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9화 (99/1,277)

##  99화

농담이 아니라,

마음 같아선 정말 방학 내내 사샤와 함께 있고 싶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그 어떤 예술품과 보물도 이렇게 날 감동시킨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미소를 짓는 사샤의 얼굴은 파베르제의 달걀보다 더 값진 보물처럼 느껴지곤 했다.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었다.

난 이후에 어찌 되든 간에, 당장 오늘 하루만큼은 사샤에게 모든 시간을 쓸 생각이었다. 그 누구도 오늘은 나와 사샤를 방해할 수 없…….

“잠깐만, 타티아나, 사샤.”

나와 사샤의 눈이 동시에 돌아갔다. 동시에 따가운 눈총을 받게 된 에르네스트가 찔끔하는 표정을 짓더니,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 봐. 그거 별로 좋은 아이디어가 아닌 것 같아.”

“왜죠?”

“그…… 갑자기 손님을 데리고 간다는 게 조금…….”

듣고 보니 나 역시 너무 흥분해 있었음을 깨달았다.

모스크바에서 잠시 별장으로 휴양을 온 베샤스트니흐 가족들의 입장을 생각하자면 갑작스레 들이닥친 손님을 맞이하는 건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부담이 아니라 그냥 민폐다.

“…….”

너무 기분이 앞섰다는 것을 자각하니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내가 침착해지자 에르네스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해하겠지?”

“부모님이 계신가요?”

“그래. 지금 시간이면…… 아버지는 잠시 일 때문에 안 계시겠지만 어머니는 계실 시간이야.”

급격하게 마음이 꺾인다.

“이렇게 갑자기 인사하고 싶어? 우리 어머니와?”

“…….”

“그건 너도 싫지?”

담백하게 친구 어머니라 생각하면 사실 별로 부담 가질 일이 아니었지만, 약간 걸리는 부분이 있긴 했다.

더군다나 에르네스트와는 이성 친구이지 않은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이 에르네스트가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 솔직히 털어놓지만, 여기 별장은 그렇게 좋은 곳이 아니야. 비좁고. 차라리 모스크바에 돌아가면 그때에나 저택에 한 번쯤 들러 줘. 충분히 환대할 테니까.”

그 자존심 강한 에르네스트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마음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알았어요.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에르네스트의 말이 옳아요. 다음에 정식으로 찾아뵙겠어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은 별로 때가 좋지 않았다.

난 아쉬운 마음으로 사샤를 돌아보았다. 정녕 이 아이를 보내야 하는가? 이렇게 된 이상 가이드를 약속해 준 예카테리나 궁전에서 한 8시간쯤 버텨 볼까?

하지만 사샤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한 듯했다.

슬픈 얼굴로, 사샤가 말했다.

“타티아나 누나는 비좁고 별로인 곳은 싫어요?”

“……예?”

사샤는 내가 에르네스트의 말에 생각을 바꾸었다고 느낀 것 같았다.

물론 에르네스트의 설득에 넘어간 것은 맞지만, 그건 가족 휴가에 내가 끼어드는 그림이 굉장히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난 혹여나 사샤가 오해할까 싶어 천천히 설명했다.

“결코 아니에요. 제가 다음을 기약한 건 사샤의 가족분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무슨 폐요?”

“그야 제가 난데없이 손님으로 찾아가면…….”

“왜 난데없어요? 제가 초대해도요?”

이 통념적인 기준이라는 것을 말로 풀어 이야기하자니 조금 어려웠다.

더군다나 방금 전까지 의기투합해서 함께할 것처럼 말해 놓고선 이제 와서 뒷걸음질을 치려니 마음이 쓰렸다.

사샤가 바닥을 바라보며 웅얼거렸다.

“모르겠어요. 형도 누나도, 왜 그런 말을 해요? 마치 엄마가 누나를 싫어할 것처럼.”

“그게 아니에요. 사샤. 오해하지 마세요.”

“사샤.”

큰 그림자가 불쑥 우리를 덮었다. 올려다보니 에르네스트였다.

에르네스트는 사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말이 아냐. 그 어떤 손님이든 지금 갑자기 간다면 어머니는 그 손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야.”

“왜?”

“언제나 손님맞이엔 준비라는 게 필요하니까.”

“왜? 학교 끝나고 내 친구들은 아무 때나 와도 어머니는 좋아해 주셨는데.”

“그건 모스크바에서의 일이잖아. 여긴 아무것도 없잖아.”

“이상해. 아무것도 없으면 우리가 손님한테 폐인 것 아냐? 왜 반대로 말 해?”

“아니 그러니까…….”

에르네스트는 답답하다는 듯 말을 흐렸고, 사샤 역시 답답한 것처럼 보였다.

이전까지 알고 있던 상식으로는 집에 손님을 초대하는 것에 아무 문제도 없었기 때문에 무엇이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

에르네스트는 강압적이지 않게 조곤조곤 설명하고 있었지만 점점 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난 늦지 않게 끼어들어 말했다.

“저기, 전화로 여쭤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지 않겠어요?”

“…….”

에르네스트가 말을 뚝 멈췄다.

사실 길게 이야기할 것 없었다.

집에 계실 에르네스트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갑자기 친구를 데려가도 되겠느냐고 물으면 당연히 어머니는 난색을 표하실 테고, 그것으로 사샤를 설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좋아. 당장 해 보자.”

에르네스트가 곧장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난 조금 아쉬운 손길로 사샤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이제 별장에 가서 에르네스트의 어머니를 만나 인사를 드릴 일은 없겠지만, 함께 예카테리나 궁전을 구경하기로 한 약속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난 현재 주어진 기회에 충실할 줄 알았다.

“아, 어머니.”

통화가 연결되었고,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집에 계신가요? 아, 예. 뜬금없이 죄송한데, 친구를 데려가도 될까요? 예? 아뇨. 학교 친구요. 예. 예. 모스크바에 사는 학교 친구라니깐요. 아니, 그건 저도 모르죠. 길에서 마주쳤어요. 예. 여행을 왔다네요. 저도 조금 놀랐죠.”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길 잠시, 에르네스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데리고 오라고요?”

당혹스러운 눈빛이 나와 사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샤는 거보라는 듯 가슴을 폈고, 난 에르네스트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렇게 흔쾌히 허락 하시리라곤 생각 못 했는데, 이 멀리서 우연히 학교 친구를 만났다고 하니 에르네스트의 어머니께서도 흥미가 동하신 것 같았다.

얼이 빠진 채 나와 눈빛을 교환하던 에르네스트가 더듬거리며 다시 말했다.

“여, 여자애인데요?”

그리고 그건 두 번째 자충수였다. 스마트폰 너머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정확히 잘 들리진 않지만 에르네스트의 안색이 낭패를 본 사람처럼 창백해졌다.

잠시 후,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에르네스트가 우울하게 말했다.

“데리고 오라시는데.”

“…….”

어안이 벙벙해 있자 사샤가 내 팔을 잡았다.

“누나, 기쁘지 않아요?”

그제야 난 내가 기뻐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쨌거나 허락을 받은 것이지 않은가.

당혹스러움은 여전했지만, 내 눈치를 살피는 듯한 사샤를 보니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단순명료했다.

“선물을 사야겠네요.”

* * *

사샤와 함께 원래 계획이었던 예카테리나 궁전을 돌아보았다.

예카테리나 궁전은 18세기에 있었던 예카테리나 황후의 여름 별장이니만큼 그 정원과 연못 등이 여름이면 더없이 예쁘다고 하는데, 하필 눈이 펑펑 내린 한겨울에 찾아서 정원을 보는 재미는 별로 없었다.

사샤도 정원엔 별로 볼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곧장 궁으로 날 이끌었다.

궁 안에 들어서니 금으로 장식된 거대한 홀이 우릴 맞이했다.

궁 내부의 방만 55개였는데 그걸 다 제대로 돌아보려면 최소 두어 시간은 넘게 걸릴 규모였다. 그렇게 길게 있을 순 없었다.

오빠와 단둘이라면 또 모를까, 일행이 네 명이나 되는데 그중에서 여기 처음 와 보는 것은 나뿐인지라 혼자서 오래 있기가 미안했다.

때문에 사샤와 함께 조금 설렁설렁 둘러보고는 유명한 아라베스크 홀이나 호박방만 자세하게 구경했다.

특히 호박방은 실물을 보니 지금껏 본 수많은 궁전과 방들이 초라해 보일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그렇게 대충 돈 것 같은데도 1시간 가까이 걸렸다.

난 밖으로 나와서 곧바로 사샤를 앞세우지 않고, 마트에 들러 선물용 과일과 육류를 조금 샀다.

에르네스트는 그럴 필요 없다며 말렸지만 그렇다고 맨손으로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진짜 너무 그러지 말라니까…… 실망한다고.”

“실망이라니 대체 무슨 실망요?”

“…….”

에르네스트는 내가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어서 실망하게 되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사실 그로선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소시민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려 줘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에르네스트.”

“하아…….”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머리를 헤집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

“이쪽이에요, 누나.”

그렇게 형이 곤란해하든 말든, 사샤는 싱글벙글 웃으며 내 손을 이끌었다.

에르네스트와 사샤가 머물고 있는 별장은 굳이 차량으로 이동할 필요 없이 조금 걸으니 도착할 수 있었다.

사샤가 먼저 입구로 뛰어 올라가고, 난 잠시 고개를 들어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옆에서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했…….”

“상당히 예쁘네요.”

“어…… 뭐?”

우리가 도착한 곳엔 5층 정도 되는 아파트가 있었다.

감탄하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세월에 따라 오래된 느낌이 구닥다리처럼 느껴지지 않고 고풍스러웠다.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않고, 여러 사람들이 살기에 딱 좋은 곳이라는 느낌이다. 난 이런 느낌도 굉장히 좋아했다.

에르네스트가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타티아나. 혹시나 착각하고 있나 싶어서 말인데, 여긴 아파트고 저택 같은 게 아닌…….”

“제가 그렇게 상식이 없어 보이나요? 몇 층으로 가면 되나요?”

“5층…….”

“가요.”

에르네스트는 계속 내가 불편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난 그런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에르네스트라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익히 알고 있는데, 그가 어떤 집에 살든 간에 그가 지닌 것은 아무것도 퇴색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게다가 사샤가 직접 초대해 준 것인데 무슨 불만이 있겠는가?

손짓하는 사샤를 따라 올라가니 에르네스트와 루슬란 오빠도 내 뒤를 따라왔다.

3층쯤 오르자 숨이 가빠 왔다.

앞서가던 사샤가 도로 내려오더니 내 손을 잡아 주려 했지만, 만에 하나 내가 손을 잡은 채 넘어졌다간 사샤가 다칠지도 몰라서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그렇게 5층에 오르니 사샤가 짜잔 하고 소리를 내며 말했다.

“다 왔어요. 고생했어요, 누나.”

“고생하지 않았…… 후으…….”

“물이라도 한 잔 가져다 드릴게요.”

사샤가 갑자기 열쇠를 꽂더니 벌컥 현관을 열어젖혔다. 문을 연 채 뛰어 들어가며 사샤가 말했다.

“어머니, 저 왔어요. 컵 주세요.”

“이제 왔구나? 사샤. 에르네스트는?”

“같이 와요. 그리고 타티아나 누나도 왔어요.”

“타티아나? 그게 누구니?”

부엌 쪽에서 한 여인이 모습을 보였다. 윤기 있는 흑발이 어깨 너머로 흔들렸다.

사샤가 어머니라고 불렀으니 동시에 에르네스트의 어머니일 것이고, 그렇다면 못해도 나이가 서른 중반은 되었을 텐데, 결코 그 나이 대로 보이지 않았다.

미리 에르네스트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뵈었다면 20대인 줄 알았을 것이다.

난 아직까지 현관 밖에 멈춰 서 있었고, 에르네스트의 어머니는 날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어머나…….”

작은 탄성, 놀람, 기쁨 등의 여러 감정이 내 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분은 번개처럼 내 쪽으로 달려오셨다.

“얘, 뭐 하니! 빨리 들어오지 않고?”

“아…….”

뇌가 정지된 상태로 다리만 움직여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날 이끌고 거실로 향한 에르네스트의 어머니는 재빨리 내 겉옷과 모자를 받아 주시고, 그걸 옷장에 걸어 두신 다음 다시 날 보시더니 거의 비명을 지르셨다.

“세상에, 누구라고?”

“그…… 안녕하세요…….”

어떻게 소개를 해야 할지 갑자기 막막했다.

갑자기 친구 어머니를 이렇게 만나니 아무리 반갑게 맞아 주셔도 조금 어색했다.

난 바보처럼 더듬거리지 않으려 애썼다.

“전 에르네스트와 사샤의 친구인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고 해요. 그…… 처음 뵙겠습니다.”

“아, 그러니? 아까 전화로 말한 친구가 너였구나?”

“예. 그와 같은 피아노과 8학년에 있…….”

“잠깐, 베르체노바라고?”

“그…… 그런데요…….”

처음 보였던, 굉장히 반가워하시는 모습이 점점 옅어지더니 급기야 굳어지기까지 했다.

난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아닌가 싶어 어깨를 움츠렸다. 여기서 박대라도 당하면 정말 안 오느니만 못하게 된…….

“에르네스트!”

에르네스트의 어머니가 갑자기 현관 밖으로 소리를 질렀다.

곧이어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에르네스트가 순식간에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예? 무슨 일이에요?”

“이 녀석아! 전화로 누가 온다고 이야기는 했어야지!”

“이, 이야기했었잖아요. 친구라고요. 어머니가 데리고 오라고…….”

“그게 누군지 이야기는 했어야 할 것 아냐!”

에르네스트의 어머니는 고함을 지름과 동시에 발에 걸려 있던 슬리퍼를 날리려는 듯 발을 들어 올리다가 잔뜩 긴장해서 겁먹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날 발견하시고는 도로 발을 내리셨다.

“그게…….”

그러고는 황망하게 더듬거리셨다.

“어서 오렴, 타티아나.”

환영 인사를 받고도 살짝 긴장되었다.

물론 폐가 되겠다는 것을 알고 온 것이지만 미리 전화로 허락을 받아서 아무래도 괜찮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실수였던 모양이다.

이렇게 부담스러워하실 줄은 미처 몰랐다.

지금이라도 일단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약간 후회하고 있는데, 사샤가 물컵을 내밀었다.

“여기요, 누나. 물.”

“고마워요, 사샤.”

정말 목이 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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