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29번.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고대하던 이름이 불리고, 주변이 조금 웅성거렸다.
아나스타샤는 의자 아래로 조금 파묻었던 몸을 급히 일으켜 세웠다.
“…….”
아나스타샤는 저 멀리 있는 베르체노프 가족, 그리고 베샤스트니흐 가족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타티아나의 이름이 불리자 느슨해져 있던 어깨를 바짝 세웠다.
아나스타샤는 암표를 구해 들어온 것이라 멀리 떨어져 앉아 있었다.
유리 알렉세예비치가 바로 옆 자리를 구해 줄 수도 있다고 했지만, 아나스타샤는 거절했다.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녀는 타티아나와 많은 시간을 공유해 왔다.
최근 이틀간 타티아나와 연습실에 계속 같이 있었던 것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아나스타샤였다.
타티아나가 무대에 올리기 위해 준비한 곡은 총 다섯 곡이었다.
그 모든 곡에 아나스타샤의 목소리가 스며들어 있으리라, 그녀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잠시 기다리자 보랏빛 드레스를 입은 타티아나가 무대 위로 입장했다.
순간적으로 홀 전체에 정적이 맴돈다. 모두가 숨 쉬는 것도 잊고 무대 위로 나타난 타티아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수백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타티아나는 우아하게 걸음을 옮겼다. 본연의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청중들을 사로잡는다.
아나스타샤는 그 자연스러운 걸음걸이와 몸짓에 감탄했다.
평소 성격대로라면 분명 부담스러워할 의상을 입고도 턱을 당기고, 허리를 편 자세는 당당했다.
이제껏 있었던 박수들보다 훨씬 더 커다란 박수가 쏟아졌고, 타티아나는 여유 있는 태도로 태연하게 미소를 짓더니 절도 있게 인사했다.
음악을 제외한 다른 모든 면에서 조금 유약한 면이 있는 평소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
타티아나가 피아노 앞에 앉고, 곧 홀 전체가 조용해졌다.
연주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의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나스타샤는 조금 덜 긴장할 수 있었다.
타티아나가 무슨 곡을 준비했고, 또 얼마나 완성도를 가지고 있는지 일찍이 들어 봤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내심 뿌듯함까지 느꼈다.
“……!”
그런데 난데없이 들려오는 생소한 선율에 아나스타샤는 대경실색하며 눈을 크게 떴다.
프레데릭 쇼팽의 폴로네이즈 중 여섯 번째 곡, 영웅 폴로네이즈가 타티아나의 손으로부터 연주되기 시작했다.
아나스타샤는 하마터면 입을 열어 소리를 낼 뻔했다.
요 이틀간 타티아나와 붙어 있으면서 아나스타샤는 단 한 번도 타티아나가 쇼팽의 폴로네이즈를 연습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곡을 갑자기 콩쿠르 예선전 무대에 올리다니, 얼토당토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 외의 그 누구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예선 자유곡으로 준비한 곡이라 생각할 뿐이다. 그 정도로 원숙한 완성도를 갖춘 연주였다.
아나스타샤는 당혹스러워하며 무대 위를 지켜보았다. 텔레파시로 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
그리고 아나스타샤의 텔레파시에 화답하듯, 타티아나가 건반을 찍어 눌렀다.
그것이 계기였다.
순간, 분위기가 뒤집히고, 상반된 조성이 느껴졌다.
힘차게만 느껴졌던 음악이, 사실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아나스타샤가 눈을 홉떴다.
조성을 바꿔서 음악의 분위기를 바꾼 것이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단 한 음도 어긋나지 않게 정확하게 악보에 따라 연주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제시한 또 다른 방향은 모든 선율과 화성을 다르게 해석하도록 만들었다.
거기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공격성에, 아나스타샤는 헛숨을 집어삼켰다.
날카롭게 정제된 분노가 창칼이 되어 투사되었다. 섬뜩한 쇳소리가 폐부를 찌르는 것 같다.
지옥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오는 듯한 스케일과 연속해서 내리쳐지는 옥타브의 화음이 뚜렷한 부피를 지니고 있었다.
이 넓은 홀 전체를 찍어 내리는 음의 질량에, 아나스타샤는 한없이 쪼그라드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타티아나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퍼포먼스가 과하지도 않다. 편안하게 손을 들어 건반을 누를 뿐이다.
하지만 그 동작이 피아노로부터 뽑아내는 음은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갑고 싸늘했다.
여지껏 준비해 온 곡들에서 느낄 수 있었던, 지성미 넘치는 아카데믹한 연주는 여기에 없었다.
타티아나는 명백하게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다.
왜 화가 난 거야……?
아나스타샤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분명 대기실로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몇 시간 후 무대로 올라온 타티아나는 준비해 온 곡도 미뤄 두고 쇼팽의 영웅 폴로네이즈를 연주했다.
그것도 단조로 들릴 정도로 파괴적인 음향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곡의 해석이란 연주자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마련이지만, 화성과 선율의 규칙은 거의 절대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연주자들은 어지간해선 거기에서 탈선할 수 없었다.
타티아나는 그 어지간함을 벗어나는 중이었다.
그녀는 교묘하게 커튼을 드리웠다.
항상 알기 쉽게 이미지화된 연주를 했던 것과 달리, 이번엔 그렇게 음악을 비틀었다.
거기에 모두가 속았다.
대부분의 청중들은 타티아나의 태연한 태도와 그 어마어마한 기교에 눈이 쏠렸다.
내림가장조로 작곡된 밝고 경쾌한 형태를 먼저 느낄 수밖에 없었다. 조성을 달리하여 곡을 듣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커튼 뒤를 살짝 엿볼 수 있는 통로를 제시했고, 무의식중에 그 통로를 따라갈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경쾌한 나팔 소리가 곧 전쟁터의 함성 소리로 바뀌고,
낮은 드럼 소리는 돌격하는 기병의 말발굽 소리로 바뀌었다.
피아노 한 대에서 낼 수 있다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소리들이 얽혀서 쏟아져 내렸다.
아나스타샤는 순간 피비린내마저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현기증이 일었다.
“…….”
아나스타샤에겐 영원같이 느껴지는 7분이 지나고, 타티아나는 마지막까지도 예리함을 잃지 않고, 곡을 마무리했다.
아나스타샤가 아는 한, 타티아나는 연습도 없이 무대 위에 올라갔으면서도 한 번의 미스도 없이 완벽하게 곡을 연주해 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그녀에게 향했다.
타티아나가 감사하다는 듯 생긋 웃으며 인사를 했다. 박수소리는 더욱 커졌다. 여기저기서 찬사가 이어졌다.
콩쿠르를 치르는 중이 아니었다면 앙코르까지 나왔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모두가 어린 천재에게 환호할 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자리에서 살짝 엉덩이를 들고, 청중들이 아닌 앞에 있는 심사위원들을 넘어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섯 명의 심사위원들은 저마다 빠르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방금 그 연주 이면에서 또 다른 목소리를 들은 것은 비단 아나스타샤뿐이 아니었다.
하지만 찜찜한 해석에 대한 이야기가 분분할지언정, 타티아나의 연주에 대해 트집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객관성은 주관성에 우선하기 때문이었다. 타티아나의 테크닉은 더할 나위 없이 정확했고 연주는 완벽했다.
아나스타샤는 자신도 무대 위에서 저렇게 보일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길게 고민할 것도 없이 무리였다.
“…….”
어느 날 갑자기 바람처럼 휙 날아든 타티아나는 언제나 쫓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어떻게든 그녀를 쫓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피아노를 연습해도 타티아나는 상상을 초월했다.
물론 타티아나는 세상 그 누구라도 좋은 음악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진지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열과 성을 다해 도와주고 곁에 있어 준다.
때문에 그녀는 분명 아나스타샤의 피아노도 좋아한다고 말해 주었다.
하지만 종종, 타티아나는 이렇게 주변의 그 누구도 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달려가 버리곤 했다.
그 점이 때때로, 아나스타샤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
몇 명이나 내 메시지를 알아들었을까. 잘 모르겠지만 많진 않겠지.
막 박수가 쏟아지는 관중석을 올려다보았다. 열렬한 박수가 쏟아진다. 난 정확하게 내가 의도하는 바만 성공시켰음을 직감했다.
심사위원들은 무언가 바쁘게 할 말이 많은 것 같았지만, 날 예선전에서 떨어뜨릴 순 없을 것이다.
이 또한 예선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현실적인 생각을 하니 가슴이 살짝 아팠다.
난 이 존재 자체가 음악을 사리사욕으로 탐하는 못난 망령에 불과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약간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난 작게 숨을 고르고 무대에서 뒤돌아섰다.
“…….”
연주자 대기실 문은 열려 있었다.
그 문 앞을 그리고리가 가로막고 선 채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멀리서도 보인다, 턱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난 그를 향해 눈짓했다. 꼼짝도 않는다. 결국 입을 열었다.
“비켜 주세요.”
“…….”
그는 묵묵부답으로 침묵했다. 어쩌라는 거야?
왜 가만히 있어? 아까부터 잘하던 것 있잖아?
“제 연주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
그리고리는 아무 말 없이 날 노려보기만 했다.
눈동자가 형편없이 흔들리는 걸 보니 혹여나 그가 주먹을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약간 무섭기도 했다.
내가 공격당하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라, 그래도 음악가인 그리고리가 오늘 너무 많은 것을 잃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돌이킬 수 없이 너무 많은 것을 잃기에 그는 너무 어렸다.
병 주고 약 주려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가 나왔다.
“비켜 주세요. 그리고 나가서 무대에 올라 실력을 보여 주시고, 다시 대기실로 돌아오세요.”
“…….”
“전 어디에도 가지 않고 대기실에 있을 테니.”
지금까진 그를 무시했지만, 이제 내겐 그를 상대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기다리고 있겠단 말에도 그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하리라.
사실 내가 뭘 하든지 그가 멘탈이 강한 연주자라면 그 어떠한 흠집을 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철저하게 개인전인 콩쿠르에서 다른 연주자에게 영향을 주기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한눈에 보아도 완전히 압도당한 그리고리는 엉망이 된 컨디션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내 칼날은, 확실하게 그의 심장을 꿰뚫은 것이다.
그리고리가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그 정도 실력이면 그냥 쳐도 되잖아.”
“무슨 말씀이시죠.”
“네 곡을 쳐도 됐잖아.”
그는 아주 바보가 아니었고, 그렇게 내게 물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었다.
특정성 없이 음악으로 모두에게 감동을 주고, 또한 내가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오늘 음악을 무기로 사용했다. 정확하게 그를 노리고 시퍼런 칼날로 습격했다.
그가 악보를 빼앗고, 폄하하고, 빈정거리는 것으로 다른 참가자들에게 영향을 주려고 했던 것처럼, 나 역시 그에게 영향을 주고 싶어서 철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내가 쓸 줄 아는 무기는 단 하나뿐이었다.
이 명백한 공격 행위에 어떤 설명이 더 필요할까.
“그냥, 당신과 직접 겨뤄 보고 싶었어요.”
“…….”
난 피아노로 이루어지는 대결을 언제나 사랑하고 애용해 왔다.
상황이 콩쿠르일 뿐이지 본질적으로 다를 건 전혀 없었다. 이 전쟁터에서 공정함이란 실력뿐이란 것을 보여 줄 뿐이다.
그렇게 내가 건 대결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리는 똑같이 영웅 폴로네이즈로 내 대결을 받아들이거나, 다른 곡으로 도망치는 두 방법밖에 선택할 수 없게 되었다.
“30번, 그리고리 세르게예비치 쉬르바고프.”
“…….”
진행 요원이 그리고리의 이름을 불렀고, 그제야 그는 막고 있던 문에서 나왔다.
기계적으로 팔다리를 움직이면서도 정말 이제 자신이 무대에 서야 할 차례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머리가 완전히 혼란에 빠져서 비틀거리고 있다.
“…….”
난 그 뒷모습을 보다가, 대기실로 들어와서 문을 닫았다.
그리고 무대 상황을 비추는 모니터를 통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리가 뻣뻣하게 인사했다. 박수가 쏟아졌고, 그리고리는 피아노 앞에 앉더니 몇 초간 고민했다.
그 모습이 어색하게 보이기 직전, 그가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내가 방금 연주했던 쇼팽의 영웅 폴로네이즈.
다른 곡을 연주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
그리고 그는 곡을 망쳤다.
멀쩡하게 연주하는 것 같다가도, 이상하게 리듬을 잃어버린다.
그가 준비한 음악이 이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했다. 누가 보더라도 그것은 내게 영향을 받은 음악이었다.
내가 잔인하게 쑤셔 박은 칼날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리는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갈수록 연주는 심각해졌다. 청중들은 이 연주를 듣고, 바로 전에 있었던 또 다른 폴로네이즈를 떠올린다.
그리고 입으로 내진 않겠지만 분명하게 시선으로 압박을 주고, 그를 또다시 공격한다.
여자인 나를 힘으로 찍어 눌러 보겠다는 듯, 과하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 연주가 듣기에 좋지 않았다.
경쾌해야 할 음색이 쾅쾅거리는 소음으로 변질되었다. 손가락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미스터치가 너무 많았다.
“…….”
난 내 의도대로 그에게 음악만으로 영향을 줄 수 있었다. 무기로 사용된 음악은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깨뜨려 버렸다.
엉망진창으로 무너져 내리는 그리고리를 보면서 사실 그리 기분이 좋진 않았다.