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7화 (97/1,277)

##  97화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만난 탓에 푸른 눈이 당혹을 담았다가, 곧 평정을 되찾았다.

교복도 슈트도 아닌 두터운 점퍼를 입은 에르네스트는 평소보다 조금 더 커 보였다.

그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내가 지금 잘못 보고 있는 것 아니지?”

“저도 참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에요.”

“하하하, 그 말투 들으니 확실하네.”

에르네스트가 내 쪽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확실해. 넌 타티아나야.”

“맞아요. 에르네스트.”

“널 학교가 아닌 이런 곳에서 다 보게 되네.”

“그러네요.”

솔직히 엄청 놀랐다.

모스크바에서 돌아다니다가 길에서 에르네스트를 만났더라면 이렇게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모스크바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상트페테르부르크고 이 푸쉬킨스구는 그중에서도 중심가에서 떨어진 외곽 지역이지 않은가.

이런 곳에서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를 만난 것은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

“…….”

하지만 이 기적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서로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만나니 첫 인사가 오간 뒤엔 할 말이 막막했다.

사실 이 먼 곳에서 희박한 확률을 뚫고 학교 친구와 만났는데 무슨 할 말이 더 필요하겠느냐만, 난 밖에서 학교 친구를 만나서 쿨하게 인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주받은 사교성에 한탄을 하고 있을 때였다.

“누구야?”

옆에 있던 루슬란 오빠가 물었다.

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길게 고민할 것 없이, 간단하게 답했다.

“학교 친구예요.”

“중앙음악학교?”

“예.”

“거기 다니는 녀석이 왜 여기에 있어?”

조금 당황스러웠다.

내 앞에선 조금 미덥잖게 굴지만 적어도 밖에 나가선 깔끔하고 정중하게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루슬란 오빠가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다.

아무리 동생 친구라지만 그래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뾰족한 말투로 대할 필요가 있나?

오빠를 조금 나무라려던 때였다.

“그쪽 분은 타티아나와 무슨 사이 되시는지?”

에르네스트가 맞대응했다.

굉장히 정중하고 깍듯한 태도였지만, 그 이면엔 조금 날이 서 있는 게 나에게까지 느껴졌다.

얘는 또 왜 이래?

루슬란 오빠가 인상을 썼다.

“보면 몰라?”

“모르겠으니 물어보죠.”

뭐 하는 짓들이야?

“여긴 제 오빠 루슬란이에요, 에르네스트.”

난 넋 놓고 구경만하지 않았다.

아예 두 사람 사이에 이야기가 길어지기 전에 잽싸게 루슬란 오빠의 팔을 붙잡으며 소개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뜻으로 꽉 붙들어 버리니 루슬란 오빠가 입을 다물었다.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있는 대로 이야기하면 될 것을 왜 굳이 기 싸움을 하는지 모르겠다.

에르네스트도 평소 친구도 별로 없는 내가 이렇게 다른 도시에까지 와서 함께 다니는 사람이라면 분명 가족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왜…….

“……친남매라고?”

몰랐나 보다.

에르네스트는 나와 루슬란 오빠를 번갈아 보더니 사과해 왔다.

“미안합니다. 타티아나에게 오빠가 있는 줄은 미처 몰라서.”

“그럴 수도 있지.”

루슬란 오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런 오빠가 꼴 보기 싫어서 눈을 흘겼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말해 줬어야지 수수께끼처럼 보면 알지 않냐고 뻗댈 건 뭐야?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어 말했다.

“저번에도 파티장에서 모르는 선배들 때문에 조금 곤란했던 적이 있어서 말입니다. 제가 조금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나 봅니다.”

“……뭐?”

순간 루슬란 오빠의 고개가 끼긱거리며 내 쪽으로 돌았다. 난 소릴 지를 뻔했다. 그 이야기를 지금 왜 꺼내?

학기말 사교파티장에서 실수로 탄산음료를 마시고는 살짝 취해선 막심 선배와 일종의 견해 차이로 다투다가 그대로 무대로 올라갈 뻔했던 일이 있긴 했다.

아나스타샤는 내 고집을 뜯어말리지 못하고 있었고 그때 정말 에르네스트와 리처드가 제동을 걸어 주긴 했지만…….

지금 그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리잖아!

아니나 다를까, 내가 당시 상황을 변명하기도 전에 루슬란 오빠가 이를 갈며 말했다.

“어떤 자식들이야?”

“……오빠 제발. 그런 거 아니…….”

“점잖은 학교라 생각했었는데, 거기에도 겁을 상실한 놈들이 있었네.”

“아니라니까요, 정말.”

“아니긴 뭐가 아냐, 네가 뭘 잘 몰라서 그러는데 세상엔 별의별 자식들이 다 있는…….”

루슬란 오빠가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오빠가 보기에 나는 1년도 안 되는 상식을 지닌 동생에 불과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해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아서 에르네스트 쪽을 보았다.

“…….”

굳이 할 필요 없는 말실수로 날 난처하게 만든 에르네스트는 아무 말 없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뒤통수가 다 얼얼했다.

에르네스트는 실수로 선배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니었다. 루슬란 오빠를 흔들기 위해 일부러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도발에 보기 좋게 걸려 넘어간 루슬란 오빠는 날 보며 진지하게 설교를 시작했다.

“타티아나.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밖에선 누구라도 조심하라고, 특히 남자들은…….”

“오빠가 언제 저한테 그런 말을 했나요, 대체.”

목소리는 더없이 진지한데, 하나도 와닿지 않았다.

약간 한심하다는 투로 중얼거리니 루슬란 오빠가 황망하게 말했다.

“……없던가?”

“없죠.”

“그럼 지금 할게. 순진하게 같은 학교 선배고 자시고 절대 믿지 말고…….”

“…….”

우리 오빠 이렇게 순진해서 어쩌면 좋지…….

한참이나 어린 에르네스트의 의도에 완전히 넘어간 오빠를 보다가, 문득 오빠도 나도 한심해져서 원망 어린 눈으로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더니 그는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당해도 싸다는 듯한 표정이다.

진짜 한 대만 때리면 안 될까? 맨손으로 때리면 하나도 안 아플 테니 야구 배트 같은 걸로.

오빠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에르네스트를 노려보았다.

에르네스트는 내 머릿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당하고 있는지 상상도 못 하는 주제에 웃고만 있었다.

처음 떠올랐던 야구배트가 조금 더 각지고 무시무시한 무기로 변신하고 있었다.

걱정 마, 내가 팔은 건들지 않을게. 그래도 피아노는 쳐야 하니까. 그러니까 막지 말고 얌전히…….

그렇게 조금 폭력적인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형.”

“사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공원 저편에서 달려오는 작은 에르네스트를 보고 난 기겁해서 모든 상상을 흩어 버리고 눈을 깜빡였다.

“……허.”

에르네스트는 나와 루슬란 오빠를 보고 우리가 남매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지금 에르네스트에게 달려가 안기는 작은 에르네스트는 누가 보아도 그 둘이 형제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닮아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성격이 독선적이고 살짝 사람 열 받게 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적어도 생긴 것 하나만큼은 어디 흠잡을 곳이 없긴 하다.

그 동생 역시 유전자가 어디로 가진 않는지 빼어난 귀여움을 자랑했다.

에르네스트가 동생에게 말했다.

“사샤, 사진은 다 찍었어?”

“응.”

방긋 웃으며 대답하는 모습이 숨넘어가게 귀엽다. 세상에 무슨 애가 속눈썹이 저렇게 길지?

에르네스트와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아하니, 에르네스트의 동생은 바로 옆에 있는 공원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쩐지 에르네스트가 혼자 길가에 서서 공원 쪽을 바라보고 있더라니, 동생을 보고 있던 것이었다.

있지도 않은 모함으로 친구를 난처하게 만드는 에르네스트와 달리, 정말 천사가 아닐지 의심되는 맑은 눈이 내 쪽으로 향했다.

“누나는 누구예요?”

내게 관심을 가져 주다니 감동할 뻔했다.

하지만 난 내심 이 순간을 고대하고 있었다. 난 여태껏 살면서 내 본 목소리 중 가장 상냥한 톤이지 않을까 생각되는 어투로 말했다.

“전 에르네스트와 친구인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고 해요. 천사님은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맙소사.”

에르네스트가 귀신이라도 본 듯한 눈으로 탄식을 토해 냈다.

시끄러워. 난 지금 처음으로 너와 친구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는 중이니까.

에르네스트의 동생은 내 인사를 듣더니 안겨 있던 팔을 톡톡 쳤다.

“내려줘, 형.”

그리곤 제 발로 똑바로 서서 날 바라보며 인사했다.

“전 사샤 스테파노비치 베샤스트니흐예요. 우리 형의 동생이에요.”

“……세상에.”

이번엔 내가 탄성을 발할 차례였다.

이건 거의…… 폭력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귀여움 앞에서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겠는가? 난 완전히 무장 해제된 상태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샤와 눈을 마주했다.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사샤.”

“저도요. 타티아나 누나.”

“오늘 정말 개안하는군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술을 보러 왔는데 예술이 달리 있는 게 아니었어요.”

“……?”

깜찍하게 고개를 갸웃하는 사샤의 위에서 에르네스트가 얼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기절하겠군.”

“에르네스트라고 했나. 좀 묻겠는데, 타티아나가 학교에서도 저러는 건 아니지?”

“아뇨, 전혀요. 저런 목소리는 오늘 처음 듣는데요.”

“그럼 다행이고.”

루슬란 오빠와 에르네스트가 주고받는 대화를 무시하며 난 팔을 벌려 보였다. 그리고 뭐라 말도 하지 않았는데 사샤는 쪼르르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미칠 것 같다. 에르네스트가 심란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든 말든 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데 얌전히 내 허리춤을 끌어안고 있던 사샤가 문득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그런데, 누나.”

“예.”

“형이랑 친구라고 하셨죠.”

“예. 같은 피아노과예요.”

“어…… 그럼 선배인가요?”

“?”

무슨 소린지 몰라 눈을 마주치니 사샤가 말했다.

“저도 피아노과예요.”

“예?”

“1학년이요. 0학년은 건너뛰었어요.”

놀라서 고개를 들자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몰랐어?”

뭘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거야?

“제가 어떻게 알아요?”

“저번에 한 번 봤잖아.”

“언제요?”

“편입 실기시험 칠 때.”

그제야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약 반년 전, 중앙음악학교 편입 실기시험을 치러 갔을 때 난 그곳에서 에르네스트를 처음으로 만났다.

원래 재학생이던 에르네스트가 실기시험장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때 그가 거기에 있었던 것은 동생의 입학시험을 응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에르네스트의 부모님과 동생을 멀찌감치에서 보긴 했지만…… 뒷모습을 보았을 뿐이었다.

“……아.”

“기억났어?”

기억이 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사샤의 얼굴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으니까. 단지 그 작은 뒷모습이 이 아이였겠구나 싶었을 뿐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사샤가 입학한 지 반년 만에 이렇게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는 사실에 갑자기 지난 과거가 후회되었다.

실기시험 날 정식으로 인사라도 하고 사샤의 응원도 해 주었어야 했는데 대체 난 뭘 하고 에르네스트는 뭘 한 거지.

“……너 또 이상한 생각 하는 것 같은데.”

“그런 적 없어요.”

“아무리 봐도 너 이상해. 사샤. 이리 와.”

“응.”

형의 말엔 거스를 수 없는지 사샤가 아쉽다는 듯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난 겉으로 태연하게 웃고 있었지만 에르네스트가 미웠다.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돼?

하지만 사샤를 앞에 두고 에르네스트를 노려볼 수도 없었다. 난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무릎을 탁탁 털었다.

옆에 있는 루슬란 오빠도 조금 식겁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짜증이 났다.

“왜 그렇게 보시나요?”

“아니, 음…… 아니야.”

“오빠랑 바꾸고 싶어요.”

“……뭐?”

“아무것도 아녜요.”

난 매몰차게 말하며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에르네스트도 사샤와 함께 놀러 오신 건가요?”

“뭐, 그렇지. 너도?”

“예. 그리고 다음 주에 있는 콩쿠르에도 참가하려 해요.”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 나가는구나.”

“에르네스트는 안 나가시나요?”

“난 재작년에 거기서 1등 했어.”

“…….”

잘나셨네요, 라고 말하면 너무 치졸해 보일 것 같아서 꾹 참았다.

어쨌든, 이번 콩쿠르에서 잘해야 할 이유가 또 한 가지 생겼다. 비공식적으로나마 난 그를 이긴 적도 있지 않은가?

이러저런 생각을 하며 에르네스트를 새삼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물어 왔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갑자기 에르네스트를 만나서 정말 깜빡 잊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궁전을 보려고요.”

“거긴 봐도 봐도 새롭지.”

“음…… 전 처음이라서요. 꽤 기대하고 있어요.”

내 말이 조금 의아했는지 에르네스트가 눈썹을 꿈틀거렸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사샤가 불쑥 말했다.

“형, 나도 예카테리나 궁전에 갈래.”

“뭐? 왜?”

“타티아나 누나한테 설명해 줄래.”

“네가 가이드야?”

“가이드 할래.”

난 절대 거기에 저항할 수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꼭 고용하게 해 주세요.”

“…….”

에르네스트가 아까부터 계속 굉장히 실례인 눈빛을 보이는 것 같지만 잘 모르겠다.

난 강력하게 사샤를 가이드로 두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나와 사샤가 함께 움직일 것 같은 상황이 되자 에르네스트가 루슬란 오빠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루슬란 오빠가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아무 힘도 없어. 타티아나가 하고 싶다면 그리할 거야.”

“함께 따라오실 거죠?”

“당연하지.”

그렇게 결정되었다. 계속 루슬란 오빠와 함께 둘이서 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 관광은 베샤스트니흐 형제와의 만남으로 네 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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