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그리고리 세르게예비치 쉬르바고프라고 스스로의 이름을 밝힌 녀석은 뭔가 나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간 자기가 나갔던 콩쿠르와 년도 등을 읊으며 혹시 그중 겹치는 것은 없는지 자꾸 묻는데, 난 지금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으므로 받아 줄 생각이 없었다.
분위기 파악 좀 하라고 한마디 더 하려는 찰나, 대기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들어왔다.
“참가자 여러분, 빠짐없이 모이셨는지 명단 확인하겠습니다.”
뭐 하다 이제 왔냐고 할 틈도 없이, 직원은 가지고 온 파일철을 휙휙 넘기더니 다짜고짜 호명하기 시작했다.
“참가번호 1번, 프랑스, 브누아 드롱.”
자기 이름이 나오자 한 남학생이 뭐라고 대답하며 손을 들었다. 아마 프랑스어인 것 같았다.
그렇게 한 명씩 이름이 불려 나갔다. 프랑스뿐만이 아니라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중국, 일본 등등 수많은 국가에서 온 아이들이었다.
“11번, 한국, 임세연.”
“아, 예!”
악보를 품에 꼭 안고 있던 아이가 번쩍 손을 들며 대답했다. 자연스레 임세연이라는 이름은 내 기억 속으로 들어왔다.
특별히 관심이 가는 건 아니었다. 그냥 익숙한 언어가 귀에 들리는 대로 기억이 될 뿐이다.
출석은 계속해서 빠르게 지나갔다.
“29번, 러시아,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예.”
가볍게 대답하며 난 그리고리 쪽을 힐긋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그의 이름은 불려지지 않았다. 내 뒷 순서인 것이다.
그리고리는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난 분명하게 그를 노리고 있다.
“…….”
뚜렷한 악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난 비겁하게 트집을 잡고도 공정 운운했던 그를 가만히 두고 싶지 않았다.
어른스럽게 침착해지려고 나름대로 애쓰고 있지만, 무의식중에 난 상당히 많이 짜증이 나 있었다.
그가 내 뒷 순서가 된 것으로 첫 번째 조건은 갖춰졌다.
이제 두 번째 조건, 내가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확신은 없지만, 무의미하진 않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쓸 수 있는 무기들 중 가장 강한 것은 돈이나 말, 행동 같은 것이 아닌 피아노였으니까.
“…….”
가만히 시선을 내려 내 손을 바라보았다.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다.
난 분명히 좋은 결과를 내러 왔고, 남이야 어떻든 신경 끄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나 집중하는 것이 옳았다.
지금 이렇게 고민하는 것도 쓸데없는 짓에 가까웠다.
그래도 난 고민한다.
머리가 시키는 대로 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후회하고 말 것 같다.
갈등하고 있을 때였다.
“다음으로…… 30번, 러시아, 그리고리 세르게예비치.”
“예.”
뭐……?
무슨 운명의 계시처럼, 그리고리가 바로 내 뒤 번호로 불려졌다.
40명 가까이 있는 여기에서 노리고 있던 상대가 내 바로 뒤로 붙을 확률이 대체 얼마나 되지……?
적당히 현실적으로 균형을 맞추던 저울이 점점 기울어졌다.
직원이 출석을 마치고 파일철을 탁 닫으며 말했다.
“총 11개국에서 오신 마흔한 명으로 이상 없군요. 그럼 안내 사항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자기 차례가 오기 전까지 대기실 밖으로 나가지 마시길 바라며 혹 차례에 자리에 없을 시…….”
뻔한 말들이었다. 하지만 난 직원의 말을 경청했다.
그다음 나올 말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질문 있으십니까?”
“예.”
기다리고 있던 내가 말하자 직원이 날 돌아보았다.
“무엇이 궁금하신지?”
“대기하는 동안 악보를 보거나 음악을 들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이로써 그리고리의 헛소리는 원천 차단한 셈이었다. 그리고리는 직원에게 그건 공정하지 않지 않냐며 대들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당장 매듭지어야 할 일을 매듭지은 나는 머릿속 저울을 지켜보며 잠시 결정을 유보하기로 했다.
어차피 내 순서는 한참이나 뒤였다. 시간으로 치자면 서너 시간쯤 걸릴 것이다.
그사이에 얼마든지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일이니 일단 몇 시간 동안 하는 것 봐서 결정해도 늦지 않으리라.
주위를 둘러보니 몇 시간이나 기다려야 할 참가자들을 위한 간단한 먹거리 등이 보였다.
한쪽엔 커다란 거울과 함께 작은 화장대와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소지품들을 넣을 수 있는 개인 사물함도 구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대 상황을 볼 수 있는 텔레비전까지.
무대 뒤의 대기실이라는 것이 으레 비슷비슷하긴 하지만, 상당히 잘 준비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이대로 몇 시간쯤 있더라도 큰 불편은 없을 것 같다.
잠시 기다리자, 벽 너머로 우르르 하는 소리가 들렸다. 홀로 사람들이 입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곧이어 안내 방송이 이어졌고, 청중들을 향해 이 콩쿠르에 대한 설명 등도 이어졌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1번 참가자, 브누아 드롱. 무대 위로 입장해 주십시오.”
말이 나오기도 전에 문 앞에서 손을 풀고 있던 남자아이가 씩씩하게 문을 열고는 무대로 향했다.
그 뒤는 텔레비전으로 볼 수 있었다.
박수소리가 이어지고, 꾸벅 인사를 한 남자아이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음악 콩쿠르 피아노 부문 예선전 1라운드가 시작되었다.
“…….”
난 살짝 긴장하며 프랑스 남자애가 무슨 곡을 가지고 올라갔을지 기대했다.
이 콩쿠르는 정말 특이한 구석이 많았다.
자유곡인 데다가 신청서에 자신의 프로그램을 적어서 내지도 않았기에 사람들은 연주가 시작되기 전까지 연주자가 무슨 곡을 준비했을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일정도 특이했다.
청소년 콩쿠르들도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것들은 며칠씩 진행되곤 하는데, 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는 DVD 오디션, 예선전 1라운드, 예선전 2라운드. 그리고 이틀에 걸친 본선으로 딱 나흘 만에 승부를 가리게 된다.
상당히 살벌한 일정의 콩쿠르다.
“……그놈멘라이겐.”
하지만 클래식이 으레 그렇듯, 무대에 올라간 곡은 그리 특이할 것이 없었다.
첫 주자가 예선으로 선보인 곡은 프란츠 리스트의 콘서트 에튀드 중 두 번째 곡, 그놈멘라이겐이었다. 흔히 난쟁이의 춤이라 불린다.
화려한 기교를 필요로 하는 곡들을 많이 작곡한 리스트가 콘서트 에튀드라는 이름까지 붙여 가며 작곡한 곡치고는 난이도가 적절하고 접근성이 좋아서 현대에까지도 자주 연주되는 편이었다.
“…….”
통통 튀는 음색이 듣기에 나쁘지 않다. 조금 더 템포를 침착하게 가지고 갔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자신감 넘치는 연주였다.
“개판이군.”
“……?”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 옆을 보니 그리고리가 팔짱을 끼고 툴툴거렸다.
“저딴 실력으로 어떻게 DVD 오디션을 통과했지?”
와, 이거 정말 기본 매너가 안 되어 있는 녀석이네?
이젠 화도 안 나고 그냥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고 있는데, 그리고리가 이쪽을 의식하더니 피식 웃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요.”
난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리가 조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러면 잘했다는 거야, 저게?”
“잘했건 못했건, 그렇게 입 밖으로 내지 마세요. 실례잖아요.”
이런 기본적인 것까지 가르쳐 줘야 하나? 하지만 그리고리는 코웃음 쳤다.
“어차피 못 알아듣잖아?”
“알아듣건 못 알아듣건 상관없으니 말씀하지 마시라고요.”
“학교 선생님 같은 말투네, 타티아나.”
“…….”
내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분노가 더해지면서 저울이 점점 기우는 것이 느껴진다.
상종도 하기 싫다는 뜻으로 고개를 팩 돌렸다. 등 뒤로 그리고리의 시선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는 딱히 더 내 이름을 부르면서 귀찮게 하진 않았다.
대신.
“저 자식 방금 틀렸네.”
“…….”
그리고리는 어떻게 하면 날 열 받게 해서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지 알아냈다는 듯, 더더욱 신명나게 떠들어 댔다.
실수였다. 그냥 가만히 있을걸.
그리고리는 그 후로도 계속했다.
“자세가 저게 뭐야? 건반 냄새라도 맡나?”
연주 스타일을 폄하하는가 하면…….
“표정 좀 봐, 손이 아니라 얼굴로 피아노를 치는 것 같은데?”
무대 위에 올라간 연주자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딴지를 걸어 댔다.
“…….”
하지만 지금 내가 눈앞에서 흔들거리는 이 미끼를 물어 버린다면 보기 좋게 낚이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내가 목소리를 높여 싸운다 한들, 어차피 그리고리는 귓등으로도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말 쥐어박거나 걷어찰 수도 없었다. 주먹다짐으로 그리고리를 이길 수 있으리라 기대하진 않는다.
결국, 내가 또래 남자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분야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난 아예 주스를 한 잔 들고 구석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그리고리가 내 관심을 끌기 위해 온갖 헛소리들을 하든 말든 깔끔하게 무시해 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무시하자 혼자서 떠들던 그리고리도 결국 맥이 빠졌는지 얌전해졌다. 무슨 말이 저렇게 많은 거야, 대체?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며 비로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나는 머릿속을 마구 헤집어서 악보를 찾아냈다.
그리고 눈을 감고, 한 장 한 장 공들여 읽기 시작했다. 리허설 같은 것을 할 기회는 없었다. 준비를 하자면 지금뿐이었다.
벽 너머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와, 대기실의 소음으로 여전히 주위는 시끄러웠지만 난 집중을 깨뜨리지 않고 악보에만 집중했다.
난 어떤 상황에서나 음악에 집중할 줄 알았고, 어지간해선 잘 방해를 받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잠시간의 평화는 겨우 1시간을 못 가서 깨졌다.
“뭐야, 결국 폴로네이즈 치네?”
참가번호 11번 임세연이 무대 위에 올라가서 연주를 하기 시작하자마자, 그리고리가 그런 말을 했다.
“못 칠 줄 알았는데. 차라리 안 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네. 저게 뭐야?”
“…….”
내가 듣기에 지금 들리는 연주는 그렇게까지 흠을 잡기엔 너무 훌륭한 연주였다.
물론 내가 듣기에도 미흡한 부분이 들리고,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지금 그리고리가 떠드는 말은 그야말로 음악과는 전혀 상관없는 아주 유치한 트집 잡기에 불과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유들유들한 시선이 내게 꽂힌다. 굉장히, 기분 나쁘다.
드디어 해냈다는 얼굴이 비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할 말이라도 있어?”
“…….”
유보하고 있던 결정을 단숨에 내렸다.
난 스스로가 미련에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안다.
눈을 감아 버리면 지금의 이 감정이 영원히 사그라들지 않을 것 같았다.
기회, 후회, 자존심, 그런 것들이 엉켜 이루어진 나란 망령에게 있어서 어떠한 충동이란 굉장히 강력하다.
일시적인 감정에 휩쓸린 결정이라는 것은 나도 알지만, 오늘 저 녀석을 무시하고 내 예선에만 집중한다 하더라도 끝까지 미련이 남을 것 같았다.
자꾸 생각이 나서 다 끝나고도 땅을 치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
다시 고개를 돌리고 기다렸다.
이번엔 무작정 참는 것이 아니었다. 숨을 죽이며 기다리는 것이었다.
내가 송곳니를 드러낼 차례를.
마음속으로 곡을 날카롭게 벼리며, 한 자루의 칼로 만들었다.
난 실체가 있는 피아노를 붙잡고 몸으로 다루는 데에 익숙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연습은 그리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피아노 없이 혼자서 한계가 있더라도, 여태껏 해 온 것들이 어디로 가진 않는다.
조용히 곡을 살폈다. 수천 개의 음표와 수백 개의 마디들,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지만 몇 번이고 떠올리며 갈고닦았더니 금세 예기를 되찾았다.
난 어느 부분이 가장 날카롭게 틀어박힐지 가늠하며 그 부분을 더더욱 집중해서 만들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내게 음악을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고 호통을 치셨지만, 난 세상에 음악보다 더 강력한 도구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몇 시간 정도는 순식간에 지나간다.
난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일어섰다.
“29번.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무대로 입장하세요.”
“예.”
곧바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난 대기실에서 무대로 통하는 문 쪽으로 향했다.
도중에 그리고리가 보였다.
그는 빈말로라도 내게 잘하라 하진 않았다. 우린 경쟁자인 것이다.
그래, 넌 그래서 날 더 흔들어 놓으려 했을 뿐일지도 모르지. 이해해,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기대해도 좋아.
난 도발적으로 웃으며 한마디만을 남겼다.
“제 평가는 부디 제 앞에서 해 주시길.”
“……하.”
여태껏 무대에 오른 참가자들을 모멸스럽게 까 내리고 욕하는 것을 비아냥거리는 내 말에 그리고리는 코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못 할 것 같냔 뜻으로 보였다.
꼭 그리해 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