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잠에서 깨어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꼭두새벽이었다. 눈가를 비비다가, 습관적으로 스마트폰 옆을 더듬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제야 난 어젯밤, 아버지에게 생일 선물로 받았던 가넷 목걸이를 루슬란 오빠에게 주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냈다.
“…….”
심적으로 이해는 간다.
진짜 어머니에겐 엉망으로 대하고, 정작 그 유품은 목에 찬 채로 천진하게 구는 내 모습이 역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루슬란 오빠의 평정은 한 번에 무너졌다. 그뿐이었다.
난 루슬란 오빠를 정말 가엾게 생각한다.
가넷 목걸이를 내놓으라는 것은 감정에 휩쓸린 요구였지만 난 루슬란 오빠가 무엇을 요구하건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내 손으로 목걸이를 끌러서 내어 준 것이다.
“…….”
우울하게 이불을 걷어 냈다. 밖으로 나오니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다.
“일어났어?”
“……예.”
루슬란 오빠는 이 새벽에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나오는 방송은 내가 알지 못하지만 그리 재미있어 보이진 않았다.
잠이 잘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욕실에 가서 간단하게 세면을 하고 양치를 하고 나올 때까지도 루슬란 오빠는 계속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난 조금 서성였다. 1박에 수십만 루블씩 하는 이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엔 어디든 갈 곳이 많았지만, 지금 난 어디든 갈 곳이 없었다.
다시 침대로 돌아가서 좀 누워 있을까 생각할 때였다.
“타티아나.”
루슬란 오빠가 날 불렀다.
“예?”
“뭐 하고 있어. 독수리처럼 멀찌감치서 보고 있지 말고, 이리 와.”
한참이나 뒤편에서 어물거리고 있는 게 보지 않아도 느껴진 모양이었다. 난 어쩔 수 없이 터덜터덜 소파로 갔다.
자다 일어나서 슬립에 가운만 걸친 차림이라 조금 추웠다. 웅크리고 있자 루슬란 오빠가 담요를 건네주었다.
“덮어.”
“……고마워요.”
루슬란 오빠가 준 담요는 방금까지의 체온을 그대로 담고 있어서 따뜻했다.
담요를 어깨부터 둘러메고는 눈치를 살폈다. 루슬란 오빠는 아무 생각도 없는 것처럼 텔레비전에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빠 역시 내 쪽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음이 느껴졌다.
“…….”
한동안 침묵 속에서 작게 틀어 놓은 텔레비전 소음만이 존재했다.
난 지금 여기서 오빠가 어제에 이어 진중한 이야기를 꺼내진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분명히 이번에도 또, 아무렇지 않게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릴 것이다.
속상했다.
난 루슬란 오빠와의 관계가 일방적인 배려나 피상적인 우애가 아닌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길 원했다.
하지만 루슬란 오빠는 과거의 그림자를 버티지 못했다. 때문에 아예 날 새 동생으로 여기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듯했다.
사람 마음이란 게 어찌 마음대로 되겠느냐만, 조금 화가 나기도 했다.
편하게 사는 건 인정 못한다던 그 꼿꼿한 인간은 어디로 가 버린 거야?
발작적으로 한마디 쏘아붙이려다가, 그것도 다 귀찮아져서, 그냥 침대로 돌아갈까 조금 고민했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 타티아나.”
이 인간이 속도 모르고 그런 소릴 했다.
물론 루슬란 오빠가 지금 나보다 더 스트레스 받고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 와중에도 담담하게 어른인 척하는 것이 정말 꼴 뵈기 싫었다.
“오늘내일로 주말을 보내면 정말 콩쿠르가 코앞이라서요. 앞으론 쭉 아침부터 연습실에 가 있을 생각이에요. 혼자 갈게요.”
“혼자는 위험해.”
“빅토르가 같이 가잖아요. 위험할 건 없어요.”
“그렇게 위험하단 게 아니라…….”
“그럼 뭔가요?”
“…….”
루슬란 오빠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너무 날카롭게 말한 게 아닌지 조금 후회되긴 했지만 이제 와서 쏟은 말을 담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루슬란 오빠가 말했다.
“마음대로 해. 그럼 나도 오늘은 이쪽 지부에 용무를 좀 보고 있을 테니.”
“……그러세요.”
“그래. 그리고…….”
일단 오늘 하루는 각자 움직이는 것으로 순순히 합의하던 오빠가 이것만큼은 양보하지 못한다는 듯, 내 쪽을 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저녁은 같이하도록 하자.”
“…….”
“알았지?”
“예. 알겠어요.”
모스크바에 있을 때도 아버지는 정말 급한 일이 있지 않고서야 어지간해선 저녁 식사만큼은 가족이 함께 모여서 하도록 했다. 그것은 일종의 법칙처럼 우리들에게 이어졌고, 난 그걸 거부할 생각까진 들지 않았다.
* * *
조식이 제공되는 시간이 되자마자 곧바로 내려가서 식사를 하곤 호텔 밖으로 나왔다.
“……후우.”
밖으로 나와 입김을 내며 조금 기다렸다.
빅토르에게 미리 연습실을 구해 달라고 부탁을 해 놓은 상태였다. 아마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연습실 예약이 되면 곧장 가서 오늘은 정말 저녁때까지 온종일 틀어박혀 있을 생각이었다. 학교에 가거나 누가 방해할 일도 없으니 식사 시간을 제외한다면 온전히 피아노 앞에 앉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빅토르가 조금 늦는다. 뭔가 문제라도 생겼나?
일단 로비에서 기다릴까 싶어 발걸음을 돌렸는데, 저편에서 검은 슈트를 입은 남자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빅토르였다.
“빅토르!”
“아가씨…….”
빅토르는 드물게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죄송합니다만, 조금 기다려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연 곳이 없다고 하는군요.”
“아…… 그렇겠네요. 미안해요, 빅토르.”
항상 오후에 연습실에 가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지만,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누가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문을 열겠는가? 아무 생각 없이 빅토르에게 부탁한 내가 바보 같았다.
빅토르는 고개를 젓더니 이어 말했다.
“10시는 되어야 된다지만, 그렇게 오래 기다리실 필요는 없고 조금만 기다리시면 제가 따로 조치를 해서…….”
“아뇨,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해 주실 필요는 없어요.”
따로 조치를 취하는 게 뭔진 모르겠지만, 조금 기다려서 될 일이라면 그냥 기다리고 싶었다.
“음…….”
하지만 연습실에도 못 가게 되고, 갑자기 할 일이 없이 스케줄이 공중에 붕 뜨니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원래 이 시간엔 호텔방에서 루슬란 오빠와 뒹굴거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해가 뜨면 관광을 하러 나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호텔방으로 다시 돌아가서 죽치고 있으려니 그것도 싫었다.
어쩌지.
“빅토르.”
“예, 아가씨.”
“제가 어디로 갔으면 좋겠어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눈을 가늘게 뜨는 빅토르를 보며 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충 떠들었다.
“음…… 그냥 우리 산책이나 조금 하지 않을래요?”
“아가씨. 이렇게 어둡고 추운데 혼자 다니시는 건 추천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만.”
“왜 제가 혼자예요? 빅토르가 같이 가 주시면 되잖아요.”
“전 어디까지나 은밀하게 경호를 하는…….”
“여긴 위험한 외지니까 밀착 경호로 바꿔 주세요.”
억지라면 몇 번이고 쓸 수 있었다.
빅토르는 날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함께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날이 차니 산책이 아닌 드라이브로 대체하시죠.”
“그럴까요.”
드라이브건 뭐건 어쨌거나 상관없었다. 애초에 산책이란 말도 당장에 떠오르는 게 없어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지, 사실 영하 10도는 되는 이 새벽 날씨에 밖을 돌아다니고 싶진 않았다.
잠시 후, 빅토르가 이끄는 경호팀이 차를 준비했고 난 빅토르와 함께 뒷좌석에 올랐다.
“어디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일단 넵스키구 쪽으로 빠져나가서 네바강 대로를 타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빅토르는 따로 내게 묻지 않고 바로 지시했다. 난 지금 빅토르가 날 어디로 데리고 가든 아무 불만도 없었기에 얌전히 좌석에 머리를 기대었다.
새벽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한적하고 조용했다. 가끔씩 헤드라이트 불빛이 스쳐 지나갔다.
저 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하나씩은 목적지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겠지? 아무 목적지도 없이 무의미하게 도로에서 기름을 태우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더니 조금 신기했다.
“…….”
멀거니 창밖을 내다보며 상념에 잠겨 있자니 옆에 있던 빅토르가 말을 걸어왔다.
“아가씨, 안마는 안 하십니까?”
성악을 배우기 이전의 난 자주 몸이 저리고 뻐근한 느낌을 받았으므로 늘 기회가 닿을 때마다 차량 옵션으로 달려 있는 안마 기능을 놓고 빅토르와 실랑이를 벌이곤 했다.
제발 품위를 지켜 달라는 입장이었던 빅토르가 갑자기 장난스레 이런 말을 하니 조금 쌩뚱맞았다.
하지만 이 또한 그가 날 위하는 방법이리라. 난 웃으며 대답했다.
“어제 스파에서 목욕을 조금 오래 해서 그런지 별로 내키지 않네요.”
어제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루슬란 오빠는 할 일이 있다며 외출했다. 난 호텔방에 홀로 앉아 있다가 그대로 잠드는 것도 싫어서 방 밖으로 나와 돌아다녔던 것이다. 이전에 봐 놓았던 스파는 시간을 죽이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거기 안마의자가 꽤 괜찮더라고요. 하나 살까 싶어서 모델명도 적어 놨어요.”
“진담이십니까……?”
“예. 보세요.”
난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스마트폰 메모장을 빅토르에게 보여 주었다. 빅토르의 표정이 우스꽝스럽게 변했다.
“이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제 방엔 빈 공간도 많아서 충분히 들어갈 것 같은데요.”
“공간 문제가 아닙니다, 아가씨…….”
빅토르는 대놓고 보라는 듯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내 앞에서 이렇게 스스럼없이 한심하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는 사람은 정말 빅토르밖에 없었다.
실실거리며 웃고 있는데, 빅토르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렇군요. 아가씨의 방은 아직도 텅텅 비어 있죠.”
“텅텅 비진 않았는데요.”
“제가 보기엔 빈방이나 다름없습니다. 세상에 누가 그 방을 베르체노프가 아가씨의 방이라고 보겠습니까?”
빅토르가 봐도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내 방엔 아직도 몇 가지 필수적인 가구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를 집에 초대해서 그 살풍경한 내 방을 보여 주곤 아무리 나라도 조금 부끄러움을 느껴서 벽지라도 조금 화사한 색으로 바꿔 볼까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은 생각일 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방에 안마의자를 들여놓는 상상을 하니 조금 재미있었다. 거의 초현실적인 풍경이 되지 않을까? 다시 아나스타샤를 초대하게 되면 내 방을 본 그녀가 대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
빅토르는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흘겨보더니 결국 졌다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뭐라도 좋습니다. 안마의자도 좋고 다 좋으니 채워 넣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정말요? 아버지에게 빅토르가 허락했다고 말해도 될까요?”
“절 자르고 싶으시다는 말씀은 굳이 그렇게 돌려 말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하하하.”
설마, 세상이 무너진들 내가 당신을 자를 수 있을까.
깔깔거리며 웃자 빅토르 역시 따라 웃었다. 이렇게 편한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빅토르.”
“예, 아가씨.”
가만히 그를 부르자 그가 화답했다.
하지만 난 빅토르를 불러 놓고도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항상 쓰고 있는 선글라스를 벗은 빅토르는 언제나처럼 조금 칠칠치 못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언제나 조금 가벼운 언행으로 가끔 날 열 받게 하기도 하지만, 그 누구보다 믿을 만한 유능함으로 날 지지해 주고 있는 사람.
말없이 조용히 나와 시선을 교환하던 빅토르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깊게 생각하지 말고, 거슬리면 무시해 버리라는 듯, 그렇게 한없이 가벼운 어조로 빅토르가 말했다.
“저는 잘 모릅니다만, 아가씨의 방을 그렇게 청소한 건 아가씨의 명령이 아니었죠. 그러니 그걸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 마시죠.”
“……그런가요.”
“예. 그냥 원하는 대로 하시죠.”
그냥 원하는 대로가 사실 가장 어렵다는 것을, 지금 빅토르에게 말해 봐야 괜한 걱정만 사게 될 것 같았다.
난 대신 다른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빅토르. 저도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말씀하시죠.”
“빅토르는 몇 년 동안 제 경호원이었던 건가요?”
그간 한 번도 묻지 않았던 것이었다.
내가 처음 학교에 가게 된 것이 8월이었으므로 그가 내 전속경호를 맡게 된 것은 대략 7개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난 어쩐지 여태껏, 그리고 지금 그가 날 대하는 태도에서 어쩌면 그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래 날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을 느꼈다.
빅토르는 잠시간 침묵했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했다. 난 조금 짜증이 났다. 이것도 말 못해 줘? 또 아버지가 입막음이라도 했어?
“…….”
그런 내 시선을 빅토르도 느꼈는지 그는 처음으로 내 질문에 답해 주었다.
“6년입니다.”
“6……년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긴 시간에 난 말문이 막혀서 더듬거렸다.
빅토르는 어딘가 회한 어린 눈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그때도, 지금도 전 자진해서 이 자리에 있습니다.”
“…….”
수천 마디의 말도 필요 없이 그 한마디만으로도 난 갑작스럽게 짓쳐드는 안도감을 맛보았다.
누군가 내가 모르는 날 알고 있으리란 불안감과, 저택에서도 암암리에 느껴지는 시선들도 모두 신경 쓸 것 없이 빅토르에겐 그 어떤 질문을 할 필요도, 부채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