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5화 (95/1,277)

##  95화

루슬란 오빠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한 후, 나는 빅토르에게 부탁해서 근처 연습실을 빌렸다.

다행히 유명 음악원 부근에 형성되는 가게나 서비스들이 으레 그렇듯, 저녁 늦게까지도 운영하는 기악 연습실들은 굉장히 많았다.

빅토르는 굉장히 유능한 사람이었으므로 그중 가깝고 괜찮은 곳을 알아서 예약해 주었을 것이다.

“고마워요, 빅토르.”

“별말씀을.”

빅토르에게 감사를 표하자 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사실 그는 내 비서 같은 사람이 아니라 전담 경호원일 뿐인데, 난 그를 너무 의지하고 부려 먹는 것 같아서 가끔은 조금 미안해지기까지 한다.

업무 외 수당이라도 따로 줘야 하는 게 아닌지, 아버지에게 한번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차량은 금방 연습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여기가 연습실이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박물관이 아니고요?”

빅토르가 안내한 곳은 또 다른 박물관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휘황찬란한 위용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여긴 뭐 죄다 이런 식이야……?

하지만 지금 우리가 머무는 호텔도 거의 19세기의 궁전같이 생겼으니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연습실이 연습실답지 않고 화려하게 꾸며졌다고 해서 그것이 딱히 납득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옆을 보니 루슬란 오빠가 당연하다는 듯 차에서 내려 내 옆으로 다가왔다.

“오빠도 같이 가시려고요?”

“어.”

“저 이번엔 정말 1시간 넘게 걸릴 것 같아요.”

“상관없어. 옆에서 책이라도 읽고 있지 뭐.”

“……알았어요.”

며칠을 갈진 모르겠지만 일단 당장 오늘만큼은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따라다닐 모양이었다. 내일은 루슬란 오빠가 하자는 대로 해야 할 것 같다.

화려한 로비 가운데에 있는 카운터에 가서 이름을 말하니 예약된 연습실 번호를 알려 주며 열쇠를 건네주었다.

방 열쇠마저도 고풍스러운 문양이 각인되어 있어서 잃어버리기라도 했다간 큰일 날 것 같았다.

굉장히 미심쩍은 느낌을 받으며 연습실 문을 열었을 때 난 순간 모든 것을 파악했다.

“타티아나. 이거 일반 연습실은 아니지?”

루슬란 오빠가 조금 얼떨떨한 듯 말했고, 난 그 의견에 동의했다.

샹들리에가 달린 작은 룸엔 그야말로 럭셔리한 소파와 테이블이 있었고, 벽에는 사람과 풍경 등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심지어 가짜로 보이긴 하지만 벽난로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 그랜드 피아노가 위치해 있었다.

그 옆에 바이올린과 첼로 같은 다른 악기들도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만 충족된다면 실내악도 가능할 것 같았다.

17세기에서 19세기 중엽까지, 프랑스의 옛 귀족들은 자기 저택의 객실을 다른 이들에게 공개하고, 저명한 예술가들을 초대함으로써 예술에 관한 자유로운 토론의 자리 등을 마련하고 친목을 다지곤 했다.

누가 보아도 이 방은 상류 귀족들의 사교 교류 등을 위한 프랑스 살롱 문화 양식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곳이었다.

연습실이라기보단 작은 무대에 가까웠다.

“음식 주문도 가능한가 본데, 타티아나.”

루슬란 오빠는 그사이 테이블 위에 있던 메뉴판을 들고 있었다. 오빠도 이런 곳은 처음인 모양이었다.

다른 연습실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방 안을 둘러보는 오빠를 보니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단 생각이 들었다.

난 모자와 겉옷을 벗어 걸고 나서 조용히 피아노 앞에 가서 앉았다.

“…….”

피아노를 만져 보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관리를 잘 했는지 소리도 나쁘지 않았고 조율도 잘 되어 있었다. 바로 사용해도 되는 피아노였다.

“후…….”

난 아무 생각 없이 내가 하고 싶은 연습이나 하려던 생각을 일단 뒤로 미뤄 두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았다.

작은 연주회를 한다는 느낌으로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더군다나 듣는 사람이 루슬란 오빠이지 않은가? 되도록 좋은 곡들을 들려주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혹시 신청곡 있나요, 오빠?”

내 질문에 루슬란 오빠는 들고 있던 메뉴판을 내려놓고 말했다.

“신청곡? 무슨 신청곡?”

“오빠가 듣고 싶으신 곡이 있다면 연주해 드릴게요.”

“……뭐?”

루슬란 오빠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손사래를 쳤다.

“네 연습을 하러 온 곳이잖아? 나한테 신청곡을 왜 받아?”

“오늘은 연습 안 하려고 해요. 대신 연주회를 하기로 했어요.”

“갑자기 무슨 연주회를…….”

“그렇게 딱딱하게 말씀 마시고요. 저도 분위기 파악 정도는 할 줄 알아요.”

아무리 내 개인 연습을 위한 시간이라지만 이런 분위기를 지닌 장소에서 실험적이고 단순반복적인 터치 연습이나 기본 테크닉 훈련만을 충실하게 할 정도로 눈치 없진 않았다.

가만히 날 보던 루슬란 오빠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인진 알겠는데, 그럴 필요 없어. 네가 집중을 못하겠다면 그냥 다른 연습실을 구하자, 타티아나.”

오빠는 내 제안을 거부했지만 난 이미 마음을 굳힌 지 오래였다.

“아뇨, 제가 하고 싶어졌어요. 오빠는 절 위해 이곳까지 따라와 주셨죠. 이 정도는 보답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건 이미 충분히…… 아니야, 알겠어.”

루슬란 오빠는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쇼팽의 녹턴이나 왈츠는 어때?”

쇼팽은 프랑스에 있을 때 살롱에서 연주회를 자주 가졌기 때문에 이를 위한 음악들을 많이 작곡했는데, 녹턴이나 왈츠가 대표적이었다.

교양으로나마 클래식에 대해 알고 있는 루슬란 오빠는 그렇게 살롱 음악을 주문했다.

“좋죠. 녹턴보다는 왈츠가 듣기 편하시겠죠? 비교적 지루하지 않으니 말이죠.”

“네 마음대로 해.”

마음대로 해라. 가장 자유롭고 편한 주문이었지만 지금 내겐 그 무엇보다 까다로운 주문이기도 했다.

잠시 멈칫했다. 난 쇼팽의 왈츠 열여덟 곡을 전부 연주할 줄 알았다. 하지만 어떤 곡을 연주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장 좋아하시는 숫자 하나만 말씀해 주세요.”

“……숫자?”

“예.”

“2가 좋은데.”

그래서 난 쇼팽 왈츠 2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지시는 비바체. 생기 있고 빠르게 통통 튀는 듯한 음색으로 화려한 왈츠라는 부제에 걸맞은 소리에 집중했다.

* * *

루슬란은 읽으려고 가지고 온 책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음악에 집중했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본래 춤곡인 왈츠를 독립적인 기악곡으로 탈바꿈시켜 일종의 센세이션까지 몰고 온 쇼팽의 왈츠는 타티아나의 손에서 연주되어 19세기의 양식을 모방한 이 방을 정말 그 시대로 되돌리려는 듯했다.

타티아나는 마치 피아노를 가지고 놀기라도 하는 듯 자유자재로 왈츠를 연주하고 있었다.

편안한 왈츠의 박자에 아기자기하고 리드미컬한 선율이 마치 그 형태를 지니고 주위를 맴도는 듯 서로 부딪히지 않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었다.

루슬란은 이렇게 생기 넘치는 왈츠는 처음 들어 보았다.

루슬란은 저번 타티아나가 생일날 연주했던 것을 본 이후로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정말 장난 아니군.”

루슬란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타티아나는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춤을 추듯 좌우로 어깨를 자연스레 흔들며 피아노를 치고 있었는데, 정말 소리가 살아 움직이며 피아노가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클래식에 대해 잘 모르지만 적어도 열다섯 살의 실력치고는 그 수준이 어마어마하게 높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

타티아나는 기억을 잃었지만 피아노에 대한 기억만 남아서 그간 맹목적으로 피아노에만 매달렸음이 분명했다.

거기에 운 좋게도 잠들어 있던 재능까지 발현되어서…… 지금의 타티아나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이러한 모습과 실력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루슬란은 타티아나의 왈츠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동생이 아무것도 모른 채 피아노에만 집중해서 피아니스트가 되어 연주회를 열고, 자신은 가장 앞자리에서 그 연주를 듣는 광경이 떠올랐다.

그때쯤 타티아나와의 사이는 굉장히 친밀해져 있을 것이다. 한 번 깨어졌던 것을 다시 붙인 것이기에 일반적인 남매들보다 더욱더.

루슬란은 꽃을 들고 연주자 대기실 앞에서 서성이다가, 타티아나가 나오면 건네줄 수도 있었다.

타티아나는 그것을 거부하거나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분명 웃으며 받아 주겠지.

“…….”

점점 더, 생각을 하면 할수록, 충분히 현실성이 있다는 판단이 들수록, 루슬란은 유리가 타티아나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 유혹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타티아나가 무엇을 잃었는지 간에, 루슬란은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오빠?”

“…….”

연주는 끝나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루슬란을 타티아나가 조용히 불렀다. 정말 잠든 것이라면 깨우지 않으려는 듯했다.

루슬란은 자고 있지 않았고, 눈을 뜨고 박수를 쳤다.

“브라바.”

루슬란이 이렇게 박수를 칠 줄은 몰랐는지 타티아나는 놀란 눈을 뜨더니 옅게 웃었다.

“감사해요.”

“정말 잘 치네.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에 어느 정도 수준의 연주자들이 모이는진 잘 모르겠지만, 애도를 표해야 할 것 같다.”

“아하하, 그렇게까지요?”

타티아나는 정말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그 이면엔 조금 어두운 기색이 있었지만 거의 아부로까지 들리는 루슬란의 칭찬엔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짧은 칭찬과 답사를 주고받다가 루슬란이 말했다.

“정말 고마워, 잘 들었고…… 이젠 네 연습을 해도 좋아. 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오늘 연습은 하지 않을 거예요.”

“난 네가 연습하는 것만 들어도 충분히 그걸 음악적이라고 느낄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야. 그냥 네가 연습해야 하는 곡을 쳐.”

“…….”

잠시 생각하던 타티아나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러면 콩쿠르에 올릴 곡을 연습할게요. 이게 오빠를 위해 준비한 곡은 아니지만 되도록 집중해서 할 테니…….”

“알았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연습해.”

“……알겠어요.”

타티아나는 결정을 내리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는 타입이었지만 막상 결정을 내리고 나면 어물거리는 일 없이 단호하게 거기에 달려들어 집중하곤 했다.

다시 건반이 눌리고, 피아노가 노래하기 시작했다.

루슬란은 타티아나가 새로 연주하기 시작한 곡이 어떤 곡인지 잘 모르지만 방금 연주했던 쇼팽의 왈츠보다 더 어려운 곡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둡고 음울한 음색이 그림자처럼 피아노에서 솟아나와 타티아나를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 어른거렸다.

왈츠를 치면서 보여 주었던 그 활기차고 밝은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음악으로 펼쳐지는 화성의 마술이란 사람의 감정을 즐겁게 했다가, 순식간에 우울하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다.

루슬란은 타티아나가 펼치는 화성에 자칫하면 통째로 휩쓸려 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루슬란은 거기에 다시 빠져들면 타티아나가 집중을 잃고 연습을 망치게 될까 싶어 억지로 책을 펴 들었다. 당연히 글자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타티아나가 피아노로 만들어 내는 소리에 전신의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로 루슬란은 애써 태연한 척 페이지를 넘겼다.

한 글자도 읽지 못했지만 기계적으로라도 넘기지 않으면 어색하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또 다른 연주를 감상하던 루슬란은 타티아나가 연주를 잠시 멈추자마자 저도 모르게 불쑥 말했다.

“타티아나.”

“……예?”

손을 멈추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타티아나가 고개를 들었다.

루슬란이 말했다.

“뭐 먹지 않을래?”

“?”

타티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희 저녁 식사 한 지 얼마 안 되었잖아요?”

“그래도, 뭔가 주문할 수 있는데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는 것도 조금 그렇잖아? 단 것 먹고 싶지 않아?”

루슬란은 타티아나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짧은 레슨을 받고 나오자마자 케이크를 사 달라고 졸랐던 것을 떠올렸다.

저녁은 잘 먹었지만 아마 지금 동생에겐 당분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타티아나는 마다하지 않았다.

“좋아요. 바로 가능한가요?”

“이 전화기를 쓰면 될 것 같은데.”

루슬란이 테이블 위에 있는 전화기를 들었고, 곧 웨이터가 테이블로 왔다.

루슬란은 동생이 카페인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좋아하는 과자를 몇 가지 물어서 주문하고 음료도 함께 시켰다.

웨이터가 주문을 받아 나가자 타티아나가 히죽 웃었다.

“오빠도 케이크에 눈을 뜨신 것 같아요.”

“……뭐? 아닌데?”

“괜찮아요. 저도 사실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다니면서 어깨너머로나마 배운 것들이…….”

그리고 갑자기 타티아나는 알 수 없는 프랑스어를 막 섞어서 이러저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루슬란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이전에도 타티아나는 과자라면 사족을 못 쓰긴 했었다.

그 어떤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과자만 입에 들어가면 일단 조용해지곤 했다.

지금도 케이크를 좋아하는 것 같고, 역시 기억을 잃었어도 입맛은 그대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피아노 의자에 앉은 채 이야기하는 타티아나와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서 루슬란이 대화를 주고받을 때였다.

“실례합니다.”

주문을 받아 나갔던 웨이터가 핑거푸트로 가득 채운 3단 트레이와 케이크가 올려진 접시를 가지고 들어왔다.

“맛있게 드십시오.”

타티아나는 눈을 빛내며 테이블로 오더니, 핑거푸드가 올려진 트레이에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가볍게 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들이지만 다시 피아노를 만져야 하니 쉽게 만질 수 없었던 것이다.

냅킨이 있긴 하지만 타티아나는 음식을 집어 먹은 손을 대충 냅킨으로 닦고 건반을 만지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편하게 손으로 집어먹고 잠시 나가서 손을 씻고 오는 것과 거기에 걸리는 시간 등을 생각해 본 타티아나는 각오가 섰는지 조심스레 루슬란을 불렀다.

“오빠.”

“어.”

“저기…… 카나페가 먹고 싶어요.”

“먹어.”

루슬란은 지금 나온 과자들을 타티아나가 전부 먹는다 해도 상관없었기 때문에 대충 대답했지만 타티아나는 어쩐지 샐쭉하게 다시 말했다.

“집어 주시면 안 될까요?”

“?”

직접 집어서 입에 넣어 주기라도 하란 말인가? 요 며칠 사이 확실히 친밀해졌고, 뭐라도 더 해 주고 싶은 여동생이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것이 있었다.

“넌 손 없어?”

“예, 없어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이게?

루슬란이 인상을 썼다.

“아까까지 피아노는 발로 쳤어?”

“그건 피아노 치는 손이고요, 이 핑거푸드를 먹을 손이 없어요, 지금.”

“……말을 왜 그렇게 어렵게 하는 거야?”

그제야 타티아나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파악한 루슬란이 혀를 찼다. 건반을 만질 손을 더럽히기 싫다는 뜻이었다.

“하…….”

그냥 직접 집어 먹고 손 씻고 오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아침에 빚진 것도 있으니 강력하게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루슬란은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준다고 생각하며 캐비어가 올라간 카나페를 하나 집었다.

타티아나는 뒷짐을 진 채 먹이를 받아먹는 새처럼 자동적으로 입을 벌렸고, 루슬란은 행여나 떨어뜨리거나 잘못할까 긴장하며 타티아나의 입에 카나페를 넣어 주었다.

입에 든 것을 음미하던 타티아나가 말했다.

“음, 역시 맛있네요. 주문하길 잘했어요.”

“……그냥 대충 집어 먹고 손 씻고 오지 않을래?”

방금 한 행위가 급격하게 부끄러워진 루슬란이 입가를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그냥 한참이나 어린 동생의 어리광을 들어준다는 심정으로 먹여 준 것인데 막상 하고 나니 엄청나게 창피했다.

하지만 그런 루슬란의 반응을 보며 타티아나는 더욱 짓궂게 웃었다.

“알았어요. 그렇다면 오빠도 제가 하나 먹여 드릴…….”

“됐어! 저리 안 가!”

루슬란은 기겁해서 기성을 질렀고 타티아나는 크게 웃었다.

기분 좋게 웃는 동생을 보며 루슬란은 이를 갈았다. 이게 아주 오빠를 가지고 놀아?

얼마 전부터 어렴풋하게 느끼던 점이지만, 역시 타티아나의 기억이 날아가면서 남은 것은 피아노에 대한 것과 입맛뿐이 아니었다.

폭력적으로 변질되기 전의 장난기 많고 활발한, 타고난 성정이란 쉽게 어디론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