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점심 식사를 할 시간이 되어서야 루슬란 오빠를 깨웠다. 그리고 잠들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는 루슬란 오빠를 간신히 어르고 달래서 내 연습에 굳이 참관할 필요가 없음을 납득시켰다.
“…….”
오빠가 나가고, 난 연습실에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아무도 없이 내 숨소리와 심장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이 공간에서 앞으로 최소 서너 시간은 그 누구도 날 방해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자, 부산했던 정신이 착 가라앉는 것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다시 연습을 시작하기 위해 일단 스마트폰을 무음모드로 바꾸면서 메시지들을 확인했고 아나스타샤가 보낸 메시지를 보았다.
[타티아나. 콩쿠르 준비는 잘 하고 있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간 그녀와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긴 했지만 대부분이 사담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그런 그녀도 콩쿠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긴 하는가 보다.
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고 서너 번 울리자 아나스타샤가 전화를 받았다.
“아, 아나스타샤! 통화해도 되나요?”
- 어, 그, 그래. 타티아나.
아나스타샤는 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목소리 뒤로 뭔가 시끌시끌한 소리들이 지나쳐 갔다.
“지금 밖에 나와 계신가요?”
- 응, 맞아. 혹시 거기까지 들려?
“사람들 소리가 들려요. 아…… 그럼 나중에 통화하도록 해요. 밖에서 위험하게 하실 필요 없…….”
그때,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내 말을 툭 자르고 들어왔다.
- 아니야, 타티아나. 지금 하자. 나도 네게 할 말이 있어.
“……무슨 일인가요?”
할 말?
내가 묻자 아나스타샤에게선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 뒤로 사람들의 소음만이 들렸다.
보채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더니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 나도 네 콩쿠르 보러 갈려고.
“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녀의 말에 조금 놀라서 되물었다.
-아, 걱정 마. 네 방해를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
방해가 문제가 아니었다.
콘서트도 아니고 콩쿠르를 굳이 들으러 와 달라 부탁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나스타샤도 내 생각을 이해했는지 잘 하고 오라고 전화상으로 응원을 해 주었다. 난 친구로서 그 정도 응원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와 준다면 그것도 기쁜 일이었다. 솔직히 말해, 요 일주일 정도 안 봤을 뿐인데도 난 그녀가 보고 싶었다.
만약 그녀가 와 준다면 어떻게든 보답할 방법이야 많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훌륭한 도시였다. 아나스타샤와 멋진 식사라도 함께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아나스타샤에게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혹시 싫어?
“예?”
난 깜짝 놀라 말했다. 절로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아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혹시 시간에 맞춰서 마중을 나갈 수 있을까 생각하는 중이었는데요?”
-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던 아나스타샤가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이어 나갔다.
- 옆에 에르네스트는?
“에르네스트요?”
- 그래. 있는 거 아니야?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지금?
에르네스트와 만난 신기한 이야기는 그저께 아나스타샤에게 메시지로 이야기한 바 있었다.
루슬란 오빠와 예카테리나 궁전을 보러 갔다가 길에서 에르네스트와 마주쳤다고 했더니 그녀는 세상 참 좁다는 게 헛말은 아니라며 어이없어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그 후로도 내가 에르네스트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난 조금 황당하다는 투로 말했다.
“지금 저 혼자인데요?”
- 혼자? 왜?
왜냐니, 더더욱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갑자기 왜 혼자냐고 묻는 데에 인간은 본디 홀로 외로운 생물이라고 바보 같은 소리를 해 볼까 생각하고 있었더니, 아나스타샤가 다시 물었다.
- 네 오빠는 어디 가고?
“제 연습에 방해되기 싫다고 잠깐 나갔어요. 지금 연습실이라서요.”
- ……그렇구나.
그제야 납득한 듯 아나스타샤가 훨씬 산뜻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뭔진 몰라도 그녀의 불안이 조금 해소된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가 마지막으로 확인하겠다는 듯 말했다.
- 어쨌든, 나도 가도 되는 거지?
“당연히 오셔도 되죠, 아나스타샤. 아까부터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아, 그런데…….”
가장 큰 문제가 생각났다.
가지고 있던 초대권을 한 장도 남김없이 에르네스트에게 다 줘 버렸기 때문이다.
줬던 걸 도로 뺏을 수도 없고,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미안해요. 아나스타샤에게 드릴 초대권이 없어요.”
- 나한테 줄 필요는 없어. 구했거든.
“……어떻게요?”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음악 콩쿠르는 매년 티켓이 매진될 정도로 인지도와 권위가 높은 콩쿠르라고 들었다.
심지어 에르네스트도 그 티켓을 구하지 못해 내게 부탁할 정도였다. 한참 전부터 구해 놓은 것이 아니라면 이제 와서 티켓을 구하긴 정말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런데도 아나스타샤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할 뿐이었다.
- 잘.
“…….”
수화기 너머로도 그녀의 장난스런 미소가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나나 에르네스트보다 훨씬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으니 내가 모르는 방법이 있었으리라.
아나스타샤는 짧게 웃더니 말했다.
- 아무튼…… 나 신경 쓰지 말고 연습에 집중해. 타티아나.
“제가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가 있나요.”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해 줬으면 좋겠다.
“언제 도착하시나요.”
- 아하하.
맑은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 오늘 저녁.
***
“아나스타샤!”
공항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던 나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곤 손을 흔들었다.
막 나오던 아나스타샤는 날 보더니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복의 그녀는 이 날씨에도 패셔너블함을 뽐내고 있었다. 반짝이는 당당함이 빛난다.
그런데 말이지, 다 좋은데 지금 영하 10도예요, 아나스타샤. 안 춥나요?
“추워 죽겠네.”
“…….”
내 곁으로 온 아나스타샤가 으으으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말했다.
걱정스레 쳐다보자 아나스타샤가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보니까 좋다, 타티아나. 안 그래?”
“그러게 말이에요.”
아나스타샤가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이유에는 분명 날 보고 싶었던 부분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간만에 아나스타샤를 보게 되어서 기뻤다.
“이쪽으로 와요, 아나스타샤. 차를 대기시켜 놨어요.”
추워 보이는 아나스타샤를 이끌고 공항 밖으로 빠져나온 다음, 우릴 기다리고 있는 차에 탔다. 비어 있는 뒷좌석에 둘이 앉을 수 있었다.
“네 오빠 루슬란 유리예비치는?”
아나스타샤가 오빠를 찾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조금 의아했다.
“예약한 레스토랑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마중은 저 혼자 나가라 하시더라고요.”
“……그래? 여기 와선 항상 같이 다녔다고 하지 않았어? 가만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래도 오빠는 최선을 다해 줬어요.”
내가 루슬란 오빠를 두둔하자 아나스타샤가 그냥 해 본 소리라며 웃었다.
잠시 후, 차량은 네바 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멋진 뷰를 지닌 파인 다이닝fine dining에 도착했다.
난 계단을 올라가서, 루슬란 오빠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리고 조금 당황해서 눈을 부볐다.
“오빠?”
“타티아나. 왔니.”
평소에도 늘 깔끔하게 입고 다니긴 하지만, 오늘 루슬란 오빠는 보다 철저하게 포멀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멋진 와이셔츠와 조끼 차림이 저녁 식사가 아니라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같이 보였다.
내 뒤를 따라오던 아나스타샤도 루슬란 오빠를 발견하고는 인사했다.
“다시 뵙네요, 루슬란 유리예비치.”
“안녕, 아나스타샤.”
난 루슬란 오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좋은 자리니까 좋게…… 그리고 내가 침범해도 좋은지 확실하지 않은 일에 대해선 신중하게 굴어야 했다.
“…….”
외투를 벗고 한자리에 앉은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루슬란 오빠는 모스크바에서 내 콩쿠르를 응원하겠다며 날아와 준 아나스타샤에게 감사를, 아나스타샤는 나와 동행해 준 루슬란 오빠에게 정말 좋은 오빠라고 칭찬을.
난 아나스타샤와 루슬란 오빠, 이 둘 모두를 정말 좋아했지만, 그 둘이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림만 보자면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루슬란 오빠는 그 어디에 내놓아도 모자람 없는 미청년이었고 아나스타샤 역시 말도 못 할 정도로 예쁜 사람이었으니까.
하나 문제라면 나이 차이 정도였지만, 러시아의 평균 결혼 시기는 20대 초반으로 굉장히 빠르고, 몇 살 정도 나이 차이는 아무런 흠도 아니었다.
아니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냥 이야기만 하고 있는 거잖아? 나 혼자 그 이상을 넘겨짚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데.
“타티아나.”
“……아, 예.”
혼자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아나스타샤가 날 불러서 대답했다.
아나스타샤는 내게 물었다.
“그런데 나 때문에 연습할 시간 너무 많이 뺏긴 것 아냐?”
“…….”
오늘 한 연습량으로는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난 걱정 말라는 뜻으로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너무 많이 하는 것도 안 좋아요.”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너무 웃긴데…….”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날 심각한 연습벌레라 생각하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루슬란 오빠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아나스타샤에게 내가 평소에도 학교에서 연습을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다.
오빠의 말에 의하면 나는 같은 부분을 똑같이 수백 번씩 반복하거나, 건반으로 모스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오빠가 보기엔 그렇게 보인 모양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까르르 웃으며 원래 그게 내 연습 방법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난 다음부턴 그 누구에게도 내가 연습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식사는 훌륭했고 분위기는 좋았다. 루슬란 오빠는 와인까지 곁들였고, 아나스타샤는 유난히 많이 웃었다.
“정말 기분 좋네요. 고맙습니다, 루슬란. 고마워, 타티아나.”
그사이 아나스타샤는 루슬란 오빠를 편하게 부르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날 잠시 돌아보았다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타티아나와 너무 사이좋아 보이세요. 정말 부러워요.”
“그런가?”
“저도 오빠가 있는데 제 오빠는 어찌나 사람이 배려심이 없는지…… 절 너무 못살게 해서 매일같이 싸운다니깐요?”
아나스타샤는 투덜거리며 그렇게 말했고 나와 루슬란 오빠는 서로를 바라보곤 어색한 웃음을 머금었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
“아무튼 정말 부럽고…… 아, 혹시 루슬란. 계속 타티아나와 함께 다니셨던 건가요?”
그녀의 질문에 오빠가 대답했다.
“그렇지.”
“제가 타티아나에게 듣기론 꽤 여러 곳을 다니셨다 들었는데, 안 피곤하셨나요.”
아나스타샤는 다시 루슬란 오빠에게 물었다.
난 약간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늘 쿨한 아나스타샤는 원래 이렇게 한 번 묻고 들었던 것을 두 번 세 번 묻는 일이 없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유난히 이상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원하는 것이 있을 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녀의 얼굴이 루슬란 오빠에게 향했다.
루슬란 오빠는 이곳에서 나와 돌아보았던 곳들을 떠올리는 듯 잠시 생각하더니, 훗 웃으며 말했다.
“뭐, 나도 신선했고. 그리고 보니 엊그젠 타티아나의 친구도 만났었지. 아나스타샤. 혹시 에르네스트라는 이름 알아?”
순간, 아나스타샤가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난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아나스타샤가 루슬란 오빠에게서 이끌어 내고 싶어 했던 대화는 이 부분이었다.
“알죠. 만났다 하셨던가요?”
하지만 이 대화를 열고 싶어 했던 것은 비단 아나스타샤 뿐이 아니었다.
루슬란 오빠가 돌연 진지하게 태도를 바꾸며 물었다.
“네가 보기엔 어떤 녀석이야?”
“루슬란은 어떻게 보셨어요?”
서로 똑같은 질문을 주고받는 둘을 보며 난 막연히 조금 침울했던 기분이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기우는 것을 느꼈다.
뭐야, 이 두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