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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08화 (108/1,277)

##  108화

조금 늦게까지 늦잠을 잔 우리 남매는 하품을 하며 호텔 조식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새벽까지 이야기를 하느라 잠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루슬란 오빠가 술을 마시거나 내가 콜라를 마시는 일 없이, 우리 남매는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다. 다만 앞으로의 이야기, 보다 행복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렇다고 이전의 모든 것을 없던 일로 없애 버리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난 기존에 그녀가 엉망이었던 만큼, 그리고 내가 잘했어야 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만큼, 두 명분을 감당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슴속 깊은 곳에 단단히 못박아 두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도 몇 시간 못 잔 것 같은데, 내 생각에 아마 오빠는 나보다 더 심하게 잠을 설쳤을 것이다. 루슬란 오빠가 생각이 많다는 것은 잠깐 본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호텔 조식으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다시 방으로 올라가선 외출복을 갈아입고 밑으로 내려왔다.

“자.”

루슬란 오빠는 차에 두었던 서류 가방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검붉은 보석이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난다. 정밀하게 세공된 가넷 목걸이가 내 손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서늘한 무게를 느끼니, 비로소 조금 안심이 되었다.

목걸이를 내려다보고 있자, 오빠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줘 봐, 걸어 줄게.”

“예.”

순순히 목걸이를 다시 건넸다. 밤새 차에 있었던 목걸이는 차가워서, 그걸 내게 걸어 주기 전에 루슬란 오빠는 양손으로 목걸이를 꼭 쥐고 따뜻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한 그 모습 하나에서도 오빠의 성격이 드러났다.

나는 마치 기도하는 사람처럼 양손을 모으고 있는 루슬란 오빠를 경건하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루슬란 오빠가 손짓했다. 그 손짓에 따라 난 뒤로 돌았다. 커다란 손이 내 머리칼을 걷어 내고 목에 와 닿았다.

금속 재질의 체인과 장식이 내려앉으며 루슬란 오빠의 체온을 내게 전해 주었다.

등 뒤에서 루슬란 오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날은 미안했어.”

루슬란 오빠가 다시금 사과해 왔다.

그날, 순간적으로 날 견디지 못하고 목걸이를 빼앗은 것에 대한 사과다.

난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오빠를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에 굳이 내게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조용히 대답했다.

“괜찮아요.”

우리 남매는 그렇게 가벼운 사과를 주고받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솔직히 말해 이렇게까지 루슬란 오빠가 날 봐줄 줄은 언감생심 기대도 하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엔 아무것도 얻어 내지 못하고 그저 분노만 살지도 모른다는 예상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진심으로 루슬란 오빠를 대하자, 약간의 믿음을 얻어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목걸이가 따뜻해요.”

“…….”

루슬란 오빠는 조금 창피한 듯 내 시선을 피하며 쓸데없이 차 안을 뒤적거렸다. 난 그 뒷모습을 보며 웃었다.

지금 드는 이런 따뜻한 마음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가끔은 조금 헷갈리기도 했다.

그녀에게 영향을 받고 있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몸과 정신이 헛돈다는 걸 몰랐을 땐 그저 원래부터 병약했겠거니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은 성악을 배우고, 그녀와 함께 듀엣을 하기로 결심하면서부터였다.

정확히 그 시점부터 난 급속도로 일체감을 느낄 수 있었다. 본래 이 몸이 가지고 있었던 잠재력을 더욱 높게 끌어낼 수 있게 되면서 테크닉은 한결 유려해졌고, 잔병치레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낮은 혈압과 냉증, 온몸이 저렸던 것도 날이 갈수록 나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몸에 직접적이고 확실한 영향이 갔다면, 그와 동시에 내 정신에도 직접적인 영향이 오지 않으리란 법도 없었다.

“…….”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되레 조금 더 시원해진 기분이다.

이미 내 고유의 정체성이란 것은 음악에만 국한 지어 놓은 지 오래였다. 처음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음악 외의 다른 것들은 지나온 길가에 하나둘 흘린 지 너무 오래되어서, 이젠 그게 뭐였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 와서 내 정신이 무언가에 영향을 받는다 한들 관심 없었다. 그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음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쳐 버리지만 않는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루슬란 오빠는 말없이 웃고 있는 날 다시 돌아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주 웃었다.

한결 편안해진 분위기에서 루슬란 오빠가 허리를 세웠다. 날 내려다보는 시선이 내 목으로 향한다. 그렇게 목에 머물던 시선은 잠시 흔들리더니 머리로 향했다. 오빠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살짝 헝클었다.

“그 목걸이, 네가 그만큼 소중하게 여기는 게 고맙고, 잘 알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여겨 줬으면 좋겠어. 그러면…….”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멈칫했다. 물끄러미 올려다보니 루슬란 오빠가 말을 이었다.

“아니, 분명…… 어머니가 널 지켜 주실 거야.”

한 번도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었는데.

“앞으로 네가 어떤 삶을 살든 간에 말이지. 타티아나.”

그날 밤, 목걸이 줄을 손가락에 건 채로 날 찍어누르듯 노려보며 했던 말과 얼핏 비슷했지만, 그 뜻은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기억에 없는 어머니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난 모른다. 그녀가 어머니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 사이에 내 자리도, 자격도 없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녀가 기억을 잃고 깨어났다고 해도 지금 똑같은 상황일 테고 따라서 다를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자격의 부재를 느낀다. 아직까지 이런 걱정을 한다는 것이 조금 우습지만, 적어도 난 그렇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내가 새로이 가족으로 받아들인 이들을 그녀도, 어머니도 거기에 루슬란 오빠와 아버지까지 내가 지킬 수 있다면……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지켜 나가고 싶었다.

그 모두를 깨끗하게 밀어내 버리는 것은, 너무 공허한 일이니까.

어느 날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검은 낭떠러지만이 보인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살짝 상념에 잠겨 있는데, 루슬란 오빠가 쾌활하게 물었다.

“그럼,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는데? 타티아나.”

“오늘은…… 바로 연습실로 가려고 해요. 콩쿠르까지 이틀밖에 남지 않아서 준비를 해야 해서요.”

“그렇게 하자.”

그러면서 루슬란 오빠는 당연한 듯이 따라오려 했다. 난 조심스레 말했다.

“저기, 오늘은 정말 제 개인 연습을 할 거라 따라오셔 봐야 재미없으실 텐데요.”

“상관없어.”

루슬란 오빠가 말했다.

“오늘은 네가 제대로 연습하는지 감시할 거거든.”

“감시요?”

“그래. 요즘 너 피아노에 너무 소홀하지 않았어?”

“…….”

물론 그저께도 에르네스트와 만나서 연습이라곤 하나도 안 했고 어제도 오전에 조금 한 것 말고는 없긴 하지만…….

정말 대충 하긴 했다. 그만큼 오늘내일은 전력을 다할 생각이지만.

“그렇지만요…….”

“그러니까 제대로 하는지 지켜봐야지. 네가 콩쿠르에서 잘하려면.”

그렇게 루슬란 오빠는 혹여나 농땡이 피울 생각 하지 말라는 듯 눈을 부라렸다. 난 조금 황당했다.

감시? 하나도 안 무서웠다.

* * *

“…….”

“오빠.”

“…….”

“루슬란 오빠.”

난 조용히 루슬란 오빠를 불러 보았지만 아무 대답도 없었다. 기울어진 정수리만 보였다.

“……이럴 줄 알았어.”

연습을 시작한 지 불과 1시간. 루슬란 오빠는 의자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잠들었다.

고르게 오르락내리락하는 팔을 보니 정말 곯아떨어진 듯하다.

난 한숨을 쉬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저 인간을 어떻게 한다?

처음에 루슬란 오빠는 호기롭게 연습실로 앞장섰다.

요 일주일간 오빠와 함께 연습실에 왔을 땐 내가 가벼운 소나타나 폴로네이즈, 에튀드 등으로 오빠를 지루하지 않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 루슬란 오빠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진지하게 콩쿠르에 올려야 할 곡들을 집중적으로 연습했다. 이젠 정말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난 콩쿠르에서 어떻게 해야 객관적으로 보일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가장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것은 곡의 암보와 그것을 음악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테크닉이었다. 인템포로 미스터치 없이 절뚝거리지 않고 얼마나 유려하게 쳐 내릴 수 있는가. 이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었다.

콘서트가 아닌 콩쿠르에서 딱히 화려하거나 과시적일 필요는 없었다. 아무리 화려한들 속임수에 불과하다면, 심사위원들에게 있어 그건 감점 요인에 불과하다.

여기선 보다 현실적으로 임해야 했다. 기본적인 테크닉이 궤도에 올라오고, 악보를 문제없이 건반 위로 올릴 수 있게 된다면 그다음 추구해야 할 부분은 보다 근본적인, 음악 그 자체에 대한 연구이다.

차분하게, 그 어떤 사념도 없이 오로지 건반과 소리에만 집중해서 연습을 해 나갔다.

같은 구간만 수십 번씩 반복해서 보다 아름답게 들릴 수 있도록 연구하고, 한 화음의 음색이 마음에 안 들어서 또 수십 수백 번씩 반복하며 좋은 터치와 소리를 찾기도 했다.

이러한 내 연습은 지독하게 지루하고 때론 시간 감각을 뒤틀어 놓기도 했다. 난 종종 이렇게 연습을 하다가 앉은자리에서 몇 시간이고 흘려보내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만큼 중요했다. 내 입장에선 그 수백 번의 연구가 모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루슬란 오빠가 보기엔 조금 정신병에 걸린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심지어 피아노를 전공하는 아나스타샤마저도 이런 날 보고 이상한 애라고 할 정도였으니, 비전공자인 오빠는 오죽하겠는가.

스케일과 아르페지오 연습을 주르륵 하는 데에 30분.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 이후 내내 이렇게 건반을 톡톡 치며 소리를 듣고 있자 루슬란 오빠는 참다못해 지금 뭐 하냐고 내게 물었다.

물론 난 오빠가 뭐라 한들 신경 쓰지 않고, 연습 중이니 방해 말라고 딱 잘랐다. 루슬란 오빠는 그렇게 얌전해졌다가, 곧 잠들어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곯아떨어질 줄은 몰랐는데.

“…….”

난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났다. 류보비에게 배웠던 것들을 떠올리며 발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오빠가 잠들어 있는 의자로 다가갔다.

오빠는 내 기척을 못 느끼고 있었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장난기가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

하지만 피곤한 듯 잠들어 있는 루슬란 오빠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즐거움보단 약간의 안쓰러움이 생겨났다. 난 불쑥 차올랐던 장난기를 얼른 흩어 버리고, 가까이 다가가서 루슬란 오빠의 어깨를 흔들었다.

“오빠.”

“……응.”

잠깐 사이에 얼마나 깊게 잠들었는지, 바로 깨지도 않고 웅얼거린다. 어제 하루 종일 바빴다고 하던데, 가뜩이나 피곤한 데다가 밤새 나와 이야기를 하기도 해서 잠을 설친 모양이었다.

“저쪽에 있는 소파에 가서 주무세요.”

“……응.”

“정말…….”

난 루슬란 오빠의 팔짱을 풀어내고 아직도 반쯤 잠들어 있는 오빠를 부축했다. 내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팔 밑으로 파고들자 오빠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좀비를 일으켜 세우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루슬란 오빠를 재주껏 소파에 눕히고, 벗어 둔 외투를 가지고 와서 덮어 주니 오빠는 다시 잠들었다.

조금 어이가 없긴 했지만 루슬란 오빠가 보다 편하게 눕자 마음이 편해졌다.

“…….”

그렇게 오빠를 눕히고, 난 다시 피아노로 돌아왔다.

건반 앞에 다시 앉아서 방금 하던 연습을 계속하기 위해 손가락을 올려놓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는 해 드려야겠지요.”

그리고 나는 슈베르트의 자장가를 천천히 연주하기 시작했다.

모차르트, 슈베르트, 브람스의 자장가는 굉장히 유명했고 태교 음악 등으로도 많이 음반이 나오긴 했지만, 사실 피아노 연주자가 무대에서 연주하지는 않는다.

그리 어렵지 않은 데다가 청중들을 모두 잠재울 작정이 아닌 이상에야 자장가를 무대 위에 올릴 일은 없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내 레퍼토리에 자장가를 넣은 적은 없었다. 피아노로 연주해 본 적도 손에 꼽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 선율이 어떻게 흘러가는진 알고 있었다.

잔잔한 선율에 맞추어 화음을 얹었다. 복잡한 잇단음표 같은 것이 들어갈 이유는 전혀 없었다. 여유롭고 편안하게, 오로지 루슬란 오빠가 편히 잠들 수 있도록 곡을 만들었다.

“…….”

여전히 즉흥적인 부분에선 많이 어색하지만 그래도 이전보단 훨씬 자연스러운 음악이 만들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기에 난 목소리까지 얹었다.

혹여나 깨울까, 피아노 선율에 살짝 묻히듯 그렇게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다.

배운 적은 없지만 기억 어딘가에 남아 있는 가사는 자연스럽게 입에서 흘러나왔다. 정확한 가사가 기억나지 않을 땐 허밍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피아노 소리와 내 목소리는 한데 얽혀 슈베르트의 자장가를 연주했다.

“…….”

결코 길지 않은, 짧은 한 곡을 치고 나서 돌아보니, 루슬란 오빠는 미동도 없이 새근거리며 자고 있었다.

그녀는 할 수 없었지만 나는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좋은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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