굉장히 훌륭했다.
난 이 음악원에 있는 피아노 교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긴장된다.
약간 얼어 있자 루슬란 오빠가 내 어깨를 툭 쳤다.
“같이 가 줄게.”
“……예.”
난 스마트폰을 열어 주소록을 확인했다. 소피야 교수님이라는 이름에 연락처가 저장되어 있었다.
미하일 선생님의 소개로 주고받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교수님의 연락처였다.
어제 전화 통화를 나누기도 했었고, 오늘은 메시지로 몇 시까지 어느 레슨실로 오면 만날 수 있다고 알려 주시기까지 했다.
친절한 분이실 것 같으니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으리라.
입구에 있는 경비에게 교수님의 성함과 용무를 말하고, 음악원 안으로 들어왔다. 복도에 들어서니 동서남북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크고 넓었다.
나와 루슬란 오빠는 들어와서도 길을 못 찾아서 조금 헤매기까지 했다.
방학이라 그런지 지나다니는 학생도 별로 없어서 루슬란 오빠는 처음 학생을 발견하자마자 일단 붙잡았다.
“실례합니다.”
“예?”
“외부인이라 그러는데, 길 좀 여쭐 수 있겠습니까?”
“아, 예. 어디로 가세요?”
루슬란 오빠는 내게 스마트폰을 받아 메시지에 적힌 레슨실을 물었다.
평소 조금 푼수 같은 느낌은 온데간데없이, 정중하고 딱 부러지는 모습이 꽤나 절도 있었다.
루슬란 오빠에게 붙잡힌 학생이 조금 얼굴을 붉히며 복도 한쪽을 가리켰다.
“그…… 저쪽으로 가시면 돼요. 얼마 안 가 보일 거예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가르쳐 준 방향대로 가다가, 문득 루슬란 오빠에게 물었다.
“오빠, 평소에도 그런 말투 쓰시나요?”
“무슨 소리야?”
“그…… 조금 놀라서요.”
루슬란 오빠는 내 말을 곱씹더니 갑자기 인상을 썼다.
“너 그게 무슨 의미야? 내가 평소엔 안 그렇다고?”
“……사실이 그렇잖아요?”
“뭐가 사실이야?”
“아뇨, 어쨌든 다행이에요. 안심이 되네요.”
“뭐가 다행이고 안심이 된다는 건데!?”
이렇게 여행을 오기 전까지 루슬란 오빠가 내게 보였던 태도를 생각하면……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샐까 봐 걱정했다고 했다간 루슬란 오빠가 화가 나서 돌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난 입을 꾹 닫았지만 미소가 새어 나오는 건 막을 수 없었는지, 그걸 본 오빠가 자꾸 왜 웃냐고 캐물어서 조금 난처했다.
다행히 소피야 교수님의 레슨실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고 난 루슬란 오빠의 추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너 나중에 설명해.”
나중에는 무슨 나중이에요. 까먹겠죠.
난 싱긋 웃으며 레슨실 문을 두드렸다. 조금 긴장했던 것들은 루슬란 오빠와 대화를 하면서 모두 사라져 있었다.
“미하일 표도로비치 볼콘스키 선생님의 소개를 받고 온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타티아나? 아, 들어오세요.”
허락을 받고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한 여성분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우릴 맞이했다.
“어서 와요.”
미하일 선생님과 비슷한 연배로 보인다.
큰 키에 금발을 단발로 가지런히 정돈하고 테가 얇은 안경을 쓴, 학구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분이셨다.
음악원의 교수님이시니 분명 피아니스트였을 테지만 어쩐지 첫인상은 생물학을 전공하시는 교수님 같다는 느낌이 물씬 들었다.
눈빛 자체는 부드러웠지만 현미경으로 세포 단위까지 살피는 듯한 느낌, 대체로 어느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신 분들은 저런 눈빛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았다.
교수님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소피야 마슈마이어예요. 반갑군요.”
그 손을 맞잡자마자 난 첫인상을 다시 고쳐먹었다. 이건 피아니스트의 손이었다. 그것도 나와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오랜 시간을 건반을 만져 온.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교수님.”
“그래요. 음, 저쪽 분은?”
“제 오빠 루슬란이에요.”
조금 차분한 분위기의 소피야 교수님이 작게 탄성을 냈다.
“동생의 레슨과 콩쿠르에 따라오신 건가요? 요새 찾아보기 힘든 오빠네요.”
“그……렇긴 하지만 관광도 겸사겸사…….”
루슬란 오빠는 아까 보여 준 절도 있는 모습은 어디 갔는지 목을 긁적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소피야 교수님은 그런 루슬란 오빠를 보며 말했다.
“좋은 오빠로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맞장구를 치자 루슬란 오빠는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듯한 표정을 했다.
조금 더 놀려 주고 싶었지만 여기까지 와 준 것만 해도 고마웠다.
“오빠, 앞에서 기다려 주실 건가요?”
“그러려고.”
“너무 오래 안 기다려 주셔도 되어요.”
“그건 또 뭔…… 어쨌든.”
루슬란 오빠가 자세를 바로하고 소피야 교수님에게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교수님.”
“알겠어요. 걱정 말아요, 오빠분.”
“……간다, 타티아나.”
그 말을 끝으로 루슬란 오빠는 레슨실 밖으로 나갔다.
“일단, 앉아요.”
소피야 교수님이 의자를 가리켰다. 당장 피아노를 치기보단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으신 것 같았다.
처음으로 러시아 음악원의 교수님과 마주한 자리이니, 나 역시 교수님과 대화를 조금 나누어 보고 싶었다.
중앙음악학교에 다니면서 많은 선생님들에게 지도를 받았고 그 지도 수준도 내가 감당하고 소화하기엔 넘친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음악원의 교수님들에겐 막연한 동경이나 선망 같은 것도 약간 있었다.
어떤 말을 하실까 얌전히 앉아서 기라디고 있을 때였다.
“놀라지 않네요?”
“……예?”
소피야 교수님은 대뜸 그런 말을 했다. 난 무슨 말을 묻는 건지 몰라 되물었다.
물론 놀라기야 놀랐다. 모스크바 음악원보다 더 거대한 이 음악원의 규모나, 그 외 여러 가지에 소소한 놀라움을 느끼긴 했다. 하지만 그런 걸 물으시는 것 같진 않아 보였다.
영문을 몰라 하는 날 보며 소피야 교수님이 자신의 가슴께를 가리켰다.
“제 이름을 듣고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나요?”
그제야 난 교수님이 뭘 묻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교수님의 풀 네임은 소피야 마슈마이어. 듣자마자 바로 국적을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이었다.
“교수님이 독일인이신 것 말씀이신가요?”
내 말에 소피야 교수님은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음, 많은 학생들을 만나 봤지만 타티아나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있는 학생은 처음이에요.”
뭐가 놀랄 일이라는 건지 잘 모르겠다.
다른 학생들은 놀랐는지도 모르겠지만 난 별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나부터가 이방인이었기에 그런 것도 있었으나, 소피야 교수님은 국적이 어디든지 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교수로 재직 중이신 분이셨다.
그만큼 실력을 인정받고 계신 분이라면 다른 무엇이 중요할까? 러시아 음악원에선 러시아인만을 뽑는 것도 아닌데?
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예카테리나 대제도 독일인이었잖아요? 교수님.”
“…….”
내 말에 교수님은 한 방 맞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예카테리나 2세. 18세기 후반부터 러시아를 통치한 여제였다.
러시아 제국을 발전시키고 학문과 예술에 이바지한 바를 인정받아 독일 출신의 황후였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사에선 그녀를 예카테리나 대제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자랑이기도 한 에르미타주 박물관도 예카테리나 대제가 유럽에서 예술품 226점을 겨울궁전으로 들여온 것을 계기로 만들어진 것이다.
정치경제적으론 어땠는지 몰라도 적어도 예카테리나 대제가 러시아의 예술사에 엄청나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엔 이견이 없었다.
난 문득 생각난 것을 마저 덧붙였다.
“예카테리나 대제의 본명도 소피야라고 알고 있어요, 교수님. 교수님의 성함과 같네요.”
“……정말 처음이군요. 이렇게 말하는 학생은.”
객관적으로 말해 소피야 교수님은 조금 특이하긴 했다.
클래식 음악으로 러시아와 쌍벽을 이루는 독일에도 베를린, 우데카, 한스, 뮌헨 등등 수많은 유수의 음악대학들이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교수를 하실 정도면 그런 자국의 음악원에서 교수를 하셨어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 이유가 있다 한들 무언가 내가 알 방법은 없었고, 알려고 하더라도 실례가 아닐까 싶다.
소피야 교수님은 내 맞은편 의자에 앉더니 물끄러미 날 바라보았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면밀하게 날 관찰하는 것처럼 보였다.
“교수님?”
“아, 미안해요.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
소피야 교수님은 허리를 세우고,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미하일이 그렇게나 부탁하기에 어떤 학생인가 궁금했는데…… 꽤 강렬하군요. 타티아나. 솔직히 말해 보세요. 제가 독일인이 아니라 중국인이었어도 상관없어하셨을 테지요?”
“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예, 그래요.”
소피야 교수님은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눈을 빛내며 말했다.
“타티아나. 당신에 대한 첫인상은 아주 마음에 들어요. 절 예카테리나 대제에 빗대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음악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고 싶군요.”
“……감사합니다.”
막상 나는 구세프 선생님에게 허구한 날 기본도 안 된 주제에 음악을 도구로 사용할 줄밖에 모르는 파렴치한으로 매도당하는 처지였지만, 일단 칭찬을 해 주시는 데에야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처음 보는 교수님에게 좋은 첫인상을 남겼다는 사실도 고무적인 일이었다.
조금 긴장이 풀어진 사이 소피야 교수님이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평가하든 간에 타티아나에겐 그리 큰 의미가 없겠지요? 타티아나가 중요시해야 할 것은 일주일 후에 열릴 청소년 콩쿠르일 테니 말이에요.”
“…….”
말없이 어색하게 웃자 교수님이 말했다.
“중요한 콩쿠르를 앞두고 사사하던 선생이 왜 이곳까지 타티아나를 보냈는지…… 유례없이 참 특이한 상황이에요. 하지만 하나만은 약속드릴게요.”
소피야 교수님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가 맡은 바 최선을 다해 드리죠. 타티아나도 최선을 다해 주시겠어요?”
“예, 물론이에요.”
“씩씩해서 좋군요. 좋아요.”
깔끔하게 대답하자 소피야 교수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박수를 짝 쳤다.
“……!”
그 마른 몸에서 나온 소리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쩌렁쩌렁한 소리가 레슨실을 가득 메웠다. 귀가 찡할 정도였다.
깜짝 놀라 교수님을 올려다보자 이전까지의 조금 풀어져 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소피야 교수님이 뒤편에 놓인 피아노를 가리켰다.
“피아노 앞에 앉으세요.”
차갑진 않지만, 결코 부드럽지도 않은 엄격한 목소리가 본격적인 레슨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