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6화 (106/1,277)

##  106화

“베토벤이 이 피아노로 곡을 썼었군요.”

“정말 베토벤이 쓰던 피아노는 독일에 있어. 이건 그냥 같은 시대의 같은 피아노야.”

“그렇겠지만요.”

엔틱한 피아노를 손으로 쓸어 보다가, 문득 에르네스트에게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에르네스트.”

난 에르네스트가 대번에 목에 힘을 주며 젠체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내 예상대로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어지간해선 받아 줄 용의도 있었다. 이제는 일부러 조금 그런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다.

“나한테 고마울 게 뭐 있어?”

“그래도요.”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그는 별 소릴 다 듣겠다는 듯 대꾸했다. 쑥스러워하는 건가 해서 유심히 보았지만 그렇게 보이지도 않았다.

이 애가 이렇게 칭찬을 마다하거나 그런 성격이 아니었을 텐데……?

그렇게 조금 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던 에르네스트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어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고.”

“조금이 아니에요. 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와서 여태껏 찾던 것이 바로 여기에 있었는걸요.”

“……? 오래된 피아노를 찾고 있었다면 그렇게 말을 하지 그랬어?”

“그게 아니라…….”

미하일 선생님이 무작정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돌아다녀보고 내 음악을 성숙하게 만들 계기를 찾아보라고 했기에 그에 따르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걸 말로 설명하자니 애매했다.

그런 제안을 한 선생님도 이상하게 보이고 그걸 덥석 받아들인 나도 이상하게 보일 것 아닌가?

“이 피아노를 쳐 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어요. 제가 이걸 찾고 있었다는 걸.”

“그래. 내가 틀리게 보진 않은 것 같네. 물론 이걸 처음 보자마자 한번 쳐 보고는 그대로 레퍼런스로 삼아도 무방할 정도의 음악을 만들어 낸 건 네가 그만큼 대단하다는 것이겠지만…….”

잠시 말을 흐리던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젓더니 이어 말했다.

“어쨌든 너도 기준이 선 것 같네.”

“사실 알고 있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그냥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쳐 보고 들어 보는 건 완전히 다른 것이죠.”

“그렇지. 특히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더더욱.”

우리 같은 사람들, 즉 음악을 맹목적으로 떠받드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목적을 가지고 행하는 사람들은 종종 어디까지 왔는지 잘 모르는 지점을 느끼곤 했다.

근래 내가 피아노로 음색을 연구하면서 느낀 것이 그러했다. 그녀의 음악에 대해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성악으로 가늠하고, 그것을 피아노로 옮기기 위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난 길을 잃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안다면 중간에 뭘 내려놓고, 얼마나 멀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멀리까지 왔지만, 아직 그렇게 아득하게 멀지는 않아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앞으로도 난 현대식 피아노와 현대식 주법, 현대식 해석으로 연주자로서의 길을 찾아 나가겠지만, 오늘 이 음악은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어쨌든…….”

에르네스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말했다.

“이왕 이렇게 빌린 김에 조금 더 쳐 보는 게 어때?”

“…….”

난 잠시 고민했다. 이 에라르 피아노, 확실히 재미있는 소리가 나긴 했다. 손끝의 감각으로만 느끼기에도 해머가 작고 건반이 가벼웠다. 아직 원시적인 형태의 피아노라서 그런 것 같았다.

조금 더 가지고 놀아 봐도 재밌겠지만…… 글쎄.

“아뇨, 괜찮아요.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었거든요. 사실 이건 조금 심적인 문제에 가까운 것이라서요.”

이 자리에서 베토벤의 모든 곡들을 다 원전연주를 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굳이 하자면 할 수도 있었지만, 난 발트슈타인이라는 이 정직한 곡으로 지금 내 위치를 가늠해 보는 정도에서 그치려 한다.

쇼팽이 즐겨 썼다던 플레이엘 피아노는 한 번 쳐 보고 싶긴 하지만, 그건 다음 기회에 해도 좋으리라.

“…….”

난 조용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원전연주를 해 보고, 내가 그간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자 차차 내가 고민했던 것들이 정리되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뭘 해야 할지, 비로소 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

에르네스트를 돌아보니 그는 살며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작년에 연구회를 만들겠다고 하던 그와 지금의 그는 또 조금 달라져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달라진 것처럼.

“에르네스트. 오늘 바쁜 일 있으신가요.”

“……아니?”

“그럼 저와 조금 더 어울려 주시겠어요?”

난 에르네스트가 내 제안을 거절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는 예상외로 진지하게 말했다.

“타티아나. 내가 아까도 말했을 텐데, 너도 납득한 것 같았고.”

“무슨 말씀이신가요?”

“콩쿠르 말야. 연습 안 할 거야?”

“…….”

에르네스트가 마치 선생님이라도 된 듯 팔짱을 끼고 말했다.

“친구로서 말하는 건데, 다른 데에 신경 쓰지 말고 콩쿠르에 집중하는 게 좋을 거야. 난 그 집중을 방해할 생각도 없고.”

“…….”

“상트페테르부르크 콩쿠르는 청소년 콩쿠르이긴 하지만 결코 만만치 않아. 세계 각지에서 온갖 놈들이 다 온다고.”

“그렇겠지요.”

“난 네가 거기에서 잘했으면 좋겠는데.”

솔직히 조금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내 콩쿠르를 생각해 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나도 피아노에 진지한 사람으로는 그 누구 못지않았다. 지금 난 생각 없이 그냥 나태함을 즐기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오늘 내가 얻어 낸 것들에 대해 아주 일부분이나마, 그에게 돌려주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에르네스트, 점심 식사라도 함께하도록 해요. 어제저녁에 대한 보답도 할 겸, 제가 사 드릴게요.”

“…….”

내 연습시간을 뺏을 순 없다며 단호하게 고개를 젓던 에르네스트도 함께 식사를 하자는 제안까지 거절하진 못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잘 생각했어요.”

“타티아나. 점심을 먹는 건 좋지만 그 후엔 연습해야 해. 난 진짜 밥만 먹고 갈 테니까.”

깐깐한 선생님처럼 구는 에르네스트를 보며 난 방긋 웃었다.

* * *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에르네스트.”

“…….”

그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차창 밖을 보더니 내게 물었다.

“우리 점심만 먹고 헤어지기로 하지 않았나? 왜 해가 지는 것 같지?”

“점심만 먹은 것 맞잖아요?”

저녁 식사까지 한 건 아니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단지 점심 식사를 마친 후 5시간 넘게 그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돌아다녔을 뿐이다.

그와 함께 처음 보는 거리를 돌아다니고, 쇼핑을 하다 보니 시간은 정말 빨리 흘러갔다.

에르네스트는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감각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난 숨죽여 웃었다.

우리가 탄 차는 에르네스트의 아파트 앞에 다다랐다. 에르네스트는 그제야 깨달았는지 고개를 들고 말했다.

“너 연습…….”

“열심히 할게요.”

딱 부러지게 답하자 에르네스트는 그 이상 말하지 못했다. 어쨌건 날 믿겠다는 눈빛이 보인다.

차가 멈춰 서자 에르네스트가 차 문을 열었다. 난 그의 양손 가득 선물한 물건들을 보며 상냥하게 웃었다.

“어서 올라가세요. 아, 인사드리러 같이 올라가지 못한 건 죄송하다고 꼭 어머니께 전해 주세요.”

“알았어.”

“사샤에게도 부탁해요.”

“응. 갈게.”

그는 작게 인사하며 차 문을 닫았다.

오늘 에르네스트는 내 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는데 겨우 이 정도로 보답이 되었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난 약간의 마음의 빚을 간직하면서 계단을 올라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가씨, 혹시 다른 곳에 또 들르실 데라도?”

“없어요, 빅토르. 호텔로 가요.”

“알겠습니다.”

빅토르의 대답과 동시에 차는 호텔로 향했다.

창문 밖을 보니 해가 뉘엿거리며 지고 있었다. 오후 5시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2월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정말 빠르게 해가 지는 도시였다.

그리고 그사이 루슬란 오빠에게선 한 통화도 걸려 오지 않았다. 메시지도 없었다.

약간의 섭섭함을 느끼면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루슬란 오빠도 분명 어제 있었던 일로 마음이 싱숭생숭할 테지만, 그래도 이건 조금 심했다.

30분가량 달려 차량은 호텔에 도착했고, 난 오늘 하루도 고생해 준 빅토르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빅토르는 자상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혹시 루슬란 오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도 없었다.

을씨년스럽게까지 느껴지는 거대한 거실을 보다가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우선 짐들을 정리해 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조금 얼어 있던 몸이 따뜻한 물에 닿자 기분 좋게 저릿하기까지 했다.

구비되어 있는 입욕제를 몇 가지 넣고 목욕을 즐기다 보니 아예 호텔에 있는 스파에 잠시 들를까 생각도 들었지만, 언제 루슬란 오빠가 올지도 모르는데 괜히 그렇게 방을 비우고 싶지 않았다.

말끔하게 목욕을 마치고 머리를 말리면서 빗질을 하고 있자니 덜컹 하며 호텔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확인했다. 루슬란 오빠였다.

“……미안. 늦었어, 타티아나.”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진 잘 모르겠지만 조금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날 대하는 모습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려는 듯, 오빠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난 마주 웃어 주며 답했다.

“아니에요. 저도 방금 들어왔어요.”

“그래? 너야말로 많이 늦었네. 뭐 했어?”

그렇게 궁금하면 전화라도 한 번 해 보지 그랬어요?

“에르네스트와 함께 연습실에 들렀다가,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그랬지요. 재미있었어요.”

“……에르네스트?”

“예. 어제 보셨잖아요?”

오빠가 미세하게 눈가를 꿈틀거리더니, 한숨을 내쉬며 겉옷을 벗었다.

“그래, 다행이다.”

“다행이요?”

“네가 혼자 돌아다니는 것보단 낫지. 친구라며? 그 녀석.”

“…….”

대답하지 않고 빗질을 멈춘 채 가만 바라보았다. 루슬란 오빠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허리를 숙여 가방을 뒤적이며 말했다.

“나도 오늘은 눈코 뜰 새 없이 돌아다니느라…… 아, 타티아나. 저녁은 어디서 먹을까? 저번에 봐 둔 레스토랑이…….”

“저 방금 씻어서 오늘은 다시 나가기 싫어요.”

“……응?”

그제야 루슬란 오빠가 날 돌아보았다. 난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상태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루슬란 오빠는 잠시 말이 없더니, 다시 가방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러면 오늘은 룸서비스를 시키지 뭐. 이 정도 되는 객실에 머물면서 룸서비스 한 번 안 시키는 것도 이상하잖아.”

“……좋아요.”

난 필요 이상으로 짜증을 내고 있음을 깨닫곤 힘없이 말했다.

일부러 손을 늘어뜨리고 심호흡을 했다. 이렇게 까칠하게 대할 생각은 없었는데, 왜 이렇게 입만 열면 뾰족한 말들이 나오는 건지 잘 모르겠다.

가방을 정리한 루슬란 오빠는 욕실에 가서 씻고 나오더니 곧 객실 내에 비치되어 있는 전화를 들고는 룸서비스를 주문했다. 내게 뭘 먹고 싶냐고 물었지만 난 대충 아무거나 시켜 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룸서비스를 기다리면서,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루슬란 오빠가 내게 말했다.

“이쪽으로 안 올래?”

“…….”

멀찍이 떨어져 있는 의자에 앉아 있던 난 말없이 조용히 소파에 가서 앉았다.

소파에 앉으면서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스쳐 지나가고 곧 텔레비전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분명 시끄럽게 뭐라고 떠들고 있었지만, 난 지금 이 순간이 아득하게 조용하다고 느꼈다.

그것은 루슬란 오빠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날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타티아나.”

“……예.”

오랫동안 고민한 투가 역력한 목소리로 루슬란 오빠가 말했다.

“내일은 같이 다니지 않을래.”

“…….”

약간 기쁜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난 환희에 찬 목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적당히 목을 깔고 대답했다.

“좋아요.”

“그래, 그러자.”

“예.”

고개를 끄덕이자 루슬란 오빠가 이어 말했다.

“아무래도 그래야겠어. 중간에 네가 별 탈 없이 있다는 보고를 받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눈앞에 없으니까 걱정이 되어서…….”

“…….”

걱정…… 걱정이라.

원래 적절한 때가 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오늘 밤이 가기 전에 이야기를 하긴 해야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적절한 상황이란 항상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 말을 꺼내는 것 자체만으로 분위기가 급격하게 얼어붙으리란 것쯤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되도록 루슬란 오빠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도록 얌전히 저녁 식사를 하며 분위기를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말하지 않고선 못 배길 것 같았다.

“저기, 오빠.”

“어.”

루슬란 오빠가 약간 풀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넌지시 말했다.

“오빠가 화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말할게요.”

음…… 벌써부터 루슬란 오빠의 눈빛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충분히 각오하고 입을 열었다.

“목걸이 돌려주셨으면 해요.”

루슬란 오빠는 잠시간 날 바라보다가, 싸늘하게 일갈했다.

“없어.”

안 된다는 말도 아니고 없다는 말로 더 이상 뭔가 묻지도 못하게 단호하게 틀어막았다.

루슬란 오빠가 거절하리라 예상은 했지만 조금 너무하다.

하지만 난 굴하지 않고 조금 더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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