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잠시 팔을 들어 주시겠어요?”
난 의상실 직원이 시키는 대로 했다. 낯선 손이 허리춤을 스치고 지나가는 기분이 썩 즐겁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제 와서 멋대로 변덕을 부리거나 할 순 없었다.
난 몸을 움직이지 않고 눈만 들어 앞에 있는 전신거울을 바라보았다.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내가 보였다.
나제즈다가 평소 내게 입혀 주었던 스타일과는 확연히 달랐다. 더 화려하고, 노출도 강하다. 어깨를 드러내고 시스루 원단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제 드레스를 입는 것에도 익숙해질 만했지만 이렇게 시스루를 사용한 드레스는 처음이라 어색하고 신경이 쓰였다.
중앙음악학교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석하는 드레스라면 무조건 교칙 위반일 테지만, 이번엔 그런 것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의상실의 추천 중에서 골라 입은 것이다.
갑자기 교칙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
의상실에서 나오자 내 외투를 들고 기다리고 있던 빅토르가 깜짝 놀란 듯 말했다.
“아가씨?”
“예, 빅토르.”
“조금 파격적이신 것 아닙니까?”
“그런가요?”
“유리 님도 보러 오신다는 걸 조금 감안해 주셨으면…….”
솔직히 말해 지금 내가 보아도 이 드레스는 약간 부담스러웠다. 도중에 다른 드레스로 갈아입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 다시 돌아가서 갈아입어도 시간에 못 맞추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지 않을까요?”
“…….”
언제나 그렇듯, 허락받는 것보단 용서받는 것이 쉽다는 진리하에 난 이 드레스를 그대로 입고 가기로 했다.
뭐 어떻겠는가? 앞으로도 무대 위에 오를 때마다 드레스를 입을 일은 많고도 넘칠 텐데, 가끔은 이런 것을 입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일탈 등을 즐기는 기분은 전혀 없었다.
되레, 약간의 의무감과 책임감.
그런 것들이 내 관념을 깨뜨리고, 이 드레스를 입게 만들었다.
“……일단 검사를 받으러 가 볼까요.”
“검사요?”
“예.”
난 빅토르를 대동하고 위층에 있는 헤어숍으로 향했다. 거기엔 아나스타샤가 있었다.
이곳까지 아나스타샤와 함께 왔지만 그녀도 따로 펌을 하느라 시간이 조금 갈린 것이다.
내가 드레스를 입고 올라오자 시간이 딱 맞은 것 같았다. 때마침 아나스타샤는 거울로 자신의 머리를 보며 점검 중이었다.
“아나스타샤.”
“타티아나…… 헉.”
가만히 부르자 아나스타샤가 날 돌아보곤 헛숨을 들이켰다.
“무슨 일이야, 이게 도대체. 타티아나가 이런 드레스를……?”
“이상한가요?”
“이상? 아니!”
아나스타샤가 내 쪽으로 오더니 위아래로 훑었다.
그 시선이 조금 부끄러웠지만 그녀가 나쁘지 않다고 평가해 준다면 어디에 가서도 자신감 있게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긴장하며 그녀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자, 아나스타샤가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타티아나 네가 평소에 입는 스타일도 상당히 잘 어울리는 편이었고 나쁘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든 적도 많았거든?”
“아깝다고요?”
“그래. 그런데 오늘은 아주 산뜻하네.”
그녀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진 잘 모르겠지만, 어쨌건 괜찮아 보인다니 다행이다. 그렇다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음음, 하는 소리를 내며 유심히 날 지켜보더니 문득 손가락을 들어 내 목 언저리를 가리켰다.
“그 목걸이도 괜찮네. 원래 있던 거야?”
“예.”
“상당히 센스 괜찮은데? 괜히 확 튀지도 않고. 우린 팔찌나 반지를 하기 힘드니까 맞추기가 꽤 까다로운데.”
뭔가 중얼거리던 아나스타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요컨대, 오늘은 95점이야.”
“5점은 어디서 감점된 건가요?”
“5점은 여기서 머리 하느라 널 따라가지 못한 날 위한 점수.”
그 어떤 스타일리스트의 손에 맡겨진다 해도, 아나스타샤가 끼지 않는다면 95점이란 말이었다.
난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다시 의상실로 내려가서 남은 5점을 되찾아도 괜찮은데요.”
내 대꾸에, 아나스타샤는 가만히 날 바라보더니 곧 장난스레 내 이마를 쿡 찔렀다.
“하지만 난 널 100점으로 만들어 놓진 않을 거야.”
“왜요?”
“그냥.”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아나스타샤가 외투를 집어 들었다. 잘 모르겠다.
난 다시 거울로 내 모습을 살폈다. 아나스타샤가 말한 대로 가넷 목걸이는 보랏빛 드레스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같이 가요, 아나스타샤.”
마지막으로 내 모습을 거울로 일견하고, 난 그녀의 뒤를 쫓았다.
***
차를 타고 가면서 아나스타샤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 그녀는 오늘 여러 양반 기절하게 생겼네, 라며 이상한 말을 했다.
그리고 그게 무슨 뜻인진, 아버지를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마중 나간 오빠와 공항에서 만나, 곧장 콩쿠르가 열리는 홀까지 온 아버지는 내 모습을 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굳어 버렸다.
한참을 버벅이던 아버지가 꺼낸 말은, 평소 모습을 생각하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우스운 말이었다.
“그…… 안 춥니?”
하마터면 웃어 버릴 뻔했지만, 그런 결례를 범할 순 없었기에 얌전히 대답했다.
“괜찮아요. 아버지.”
코트 없이 실내가 아닌 밖으로 나가면 찬 공기가 닿는 순간 얼어 죽을 것 같았지만, 따뜻한 실내에선 괜찮았다.
옆에 있던 루슬란 오빠도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
“…….”
두 분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이 자리에서 내 드레스에 대해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를 의식하는 것 같았다.
대신 아버지는 내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짧고 강렬하게 응원해 주셨다.
“네가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마.”
“예.”
응원이란 때때로 그리 길 이유가 없었다.
루슬란 오빠는 자신이 수천 명 앞에서 스피치를 했던 경험담 등을 이야기해 주며 내 긴장을 풀어 주려 했다.
난 이전에 교내 위클리도 멀쩡히 치렀었고, 그 전에 아마 루슬란 오빠보다 몇 배는 더 남들 앞에 서서 준비한 것을 선보이는 데에 경험이 많고 익숙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오빠의 말을 경청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조금 나누고 있는데,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그쪽을 바라보자 그 역시 날 발견한 듯 화색을 띠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타티아나.”
“에르네스트.”
에르네스트는 가족들과 함께 있었다. 저번에 뵈었던 에르네스트의 어머니와 동생인 사샤까지.
“어머나, 타티아나! 오늘 정말 예쁘구나!”
“정말 감사해요.”
눈을 반짝이며 내게 와서 열렬하게 칭찬을 하시던 에르네스트의 어머니는, 곧 아버지를 보며 밝게 인사했다.
“유리 알렉세예비치. 오랜만에 뵙네요.”
“이런 곳에서 다 뵙는군요. 반갑습니다.”
이미 두 분은 안면이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설마 에르네스트의 어머니가 내 콩쿠르를 보러 오실 줄은 몰랐는지 상당히 놀라워하셨다.
에르네스트의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아하, 모르셨나요? 며칠 전 타티아나를 만났었답니다.”
“우연히 말입니까?”
“예. 에르네스트가 타티아나와 같은 학교 친구였더라고요. 길에서 우연히 만나선 집에 데려왔지 뭐예요?”
아버지는 처음 듣는 일이라는 듯 내 쪽을 돌아보았다. 당연히 처음 듣는 일이실 테지, 내가 말한 적은 없으니까.
내가 전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으로 앉아 있자 아버지의 시선이 이번엔 루슬란 오빠 쪽으로 향했다.
“스테판의 가족분들과 만났다면 왜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 루슬란.”
“그…… 음.”
루슬란 오빠는 아마 아버지에게 정기적으로 보고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날은 멀쩡한 정신으로 아버지에게 보고를 할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 가지로 신경을 빼앗겼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난 도중에 끼어들어서 말했다.
“그날 오빠도 기분이 좋아서 깜빡했을 거예요. 그리고 제가 정신없게 하기도 했고요.”
“그래도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전화를…….”
“다음엔 꼭 드릴게요, 아버지.”
한 번만 넘어가 달라는 뜻이 통했는지, 아버지는 잠시간 날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다시 에르네스트의 어머니와 이 자리에 없는 에르네스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셨다.
“타티아나 누나.”
에르네스트의 옆에서 이쪽을 보고 있던 사샤가 내게 다가왔다.
언제쯤 내게 말을 붙일 수 있을까 안절부절못하더니, 이윽고 용기를 낸 듯했다. 난 그 어느 때보다 밝게 웃으며 사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사샤.”
“안녕하세요.”
“제 콩쿠르를 보러 와 주신 건가요?”
드레스 자락이 조금 걱정되지만, 알 게 뭐람. 난 무릎을 굽히고 사샤와 눈을 마주했다.
이전 같으면 냉큼 달려와 안겼어야 할 사샤는 약간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예, 맞아요.”
“정말 기뻐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마워요, 사샤.”
사샤에겐 아무래도 내 드레스가 조금 어색하게 보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무슨 옷을 입고 있든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곧 천사처럼 웃으며 말했다.
“저야말로 응원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사샤.”
어쩜 말을 이렇게나 예쁘게 할 수 있을까.
유네스코에서 문화유산들을 등록하고 보호하는 것처럼, 나 역시 사샤의 귀여움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내게 덕담이라도 해 주려고 하다가 아나스타샤에게 붙잡혔다.
“진짜 왔구나? 에르네스트.”
“너야말로. 결국 따라왔나 보네.”
“따라와? 뭘?”
“타티아나의 연주회가 걱정되었던 것 아니야?”
천진하게 묻는 에르네스트를 보며 아나스타샤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맞아.”
“그럼 됐지 뭐. 둘이서 타티아나가 잘 할 수 있게 청중석이나 채워 주자고.”
“말을 해도 무슨…….”
아나스타샤는 쿨하게 말하는 에르네스트가 조금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결국 어깨를 늘어뜨렸다.
저편에선 어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고, 우리는 우리끼리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난 사샤에게 긴장을 푸는 마법을 전수받았다. 1학년들 사이에서 도는 주문인 것 같은데, 난 잘 모르겠지만 그냥 사샤가 해 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
새삼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난 참가자에게 나눠 주는 초대권을 다 쓰지 못할 정도로 별 기대를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응원을 받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누나?”
“…….”
불쑥 손을 들어 사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사샤가 날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그 작은 손으로 내 손을 내리더니 말했다.
“이건 서로가 바뀌었잖아요.”
“예?”
“누나가 절 격려해 주면 어떻게 해요.”
그런 뜻이 아니었지만, 난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불과 몇 분.
난 웅성거림과 분위기를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고, 그것들이 서서히 바뀌어 가는 것 또한 느꼈다.
잠시 후, 스피커를 통해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 본 콩쿠르 참가자 분들은 연주자 대기실로 입장하시기 바랍니다.
가야 할 때였다.
난 마지막으로 사샤를 다시 쓰다듬고 일어섰다.
각자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모두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시선이 쏠리자 조금 쑥스럽기까지 했다.
“전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그래.”
“잘해라.”
내 말에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가 답했다.
“최선을 다할 수 있길 기도할게.”
“우승해라.”
“응원할게요.”
에르네스트의 어머니와 막 돌아온 에르네스트, 사샤도 내게 한 마디씩 말을 건넸다.
“…….”
아나스타샤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 사이엔 복잡한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았다. 난 자연스레 팔을 뻗었고 아나스타샤는 날 한 번 꼭 끌어안았다.
“갔다 와.”
“예.”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난 홀로 연주자 대기실로 향했다.
내가 향하는 곳과 똑같은 곳으로 향하는 수많은 참가자들이 있었다.
나이 제한이 15세까지인 청소년 콩쿠르답게 어린 참가자들이 대부분으로 보였다.
“…….”
이전 같았으면 내가 여기에 있어도 되는가에 대해 심한 회의감을 느꼈을 것이다.
언제나 느끼는 마음 속 저울이 내 몸에 제동을 걸고, 멈춰 세우고, 깊은 고민에 빠뜨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 때문에 정작 제 실력을 내지 못한다면 그만큼 우스운 일도 없었다. 아주 오만하고, 멍청한 짓이다.
지금 연주자 대기실로 향하는 저들 모두가, 내 경쟁자였다.
이제 우린 서로를 찍어 누르고, 더더욱 높은 곳으로, 위로 올라가야 했다.
거기엔 국가도 성별도 나이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전 지구를 뒤져 보더라도 이만큼 무차별적이고 격렬한 승부의 세계도 없을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가면서 난 서서히 머리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들 중에 단 한 사람도 나보다 못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임하는 것이 좋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음악 콩쿠르는 상당한 권위를 지닌 콩쿠르였고 전 세계에서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 아이들만이 모여든다.
모두가 피아노에 있어선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천재들이었고, 그 누구도 우습게 볼 수 없었다.
약간의 자만이 곧장 내 등 뒤에 칼을 꽂게 될 것이다.
난 그렇게 마음을 먹고 연주자 대기실로 향했다.
“……?”
그리고 들어서자마자 굳어 버렸다.
“뺏어 보시든가.”
「돌려줘, 돌려 달라고!」
대기실 안에선 작은 소동이 일고 있었다.
한 남자아이가 악보로 보이는 책을 빼앗아 들고 놀리고 있었고, 한 여자아이는 그것을 되찾으려다가 울고 있었다.
여자아이가 울면서 다시 악보를 돌려 달라 외쳤다. 하지만 남자아이는 그것을 비웃으며 놀렸다.
“하하하,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내놓으라고!」
“뭐라고 떠드는지 못 알아듣겠다고. 우리 말로 하라니까?”
그냥 놀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못 알아듣는 것이었다. 두 아이가 쓰는 말은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 그 두 언어를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
살짝, 짜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