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0화 (100/1,277)

##  100화

잇달아 들어온 루슬란 오빠를 본 에르네스트 어머니의 안색은 더더욱 창백해졌지만, 루슬란 오빠는 나처럼 당황하거나 하지 않고 아주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루슬란 유리예비치 베르체노프입니다. 전화를 미리 말씀을 드리긴 했지만 갑자기 찾아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동생 타티아나의 보호자로 함께 실례하게 되었습니다. 괜찮으실는지?”

“괜찮고말고요. 아…… 남편이 지금 자리를 비워서…….”

루슬란 오빠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스테판 니콜라예비치께서 함께하실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너무 괘념치 마시길. 어디까지나 오늘 전 타티아나의 들러리이니 없는 사람처럼 편히 생각해 주세요.”

에르네스트의 어머니는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냐며 호들갑스럽게 말씀하셨고 루슬란 오빠는 웃음을 잃지 않고 분위기를 편안하게 이끌어 나갔다.

그런데 난 오가는 인사를 들으며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스테판 니콜라예비치라는 분이 아마 에르네스트의 아버지인 것 같긴 한데, 그 이름이 지금 왜 나오는진 잘 모르겠다. 오빠는 분명 에르네스트를 오늘 처음 봤을 텐데?

어쨌건, 루슬란 오빠가 앞장서서 인사하고 상황을 정리하니 에르네스트의 어머니도 나와 루슬란 오빠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가늠이 되시는 듯했다.

“우선 소파에 앉아 있어요. 마실 것을 내올 테니.”

“예.”

그렇게 에르네스트의 어머니와 사샤는 함께 부엌으로 들어갔고, 남은 세 명은 옹기종기 소파에 앉았다. 난 가만히 앉아 눈만 돌려 집을 둘러보았다.

실제로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가끔 별장으로 쓴다는 말이 정말인지 필수적으로 있어야 할 소파와 텔레비전, 테이블 등을 제외한 다른 가구나 장식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빠, 에르네스트의 아버지는 어떻게 아시나요?”

난 루슬란 오빠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오빠는 에르네스트를 돌아보더니, 시선을 교환하고는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며 말했다.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네. 스테판 니콜라예비치는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분이셔.”

“……예?”

갑자기 무슨 말이야?

영문을 몰라 되묻자 루슬란 오빠가 말했다.

“우리 사업파트너 중 한 분이시거든. 그것도 우리와 기술 파트너쉽을 체결한 기업 중에선 꽤나 독보적인.”

“뭐라고요?”

생전 처음 듣는 소리였다.

에르네스트의 아버지가 이끄는 기업이 사업적으로 우리 베르체노프와 연결되어 있다고?

난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앞으로 쭉 빼고 오빠 너머에 앉은 에르네스트를 찾았다. 그는 꽤나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

“응.”

“알고 있었나요?”

“아니.”

“모르셨다고요?”

내가 다시 캐묻자 에르네스트가 시큰둥하게 이야기했다.

“그래.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떤 기업과 협력관계인지 내가 그걸 어떻게 다 알아?”

“…….”

“너도 모르고 있었잖아.”

“그렇지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난 사실 우리 집도 베르체노프 콘체른이라는 이름의 재벌로 여러 기업들을 집단으로 거느리고 있다는 정도만 안다.

무기 보안 산업, 석유, 가스 등등 여러 가지를 한다고는 하는데 정확히 뭘 하는진 잘 알지도 못한다. 관심도 없고.

에르네스트가 나처럼 아버지의 사업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역시 아무것도 모를 만했다.

조금 위화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납득 못 할 수준은 아니었다.

“……잠깐만요.”

그렇게 관계성이 정리되고 나서야, 난 지금 이 순간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지 파악할 수 있었다.

난 단순히 에르네스트와 사샤의 친구로서 잠시 놀러 온 입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에르네스트의 어머니의 입장에선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등줄기로 싸늘하게 냉기가 스며드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

이렇게 편하게 앉아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난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옆에 있던 루슬란 오빠가 날 올려다보았다.

“왜, 타티아나.”

“에르네스트의 어머니를 도와드리고 올게요.”

“굳이 이제 와…….”

“다 알면서도 가만히 계셨던 오빠는 이따 돌아가서 봐요.”

“…….”

합죽이가 된 루슬란 오빠를 내버려 두고 부리나케 부엌으로 향하니 에르네스트의 어머니와 사샤가 접시에 다과들을 올리다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셨다.

“앉아 있지, 왜 나왔…….”

“제가 도와드릴게요. 차를 내리면 될까요?”

“정말 괜찮은데.”

에르네스트의 어머니는 날 몇 번이고 만류하셨지만 난 끝까지 고집스럽게 앞접시를 닦고 찻잔을 세팅했다.

옆에서 빼꼼히 날 보던 사샤가 말했다.

“손님은 이런 거 하는 거 아니랬는데요.”

“제가 하고 싶어서요.”

“그래요?”

“그래요.”

사샤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내가 부엌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지 그 이상 의문을 품지 않았다.

내 옆을 졸졸 따라다니며 차와 커피는 어디에 있고, 설탕은 어디에 있는지 그 위치를 가르쳐 주려는 모습이 꽤나 기분 좋아 보였다.

“이 주전자는 끓을 때 F 마이너 음이 나요.”

“정말인가요?”

“그럴걸요?”

“정확하진 않으신가 보네요.”

“타티아나 누나가 들어 보세요.”

“그럴까요?”

주전자를 보며 사샤와 놀고 있자, 옆에서 에르네스트의 어머니가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리셨다.

“사샤! 너 언제부터 그렇게 친한 누나가 생겼니?”

“오늘부터요.”

“맙소사, 살다 살다 별일을 다 보겠구나. 아무리 제 형의 친구라지만 사샤가 하루 만에 이렇게 낯을 트다니…….”

기가 막힌 듯 연신 웃으시던 에르네스트의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타티아나.”

“예.”

“그…… 미안하구나.”

어깨를 늘어뜨리고 정말 미안하다는 듯한 얼굴로 말씀하시는데,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까 처음에 말이야, 순간 너무 놀랐지 뭐니? 그래서 타티아나 너도 조금 놀랐던 것 같은데…… 그게 내 본심은 아니었단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에르네스트도 참 말이지…….”

잠시 생각을 정리하시더니, 날 바라보곤 장난스레 말씀하셨다.

“이렇게 예쁜 친구가 있다면 미리 말이라도 해 줬어야지, 깜짝 놀랐잖니?”

베르체노프와 베샤스트니흐 각 가문의 아버지끼리의 관계와 복잡한 사업적인 구조 등은 모두 차치하고, 오늘은 정말 단순하게 아들의 친구로만 날 보아 주기로 하신 것 같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난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도 않아요.”

“그렇지 않긴? 사샤, 타티아나처럼 예쁜 누나 본 적 있니?”

“없어요.”

“사샤도 그렇다잖니?”

너무 직접적인 칭찬에 낯이 뜨겁다. 내가 보기엔 에르네스트의 어머니야말로 미인 중의 미인인 것처럼 보였다.

에르네스트나 사샤가 그 미모로는 따라올 자가 드물 정도로 잘난 것은 다 유전자 덕인 것 같았다.

나도 무언가 붙임성 있게 답을 하긴 해야겠는데, 결국 입 밖으로 나온 것은 아주머니가 너무 고우셔서 에르네스트의 누나인 줄 알았다는 둥, 세련됨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말들이었다.

내 덜떨어진 언어 능력이 한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말에도 에르네스트의 어머니는 너무 기뻐하셨다.

“얘는 정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

그렇게 식탁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잠시, 금세 주전자 안의 물이 다 끓었고 다섯 개의 찻잔이 모두 채워졌다.

난 서빙을 자원했다. 사샤 역시 손을 번쩍 들었다.

물론 뜨거운 차는 내가 담당해야 했고, 사샤에겐 델 걱정이 없는 다과가 맡겨졌다.

테이블에 모든 것이 세팅되자 훨씬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티타임이 시작될 수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내 아들이긴 하지만 어쩜 집에 친구도 한 번 데려오지 않고…… 내가 얼마나 걱정이었는지 모른단다. 그런데 아예 사샤가 형의 친구를 초대했구나? 에르네스트는 대체 뭘 하는지…….”

“어머니, 제발 그만 좀 해요. 절 창피하게 만들어서 죽일 거예요?”

“평소엔 창피함도 없이 그랬잖니? 학교에 무슨 네 팬클럽까지 있다며?”

“아니, 그건 어머니가 계속 여자 친구 없냐고 하시니까…….”

무슨 말이 오가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과거 두 모자 간에 여러 일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난 그 사이에 끼어들어서 에르네스트의 학교생활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떠들 생각은 없었기에 잠자코 웃으며 지켜보았다.

지금 나까지 입을 열면 에르네스트 하나쯤 침몰시키는 것은 정말 일도 아니었다.

난 최소한의 우정으로 그를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뜨리지 않고 살려 주었다.

에르네스트는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내가 가만히 있는 것에 대해 눈짓으로나마 감사를 표해 왔다.

차를 마시고, 에르네스트는 텔레비전에 연결된 비디오게임기를 켰고 루슬란 오빠와 패드를 하나씩 잡았다.

너무 당연한 듯이 둘이서 패드를 잡는지라 왜 동급생인 난 따돌리느냐고 따질 겨를조차 없었다.

둘 다 게임을 잘할 것처럼 생기진 않았는데 무슨 게임을 하는지 가만 지켜봤더니, 격투게임이었다.

에르네스트가 불쑥 물었다.

“잘하세요?”

“조금.”

그렇게 둘은 게임을 시작했고, 난 사샤와 함께 소파에 앉아 그걸 지켜보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

도대체 이 인간 게임을 얼마나 많이 한 거야?

루슬란 오빠는 정말 문자 그대로 에르네스트를 농락하고 있었다. 현란한 패드의 움직임에 따라 에르네스트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게임 잘해서 모스크바 대학교에 들어간 건 아니겠지?

별 이상한 생각이 다 들 정도였는데, 그렇게 루슬란 오빠가 에르네스트를 박살 내자마자 패드를 내려놓더니 중얼거렸다.

“내가 원래 쓰던 패드가 아니라 그런지 잘 안 되네.”

“…….”

승부욕 강한 에르네스트가 다시 덤빌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상대도 안 되게 져 버려서 그럴 생각도 안 드는 모양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어두운 눈으로 내게 패드를 넘겼고, 루슬란 오빠는 사샤에게 넘겨주었다.

당연히 나와 사샤는 대전 격투게임 같은 것이 아니라 아기자기한 협동 게임을 시작했다.

이런 류의 게임은 정말 처음이어서 약간 어리바리하게 굴었다.

사샤가 내게 점프를 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지 잘 모르겠다. 게임 못한다고 실망하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얼마나 놀았을까, 비디오 게임과 더불어 사샤가 가져온 보드게임으로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집에서 다른 남자들과 간식을 먹으며 편하게 게임이나 하고 놀아 본 것은 또 처음이었다.

특히, 늘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있는 모습만 봐 왔던 에르네스트가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게임패드를 붙잡고 있는 모습은 정말 어지간해선 보기 힘든 광경인 것 같았다.

난 새삼 지금 상황이 얼마나 평범하면서도 특별한지 깨닫고는 작게 웃었다.

에르네스트의 어머니께서 놀고 있는 우리에게 물었다.

“저녁 식사도 하고 가겠니? 꼭 식사도 하고 갔으면 좋겠는데.”

난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루슬란 오빠에게 눈으로 물었고, 루슬란 오빠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늦게까지 폐를 끼치는 것 같긴 했지만, 초대받은 입장인데 여기서 굳이 식사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의 어머니께서도 정말로 나와 루슬란 오빠가 저녁 식사를 하고 가 주었으면 하시는 듯했다.

“크게 폐만 되지 않는다면요.”

“폐라니? 무슨 말이니. 되레 지금 차릴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서 걱정이지.”

“그건 괜찮아요. 저기…… 저도 도와드릴게요.”

“그래 줄래?”

가만히 앉아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요리에 자신이 있는 건 아니지만 며칠 전엔 한 번 해 보기도 했고, 난 약간 자신감이 붙어 있는 상태였다.

부엌으로 가자 에르네스트의 어머니가 내게 앞치마를 둘러 주었다.

“자, 앞치마 해 줄게. 뒤로 돌아 보렴. 옷에 튀면 안 되잖니?”

“아…… 감사합니다.”

주방에 하나밖에 없는 앞치마까지 했으니 정말 뭐라도 해야 했지만 에르네스트의 어머니는 굳이 내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솜씨가 좋으셨다.

아직 칼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은 재료들을 씻거나, 도구들을 깨끗하게 씻는 일 정도였다.

그렇게 조금 바보같이 쳐다보고만 있는데, 부엌으로 에르네스트가 따라왔다.

난 그가 왜 왔는지 이유를 몰라 바라보았다. 물이라도 마시고 싶나?

“……?”

하지만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에르네스트는 당연하다는 듯 바구니에 든 감자를 가지고 욕실로 갔다.

쏴아아 물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에르네스트는 세척된 감자를 가지고 나왔다.

“…….”

그러곤 자연스럽게 식탁에 그걸 내려놓고 앞에 앉더니, 칼을 쥐고 감자 껍질을 깎기 시작했다.

심지어, 소위 감자칼이라고 불리는 껍질만 깎아 내는 도구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냥 평범하게 생긴 칼을 편하게 다루고 있었다.

난 처음 칼을 만졌을 때 행여나 손을 다칠까 봐 정말 벌벌 떨면서 썼었는데, 에르네스트는 거의 전문 요리사처럼 휙휙 껍질을 벗겨 나갔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난 뭐라 묻지도 못하고 지켜보았다.

내가 황당해하는 게 느껴졌는지, 에르네스트의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감자를 깎는 건 항상 에르네스트의 몫이었어서 말이지.”

“정말인가요?”

“감자 하나만큼은 나보다도 잘 깎는단다? 모르는 사이 어디 요리학원을 다녔는지도 모르겠어?”

에르네스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툴툴거렸다.

“제발 이상한 말 좀 하지 마세요.”

그러면서도 손은 쉴 새 없이 칼을 움직여 감자를 깎고 있었다.

평생 감자를 깎긴커녕, 칼을 쥐는 일도 없을 것같이 생긴 에르네스트가 후드를 눌러쓰고는 거의 전문가 같은 손놀림을 보여 주는 것을 보니 약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

이 또한 에르네스트의 한 부분이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을 때의 에르네스트는 그야말로 러시아의 자랑이라고 불릴 만한 천재 중의 천재였다.

하지만 집에서의 에르네스트는 게임도 즐겨 하고, 어머니가 음식을 하실 땐 감자를 깎는, 그런 면모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에르네스트.”

“왜.”

“다음에 저도 가르쳐 주세요.”

“뭘?”

“감자 깎는 방법요.”

“지금 나 놀리는 거야?”

“설마요.”

진심으로 감탄 중인데, 에르네스트는 내 마음을 몰라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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