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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12화 (112/1,277)

##  112화

작은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지켜보다가 문득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

짧게 다듬은 손톱과 새하얀 손이 보인다.

아직도 정리할 것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 마지막 미련은 일련의 음악으로만 뇌리 한편에 잠들어 있을 뿐이다. 지금 난 타티아나 외의 그 누구도 아니었다.

그건 분명하고, 단호하게 확실히 해야 할 일이었다.

난 러시아에서 나고 자란 타티아나가 하지 않을 법한 행동들은 가급적 하지 않으려 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항상 노력해 왔다.

“…….”

그래도 가끔은 신경이 쓰인다.

한승우가 헤매고 있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나서서 도왔던 것이 떠올랐다.

상당히 미친 짓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타티아나가 하기에 정상적인 행동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땐 사실 나도 조금 흥분해 있는 상태였다.

처음 한국인을 만나 반갑기도 했고, 내 안에 명확한 기준도 없이 모든 것이 조금 흐리멍텅한 상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승우를 돕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피아노 실력 때문이었다.

모든 기준들이 애매한 상태에서도 단 하나 변하지 않는 기준이라면 바로 피아노였다.

사실 그가 한국인이 아니라 피아노를 잘 치는 외계인이었더라도 난 나섰을 것이다.

한승우의 경우엔 그랬다.

그럼 지금은?

난 어떻게 해야 하는가.

“…….”

가만히 지켜보는 와중에도 불쑥 짜증이 치밀고 올라와 옆머리를 툭툭 치는 기분이 들었다. 굉장히 불쾌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거기에 휩쓸려 버릴 순 없었다. 돌발적인 감정이기에 더더욱 경계해야만 했다.

이 감정은 지금 이 세상에 없는 누군가의 감정에 불과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대기실 안으로 들어와 대충 아무 의자에 앉았다. 계속 시야 한쪽에서 거슬리긴 했지만 참고 무시했다.

미리 대기실에 들어와 있던 아이들과 나처럼 방송을 듣고 들어온 아이들이 모두 모이자 꽤나 북적거렸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이 시끄럽다. 각인각색, 온갖 나라에서 온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가만히 그 수를 보아하니 40여 명 정도였다.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콩쿠르치곤 참가자가 적지 않나 생각이 들 만도 하지만, 이들 모두가 이미 1차 예선 통과자들이었다.

세계 각지에 살고 있는 수천 명이 넘는 지원자들을 모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불러서 1차 예선부터 할 순 없었기에 이 정도 규모가 되는 콩쿠르는 예선 지정곡을 DVD로 촬영, 제작해서 보내는 DVD 오디션을 진행하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참가 신청을 할 때 미하일 선생님과 함께 DVD를 만들어 보낸 바 있었다.

“□□□□, □□.”

“□□ □□□.”

“그나저나 더럽게 시끄럽네. 어디서 온 놈들이야?”

“여기가 러시아인지 중국인지 모르겠군.”

하지만, 수백 대 일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참가한 천재들도 결국 어른이 없으면 아이들에 불과했다.

나처럼 구석에서 얌전히 있는 부류도 있었고, 긴장했는지 눈을 꼭 감고 무언가 기도를 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다른 나라에서 온 참가자들 중 몇몇은 끼리끼리 모인 것이 반가운지 모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 자체는 그럴 수 있는 일이었고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주위를 살피지 않고 그러고 있으니 상당히 시끄러웠다.

난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누구라도 좋으니 어른이 온다면 상황을 조금 진정시켜 줄 것이다.

그리고 저 옆에 아직도 악보를 돌려주지 않는 망나니 녀석도 진정시켜 주겠지.

“건방지게 말야, 악보를 못 외웠다면 알아서 그만뒀어야지. 여기까지 악보를 들고 와서 뭐 하는 짓이야?”

「…….」

“괜히 심사위원분들 수고스럽게 하지 말고, 꺼져. 멍청이.”

「……으, 흐끅…….」

간헐적인 울음소리가 안쓰럽다.

암보를 하지 못해서 악보를 가지고 왔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어차피 저걸 들고 무대에 올라갈 순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무대에 오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이라도 더 악보를 보고 싶었을 뿐일 것이다.

하지만 가만 지켜보고 있자니 여자아이는 이제 대들 생각도 못 하고 울기만 했다.

알아듣지 못할 러시아어로 계속 빠르게 쏘아붙이니, 한국어로 그 어떤 말을 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 것이다.

이만 놀렸으면 그만둘 만도 한데, 저 망나니 녀석은 마치 악보를 다시 줄 것처럼 흔들흔들거리면서 더 비아냥거렸다.

“슬퍼? 슬프지? 좋겠네. 그 상태로 예선에서 슬픈 곡 같은 걸 치면 아주 감정 전달을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

“물론 네가 곡을 외울 수 있는 지능이 된다면 말이지!”

누가…… 저 자식 좀 어떻게 해 주면 안 되나? 나 지금 정말로 짜증나기 시작하는데.

대기실 담당 직원이 오면 어련히 해결되리라 생각하며 난 인내해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고, 아무도 막지 않았다.

이 대기실의 아이들은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면서도 힐끔거리며 보고 있었지만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난 비로소 상황을 알아차렸다.

이곳이 그냥 공원이었다면 분명 누군가 나섰을 것이다.

이 광경이 부조리한 괴롭힘이라는 것 정도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었고, 정의감을 가진 아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어리더라도 알고 있었다.

당장 조금 뒤에 있을 치열한 경쟁에 있어선 아주 사소한 일도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혹여나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황엔 끼어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

이해는 간다.

음악가라는 테두리 안에선 모두가 친구라 할 수 있겠지만, 당장 지금은 그 누구보다 매섭게 경쟁하고 내쳐야 할 경쟁자였다.

상식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스포츠맨십에 의거하면 무대 위가 아닌 그 어디에서도 따로 경쟁을 해선 안 되지만, 그런 자긍심 이전에, 빠른 계산이 우선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눈빛에서 그러한 것들을 읽으며, 난 문득 슬퍼졌다.

수년간의 시간과 노력을 한 순간에 쏟아부어야 하는 경쟁의 세계란, 그 어떤 아이도 차갑고 냉철한 맹수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불쌍하긴, 아무도 널 돕지 않지. 저기 있는 동양인 녀석들에게 도와 달라고 해 보지 그래? 엉? 눈치만 보고 있는 쓰레기들 말야. 푸하하, 버러지들!”

“…….”

그리고 슬픔은 곧 분노로 뒤집어졌다.

이성으로 억누르고 있던 짜증이 결국 댐을 무너뜨렸다.

경쟁? 견제? 다 좋다. 난 사람이 그리 정의롭지만은 않다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시끄러워?

“이봐요.”

참고 참았다.

하지만 조용히 콩쿠르에 집중하고 싶은 내게 방해가 된다면 한마디 할 명분은 충분했다.

지금 끼어드는 게 더 문제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알 게 뭐람. 내가 하고 싶으니까 그렇게 할 거야.

“……?”

가만히 있던 내가 끼어들자 망나니 녀석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가까이서 보니 더더욱 짜증이 났다.

보기엔 멀쩡히 생긴 녀석이 왜 이딴 짓거릴 해서 사람 열 받게 만드는 거야?

녀석은 아마 끼어들어도 같은 인종이나 같은 나라의 누군가가 끼어들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러시아인인 내가 언짢은 표정으로 부르자 그가 살짝 긴장하며 대꾸했다.

“뭐…… 뭔데?”

“민폐는 그쯤 하세요. 시끄럽잖아요.”

“……뭐?”

“모두에게 방해가 되고 있다는 것, 모르시겠어요?”

내가 날카롭게 힐난하자 녀석이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방해는 무슨, 저치들이 훨씬 더 시끄럽잖아.”

물론 시장한복판 같은 분위기이긴 했지.

하지만 지금부턴 아니야.

난 고개를 돌려 싸늘하게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죄책감 가득한 시선들이 내 눈을 피한다.

그중엔 심지어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눈을 내리깔아 버리는 아이도 있었다.

그렇게 좌우로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 이쪽을 보고 있던 모두가 조용해졌다.

난 시원스레 말했다.

“조용해졌네요.”

“…….”

“이제 그만둬 주실 차례네요.”

“뭔 소린데.”

그는 이제 딴청을 피우기까지 했다.

난 약간 난폭하게 말했다.

“못 알아듣나요? 빼앗은 악보는 돌려주고 본인 차례나 준비하시란 말이에요.”

찔끔하던 표정을 하더니, 피식 웃으며 악보를 다시 흔들었다.

“이걸 내가 돌려줘야 한다고?”

“저기 울고 있는 것 안 보여요?”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어림도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말도 안 되는 궤변이 시작되었다.

“이건 당연한 거야. 난 이 곡을 제대로 외우고 있고, 악보도 가지고 오지 않았어. 이 대기실에 들어온 이상 그 누구도 반칙을 해선 안 돼. 내 말이 틀려?”

“반칙이라고요?”

“그래. 이건 반칙이야.”

지금 이 대기실이 벼락치기로 쪽지시험을 보기 위해 대기 중인 곳이라면 말이 되지만 콩쿠르를 앞두고 악보를 점검하는 게 어째서 반칙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가만히 노려보니, 내 말문을 틀어막는 데에 성공했다고 생각하는지 녀석이 의기양양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제발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하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뺀질거리는 녀석을 설득하려고 해 봐야 전혀 들어 먹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건 이 대기실을 담당한 직원분이 오시면 안내해 주실 문제로군요.”

“하, 그게 무슨 상관이지? 참가자는 우리들 아니었나?”

언성을 높여 싸우기보단 조용히 원칙대로 하려니, 녀석은 전혀 그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되레 더더욱 어깨를 치켜들며 으스댄다.

“난 참가자로서 모든 참가자들이 공평하길 바랄 뿐이야.”

콩쿠르 참가자들이 이곳 대기실에선 불만을 느꼈다면 시정 요구를 할 수 있었다. 우리에겐 그럴 권리가 있긴 했다.

하지만 일방적인 시비를 그렇게 포장하면 안 된다.

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죠……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실 건가요?”

“그, 이 대기실을 공정하게 만들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녀석은 약간 당황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꿋꿋이 자신의 논조를 고집해 나갔다.

공정…… 공정이라.

그래, 그것 정말 중요하지. 아주 중요해.

“그 곡을 외우고 계시다고 하셨죠.”

“……그런데.”

“그렇다면, 무대에 올리실 예정이시란 말씀이시네요.”

“…….”

녀석의 표정이 굳는다. 순간적으로 녀석이 들고 있는 악보를 살폈다.

쇼팽의 영웅 폴로네이즈. 난 이 녀석이 왜 악보를 빼앗아 들었는지에 대해 파악했다.

물론 대기실에서 악보를 보고 있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다. 여태껏 펼쳤던 논리대로, 단순히 그 이유만을 견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명료하고 이해하기 쉬운 이득이, 녀석에겐 있었다.

예선부터 지정곡으로 진행되는 콩쿠르들과는 다르게, 예선이 자유곡으로만 진행되는 이 콩쿠르에서 우연히 같은 곡이 겹치게 된 상대를 견제하는 것.

상당히 알기 쉬우면서도, 유치하고 시답잖은 짓이었다.

난 조용히 물었다.

“순서가 어떻게 되시죠?”

“그건 왜 물어?”

내 목소리에서 어두운 불길함을 느꼈는지, 녀석이 되물었다.

우린 각자 연주 순서대로 번호표를 하나씩 나눠 받았지만 누구도 그걸 목에 차고 있진 않아서 저 녀석이 몇 번인진 모르겠다.

하지만 내 뒷 번호이길 바란다.

“제가, 정말 저희들이 추구해야 할 공정이란 어떤 것인지 보여 드리고 싶어서요.”

“……?”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는 그를 보며 난 이제 더 이상 할 말 없다는 뜻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그 악보는 돌려주세요. 제가 못 보게 할 테니까. 그럼 괜찮죠?”

“…….”

“아니면 여자를 괴롭히는 악취미를 가지고 계신건가요? 아니면 나라 망신을 시키는 취미라도?”

신랄하게 쏘아붙이며 손을 내밀자 녀석이 갈등했다. 내가 악보를 못 보게 하겠다고 했으니 아까 떠든 논리도 무의미해졌기 때문이었다.

이제 계속 고집을 부릴 수도, 내가 더 열 받기 전에 그만 둘 수도 있었다.

어떤 선택을 해도 괜찮다.

아무쪼록 편한 대로 굴어 주시길.

손을 내민 채 알아서 하라는 뜻으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노려보고 있으니, 녀석이 악보를 넘겨주었다.

“자.”

조금 아쉬워하는 듯했지만 더 이상 나와 싸울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난 되찾은 악보를 본 주인에게 돌려주고, 러시아어로 말했다.

“펴지 마세요.”

“……?”

한국어를 할 순 없었다. 난 그걸 배운 적이 없으니까.

여자아이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지만, 내가 악보를 직접 쥐여 준 채로 그 위에 내 손을 덮어서 펴지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젓자, 내 제스처를 이해해 준 듯했다.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말했다.

「고마워요. 이거 정말…… 중요한 건데, 되찾아 주셔서.」

“…….”

무슨 말인지 난 알아듣지 못해야 했으므로 대답하지 않고 옅게 웃어 주었다.

괜찮다는 뜻은 제대로 전해졌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지, 맺혀 있던 눈물을 슥슥 닦더니 그녀 역시 마주 웃었다.

미소야말로 세상 어디에서나 통하는 언어였다.

그렇게 상황이 일단락되고, 삐딱하게 날 쳐다보고 있던 망나니 녀석이 불쑥 말을 걸어왔다.

“야, 너…….”

“뭐죠?”

시퍼렇게 날을 세우며 되받아치자 움찔하더니, 그래도 자존심이 있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한 번이라도 마주쳤으면 기억할 만한 얼굴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낯선데, 어느 학교에서 왔어?”

“그건 왜 물으시죠?”

“그…… 난 그네신 음악학교에서 왔는데.”

그네신?

“아.”

그네신이라면 모스크바에 있는 음악학교였다.

그네신 음악원의 부속으로 있는 음악학교로서, 내가 다니는 모스크바 음악원 부속 중앙음악학교와 더불어 꽤 유명한 음악학교 중 하나라 할 수 있었다.

“좋은 학교에 다니고 계시는군요?”

“뭐, 우리 학교가 좀 유명하긴 하지.”

난 이 철딱서니 없는 녀석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싶어졌다.

네가 그 좋은 그네신 음악학교에 대한 이미지를 다 망치고 있잖아. 이 멍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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