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7화 (107/1,277)

##  107화

루슬란은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두서없이 떠올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기억은 바로 여동생에 대한 것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여동생은 처음부터 루슬란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루슬란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늘 혼자 있었고 누군가 가까이 오는 것을 질색했다. 세상사를 알 만큼 알게 된 루슬란 역시 그런 동생을 별로 기꺼워하지 않았으나, 어머니인 빅토리아는 그를 타일렀다. 오빠로서 동생을 그렇게 대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심 반항적인 생각을 품었지만 어머니에게만큼은 순종적이었던 루슬란은 동생을 가까이 보살피기 시작했다. 동생 역시 조금이나마 마음을 열어 주는 루슬란에게 조금씩 마음을 터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듣기에 안 좋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을 때, 루슬란이 앞장서서 모든 소문을 잠재운 적도 있었다. 그때 이미 루슬란은 동생을 완전히 받아들였고, 다른 그 누가 뭐라 한들 지켜 내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동생과의 사이가 돌이킬 수 없이 틀어지기 시작했던 때가.

“…….”

루슬란은 타티아나에게 차갑게 쏘아붙였지만 마음속으로는 갈등해야만 했다.

도저히 돌이킬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관계는 타티아나가 기억을 잃는 것으로 회복의 가능성을 되찾았다. 하지만 오늘 잘못한다면 또다시 어그러질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소름이 끼쳤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티아나가 어머니의 유품을 그냥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보고 있는 것도 힘들었다.

“루슬란 오빠.”

그때 청아한 목소리가 갈등하는 루슬란을 불렀다.

마치 인형처럼, 얼핏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얼굴에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만이 활활 불타는 생명력을 품고 있었다.

어젯밤 베샤스트니흐가에서 감정의 폭풍을 못 이긴 루슬란이 타티아나를 압박했을 때, 스스로에게 자격이 없다는 듯 무력하게 목걸이를 풀어서 내어 주던 눈빛과는 달랐다.

타티아나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릴게요. 목걸이 돌려주셨으면 좋겠어요.”

“또 그 소리야?”

“또 그 소리예요.”

타티아나가 루슬란의 말을 반복했다.

루슬란은 헛웃음이 다 나오는 것을 느꼈다. 대체 그 목걸이가 타티아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기에?

지금 타티아나에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다. 아주 미미한 편린조차 없음을 그녀도 시인했다. 그렇다면 왜 기억도 나지 않는 것에 이토록 집착한단 말인가?

그냥 외투를 들고 밖으로 나가 버릴까 생각하던 루슬란은 다시 한 번 거절했다.

“못 줘.”

“그런가요.”

낮게 잦아든 목소리가 안타깝다. 루슬란은 혹 그녀가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건 굉장히 유감이네요.”

정말 유감이에요. 다시 반복하며 타티아나는 고개를 들었다. 루슬란은 섬뜩함을 느꼈다. 루슬란의 반응은 이미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 그 얼굴엔 그 어떠한 실망의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소파에 머리를 기대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오늘 많은 생각을 해 봤어요. 전 언제나…… 고민을 해야 하는 사람이니까요. 무엇이든 한 번에 결정지을 수가 없지요.”

그렇게 중얼거리던 타티아나는 다시 고개를 들고, 루슬란을 진지한 눈빛으로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하나 확실하게 하려고 해요. 제가 그 목걸이를 돌려받지 못하더라도 한 살 된 타티아나로만 사는 일은 없을 거예요.”

“뭐?”

“죽을 때까지. 전 오빠와 아버지, 그리고 주변 분들에게 두 명 몫의 최선을 다해야만 할 테니까요.”

두 명?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다.

타티아나는 그저 아버지의 안배에 따라 한 살로 새 삶을 살아도 된다. 루슬란은 처음엔 그 방침에 반대했었지만, 어머니의 유품인 목걸이를 타티아나가 포기해 준다면 거기에 동의하겠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타티아나의 태도를 보며 루슬란은 잊고 있었던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타티아나 너…… 설마 기억이 돌아온 거냐?”

“글쎄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 어떤 표정도 보이지 않던 타티아나가 옅은 웃음을 담았다.

루슬란은 그 반응을 보면서 정말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잊고 있었던 기억을 정말 단편적으로나마 떠올린 것이라면…….

“…….”

두서없이 차오르는 불안감을 떨치며, 루슬란이 다시 차갑게 머리를 식혔다. 타티아나를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조금 위험할 정도로 예쁜 얼굴이 작게 웃고 있었다. 그 눈에선 어떠한 적의나 분노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일견 여유로워 보이는 태도였지만 루슬란은 기억에 대한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장난치지 마, 타티아나.”

“……재미없네요.”

타티아나는 장난스런 미소를 지우고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맞아요. 전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죠.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요. 오빠의 말이 옳아요.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듣는다 한들, 그게 제 기억이 될 리는 없겠죠.”

소파에 앉은 채, 축 처진 어깨와 잘못 만지면 그대로 부러져 버릴 것 같은 목이 루슬란을 향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루슬란을 바라보지 않고, 그 너머의 무언가를 보는듯한 먼 시선으로 입을 열었다.

“상관없는 이야기이긴 한데요, 오늘 전 연습실에서 재미있는 경험을 했어요. 그간 알면서도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해 다시금 깨닫게 되었죠.”

“그게 뭔데?”

“음악은 아무리 제가 멀리 달아나도 뒤를 돌아보면 돌아갈 집이 보이고, 얼마나 멀리 왔는지 알 수 있다는 점이에요.”

중얼거리며 루슬란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던 타티아나가 돌연 그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인간 타티아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루슬란은 한탄했다. 타티아나는 기억의 부재로 아직까지도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유리가 했던 것처럼 아예 아무 의심도 하지 않도록 했어야 했다. 하지만 타티아나를 의심했던 루슬란은 기억이 없는 그녀에게 안 좋았던 과거의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몇 번이고 밀어 넣었다.

그것은 타티아나를 굉장히 괴롭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타티아나는 기억에도 없는 죄책감을 떠안게 되었고 때문에 조금 병적으로 과거에 집착하게 되었다.

루슬란은 깊게 후회하며 말했다.

“타티아나. 알았으니까 이제…….”

“전 지금 가벼운 투정 같은 걸 부리는 게 아니에요, 오빠. 진지한 이야기니까 잘 모르겠더라도 그렇게 절 무시하지 말아 주세요.”

“나도 가볍게 말하는 게 아니야.”

타티아나는 잠시 루슬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오빠가 아실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

“전 여러 가지를 기준으로 잡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거예요. 전 타티아나 그 외의 그 누구도 아니니까.”

타티아나의 말이 옳았다. 루슬란은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논리가 향하는 지점이 한곳이라는 것은 명확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아버지가 절 믿고 맡겨 주신 목걸이도 되찾아서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어쨌거나 타티아나는 목걸이를 원하고 있었다. 돌려주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했던 것은 그만큼 루슬란의 의사 또한 소중하게 여긴다는 표현일 뿐이었다.

루슬란은 고민했다.

어머니의 유품인 이 가넷 목걸이를 다시 내어 줄 수도 있었다. 사실 루슬란이 과민하게 반응했을 뿐이지, 타티아나는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목걸이를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이 애가 아무것도 모르고 그렇게 해도 되는 걸까?

루슬란은 어머니인 빅토리아를 떠올렸다. 아직 살아 계셨다면 과연 타티아나에게 목걸이를 주려 하셨을까.

루슬란은 자신의 감정이 아닌, 원주인인 어머니라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타티아나.”

“예.”

“어머니가 네게 그 목걸이를 주고 싶어 하셨으리라 생각해?”

에두르지도 않고, 루슬란은 직접적으로 물어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타티아나에게 이 질문은 거의 폭력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타티아나는 별로 충격을 받지도, 죄책감에 타들어 가는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타티아나는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뭐가?”

“아버지는…… 평소 아버지가 절 대하시는 모습으로 미루어 보자면, 어머니의 가넷 목걸이를 제게 주실 이유가 없죠. 하지만 주셨어요. 그 목걸이가 절 지켜 줄 거라면서. 바로 어머니가 절…….”

잠시 말을 흐리던 타티아나가 고개를 들며 말을 이었다.

“전 제가 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았으리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어머니는 절 그렇게까지 싫어하지 않으셨던 것 아닌가요.”

“…….”

“대답해 주세요.”

루슬란은 자신의 감정에 대해선 조금 희미했다. 좋은 적도 있었지만, 나빴을 때의 감정이 너무 격했기 때문이다. 당시 희석되어 버린 좋은 감정들은 다시 떠올리기엔 너무 옅었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해서라면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맞아. 어머니는 널 매우 아꼈어.”

타티아나는 기뻐하지도, 환희에 벅차하지도 않고,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저도 어머니를 지켜 드리고 싶어요.”

기이한 대답.

네가 그래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루슬란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기억도 없이 얼굴도 모를 사람에 대해 뭘 안다고 지키니 마니 한단 말인가? 어머니는 널 지키고 싶어 할지 모르겠지만 넌…….

“……차에 두고 왔어.”

“예?”

“네가 내 짐을 뒤지기라도 할까 싶어서, 아예 차에 뒀어.”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는 듯 타티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생각해도 좀 심하긴 했다.

루슬란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넌 그렇게 하지 않았네.”

타티아나가 살짝 정색하며 말했다.

“오빠에게 아무 말도 없이 짐을 뒤지다니, 그건…… 실례잖아요. 비겁하고.”

이 와중에도 그런 것을 생각하다니, 루슬란은 완패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루슬란은 그렇게 차갑게 굴어도 몇 번이고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이 동생을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었다.

“됐어. 네가 이겼어. 내가 어제는…… 미안했어. 흥분해서 그랬던 것 같아.”

“…….”

“사실 지금도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두 배로 잘해 보겠다고 하는 것이 진심이라는 것 정도는 알겠어. 이제 됐어.”

루슬란은 이상하게도 조금 웃음이 나는 것을 느꼈다.

“내일 차에 가서 돌려줄게.”

“정말이신가요?”

“그래. 이제 와서 안 돌려줄 이유도 없을 것 같고.”

그 말에 타티아나는 갑자기 소파 위로 스르르 늘어졌다. 루슬란이 조금 당황하는 찰나,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정말 돌려주시겠다고 하실 줄은 몰랐어요.”

“무슨 생각을 한 건데…….”

“음,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라고 하신다거나?”

“뭐? 내가 너한테? 미쳤어?”

루슬란은 말 그대로 펄쩍 뛰며 말했다. 타티아나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겠죠. 루슬란 오빠는 정말 좋은 사람이니까.”

“…….”

어쩐지 가지고 놀고 있다는 느낌이 든 루슬란이 살짝 눈썹을 찡그리자 타티아나는 마치 허공에 피아노를 치듯 손가락을 까딱이면서 노래하듯 말했다.

“우리 오늘은 늦게까지 이야기해요. 술 같은 것 없이, 오빠가 부담스러워하는 이야기 없이. 그냥 오빠가 학교에선 무엇을 하시는지, 요즘 아버지의 사업은 어떤지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요. 전 모르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거든요.”

이제 와서 베르체노프 콘체른의 사업 이야기에 관심이 생긴 것이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그저 1년을 지내면서도 가족들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 자체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루슬란은 그런 타티아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조금은 슬퍼져서, 살짝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알겠어.”

“고마워요.”

타티아나는 언제나처럼 해맑은 미소로 감사를 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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