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약속 시간에 맞춰 아파트 밖으로 나온 에르네스트는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다가, 문득 최근 통화 목록을 다시 펼쳤다.
에르네스트는 아직도 조금 혼란스러웠다.
먼저 메시지를 보낸 것은 맞지만, 그건 별 기대 없이 거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보낸 것이었다.
타티아나의 콩쿠르를 직접 보고 응원해 주고 싶다는 어머니와 동생의 성화에 못 이겨 에르네스트는 2시간 동안이나 인터넷을 뒤지고 수소문을 했지만 결국 티켓을 구하지 못했고, 지쳐 버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암표라도 구해 볼까 생각하다가, 친구의 콩쿠르에 암표를 구한다는 것도 조금 어이없는 일이라 생각해서 최후의 방법으로 미뤄 두었다.
그러고 나니 혹시 참가자 본인인 타티아나가 남는 초대권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닿은 것이다.
물론 확률은 극히 희박했다. 참가자에게 주는 초대권은 몇 장밖에 되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혹시나 하면서도 크게 기대하지 않고 스마트폰을 들고 메시지를 작성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메시지로 운을 떼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곧장 날아든 전화와 초대권이라면 세 장이나 남았으니 당장 만나자는 제안.
에르네스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별일이네.”
정말 별일이었다.
조금 기다리자 검은색 벤츠가 도착했다. 진한 선팅으로 내부가 안 보였지만, 에르네스트는 이 차가 어젯밤 보았던 베르체노프가의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조심스레 다가가자 뒷좌석 창문이 스르르 내려갔다.
그 너머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안녕. 타티아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니 언제나처럼 우아한 어투의 답인사가 돌아왔다.
타티아나는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그대로 말했다.
“일단 타시겠어요?”
“…….”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그냥 쿨하게 얼굴 보고 표를 주고 가려는 건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이 아파트까지 차를 끌고 왔을 리가 없었다.
어쩐지 그럴 것 같아서 에르네스트는 조금 멀리까지 나가도 괜찮을 차분한 옷을 입고 나왔다. 하지만 예상했다고 해서 불안감이 사그라드는 것은 아니었다.
“티켓 주러 온 것 맞지?”
“원하는 건 차차 드릴 테니, 일단 타세요.”
“……너 무슨 마피아 같아.”
베르체노프 콘체른은 무기와 방산 산업에도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마피아는 아니었다. 방금 에르네스트가 불식간에 내뱉은 발언은 듣기에 따라 상당한 실례이자,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난데없이 차 안에서 유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타티아나는 앞좌석을 향해 웃지 말라고 소리를 빽 질렀다.
말실수를 했던 에르네스트는 그 광경을 보고 나서야 조금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실례할게.”
차 문을 열고 뒷좌석에 앉으니 그제야 에르네스트는 차 안에서 누가 웃었는지 알 수 있었다.
“웃지 말아요, 빅토르.”
“하하하, 아가씨. 방금 말씀은 정말 저로서도 어떻게 변호해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변호 좀 해 주세요.”
“제가 본업이 변호사가 아니라서 말입니다.”
조수석에 타고 있는 타티아나의 전속 경호원, 빅토르가 시원스레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적당한 약속 장소를 고르시지 그러셨습니까? 갑자기 집 앞까지 픽업을 간다고 하니 저 친구도 놀란 것 아닙니까.”
“와…… 그런데 빅토르 정말 많이 변한 거 알아요?”
“제가 말입니까?”
“그래요. 예전 같았으면 저 친구라는 단어 같은 건 쓰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렇습니까?”
빅토르는 에르네스트에게 취하는 태도에 대해 무언가 대답을 하는 대신 껄껄 웃어넘겼고, 타티아나는 불만 어린 시선으로 빅토르를 한참이나 노려보다가 그가 고개를 돌리지 않자 그제야 에르네스트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이른 아침부터 죄송해요.”
“음…… 괜찮아.”
타티아나는 고개를 틀고 에르네스트를 보더니,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말했다.
“우선 차를 마시러 가도록 할까요.”
“…….”
아침 댓바람부터 뜬금없이 무슨 차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 그런 것들을 꼬치꼬치 물을 정도로 에르네스트는 눈치가 없지 않았다.
그렇게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타티아나와 함께 향한 곳은 푸쉬킨스키 구 외곽의 한 카페였다.
시간도 이르고 외곽인지라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가 한 테이블에 앉자마자 바로 종업원이 와서 주문을 받아 갔다. 에르네스트는 카페모카를, 타티아나는 카페인이 없는 캐모마일 차를 주문했다.
“…….”
“…….”
묵직한 어색함이 내려앉았다.
타티아나 역시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진 못했다. 전화로 에르네스트를 불러낼 때까지만 하더라도 상당히 기분이 업돼 있는 듯한 목소리였으나, 정작 에르네스트와 얼굴을 마주하고 앉으니 조금 어색해하는 듯했다.
“그…… 에르네스트. 말씀하신 초대권 여기요…….”
“고마워.”
티켓들을 건네며 타티아나가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그걸 받아서 봉투를 열어 보았다.
“좋은 자리네.”
에르네스트는 다시금 감사를 표하며 말했다.
“정말 고마워. 사샤가 아주 좋아하겠어. 어머니도.”
“다행이에요. 그런데…… 에르네스트.”
타티아나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사샤가 제 연주를 듣고 싶다고 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그래.”
“사샤는 지금 뭘 하고 있나요?”
“자, 아직.”
“음…….”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뭘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았다. 사샤를 데리고 왔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모양이었다.
조금 심통이 난 에르네스트가 입을 열려는 찰나, 타티아나가 먼저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어릴 때 어떠셨나요?”
“무슨 소리야?”
“어릴 때 말이에요. 한…… 지금 사샤와 비슷한 나이였을 때.”
일곱 살 정도의 일이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는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때 벌써 피아노에 상당한 두각을 보이고 있었다.
중앙음악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해서 연주회를 가지기도 했고, 수많은 선생들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
모두 자랑스러운 일들이었지만 에르네스트는 구태여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몰라. 기억 안 나는데.”
“단편적으로도요?”
“모른대도.”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로부터 사샤의 모습을 끌어내려는 듯 이러저런 질문을 던졌지만 에르네스트는 끝까지 저항했다. 그녀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진 대충 알 수 있지만 쉽게 원하는 대로 해 줄 생각이 들진 않았다.
끝까지 모르겠다고 하는 에르네스트를 보며 타티아나는 시무룩하게 팔을 늘어뜨렸다가, 갑자기 장난기가 솟았는지 불쑥 물었다.
“그럼 에르네스트의 어머니에게 여쭈어 보면 될까요?”
“…….”
정도껏 하자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나왔다. 에르네스트가 퉁명스레 말했다.
“내가 네 오빠에게 네가 어릴 때 어땠는지 물어보면, 넌 기분 좋겠어?”
뱉고 나서야 후회했다. 그냥 쉽게 대답해 줄 수도 있었다. 그는 무언가 복잡하고 드라마틱한 과거가 있지도 않았고 평범하게 피아노를 배우며 지금껏 살아왔을 뿐이었다. 이렇게까지 뻗댈 일은 아니었다.
조금 심했나 생각이 들기도 잠시, 타티아나는 충격을 받았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에르네스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조금 더 끈질기게 장난을 걸거나, 혹은 화를 내리라 생각했지만 타티아나는 그렇게 나오지 않았다.
“그건 아니네요. 미안해요, 에르네스트.”
“아니, 괜찮아. 그런데 왜…….”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냥…… 에르네스트라면 어릴 때 어땠을까 궁금해서……. 미안해요. 제가 잘못 생각하고 실수한 것 같아요.”
심각하게 기운이 빠진 모습으로 타티아나가 중얼거렸다. 무슨 이유에서인진 모르겠지만 상당한 실례를 범했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이렇게까지 우울해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
거꾸로 죄인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진짜 할 만한 이야기가 없어서 그래. 온종일 피아노만 쳤던 꼬맹이한테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었겠어?”
“……그렇죠.”
조금 이상하게 대답하며, 타티아나는 테이블 무늬를 세는 듯 시선을 고정했다.
에르네스트는 근래 들어 타티아나가 보인 모습을 떠올렸다.
아나스타샤도 종종 그런 말을 하긴 했다. 사람이 약간 바뀐 것 같다고. 물론 좋은 방향이겠지만, 에르네스트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특히 학기말 파티에 참가해서 선배들과 무대 위로 올라가려고 했던 것이나, 처음 본 사샤와 이상할 정도로 친한 모습을 보이면서 어머니까지 만났던 것, 그리고 오늘은 난데없이 전화를 걸어 와 만나자고 하기까지.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이 이런 행동을 보이진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그 가면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타티아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뇨, 별로…….”
중얼거리던 타티아나가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에르네스트의 걱정 어린 어투를 느끼곤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냥…… 콩쿠르를 앞두고 조금 불안해진 것 같아요. 그 때문이겠죠.”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제가 지금 콩쿠르 말고 다른 걱정거리가 있을 수가 있나요?”
물론 바로 며칠 앞으로 다가온 콩쿠르를 걱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타티아나의 행동을 보자면 지극히 모순되는 말이었다.
에르네스트는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자꾸 하는 타티아나를 보며 이대로 내버려 두어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막 나온 카페모카로 목을 축이고, 에르네스트는 포문을 열었다.
“내 생각이지만, 정말 콩쿠르가 걱정이었다면 날 불러내진 않았을 것 같은데.”
“……예?”
“당장 연습실에 처박혀서 몇 시간이고 피아노를 붙잡고 있는 게 네 스타일 아니었어?”
담담하게,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타티아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금 공허한 눈빛으로 에르네스트를 마주 보았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에 대해 잘 안다고 할 순 없었다. 그녀는 비밀이 많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늘 알 수 없었다.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했고, 이해 못 할 행동들을 하기도 했다.
관심이 가는 것과는 별개로, 타티아나가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앞서, 적어도 타티아나가 세상 그 무엇보다 피아노를 우선시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 점을 존중하고, 지지해 주고 싶었다.
“어제도 사샤와 친해진 것은 좋지만, 연습도 마다하고 시간을 보냈잖아.”
“그…… 싫으셨나요?”
“아니? 싫을 리가 있나.”
피아노가 없는 곳에서 타티아나가 보인 모습은 더더욱 에르네스트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교복도, 드레스도 아닌 사복 차림의 타티아나는 평소보다 훨씬 더 격의 없이 모두를 대했다.
앞으로도 그런 모습을 많이 보고 타티아나와 가깝게 지내고 싶은 것은 어쨌건 거짓 없는 그의 본심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사심에 앞서 할 말은 해야 했다.
자신이 넘겨짚은 것이 아니길 바라며, 에르네스트가 말을 이었다.
“이상하다는 거지.”
“이상해요?”
“그래. 넌 지금도 콩쿠르는 완전 뒷전인 것처럼 보여. 굉장히, 머리가 아픈 사람처럼 보인다고.”
에르네스트가 자신의 머리를 톡톡 치며 말했다. 타티아나가 살풋 눈가를 찡그렸다. 에르네스트가 계속해서 말했다.
“아마 오늘 내가 작정하고 너와 놀기로 마음먹는다면 널 재미있게 해 줄 순 있을 거야.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피식 웃으며, 에르네스트가 입술을 비틀었다.
“하지만 내 전공은 그쪽이 아니라서.”
“……그래서요?”
타티아나는 이렇다 저렇다 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간단히 답했다.
“연습실로 가자.”
우리의 전공은 그쪽이잖아.
***
연습실에 도착할 때까지 난 에르네스트와 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피아노가 있는 곳으로 가자고 했다. 그렇다면 말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렇게 빌린 연습실에 도착하고, 한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자 비로소 나와 에르네스트가 대화를 할 만한 장소가 마련되었다. 그 대화는 말로 하는 대화가 아니었다.
에르네스트가 손을 내밀었다. 외투를 걸어 줄 테니 달라는 것 같았다. 난 고개를 젓고는 직접 가서 옷걸이에 외투를 걸었다. 공연히 그를 민망하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피아노가 있는 이 방에 들어온 순간, 그도 나도 음악가 외의 그 무엇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
그렇게 서서 서로를 바라보자, 에르네스트는 이제야 약간 흥이 나는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 역시 따라 웃었다.
그래, 이 분위기야말로 우리가 대화를 나누기에 익숙한 분위기였다. 아까 그 카페 같은 곳에서 백날 떠들어 봐야 아무런 것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난 에르네스트가 고마웠다. 그는 충분히 오늘 내 변덕에 맞추어 어울려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고한 선생님처럼 날 피아노 앞으로 끌고 와 주었다.
요 며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돌아다니면서 얻어 낸 것은커녕, 그나마 조금 진전을 보였다고 생각한 루슬란 오빠와는 다시 조금 이상한 느낌으로 틀어져 버렸고.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습을 내팽개쳐선 안 되는 것이었다. 난 피아노 앞에 서고 나서야 그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누가 먼저라 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먼저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대충 의자를 조절하고, 손을 스트레칭해서 풀고는 며칠 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소피야 교수님 앞에서 쳤었던 곡을 연주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 소나타.
이 곡은 평소 자주 연습하던 곡도 아니었고, 콩쿠르에 올릴 곡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퍼포먼스적으로 좋은 곡도 아니었다.
하지만 베토벤의 소나타는 쓸데없는 기교 없이 순수하고, 정직하다.
난 소피야 교수님 앞에서 발트슈타인 소나타를 연주하면서 그 사실을 분명하게 다시 느꼈다.
그래서 한없이 정직하게, 곡을 연주해 나갔다.
그 어떤 수사나 미사여구도 필요 없었다. 이건 에르네스트와의 대화를 여는 곡이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도 모를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하는 건 바보나 할 짓이었다. 난 그냥 에르네스트와 가벼운 잡담을 하는 기분으로, 그렇게 곡을 만들어 나갔다.
“…….”
저편에서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선 에르네스트의 시선이 느껴진다. 아주 작은 소리도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숨도 안 쉬는 것 같았다.
그렇게 거의 죽은 사람처럼 기척조차 안 느껴지지만, 그 시선만큼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난 지금 음악으로 대화를 나눠 줄 사람이 있다는 것에 한없는 감사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