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6화 (96/1,277)

##  96화

나는 사흘간 루슬란 오빠와 함께 낮에는 관광을 하고 저녁엔 연습실을 빌려 피아노 연습을 했다.

애초에 느긋하게 쉬려고 여행을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정은 꽤 빡빡했다. 난 바쁘게 시간을 보내야 했다.

호텔로 돌아온 나는 그대로 소파로 직행했다.

폭신한 소파에 파묻히듯 축 늘어졌다. 며칠간 누적된 피로가 등허리를 허물어뜨렸다.

머리가 뒤쪽 어딘가의 아득한 곳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든다.

“…….”

잘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미하일 선생님이 이 도시에서 대체 뭘 느껴 보라고 한 것인지 희미하게 피부로 와닿는 바가 없진 않았다.

눈만 돌리면 문화와 예술이 즐비한 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얻을 수 있는 감동은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콩쿠르 연습에 온전히 시간을 쏟는 대신 여행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진 잘 모르겠다.

콩쿠르 날짜는 나흘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난 조금 초조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소피야 교수님을 찾아가서 레슨을 부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교수님은 이미 여러 색이 섞여 있는 음악을 구사하는 내게 또 다른 색을 칠하고 싶지 않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서로 다른 색은 섞는 조합에 따라 다양하고 예쁜 색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많은 색을 섞는다면 점차 어두워지다가, 결국 검은 색이 되고 만다.

교수님은 그 부분을 경계하시는 것 같았다.

머리가 아파 온다.

난 무기력하게 소파에 파묻혀선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재생시켰다.

그때였다.

“꺄!”

난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목을 뒤틀었다.

거의 소파에서 튕겨져 나갈 뻔했다가 발작적으로 고개를 돌려 뒤쪽을 보자 음료수 병을 쥐고 있는 루슬란 오빠가 있었다.

“와, 내가 더 놀랐네. 차가웠어?”

“오빠!”

비난조로 소리를 치자 루슬란 오빠가 미안하다는 듯 병을 흔들었다.

“네가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지.”

“심장 멎는 줄 알았다고요!”

“안 멎어. 안 멎어. 그건 그렇고, 마실래?”

“…….”

내가 노려보거나 말거나 루슬란 오빠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오빠는 요 며칠 사이 이렇게 사람이 변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날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 있었다.

“주세요.”

손을 뻗자 오빠는 뚜껑을 딴 다음 내게 내밀었다.

조금 갈증이 난 목을 달래고 있자 루슬란 오빠가 내 옆에 앉았다. 그러곤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겨누었다가, 도로 내려놓고 내게 물었다.

“뭐 듣고 있어?”

난 귀에 꽂았던 이어폰 한쪽을 빼며 말했다.

“바흐의 푸가의 기법이에요.”

“바흐?”

“예.”

혹시 루슬란 오빠가 요 며칠 날 따라다니면서 클래식에 관심이 생겼나 싶어, 난 이어폰 한쪽을 내밀었다.

“들어 보시겠어요?”

“음……. 들어 보지 뭐.”

그렇게 우리 남매는 나란히 소파에 앉아서 이어폰을 한쪽씩 나누어 바흐의 음악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복잡하고 난해한 선율이 몇 개나 겹쳐서 들려온다.

고전 대위법의 결정체라고도 할 수 있는 푸가는 나처럼 대위법과 음악이론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에겐 환상적인 마술처럼 들린다.

“…….”

하지만 옆을 살짝 돌아보니 루슬란 오빠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음악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타티아나.”

“예?”

루슬란 오빠가 날 불렀다.

“이 곡 지금 절반쯤 온 건가?”

그 와중에도 루슬란 오빠는 도저히 지루해서 못 들어 주겠는데 도대체 언제 끝나냐고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난 나도 모르게 웃어 버릴 뻔했다.

애써 웃음을 참고 담담히 말했다.

“아뇨. 이제 시작했어요.”

“총 연주 시간이 얼마나 되는데?”

“1시간 30분가량 되어요.”

루슬란 오빠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든다.

그 얼굴을 충분히 감상하다가, 난 오빠의 귀에서 이어폰을 빼냈다.

“……?”

그러곤 의아해하는 루슬란 오빠에게 말했다.

“우리 그만 듣고 텔레비전 봐요. 이 연주는 마음에 별로 안 드네요.”

내가 마음대로 혹평하기엔 너무나 훌륭한 연주였지만 루슬란 오빠가 억지로 지루함을 참아 주는 건 이정도로 충분했다.

난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몇 번 돌리고는 오빠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타티아나.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시치미를 뚝 떼고 다리를 건들거리자 오빠가 멀거니 날 보더니 갑자기 손을 훅 뻗어 와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아! 머리! 하지 마세요!”

“뭐 어때. 나갈 일도 없는데.”

“그래도 하지 마세요. 아, 정말!”

난 루슬란 오빠의 팔을 붙잡고 반항했지만 우악스러운 손길을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오빠와 소파 위에서 투닥거리다 보니 점점 힘이 빠졌다. 가뜩이나 피곤한데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간신히 멀리 피신해서 엉망이 된 머리를 쓸어내리지도 못하고 헥헥거리고 있자 루슬란 오빠가 키득였다.

“풉, 보기 좋네.”

“……짜증나는데요.”

“그으래?”

다시 집요한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난 소파 옆으로 바짝 붙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뇨, 아니에요! 잘못했어요!”

“푸하하하하.”

내 꼬락서니가 그리도 우스운지 루슬란 오빠가 박장대소를 했다. 뭐가 웃기냐고 쏘아보아도 소용없었다.

무슨 말을 하든 지금은 오빠의 웃음에 장작을 집어넣는 일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무기라도 찾아 볼까, 하고 조금 위험한 생각을 하는 중인데 오빠가 내 이름을 불렀다.

“타티아나.”

“……예.”

“너랑 이러고 놀 날이 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따뜻하고 촉촉한, 가슴 깊이 애정이 스며드는 듯한 말투였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기습에 목이 메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그렇다고.”

그냥 그런 게 무슨 소리야, 도대체?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머리가 완전히 정지해 있는데, 그런 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오빠가 이어 말했다.

“오빠 같지도 않은 날 믿고 이렇게 데려와 줘서…… 고맙다, 타티아나.”

“…….”

“내가 먼저 잘했어야 하는데…… 어쨌든, 돌아가서도 우리 이렇게 잘 지냈으면 좋겠네. 아버지가 기절하시겠지?”

생각만 해도 우스운지 오빠가 웃음을 머금었다.

“…….”

난 미하일 선생님의 조언이고 콩쿠르고 뭐고 다 치워 두고, 이 여행에 있었던 또 다른 목적 하나를 다시금 떠올렸다.

지난 1년 동안이나 서로 소원했던 루슬란 오빠와 다시 관계를 좋게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지금까지 머리 아팠던 모든 것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남은, 상관있는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조용히 오빠를 불렀다.

“루슬란 오빠.”

“어.”

“예전에 하셨던 말 기억하세요?”

“무슨 말?”

“…….”

더럭 겁이 났지만 주먹을 꽉 쥐고 마음을 추슬렀다.

나는 이 바라 마지않는 포근한 분위기를 내 의지로, 억지로 잡아 찢어야만 했다.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입을 열었다.

“제가 기억상실이지만 모든 것들을 없던 일로 하고 사는 것은 반대라고 하셨던 것이요.”

내 연습실에서 난 당시 그리 친하지 않았던 루슬란 오빠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오빠는 분명하게 기억에 없어도 사라지는 것은 없다고, 그렇게 편하게 사는 방침은 반대라고 못 박았었다.

하지만 지금 루슬란 오빠의 태도에선 얼핏 아버지의 그림자가 비친다.

“지금도 그러신가요?”

그냥, 그냥 모르는 척하고 배려 위에서 좋은 관계만을 쌓아 나갈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난 루슬란 오빠가 일방적으로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영원히 품고 있길 바라지 않는다.

허리를 펴고, 똑바로 바라보자 루슬란 오빠가 당황해 있던 표정을 지우고 점차 진지하게 얼굴을 굳혀 갔다.

“아니…… 그런데 그런 말을 왜 하는 거야? 타티아나.”

“……오빠까지 그러시면 안 되잖아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

그냥 그렇게 슬쩍 넘어가려던 오빠가 갑자기 역정을 냈다.

“정말 이해가 안 가네. 타티아나, 너 나랑 친해지고 싶은 것 아니었어? 그래서 여행에도 끌고 오고 그 많은…… 아니, 이건 착각할 수가 없잖아.”

“…….”

“똑바로 대답해 봐. 내가 네 태도에서 느낀 게 틀렸어?”

“아뇨, 맞아요. 루슬란 오빠.”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

“마무리 짓고 넘어가야 할…….”

“타티아나.”

루슬란 오빠는 고개를 저었다.

자물쇠로 철컥, 걸어 잠그듯 단호한 목소리가 날 가로막았다.

“그 이야기는 하지 않도록 하자.”

“……왜요?”

“하기 싫어.”

우리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그게 가볍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안다. 난 늘 최악의 상황만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루슬란 오빠는 앞으로도 내가 평생토록 루슬란 오빠를 칼로 찌르거나 망치로 때렸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며 살길 바라는 건가? 겉으로는 웃으면서?

심지어 루슬란 오빠도 웃겠지? 그렇게 끔찍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면 차라리 아예 모조리 그만두는 것이 나았다.

그 정도가 아니라면, 덮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라면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녀가 무슨 일을 했든, 앞으로 책임지고 루슬란 오빠와 남매로 살아야 하는 것은 나였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그 모든 것을 도맡아야 했다. 그리고 난 그 역할에서 눈을 돌리거나 눈을 감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게 주어진 새 삶과 새 가족은 결코 보너스 스테이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난 비겁자이지만 될 수 있는 한 정당하게 살고 싶었다.

“제가 오빠를 믿는 만큼, 절 믿어 주신다면 사과는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가까이 다가가자 루슬란 오빠는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거부했다.

“안 돼.”

“…….”

“안 돼. 타티아나.”

나에겐 오빠가 단어로 쌓아 올린 벽을 부술 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문득 억울해졌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었다. 지금 모든 것이 다 귀찮다고 내팽개쳐 버린다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주먹을 꽉 쥐고 각오를 다잡았다.

“…….”

조금 오기마저 생겼다.

지금까지 1년을 버티다가 결국 여행에 끌고 와서야 루슬란 오빠를 무너뜨렸다.

앞으로도 내가 더 못 할 것 같은가? 시간은 많다. 앞으로도 난 루슬란 오빠를 몇 번이고 흔들고, 압박하고, 회유할 수 있었다.

이쯤에서 내가 포기할 것이라 생각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착각…….

“타티아나. 날 그렇게 보지 마.”

“…….”

루슬란 오빠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안 돼. 그냥 잊어 줘. 아니, 넌 잊었으니 나만 잊으면 돼. 타티아나.”

“제가 그렇게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나요?”

“물론 아니겠지. 넌 집요하고, 정열적이니까. 하지만 타티아나.”

내 눈을 들여다 본 루슬란 오빠가 조용히 말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난 이게 정말 우리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라고 생각해.”

“……두 번째 기회라고요?”

“그래.”

말을 맺은 루슬란 오빠를 보며 난 숨을 멈추었다.

루슬란 오빠를 향해 되쏘려고 떠올리고 있던 모든 말들이 가라앉았다.

두 번째 기회라는 말이 내 마음에, 영혼에 파고들어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하게 틀어쥐었다.

비록 상황은 다르지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주어진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조용히 침묵했다.

* * *

“오늘은 조금 외곽으로 나가 볼래?”

“그럴까요.”

“어. 조금 밑으로 내려가서 푸쉬킨스키구로 가면 예카테리나 궁전이 있어. 꽤 괜찮은 곳이지.”

날이 바뀌고, 루슬란 오빠와 나는 함께 차에 올랐다.

오빠는 날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난 거기에 저항하지 못했다. 루슬란 오빠가 웃으면 웃고 하자면 했다.

난 태블릿 컴퓨터로 예카테리나 궁전에 대해 검색해 보곤 탄성을 질렀다.

“굉장히 화려하네요!”

“그래, 그게 바로 호박의 방이야.”

“여태껏 본 궁전들 중 가장 눈부시네요. 지금 이 방을 보러 간다니 믿을 수 없어요.”

“못 볼 뻔했지. 나치 놈들이 다 뜯어갔던걸 간신히 복원해 놓은 거니까.”

그렇게 분위기 깨는 소리를 하며 루슬란 오빠가 뒷좌석에 몸을 파묻었다. 조금 피곤해 보였다.

차로 달린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우리는 푸쉬킨스키구로 진입할 수 있었다.

푸쉬킨스키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이루는 한 구로서 조금 더 전원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좋은 곳이었다.

예카테리나 궁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운 뒤, 루슬란 오빠와 나는 차에서 내렸다.

“이대로 걸어서 가 보자. 도중에 공원도 있으니까.”

“그렇게 해요.”

난 러시아 황제인 차르의 별장이었던 궁전들을 벌써 몇 개나 봐 왔지만 이 예카테리나 궁전은 또 색다른 느낌일 것 같아서 조금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푸쉬킨스키구의 거리를 루슬란 오빠와 거닐면서 구경하고 있는데, 난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낯익을 얼굴을 발견했다.

“……?”

혹시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어 자리에 멈춰서 다시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큰 키에 금발을 기른 남자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에르네스트?”

“?”

저편에 있던 에르네스트가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내가 바로 저런 표정을 하고 있겠구나, 하고 바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와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

“……타티아나?”

조금 앞장 서 있던 루슬란 오빠가 걸음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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