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나에겐 조금 나쁜 버릇이 있다.
그녀에 대한 기억이나 힌트 등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을 보면 조금이라도 정보를 캐내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질문한다는 것이었다.
그걸 안다고 한들, 내가 그녀로부터 진정 무언가를 건네받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타티아나라는 이름이 지금 내 것이라서, 기억이 없는 타티아나가 해야 할 행동은 바로 이것이라서 난 그렇게 해 왔다.
하지만 빅토르에겐 그럴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아무리 일이라지만 6년이나 내 곁을 지켜 주었다면 감정적으로 좋지 않은 사이이진 않았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들에게,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난폭하게 굴었지만 유독 자신의 경호원에겐 친절했을지도 모른다.
모처럼 가벼운 마음이 들었다. 직접적으로 옛날 일들에 대한 것을 묻지 않고, 빅토르가 말하기 편한 것들만 골라서 묻자 그는 잘 대답해 주었다.
“소로킨은 본래 아버지의 운전을 맡고 계셨다고 그러셨죠?”
“맞습니다. 베르체노프에 적을 두게 된 것으로는 저보다 훨씬 오래되었죠. 한참이나 유리 님의 기사를 담당하다가, 요번에 저와 함께 팀을 꾸린 겁니다.”
“그렇군요.”
빅토르와 이야기를 하면서 그간 알지 못했던 자세한 것들을 알게 되었다.
빅토르가 날 경호하기 시작한 것이 6년이나 되었다는 것이나, 혼수상태일 때도 다른 팀으로 옮겨 가지 않고 기다려 주었단 것 등등. 이러저러한 이야기였다.
그냥 혼자 상상해 보았다. 빅토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6년 전부터 빅토르는 그녀가 말썽을 부리고 다니는 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론 친밀해서 감정이 나쁘지 않았다 하더라도, 가끔은 쓴소리를 하기도 하고, 충고를 하기도 했겠지.
그럼 또 한 성격 하는 그녀가 가만있었을 리가 없었다. 가끔은 서로 고성을 지르며 싸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빅토르는 떠나지 않고 남아 주었다.
그는 내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어떤 감정일까.
“…….”
빅토르에게 조금 실례라는 생각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소로킨, 자하르와 사이는 어떠세요? 좋으신가요?”
“……아가씨는 어째 제가 아가씨에게 친구들과 사이는 좋냐고 물어야 할 것을 거꾸로 묻고 계신 것 같습니다?”
듣고 보니 그렇지만 아무렴 어떤가?
“대답해 주세요. 궁금하잖아요.”
“그게 왜 궁금합니까?”
“전 화목한 걸 좋아하니깐요.”
“좋습니다.”
“에이, 정말. 그런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물어볼게요. 소로킨과 술자리라도 가져 본 적 있나요?”
싱겁게 넘어가려는 빅토르를 말로 붙잡고 늘어지자 빅토르가 딱 잘라 대답했다.
“이 직업을 가지고 술을 마시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 원래 종종 한잔하는 스타일이었지만…… 술 끊은 지 한참 되었죠. 지금은 못 마십니다.”
“어…… 그런가요?”
“예. 저희가 누릴 수 있는 기호품은 담배 정도죠. 사실 이것도 끊어야 합니다만.”
건강 문제로 스스로 끊는 것이 아니라, 직업 때문에 술을 끊어야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사표를 던질 사람이 많을 것 같았다. 이 러시아에선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인 것이다.
그 후로도, 왼쪽에 네바 강을 낀 채 대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즐기며 빅토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빅토르는 나와 루슬란 오빠가 싸움 아닌 싸움을 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결코 내게 오빠와 사이좋게 지내라느니, 그런 말은 하지 않고 다른 잡설에 집중했다.
나 역시 빅토르가 긴 시간 동안 베르체노프 가문에 있으면서 많은 것을 지켜보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결코 그에게 대답하기 어려운 것들을 묻지 않았다.
난 이렇게 겉도는 대화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빅토르와 이야기하는 것은 이상하리만치 편안했다. 예전에도 몇 번이고 이런 일이 있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빅토르.”
“예.”
“오늘 그냥 연습하지 말까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했다.
내 입으로 뱉고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늘어진 소리였다. 이제 콩쿠르까지 며칠 남았다고 이런 소릴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심지어 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주일 가까이 시간을 보내면서 미하일 선생님이 말했던 부분에 대해선 감도 못 잡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난 다른 데에 정신을 팔 때가 아니었다. 피아노에 몰입해야 할 때였다.
하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내 어리광을 마주한 빅토르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내놓았다.
“연습을 안 하신다고 해서 달리 하실 일도 없으시지 않습니까?”
“……미워요.”
“하하, 제가 너무 정곡을 찔렀나요?”
정곡이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했다.
아나스타샤도 늘 이런 식으로 날 구박하긴 하지만, 적어도 당신은 나한테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냐?
입을 삐죽이고 있자, 빅토르가 달래는 투로 말했다.
“연습을 하기 싫으시다면…… 친구를 부르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친구요?”
“예. 어제의 그.”
그런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기 때문에 난 눈을 흘겼다.
난 내 연습에 대해선 항상 내가 결정하지,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묻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내가 연습을 할지 말지에 대한 의사를 물어본 것은 빅토르가 지금처럼 나와 놀아 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지, 다른 해결책을 제시해 주길 바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빅토르가…….”
“아가씨.”
순간, 빅토르가 내 말을 끊더니 조금 무겁게 말했다.
“전 아가씨가 원하신다면 절 가깝게 여겨 주시는 건 좋지만, 친구라는 선택지와 저울질하진 않아 주셨으면 좋겠군요.”
조금 충격이었다.
아무리 가깝다 해도 선을 지키라는, 확고한 밀어냄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선을 지키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그 선은 내 생각보다 너무 멀었다. 그저 경호원과 고용인의 관계일 뿐이라는, 그런 말이었다.
빅토르가 갑자기 이렇게 차갑게 말할 줄은 몰랐다.
“왜…… 왜 그런 말을 하세요?”
“전…….”
불식간에 나온 내 말은 빅토르가 대답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그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자체만으로도 난 꽤나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엉망이었던 인간관계.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도 하나 없는 삶. 집에 아나스타샤를 데리고 왔을 때 내게 처음 친구가 생겼다며 축하해 주던 사람들로 미루어 보면 다른 인간관계 그 무엇 하나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때문에 난 그녀가 평생을 친밀한 사람 한 명 없이 고독하게 살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단 한 명 빅토르는 6년 전부터 그녀를 경호하며 괜찮은 관계로 지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거꾸로 빅토르의 입장을 생각해 본다면, 그가 왜 지금 내게 선을 긋고 자신보다 친구를 가까이하라 종용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무엇을 떠올리고,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것 같아서,
“빅토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어요.”
“아가씨, 혹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만. 아가씨도 이해하시게 될…….”
“충분히 이해해요.”
비꼬는 것처럼 들리지 않도록 진지하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도 더 잘할게요. 빅토르의 믿음을 얻을 수 있게.”
“…….”
빅토르는 조용히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난 빅토르가 안심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 가족들과 좋은 관계를 구축하고 친구들과도 잘 지냄으로써, 내가 빅토르 또한 한 명의 친구로 여긴다 한들 그가 큰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있도록.
난 쾌활하게 스마트폰을 들었다.
“그럼 전화를 해 볼까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렇게 에르네스트의 번호를 누르려다가, 멈칫했다.
“그런데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무슨 핑계로 전화를 하면 좋죠.”
“그것도…… 그렇군요.”
빅토르의 목소리에도 조금 당혹스러움이 서렸다.
친구를 부르라고 편하게 말하긴 했지만, 지금 에르네스트를 불러내는 것은 여러모로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다.
내가 고민하자 빅토르가 어물거리며 말했다.
“괜찮지 않겠습니까? 어제 그쪽 가족들과 인사도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냥 우연이었거든요?”
난 에르네스트의 어머니와 인사를 하고, 많은 감동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르네스트와 직접적으로 더욱 긴밀해진 것은 아니었다.
물론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처럼 생겨선, 감자를 깎는 둥 신선한 모습을 많이 보여 줘서 조금 친근감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아침부터 전화를 해서 불러내면 에르네스트가 어처구니없어할 것이다.
최근 통화 기록을 보니 3개월 전이었다. 이런 마당에 갑자기 전화를 걸어 놀자고 하면 황당하지 않겠는가?
“역시 조금…….”
다른 걸 생각해 봐야겠다고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메시지가 하나 날아왔다.
“……!”
혹시 루슬란 오빠가 보낸 것인가 싶었지만, 발신자를 보니 에르네스트였다.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귀신이 따로 없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빅토르도 기가 막히다는 듯 말했다.
“도청 장치 같은 게 있진 않은지 차량 검사를 해 봐야겠군요.”
“…….”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황당했다.
난 메시지를 확인했다.
[타티아나, 콩쿠르 준비는 잘 되어 가?]
이런 안부 인사 같은 메시지를 보내다니……?
난 대충 답변하려다가 에르네스트가 재작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의 우승자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언가 심오한 뜻이 숨어 있는 메시지임이 분명했다.
“…….”
빅토르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즉각 통화 버튼을 눌러 에르네스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타티아나.
“에르네스트. 갑자기 메시지라니 놀랐어요.”
난 메시지를 받고 놀랐지만 에르네스트는 전화를 받고 놀랐는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말했다.
“콩쿠르라면 잘 준비하고 있어요. 거기에 대해 해 주실 말이라도 있으신가요?”
- 음…… 있어.
조금 기대되었다.
콩쿠르를 불과 며칠 앞둔 이 타이밍에 갑자기 문자메시지라면 이전 우승자가 해 줄 수 있는 조언 같은 것임이 분명했다.
난 그런 것에 기대거나 하는 타입이 아니었지만, 가뜩이나 되는 일도 없이 답답하던 차에 에르네스트가 해 주는 말이 듣고 싶었다.
뭐라도 좋았다. 그리고 뭐라도 유익할 것이었다. 어쨌든 간에 그는 러시아의 자랑, 중앙음악학교의 수석이지 않은가?
그렇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 혹시 초대권 남는 것 있어?
“……예?”
그가 쌩뚱맞은 소리를 했다.
뭘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묻자 그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사정을 설명했다.
- 다름이 아니라, 어머니와 사샤가 갑자기 네 콩쿠르를 보고 싶다고 해서…… 관람할 수 있는 표가 있나 알아보려 했는데 당장 내일모레이다 보니 매진이더라고. 이 콩쿠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꽤나 인기가 많거든.
“아…… 그래요?”
- 그래서 말인데, 콩쿠르 참가자들에게 나오는 초대권 중 한 장이라도 혹시 남는다면 팔 생각 없나 싶어서 말야.
기대했던 조언 등은 아니었지만 문득 웃음이 나왔다.
“팔긴요, 드릴게요. 몇 장이나 필요하신가요?”
- 어…… 몇 장 있는데?
“세 장이요.”
- ……? 그렇게 많이 남았다고?
“예.”
더 남아 있진 않았다. 나한테 남아 있는 표는 딱 세 장이었다. 내가 참가자로서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줄 수 있도록 받은 초대권은 다섯 장이었고 그중 두 장은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에게 주었지만 나머지는 딱히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나스타샤에게라도 주고 싶었지만 리사이틀 같은 개인 콘서트도 아니고 콩쿠르에 친구를, 그것도 가까이도 아니고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초대하는 건 조금 경우가 아닌 것 같아서 주지 않았다.
에르네스트처럼 우연히 가까이에 있어서 기회가 닿는다면 괜찮겠지만, 굳이 콩쿠르를 멀리까지 와서 봐 줄 필요까진 없는 것이다.
물론 그것도 콩쿠르의 규모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쨌든 청소년 콩쿠르에 그럴 필요까진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그럼 두 장만 부탁해도 될까? 어머니와 사샤의 몫으로.
“그냥 다 드릴게요.”
-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나중에라도 누군가 네가 초대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아마 없을 거예요. 괜찮아요.”
어쨌든, 에르네스트는 운이 좋았다.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아하며 말했다.
- ……알았어. 고마워. 어머니가 무척 기뻐하실 것 같아. 사샤도.
“저도 어제 있었던 멋진 저녁에 대한 보답이 될 것 같아서 기분이 좋네요.”
- 그래? 아무튼 알았어. 그러면 콩쿠르 당일에 앞에서 만나는 걸로…….
“잠시만요, 에르네스트.”
말이 끊어지기 직전, 난 급히 말했다.
“지금 봐요.”
- ……뭐?
“지금 만나자고요. 티켓 드릴 테니.”
다행히 여분의 티켓은 내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백 안에 고이 잠들어 있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그에게 티켓을 주는 건 가능했다.
- …….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그로부턴 말이 없었다.
아무리 핑계가 좋았다지만, 너무 급하게 말했나? 약간 후회하려는 찰나 그가 말했다.
- 어디야?
어디긴요. 도로 위를 정처 없이 떠도는 중이지.
“아파트 앞으로 갈게요.”
드디어 내 행선지가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