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에르네스트는 앞서 가는 사샤와 타티아나를 보며 복잡한 심경을 느끼고 있었다.
그 둘은 방금 처음 만난 것이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사이좋게 재잘거리고 있었다.
타티아나가 무릎을 굽히고, 사샤가 그 귓가에 속삭이다가, 동시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한 명은 친동생이고 한 명은 친구였다. 둘 모두 소중했다.
하지만 그 둘이 저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자 에르네스트는 약간 소외감마저 느꼈다. 불공평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힐긋 옆을 보니 에르네스트와 똑같은 처지에 놓인 남자가 한 명 더 있었다.
타티아나의 오빠인 루슬란이었다.
그는 여유로운 태도를 잃지 않고 있었으나 에르네스트는 그의 눈이 어쩐지 조금 서글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에르네스트의 시선을 의식한 루슬란이 고개를 돌렸다.
“학교 친구라고 했나?”
“…….”
단순한 질문이지만 싸늘한 어투에 말문이 막힌다.
에르네스트는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다가도, 타티아나의 오빠라면 응당 그럴 수밖에 없겠다고 납득했다.
남남인 에르네스트도 타티아나를 보면 늘 무방비하게 느껴져서 불안해지곤 했다. 하물며 친오빠라면 그 걱정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어쨌든 에르네스트는 켕기거나 숨겨야 할 일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렇죠. 중앙음악학교 피아노과 8학년.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베샤스트니흐입니다.”
루슬란은 묘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언젠가 들어 본 것 같은 이름인데.”
“들어보셨다고요? 혹시 타티아나가…….”
저도 모르게 말하던 에르네스트는 도끼눈을 하는 루슬란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농담으로 한 말에 불과했지만 루슬란을 자극해서 좋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쉬며 조금 더 그럴싸한 추론을 내놓았다.
“혹시 제 아버지로부터 이야기를 들으신 것이 아닐지?”
“아버지?”
“예. 혹시 스테판 니콜라예비치 베샤스트니흐를 아십니까?”
“베샤스트니흐……?”
이제야 루슬란은 그 성이 낯설지 않은지 중얼거리다가 곧 기억해 냈다.
“혹시 스테판 니콜라예비치의 아들인가?”
“예. 그렇습니다.”
“정말이라고?”
루슬란이 아무것도 모른다면 에르네스트는 일단 얌전히 후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루슬란은 놀라워하며 말했다.
“내가 그분을 모를 수가 있나. 바로 저번 달에도 워크샵에서 스테판 니콜라예비치와 인사를 나누었는데.”
베르체노프 콘체른konzern의 후계자인 루슬란은 아직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 나이는 아니었지만 아버지인 유리를 따라 사업에 깊게 연관된 관계자들을 여럿 만나 본 적 있었다.
그중에서도 스테판 니콜라예비치 베샤스트니흐는 중요한 사업 파트너 중 하나였다.
루슬란은 언젠가 그와 이야기를 하다가 스쳐 지나가듯 에르네스트의 이름을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조금 누그러진 루슬란의 태도에 에르네스트가 작게 안도하는 사이, 루슬란이 새삼 다시 보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스테판 니콜라예비치의 아들이 타티아나와 동갑인 줄은 몰랐군.”
“저도 처음엔 많이 놀랐습니다. 타티아나와 처음 만난 것은 실기시험장에서였는데, 처음엔 베르체노프라는 성을 듣고도 그 베르체노프라는 걸 떠올리지 못했을 정도였습니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정말 처음엔 타티아나가 베르체노프의 사람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침착하게 말을 마친 에르네스트를 보며 루슬란이 물었다.
“그런데, 이 사실은 타티아나도 아는 건가? 네 말을 듣자 하니 말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아버지들 사이에 어떤 관계와 연결고리가 있는지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할 수도 있었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모를 겁니다. 타티아나에게 있어서 전 그냥 학교 친구일 뿐이죠.”
“왜 그랬지?”
“타티아나에게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습니까?”
루슬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애는 사업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하니까.”
“타티아나는 피아노밖에 모르죠.”
“뭐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긴 하지만…….”
잠시 에르네스트는 자신을 살펴보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루슬란은 에르네스트에게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지 생각했다.
타티아나는 정말 기억상실이라는 점을 학교에 말하지 않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불편할지 상상조차 안 가지만, 타티아나는 정말 그렇게 자신의 고집을 지켜 나갔다.
이제 와서 루슬란이 지금까지 타티아나가 유지해 온 것을 망가뜨려선 안 되는 것이었다.
이윽고 루슬란이 말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진 알겠어, 에르네스트.”
루슬란은 종전과 확연히 다른 어투로 말했다.
“스테판 니콜라예비치는 정말 존경할 수 있는 분이시지. 진작 우리가 만났어도 좋았겠네.”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아버지들끼리의 연결고리가 있다면 그 자식들이 친해지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특히나 루슬란은 에르네스트의 아버지인 스테판 니콜라예비치 베샤스트니흐를 몇 번이나 보고 그 사람 됨됨이를 알고 있었으며, 지금 에르네스트가 보여 주는 모습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첫인상을 상당히 괜찮게 느꼈다.
“동감입니다.”
타티아나와는 음악이라는 부분을 함께 공유할 수 있었기에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지만, 에르네스트는 루슬란에게서도 약간의 신뢰를 얻어 냈다는 것을 느꼈다.
경계를 모두 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다른 누군가보다는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해 줄 것이다.
“어쨌든…….”
에르네스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한 루슬란의 시선이 앞서가는 타티아나와 사샤를 쫓았다.
“동생이 정말 귀엽군. 사샤라고 했던가?”
“네. 저와는 일곱 살 차이 나죠.”
“나와 타티아나는 5살 차이이니 그보다 조금 더 나는군. 나이 차 많이 나는 동생이란…….”
순간 루슬란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스스로 입을 통제하기도 전에, 말이 먼저 새어 나왔다.
“어렵지.”
“어려……운가요?”
이 시점에 튀어나오리라곤 상상도 못 한 단어에 에르네스트가 조금 놀라서 묻자 루슬란이 말실수를 했단 것을 깨닫고는 얼버무렸다.
“뭐, 형제와 남매는 조금 다르니까. 편할 수도 있고.”
루슬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에르네스트는 그 뒤에 숨어 있는 것들을 살짝 느낄 수 있었다.
타티아나와 루슬란은 이렇게 방학에 사이좋게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여행을 나온 것치고는 꽤나 복잡한 남매 관계로 보였다.
당장 보기에 루슬란은 타티아나를 무척이나 과보호하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이 단순히 타티아나를 너무 아끼기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
에르네스트는 더 이상 깊게 파고들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루슬란 역시 순간적으로 말실수를 한 것을 덮어 버리길 원하는 듯했다.
루슬란이 말했다.
“그나저나, 타티아나가 아이를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저도 사샤가 저렇게 남을 따르는 건 처음 보는 것 같군요. 낯을 꽤 가리는 아이인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낯가림 심한 둘이 통하는 것이라도 있나 보죠.”
“푸하하.”
느닷없이 루슬란이 웃음을 터뜨렸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말이 그리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한참 웃던 루슬란이 불쑥 물었다.
“학교에서는 어때?”
“타티아나 말인가요?”
“그래.”
열다섯이나 된 동생의 학교생활을 묻는 것은 조금 유난스러운 일이었지만, 루슬란은 정말 그것을 궁금해했다.
에르네스트는 입에 발린 소리를 하려다가, 루슬란이 원하는 것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는 조금 생각에 잠겼다.
그라고 해서 타티아나에 대해 잘 알진 못했다. 여전히 그녀는 비밀이 많았고, 루슬란의 말마따나 어려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한 가지 있었다.
타티아나는 매사 진지해서 편하게 대하기엔 조금 까다로운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그 진지함이 우정으로 향할 땐 그 무엇보다 솔직하고 헌신적이었다.
“타티아나는…… 친구를 넓게 사귀는 편은 아니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겐 최선을 다하려 하는 스타일이죠. 저 애 곁에 모인 애들도 모두 그걸 알아요.”
“……그렇긴 하지.”
에르네스트의 평가를 듣고 루슬란은 곧바로 납득했다.
타티아나가 근래 보였던 행동들을 생각해 보면 친한 친구들에게 그녀가 어떻게 대하는지 대강 알 수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이어 말했다.
“시험 때면 시험, 실기면 실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친구들에게 투자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공부와 연습에도 부족함이 없고요. 여러모로 배울 점이 많습니다.”
과한 칭찬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에르네스트는 어디까지나 있는 그대로 사실을 전하고 있었다.
루슬란으로선 타티아나가 학교생활에 잘 적응 중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까지 신경 쓰지 않고 사고나 안 치고 다니길 바란 주제에, 한 학기가 지나 버린 이제 와서 동생을 걱정하는 것도 굉장히 우습게 들렸지만, 루슬란은 요 며칠 사이 타티아나를 보는 시선을 정말 많이 달리하고 있었다.
“루슬란 오빠.”
앞서가던 타티아나와 사샤가 걸음을 조금 늦추었다. 타티아나는 루슬란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에르네스트와 무슨 이야기를 하시나요?”
“막 인사한 참이야.”
단순한 인사보다는 조금 더 많은 것들이 오갔지만, 루슬란은 가볍게 대꾸했다.
타티아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네요.”
“다행?”
“예. 에르네스트나 오빠나 성격이 그리 좋다고 할 순 없으니 혹시 싸우진 않을까 해서…….”
“진담이냐, 타티아나.”
“농담이죠.”
타티아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사샤와 손을 붙잡고 흔들더니 고개를 숙여서 또 무어라 속삭였다. 벌써 이만큼 친해졌다고 과시하는 듯했다.
평상시보다도 훨씬 더 활기찬 모습에 루슬란은 화도 못 내고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별 모습을 다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에르네스트 역시 매한가지였다.
에르네스트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좋으면 아예 데리고 가지 그래?”
“!”
갑작스런 형의 선언에 사샤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도 되나요?”
타티아나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당장 계약서라도 가져와서 도장을 받을 듯한 기세였다.
그게 법적 효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차치하고, 일단 구두가 아닌 서면으로 남기고 싶은 모양이었다.
장난을 걸려던 에르네스트가 되레 당황했다.
“농담이야. 와, 큰일나겠네 정말.”
“제게 농담하지 마세요. 전 농담 같은 것 모르니까.”
“…….”
불과 10초 전에 한 말도 까먹은 거야?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의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고 사샤를 끌어안았다.
에르네스트는 지금 타티아나에게 정상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이래서야 헤어질 때 되면 울고불고하진 않을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어째서 어린 사샤가 아니라 타티아나를 걱정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사샤는 마치 에르네스트에게 뺏길세라 자신을 꼭 끌어안은 타티아나를 올려다보더니, 작게 말했다.
“타티아나 누나.”
“예.”
“누나가 절 데리고 가면 부모님이 슬퍼하시겠죠? 형은 빼고요.”
에르네스트의 농담을 농담으로만 듣지 않은 사샤는 조금 심각하게 말했다. 타티아나는 얼른 사샤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에르네스트도 슬퍼할 거예요.”
“그럴까요.”
“그렇고말고요.”
타티아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에르네스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타티아나가 장난이라도 쳤다간 삐쳐 버린 사샤를 달래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암담할 지경이었는데, 타티아나는 그렇게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
그때, 가만히 타티아나의 손길에 머리를 맡기던 사샤가 갑자기 묘안이 떠올랐다는 듯 제안했다.
“그럼 누나가 저희 집에 오는 건 어때요?”
“……예?”
타티아나는 멀거니 되물었고, 루슬란과 에르네스트는 그야말로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에르네스트는 불가항력적으로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에 당황했다.
사샤의 제안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다만…….
“…….”
가장 큰 장애물로 예상되는 남자가 옆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아하하하하.”
높은 웃음소리가 살얼음판처럼 얼어 버린 정적을 깨뜨렸다.
타티아나는 귀여워 참을 수 없다는 듯 사샤를 껴안고는 다시 물었다.
“정말요? 정말 제가 사샤의 집에 갔으면 좋겠어요?”
“예.”
“그럴까요?”
타티아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사샤에게도 슬퍼할 가족이 있듯, 저도 루슬란 오빠가 슬퍼할지도 몰라서요.”
완곡한 거절과 이어지는 새로운 제안.
“오늘 하루 놀러 가는 건 어떨까요?”
사샤가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놀러 오신다고요?”
“예. 저도 사샤에게 예카테리나 궁전을 안내만 받고 헤어질 생각을 하니 굉장히 허전했는데, 사샤는 지금 별장에 머물고 있다고 하셨죠?”
사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티아나는 싱긋 웃으며 다시 말했다.
“부디 폐가 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다음엔 제가 저희 집으로 모실게요.”
“좋아요, 누나.”
너무나도 간단하게 약속이 진행되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에르네스트는 좋긴 뭐가 좋냐며 머리를 싸매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그가 머물고 있는 별장엔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